[김희철의 전쟁사](28) 현리전투 패배 씻어낸 밴 플리트 포격과 백선엽의 결단

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03.03 16:59 |   수정 : 2020.03.1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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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 작전회의.png
▲ 중공군 제 5차공세 2단계(5월공세)시 국군 3군단 방어 실패로 현리지역이 뚫려 위의 상황도처럼 돌파구가 형성되자 주문진 국군 1군단사령부에서 백선엽 군단장과 미 장군들에게 작전지시하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자료제공=국방부/육사 한국전쟁사 부도]

 

‘전승불복 응형무궁(戰勝不復 應形無窮)과 줄탁동시(?啄同時)’는 전쟁승리의 지름길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손자병법 제 6허실편의 ‘전승불복 응형무궁(戰勝不復 應形無窮)’은 “전쟁에서 거둔 승리는 반복되지 않으므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 승리하기 어려우니 끝없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 3차공세 이후 킬러, 리퍼, 러지드작전 등으로 캔사스(Kansas)선까지 반격하여 북진했고 이어진 제 4차공세까지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중공군의 제 5차 춘계공세가 서울을 향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중공군은 손자병법 허실편처럼 유엔군의 허를 찔러 국군이 배치된 동부전선을 공격했다. 

알몬드의 미 10군단과 한국군 3군단이 방어 책임지역을 두고 분규에 빠지는 까닭에 후방이 차단된 3군단은 ‘현리전투’에서 치욕스런 패배로 사태를 악화시켰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지속된 공격으로 손자병법의 ‘병형상수(兵形象水)’라는 의미처럼 흐르는 물같이 동부전선에서 오대산 밑의 속사리까지 커다란 주머니 모양의 돌파구가 형성되는 큰 위기를 맞이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미 2사단이 5월18일 하룻동안에도 중공군 1개 사단의 공격을 격퇴시키며 위의 상황도에서 보듯이 퇴각한 국군 5, 7사단이 방어했던 지역의 좌측 ‘벙커고지’를 사수했다. 이 날까지 미 38포병대대는 1만2000발 이상의 포격으로 중공군에게 화력세례를 퍼부어 중공군은 약 3만5000명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되었고, 이는 적의 돌파구 확장을 거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 동측 백선엽 장군의 국군 1군단도 오대산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전선에 수도사단과 11사단을 배치하여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유사시 속사리에 도달한 중공군들이 K-18비행장에 탄약과 포탄 및 보급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강릉으로 향할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밴 플리트 장군, “중공군의 공격을 반드시 막아 내고 최대한 응징” 지시

현리전투에서 패배한 3군단의 퇴각에 따라 방어선이 무너진 상황으로 다급해진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아주 중요하고도 기민하게 줄탁동시(?啄同時)적인 판단을 했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 있던 미 8군의 예비 미 3사단에게 돌파구 첨단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고 대관령 서쪽 용평에 있는 3군단의 간이 활주로에서 작전회의를 개최했다. 

큰 키의 밴 플리트 장군은 짚차 보닛 위에 두루마리 지도를 펼쳐놓고 이후 작전을 지시했다. 그는 “지금 전선에 큰 포켓(pocket, 주머니)이 생겨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며 단호한 어조로 “중공군의 공격을 반드시 막아 내고 최대한 응징을 가해야 한다”라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어 백장군에게는 “1군단은 대관령에서 서북쪽으로”, 미 3사단 소속 라이딩스 장군에게는 “하진부리에서 동북방향으로 지체없이(Wihtout delay)공격을 시도하라”고 지시하며 수세적인 방어에서 적극적인 공격으로 전환하는 작전회의를 간명하게 10분만에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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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 공세를 막기 위해 작전지시하는 미 제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과 사격 기준량의 5배 이상을 포격하여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무제한 사격 의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던 유엔군의 포병사격 모습 [사진자료=국방부]

 

 

워싱턴 정가, 5배 이상 포격 등 단호한 대응 보고 신조어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만들어

 

한편, 중공군 공격이 주춤해졌던 5월19일 아침,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미 10군단 사령부에서 밴 플리트, 알몬드 장군과 함께 차후 작전을 논의했다. 이때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밴 플리트 장군에게 미 8군 예비로 있던 187공수연대와 미 3사단의 증원을 요구하였다. 그는 그날 저녁 187공수연대를 바로 증원하기로 하고, 알몬드에게 곧 미 3사단도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밴 플리트 사령관으로부터 경기도 광주에서 홍천 및 하진부리까지 약 200km를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 3사단은  1만 7000명의 병력과 전차, 야포 및 전투지원 중장비 등을 이끌고 좁고도 험한 길을 따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 반 만에 그 거리를 주파하는 ‘기적의 행군’을 해냈다.

 

다행히도 미군 부대원 대부분은 운전을 할 수 있어 밤낮없이 교대로 약 1,000대의 트럭을 몰면서 재촉하여 돌파구 첨단이 붕괴되기 전에 도착했다. 그들은 두갈래로 부대를 나누었는 데, 한쪽은 홍천에 도착해 미 2사단을 증원했고 다른 한쪽은 하진부리에 도착해 무너진 3군단의 서부지역을 방어했다.


사실 그 당시 미군도 모르고 있었으나 중공군은 능력을 초과한 공격으로 병참선이 신장되어 있었으며, 지역목표를 탈취하고 수천 명의 한국군을 격파하였으나 그들이 입은 피해도 막심하였다. 생존자들은 피로하고 탄약과 식량은 거의 바닥나 있었다.

이렇게 중공군의 피해가 과중했던 이유는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적군을 꺽기 위해서는 모든 힘을 쏟아 붓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육사 동기생이었다. 또한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전차전으로 과감한 돌파를 시도했던 용장 조지 패튼 장군의 휘하에서 미 3군단을 이끌고 보병과 전차를 활용하여 과감한 기동전을 구사했던 명장이었다.

휘청거려 자칫 구멍이 뚫릴지도 모를 이 동부전선의 주머니형 돌파구에 미 8군의 강력한 예비인 미 3사단을 과감히 투입했다. 또한 군사령관으로 작전을 지휘하면서 공군기를 165회나 출격시켰으며 4만1천발의 포탄을 중공군에게 퍼부어 기준의 5배를 초과하는 많은 포탄을 소모했다. 

그러자 워싱턴 정가는 그의 과감하고 단호한 대응을 보면서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일명 무제한 사격)’이라는 말을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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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년 5월21일 오후, 좌측 백선엽 제 1군단장이 미 고문관 로저스를 대동해 수도사단 사령부에서 사단장 송요찬 장군에게 명령복종 할 것을 압박했던 모습과 우측 사전 철저한 준비로 대관령을 선점하여 재반격의 계기를 마련한 수도사단 제 1연대장 한신장군 [자료제공=국방부]

 

“육군 소장으로 만족할 겁니까? 아니면 명장으로 이름을 남길 겁니까?”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의 작전지시를 받은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은 대관령을 넘어오는 비행기 속에서 세부적인 작전 구상을 했다. 군단사령부에 도착하자 바로 참모회의를 소집하여 “송요찬 장군의 수도사단 1연대(연대장 한신 대령)를 먼저 대관령에 급파해 길목을 막고, 그 공백을 11사단과 1101공병단에 맡기는 것”으로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1연대가 대관령까지 이동하는 데 약 3시간이 소요되어 오후 3시즈음 확인해보았던 작전참모 공국진 대령이 흥분한 목소리로 “송요찬 장군이 1연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있다”며 군단장에게 보고했다.

 

송 사단장은 자신의 정면도 인민군들이 압박을 해오는 위험에 처해 있어 1연대를 뺄 수 없다는 이유로 군단장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좁고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단독으로만 전투해왔던 경험에 인접부대와 협조된 작전을 고려하는 인식이 부족했고, 또한 수도사단장 송 장군은 군단장 백선엽 장군과 나이도 비슷하며 최근까지 같은 계급이었고, 동부전선에서 전투를 잘하기로 용맹을 날리던 터라 어느 정도 라이벌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 장군은 한국군 내부 구성원끼리 사소한 감정에 휘말려 벌이는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다리기로 했으나, 작전참모 공대령은 “당장 부대를 보내야 하는 상황인데 이렇게 연약한 지휘 방식을 쓸 수 없다”며 “육군 소장으로 만족할 겁니까? 아니면 명장으로 이름을 남길 겁니까?”라고 극단적 언사로 다그쳤다.

 

이에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로저스 1군단 수석 고문관을 대동하여 수도사단 사령부로 갔다. 백 장군은 엄숙한 목소리로 “귀관은 내 명령에 복종할 것이냐 아니면 불복할 것이냐?”고 질책했다. 송요찬 장군은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눈치 채고 벌떡 일어서서 “각하, 죄송합니다.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라며 바로 전화기를 들어 출동 명령을 내렸다.

 

마침 한신 대령은 두 사람의 미묘한 갈등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미 출동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때 작전참모 공대령이 지휘소를 빠져나와 1연대의 기동을 확인했다. 그때 한신 대령의 연대는 모든 전투태세를 갖추고 이동을 위해 트럭에 올라탈 준비까지 끝낸 상태였다.

 

그날(5월21일) 오후 9시 즈음에 연대 수색중대가 먼저 대관령에 도착했는데 1시간 뒤부터 중공군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라도 출동이 늦었다면 중공군은 아군이 도착하기 전에 대관령고지를 선점하여 전체 작전에 어려운 상황이 될 뻔한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고, 연대장 한신 대령과 작전참모 공대령의 책임감과 용이주도함이 작전 성공에 기여하였다.

 

그때부터 1연대와 수도사단은 승리를 거듭했다. 그동안 무리한 공격을 계속해온 중공군은 장거리 이동으로 지쳐 있었고 화력과 보급도 소진한 상태였다. 1연대의 첫 전투에서 아군 12명 피해에 1,180명의 적을 사살했다. 이후 1군단은 계속 진격하여 23일에는 현재의 휴전선 일대까지 도달했다.

 

이미 중공군은 공격 능력도 의지도 모두 상실한 상태였고, 북진을 계속하던 수도사단은 현리전투에서 전의 상실로 패배해 퇴각했던 3군단 장병들도 대거 거둬들일 수 있었다.

 

이로서 유재흥 장군이 지휘하던 2군단은 덕천전투에서, 3군단은 현리전투에서 해체됐다. 또한 3군단 예하였던 3사단은 백 장군의 1군단으로 배속되었다. 그럼으로써 그 당시 우리 국군 중에 군단 규모로 남은 것은 오직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제 1군단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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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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