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45)] ‘칸 카르데시’인 터키군은 용맹한 ‘백병전의 왕자’

김희철 기자 입력 : 2020.07.31 17:51 |   수정 : 2020.07.31 18:17

한국과 터키는 ‘피로 맺어진 형제의 나라’라는 뜻의 ‘칸 카르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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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터키는 6·25남침전쟁시 육군 1개 여단을 파병하여 참전했고 이후 한국을 피로 맺어진 형제의 나라라는 뜻의 ‘칸 카르데시’로 부르고 있다. 연인원 1만4936명이 참전해 3064명의 인명 피해를 봄으로써 얼마나 용맹히 싸웠는지 알 수 있다. 


군우리·금량장 전투가 대표적이며 터키의 앙카라·이스켄데룬 등에 참전기념물이 있다. 부산의 유엔묘지에는 영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462명이 잠들어 있다. 6·25남침전쟁시 터키여단의 참전용사인 오스만 야사르 에켄(82)은 "저희들에게 한국은 우리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터키 군인들이 한국 땅에서 ‘피를 나눈 형제(칸 카르데시)’가 됐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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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남침전쟁의 전사자들을 모신 부산 유엔군 묘역에서 영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4백62명이 잠들어있는 터키의 용사들에게 참배하는 모습과 영동고속도로 마성인터체인지 입구에 있는 터키군 참전비 [사진자료=동영상 캡쳐/국방부]

 

 

터키군은 한국의 자유와 세계 평화 위해 용맹하게 싸웠고 3064명 희생


1950년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세계 16개국의 유엔군이 참전하였는데 7월25일 터키 정부에서도 6·25남침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고 터키군은 10월17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후 11월26일부터 군우리·신림리 전투를 시작으로 1951년 1월 13일에는 의정부·연천·금화 지구에서 전투를 벌였다.


터키군은 1951년 1월25일부터 27일까지 3일 간 금량장 전투를 벌여 474명을 사살하고 23명의 포로를 잡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52년 2월24일에는 ‘단장의 능선’ 전투도 치르었다. 


터키군은 6·25남침전쟁 동안에 중공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여러 번 접전을 벌였으며 3064명의 전사자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휴전 후에는 1953년 7월부터 1966년 7월까지는 의정부 지구 경계임무를 수행하였다.


영동고속도로 마성 인터체인지 입구에 우뚝 서 있는 ‘터키군 참전비’ 탑 하단 앞의 작은 표지석 동판에는 한국어와 터키어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유엔의 기치를 들고 터키 보병여단은 한국의 자유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침략자와 싸웠다. 여기 그들의 전·사상자 3064명의 고귀한 피의 값은 헛되지 않으리라.”


또한 터키 국기에 있는 초생달과 별 모형은 이스탄불을 정복하던 날 메메트(Mehmet) 황제가 본 밤하늘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군대가 이스탄불의 성벽 밑을 뚫고 침입하려 했을 때 초승달 빛으로 이를 발견하여 나라를 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터키군은 혈전을 치른 ‘군우리 전투’에서 유엔군 최초로 미 대통령 표창 수상  


1950년 중후반에 이미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은 한반도에 진입해 있었고 당시 한중 국경에 거의 근접해 있던 유엔군에게 일련의 기습 공격을 가했다. 중공군은 국군 2군단을 괴멸시킴으로써, 미 8군의 우익을 붕괴시켰다. 이로써 11월 4일 압록강 진격을 목표로 하던 유엔군의 공세는 좌절되었다. 


이러한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을 과소 평가해 11월24일 미 8군에게 새로운 공세를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새로 도착한 터키 여단은 공세의 일환으로 미 9군단의 예비부대가 되었고, 미 8군사령부 공격의 중심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낙관과는 달리 11월 25일 밤 중공군은 대규모 반격을 감행했다. 미 8군을 상대로 거두었던 이전의 승리를 바탕으로, 중공군은 다시 와해된 국군 2군단을 공격하였고, 11월 26일 유엔군의 우익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이 상황에 고무되어 38군에게 유엔군의 우익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군우리에서 미 9군단의 철수로를 차단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맞서서 미 9군단은 터키 여단에게 11월 26일 군우리 동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터키 병사들은 영어나 한국어를 모두 이해할 수 없었기에, 터키 여단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중공군 부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부족했기 때문에 전투는 더욱 혼돈에 휩싸였다. 터키 여단은 미 9군단의 지시를 잘못 이해하여 동쪽으로 진격함으로써 산골을 통해서 장거리 행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1월 26일 덕천에서 패해 도주하던 국군 2군단 예하의 6사단과 7사단은 와원에 처음 도착한 터키 여단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는 터키군이 국군을 중공군으로 착각한 것이 원인이었다. 


아군 간의 오인 사격으로 20명의 국군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터키군도 14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잘못된 정보로 인해 터키군은 중공군을 도로변에서 조우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및 유럽 언론들은 터키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고했고, 뉴스가 발표된 이후 정확한 사실이 다시 알려졌음에도 미국 언론은 보도를 정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11월 27일,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터키 여단은 군우리 동쪽의 와원에서 치열한 전투에 임했다. 결국 터키군은 후퇴하는 국군 2군단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진격하였고, 5배나 많은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 당할 위기에서도 희생을 감수하며 용맹하게 싸웠다. 


그때 미 2사단도 중공군에게 포위당해 전멸 위기에 있었는데, 터키군은 후퇴하는 미 2사단을 엄호하기 위해 착검을 하고 중공군과 대적하여 “백병전을 가장 잘한 군대는 터키군이다”라고도 불리게 됐다. 


군우리 전투를 분석한 역사학자 베빈 알렉산더는 와원과 군우리 사이에 있던 유일한 유엔군 부대가 터키 여단이었고, 미 2사단이 철수하기 전에 중공군이 군우리를 점령할 수 없었다는 것은 터키 여단이 그들의 원래 목표를 달성하고 미 9군단의 철수를 엄호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결국 터키군은 군우리 전투에서 전술적으로는 패하였지만 중공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혀, 중공군 38군이 이후로 5일간이나 진격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었다. 물론 일부 부대가 명령도 없었는데 멋대로 철수하여 터키 여단의 명예를 실추시킨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희생을 치르며 소정의 성과를 얻었다.

 

따라서 이 전투로 터키군은 유엔군 최초로 미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었으며, 12월 13일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터키 여단이 중공군에 맞서 보여준 행동과 희생을 기려 15개의 은성훈장과 동성훈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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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남침전쟁시 군우리전투 상황도와 워커 8군사령관이 터키 여단장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모습 [사진자료=국방부]


‘백병전의 왕자’ 터키군의 ‘금량장 전투’ 


하지만 터키군은 ‘군우리 전투’에서 일부 부대가 명령도 없었는데 멋대로 철수함으로써 실추된 터키 여단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중공군과의 전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1951년 1월 25일, 용인으로 전진하던 터키 여단은 전방 금량장리의 151고지에 잘 구축되어 있는 중공군 진지와 마주쳤다. 


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미 25사단으로부터 전차를 지원받는 한편, 항공 공습 후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중공군 진지에는 드물게도 박격포 등을 비롯한 포병 지원화력이 있어서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터키 여단 3대대(앞서 제시한 ‘군우리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한 부대)는 대대장 이하 전원이 ‘알라후 아크바르(알라신은 위대하다)’를 크게 외치며 고지로 돌격하는 결전을 치루었다. 


오후 5시경 대대는 고지를 점령했는데 확인된 중국군의 전사자 474구의 시신 대부분이 총검에 의한 것이었을 정도로 터키군은 ‘백병전의 왕자’로 거듭났고 반면에 터키군은 전사 12명, 부상 70명이라는 사소한 피해만 입어 실추된 터키 여단의 명예를 다시 드높여주었다. 


마침, 이 장면을 API 통신의 종군기자가 취재하여 보도함으로 전투가 널리 알려졌고 ‘군우리 전투’에서 입었던 불명예를 완전히 떨쳐냄은 물론 ‘백병전의 왕자’라는 명성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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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국과 터키 합작으로 부모 잃은 5살 소녀와 터키 병사의 애틋한 사연을 잘 표현한 영화 ‘아일라’의 한장면과 6·25남침전쟁 참전 용사 모습 [사진자료=동영상 캡쳐]

 

  

6·25남침전쟁에서 터키군 희생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터키인들은 약 1500년 전 고구려(발해)와 돌궐(투르크)이 동맹관계였다는 것에 기인하기 보다는 사실 6·25남침전쟁 참전 이후부터 '칸 카르데쉬'의 의미를 찾는다. 

 

6·25남침전쟁 당시 터키는 5000명 파견 계획을 세우고 지원병을 모집했는데 '형제의 나라'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수만명의 터키인들이 지원했다.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견했으며 많은 희생자도 발생했다. 공식 수치는 1만4936명이 참전, 721명 전사, 168명 실종, 2111여명 부상 등이다.

 

역사적으로 용맹한 전사들이었던 투르크 민족인 터키군은 6·25남침전쟁에서도 백병전에 강한 명성을 발휘해 군우리, 금량장, 퇴계원 등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많은 전문가들은 만약 터키군이 전투에서 패했더라면 오늘날 휴전선의 위치는 훨씬 남쪽에 그어져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했다.

 

휴전 이후에도 터키군은 전쟁 복구사업을 위해 계속 주둔했으며,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았으며 전쟁고아들을 돌보고 위생, 의료 봉사활동도 펼쳤다. 이것은 2018년 한국과 터키가 합작으로 만든 ‘아일라’라는 영화에서 부모 잃은 5살 소녀와 터어키 병사의 애틋한 이야기로 잘 표현되어 있다.


대한민국이 불과 60여년 만에 세계 10위권 국가로 도약해 있다는 현실에 터키인들은 흐뭇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또한 지난 2002년 월드컵 당시 터키를 따뜻하게 응원해 준 대한민국 국민의 모습이 터키 유학생들을 통해 전해지면서 양국 관계에 대해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터키에서의 축구 열기는 뜨거워 축구가 자기 정체성의 상징이며 삶 자체라고 표현되기도 하며 결혼에서도 응원하는 축구팀이 고려 조건이 될 정도라고 한다.

 

특히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당시 자국에서 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터키인들이 '한국은 터키와 특별한 관계'라는 인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 계기가 됐다.

 

이제 터키의 '한국 사랑'은 우리 기업 제품 선호와 한류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터키내 활동중인 한류 팬클럽은 현재 17개 17만 여명에 달한다.

 

터키의 우리에 대한 호감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들만큼 특별한 것이 사실이며, 우리가 터키인들을 만났을 때 6.25남침전쟁에 참전하고 희생한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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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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