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Home >  사람들  >  지난기획

JOB 속보 >>>

실시간 지난기획 기사

  • [한국의 명장] 김선영 회장 “리본공예, 작가로 작품으로 인정 받았으면 좋겠어요”
    ▲ 김선영 한국리본공예협회 회장. [사진=양문숙 기자] 한국 리본공예 대중화에 앞장“리본공예도 작품, 2년 마다 전시회 열어”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현대 여자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맞게 되는 공예는 리본공예가 아닐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딸 아이의 머리에 꽂아주던 리본핀, 리본머리띠 등 부모님이 정성스레 고르고 또 만들었을 리본공예를 접했을 것이다.  그만큼 리본공예는 친숙하다. 길거리 가판대에서도 손쉽게 리본이 달려있는 액세서리를 구매할 수 있고, 가까운 문화센터만 찾아가도 쉽게 배울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되어 있다.   리본공예를 국내에 대중화시킨 일등공신은 한국리본공예협회(KRCA) 김선영 회장이다. 국내에 생소했던 공예를 ‘리본공예’라고 명칭하고, 리본공예 전문가를 양성하며, 리본공예 알리기에 앞장섰다.     ▲ 김선영 회장이 리본공예를 처음 배우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양문숙 기자] ■ 교편 잡던 과학교사에서 리본 다루는 전문 공예인으로 김선영 회장은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과학과목을 가르치던 교사였다. 그러나 결혼 후 일본에 가면서 리본공예를 배우게 됐다.  “학생들이 과학 과목을 워낙 어려워하다보니 재밌게 배우는 수업은 아니었다. 일본에 간 뒤에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동시에 남들에게 재미있게 알려줄 수 있는 걸 하고 싶었다. 원래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했다. 선물포장 리본을 좋아해 일본에 있는 전문가를 찾아가 배우기 시작했다.” - 일본에서 어떤 형식으로 배웠나?  “일본최고 전문가를 찾아가 사사하는 형태로 배웠다. 일본 기프트랩핑 아트 아카데미에서 2년간 배운 후 일본 리본플라워 아트 최고 장인인 하세요시코, 하세메구미 선생에게 4년 여간 사사했다. 이후 다시 한국에 왔을 때 ‘리본공예’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고, 문화센터에서 강의했다.”   - 일본에서 배운 리본공예를 한국에 새롭게 뿌리내리게 했다. 일본 리본공예와 한국 리본공예의 차이가 있다면?   “우리나라는 튀는 걸 선호하고, 일본은 튀지 않는 걸 더 선호한다. 우리나라는 남하고 다른 나만의 것, 다른 사람이 쉽게 구할 수 없는 걸 선호하다보니 화려한 리본이 더 발전했다. 그러나 일본은 대게 남들과 다른 튀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는 워낙 화려한 액세서리가 대중화되고 있어 일본도 전보다 화려한 액세서리를 많이 착용한다.”   - 한국에 리본공예를 처음 가르칠 때를 돌이켜본다면?  “일본은 공예를 배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공예를 하대하는 경향이 있다. 오래 배우지 않고, 돈도 많이 안들이기를 원한다. 사실 초반에는 이렇게 계속 가르쳐야하나 생각도 했다. 일본에서 비싼 수강료를 내고, 시간과 노력을 쏟아내며 배운 걸 너무 쉽게 풀어내는 게 아깝기도 했다. 특히나 한국 문화센터는 아주 저렴한 수강료로 가르친다. 그러나 일본에서 배우던 커리큘럼이 아닌 우리나라에 맞게 개발하면서 그런 고민이 해결됐다. 우리는 성격이 급하다 보니, 결과물이 바로 나올 수 있는 커리큘럼부터 시작하도록 수정했다.” - 리본공예가 대중화되면서 리본 등 재료에도 변화가 생겼을 것 같은데…? “요즘엔 국내산도 많고 일본산도 많다. 사실 아직까지는 정말 고급스러워 보이는 작품을 만들려면 선진국 재료를 써야 하는 비애가 있다. 그나마 요새 많이 좋아진 것이다. ‘아름다운 리본공예(성안당, 2006년11월 초판)’라는 책을 내면서 국내에 리본공예 붐이 갑자기 일어났다. 그렇게 국내에 리본 수요자가 늘다보니 공급도 늘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리본도 다양하게 많이 나오고 있다.”  ▲ 김선영 회장의 리본공예 작품들. [사진=양문숙 기자] ▲ [사진=양문숙 기자] ▲ [사진=양문숙 기자] ■ 새로운 리본공예 선도하는 ‘한국리본공예협회’ - 리본공예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달라. “리본아트는 리본을 꿰매거나 철사로 모양을 내어 소품을 만드는 공예이다. 그 중에서도 세분화하면 리본자수, 리본플라워아트, 코사지 아트, 선물포장 등이 있다. 먼저, 리본자수는 리본으로 수를 놓아 모양을 내는 것이고, 플라워아트는 사각형 리본을 이용해 꽃잎을 만들어 조화를 만드는 것이고, 코사지용으로 하는 코사지아트, 선물상자에 리본을 하는 선물포장 등으로 나뉜다. 이렇게 리본공예를 세분화 한 것도 한국리본공예협회에서 한 것이다.” - 한국리본공예협회는 주로 어떤 역할을 하나? “기본적으로 실력 있는 강사를 배출한다. 강사를 원하는 곳에 소개해주거나 공방을 차려 강의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한다. 전시나 마켓 등에 참가해 일반인에게 ‘리본공예’를 알리는 역할도 하고 있다.” “또한 강사들이 모여 꾸준히 세미나를 연다. 디자인 유행도 계속 바뀌고, 새로운 소재도 계속 바뀐다. 강사들이 모여 새로운 걸 함께 토의하고, 배워가고 있다. 강의를 듣고 자격을 갖춰 강사가 되면 그 순간부터 또다시 실전이 시작된다. 함께 배워나가면 실전에도 도움이 된다.” “2년에 한 번씩은 꼭 전시회를 개최한다. 전시에 작품을 선보인다고 하면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힘들더라도 전시회에 참여하면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한다. 전시 준비가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실력이 늘게 되는 것이다. 다음 전시는 내년에 개최될 계획이다.”  ▲ 리본공예도 작품이라고 말하는 김선영 회장. [사진=양문숙 기자] ■ 리본공예는 손쉽게 뚝딱? “리본공예도 작품”  - 리본공예가 이렇게 대중화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다른 공예에 비해 재료비가 저렴하고 쉽게 배울 수 있어 인기가 많다고 생각한다. 또한 리본은 어렸을 때부터 착용하는 경우가 많아 친숙하게 다가가는 것 같다. 특히 딸이 있는 엄마들은 단순히 취미로 만든다기 보다는 자신의 딸이 착용하는 걸 상상하면서 작업을 하니 더 즐겁게 하는 것 같다. 또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바로 완성작이 나오니까 더 흥미를 느낄 수 있다.”  - 다른 공예에 비해 빠르게 대중화 된 리본공예, 그럼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리본공예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그 수요에 맞출 강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민간자격증을 발급할 수 있는 협회를 선정할 시 서류화된 문서로 결정하는 편이 많다. 그러니 실력보다는 경영에 능한 협회가 많이 선정된다. 이렇게 선정된 협회는 짧은 기간 안에,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해서 최대한 많은 수강생을 끌어들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때문에 남을 가르칠 실력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자격증이 주어진다. 공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자격증 장사’를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통으로 하는 곳에 피해가 생긴다. 리본공예를 진짜 보급하고, 제대로 된 강사를 배출하고 싶은 협회 쪽에서는 방해가 되고 있다. 가격이나 기간을 문의하는 예비수강생들은 조금이라도 싸고 빨리 딸 수 있는 곳으로 몰리고, 그렇게 제대로 된 실력이 갖춰지지 않는 강사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이 아쉽다.”  - 반대로 리본공예 하면서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인가?  “제자가 잘 됐을 때 기분이 참 좋다. 그리고 제가 쓴 책을 리본아트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뿌듯했다. 어떤 대학에서는 교재로 쓴다고도 한다.”  - 또 집필할 계획인가? “(집필계획이)있다. 출판사에서도 계속 요청이 들어오는데, 현재는 리본아트를 세분화하면서 해야 할 일이 많아 사실 집필할 시간이 없다. 일이 좀 정리되면 차분히 쓸 계획이다. 리본아트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책을 보는 것도 있지만,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책을 보고 관심이 생겨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더라. 기본적인 리본아트 외에 리본자수, 플라워 아트, 코사지 아트 분야에도 많이 신경 쓸 수 있도록 책을 내고 싶다.” - 마지막으로 바라는 점은 무엇이 있나? “리본공예를 너무 쉬운 공예라고만 생각하는 인식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주변에서 보는 너무 간단한 리본공예를 보고는 만들기 아주 쉬운 것이라 생각하는데, 공예를 하는 사람들은 공을 많이 들이고 공부해가면서 만든다. 예를 들자면, 리본공예를 배우는 수강생들이 초반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많이 한다. 그러다 점점 만드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어려운 기술을 이용하는 작품을 만드는데 주변에서는 굉장히 쉽게 생각하고 ‘하나 만들어줘~’라며 쉽게 요청을 한다. 모든 작품을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리본공예는 난이도의 폭이 워낙 넓다. 간단하게 뚝딱 만드는 것부터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드는 작품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리본공예 작품은 경제활동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이 생각하는 가격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리본공예를 하는 사람도 작가로 인정하고, 리본공예를 작품으로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 사람들
    • 지난기획
    2014-09-16
  • [한국의 명장] 김상실 명인, 전통공예를 ‘패각공예’로 승화시키다
    ▲ 김상실 명인이 자신이 만든 악세서리를 들고 있다. [사진=양문숙 기자] 보석 세공업자에서 귀금속 공예인이 되다자신만의 새로운 공예 창작… 전통의 현대화·세계화 앞장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오묘한 빛깔의 자태를 뽐내는 전통공예 나전칠기는 날로 해외에서 각광받고 있다. 해외서 우리 전통공예를 선보이는 박람회가 열렸다 하면, 나전칠기가 외국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물론, 판매까지 순조롭게 이뤄진다.  이처럼 세계가 주목한 나전칠기를 액세서리로 변신시켜 새로운 ‘패각공예’를 창작해 전통의 현대화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주인공이 바로 김상실 명인이다. “내가 하고 있는 공예는 전통공예 현대화 작업의 일환이다. 나전에 쓰는 자개를 가지고 액세서리를 만드는 ‘패각공예’이다. 그렇지만 패각만 갖고 액세서리를 만드는 것은 아니고,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액세서리를 만들고 있다.” 김상실 명인을 만나기 위해 찾은 서울 충무로에 위치한 그의 공방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액세서리들로 가득했다. 전통 나전칠기 기법을 이용해 액세서리를 만드는 ‘패각공예’ 창시자인 명인으로, 패각이 주를 이룰 것 같았던 재료들 사이에 정말 다양한 액세서리 재료들을 접하고는 또 한 번 놀랐다. 패각공예를 비롯해 새로운 액세서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김상실 명인을 만났다.  ▲ 공예에 집중하고 있는 김상실 명인 [사진=양문숙 기자] ■ 귀금속 세공업자에서 귀금속 명인이 되기까지 - 언제부터 귀금속을 다뤘나? “귀금속 공예를 하기 전에는 세공업을 하던 귀금속 전문가였다. 사업을 크게 했었다. 90년대 미스코리아로 당선된 이승연이 드라마에 출연할 때 보석을 협찬해주며 ‘스타마케팅’을 최초로 하기도 했다. 이후 故 최진실, 김남주, 고소영, 손창민, 김혜수 등 스타들의 액세서리를 맡았다.”  - 귀금속으로 승승장구하던 사업가, 왜 공예시장에 뛰어들었나?  “사업을 크게 했는데, IMF가 터지면서 제대로 위기를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그러면서 귀금속은 상업화되기 어렵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재료비가 제품 생산가에 80%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목걸이 하나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금값이 얼마, 보석값은 얼마’ 등 일일이 따져야 하는데, 보석이란 것은 금값파동 등 재료비가 들쑥날쑥하다. 이런 보석 등 원재료비의 가격이 생산가격의 80%를 차지한다. 때문에 보석 디자인 가격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보석 디자이너들이 인정을 못 받으니 자꾸만 외국디자인을 단순 카피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 보석은 산업화되기 어렵다는 걸 안 이후, 달라진 점은? “보석 세공업보다 디자인 분야에 뛰어들었다. 당시 액세서리 디자인을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아 혼자 이것저것 찾아보고, 연구를 많이 했다. 그 다음에 남대문 시장에 액세서리 공동브랜드 종합상가를 만들었고, 이를 계기로 남들에게 액세서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강사를 불러다가 디자인을 가르치는 학원을 세웠다. 제품의 질은 좋은데 외국 디자인 모방이 많아 인정을 받지 못 하는 것이 항상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짐하게 됐다. 우리 문양, 기법 등을 근간으로 해서 현대화시켜 국제로 나가야겠다고.” -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전통공예를 계승하고 발전하는 데에만 (정부 차원의)지원을 하고, 현대공예에는 특별한 지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의 현대 디자인’은 없다. 외국 디자인은 자료가 많기 때문에 찾아서 배우는데, 전통의 현대 디자인에 대한 자료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22세기가 되어서 우리의 후손들이 21세기를 평가할 때 ‘21세기 공예인들의 디자인은 무엇인가’ 의문이 생기지 않겠는가. 현재의 현대공예도 시간이 흐르면 전통공예가 될 것인데, 과거의 것만 계속해서 하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이전에도 훌륭한 고려청자의 맥이 뚝 끊기지 않았나. 고려청자에서 이조청자로 넘어오는 과정의 빛깔이 있었다고 하면, 얼마나 예뻤을까 상상해본다. 훗날 그런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통을 이용한 현재의 디자인이 중요하겠다 생각했다.” - 디자인, 어떻게 공부했나? “나는 기계설비를 했기 때문에 미술사적인 부분이 부족한데, 이를 경험으로 커버하고 있다. 또 상가를 운영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감각을 배워가고 있다. 현재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행하는 전통공예현대화사업단에 속해 교육을 받고 있다. 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젊은 전문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배우고 있다. 한 가지 디자인이 아니라 패션, 가구, 산업 등 다양하게 디자인을 공유하고 있다.” “사실 ‘당신 누구한테 배웠소?’ 라고 물어본다면 할 말은 없지만, 스스로 배워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계는 항상 ‘스승이 누구냐’라는 계보를 갖고 평가한다. 스승의 명성으로 제자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창작공예는 인정받기가 매우 어렵다. 순수전통공예하는 사람들이 제 작품을 처음 보고는 ‘이게 공예 맞냐’고 하기도 한다. 정말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하는 전통공예 분야일수록 그런다. 하지만 어렵게 해야지만 ‘공예’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새로운 공예를 창작하는 사람에 대한 토대가 없다. 참 아쉽다.”  ▲ 김상실 명인의 ‘패각공예’ ■ “자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 전통의 현대화로 세계를 사로잡겠다는 각오에서 탄생된 것이 자개로 만든 패각공예라고 하는데 ‘자개’라는 재료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보석세공업을 했기 때문에 여러 보석을 다뤘고, 그 가치를 알고 있다. 그러나 전복껍질인 자개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자개 빛은 안과 밖에서 보는 것이 다르고, 형광등 아래서나 LED 아래서도 서로 다른 빛깔을 낸다. 그냥 원재료만으로도 어떤 소재하고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장식품이 된다. 자개는 보는 장소에 따라 빛깔이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원재료 그대로 공예가 되는 것은 아니니, 그 위에 내 혼을 실어 새로운 디자인을 입히고 있다. 자개가 나에겐 캔버스가 되는 것이다.” - 자개 위에 입힌 디자인은 어떤 것들이 있나? “2004년에 개발한 공예방식이 있다. 장식품의 줄기를 와이어를 이용해 만들어, 착용자가 자기 마음대로 (줄기를)휘어서 모양을 잡을 수 있게 해봤다. 액세서리 하나를 구입하면 한 가지 디자인으로만 묶여 사용했던 것에 비해 다양한 모양으로 마음껏 바꿀 수 있게 만든 것이다.”  - 가죽재질로 된 액세서리도 있던데? “가죽에 나전칠기를 한 것이다. 보석을 이용한 액세서리는 아름답긴 하지만 무겁다는 단점이 있다. 여성들은 몸무게 빼려고 무진장 노력을 하는데, 액세서리 무게라도 좀 줄여줬으면 좋겠다 싶어서 연구해봤다.(웃음) 가죽에 나전칠기를 하니 멋도 나고 가벼워 좋다.”  - 한국 문양도 눈에 띈다 “이것도 한글 문양으로 나전칠기를 한 것이다. 디자인은 도자기 형태로 만들었다. 이런 것들이 전통공예의 현대화이고, 세계로 나아갈 공예라고 생각한다.” - 이런 전통의 현대화 작업을 하면서 중요시 하는 것이 있다면? “너무 전통만 고집해도 안된다. 우리 것만 고집해 만들면 외국인들에게는 단순 기념품으로만 취급받을 수 있다. 하지만 외국인들이 사용하기에도 거부감 없도록 만들어 상시 착용할 수 있는 액세서리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되도록 전통 디자인과 해외 디자인이 합쳐진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한다.”  ▲ 항상 새로운 재료를 찾는다는 김상실 명인은 한지를 소재로 한 액세서리도 만들고 있다. 김상실 명인이 입체감을 위해 한지를 뜨기 전 섬유질이 느껴질 수 있는 도톰한 한지를 들고 설명하고 있다. [사진=양문숙 기자] ■ 오늘도 창작중  - 패각공예와 관련된 재료 말고도 다양한 재료가 많은 것 같다. 설명해 달라. “모든 물질은 액세서리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꼭 보석만이 액세서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있는 재료를 보자면 산호도 있고 잣나무의 잣, 박달나무 오린 것, 물소의 뿔, 야자수, 천조각 등 다양하다. 산에 가서 재료들을 더  구해오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못 가고 있다.(웃음) 이런 나무나 잣을 이용한 액세서리는 얼마나 자연친화적인 액세서리냐 하면 예전에는 틀에 박힌 소재만 통용이 되고, 착용하고 다녔는데 지금은 얼마나 개성 있게 하냐는 거다. 얼마든지 새로운 소재를 찾을 수 있다.”  -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전부 액세서리의 소재로 보이겠다 “그렇다. 걸어가다 보이는 돌멩이부터 해서 나무, 도자기 파편 등 다 소재가 된다. 쓰다가 깨진 옹기의 파편도 옆면만 위험하지 않게 갈아서 액세서리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다. 정말 버릴 것이 없다.” “버려지는 물고기 비닐도 낱낱이 뜯어 빛에 비춰보면 얼마나 오묘한 색을 내는지 모른다. 그걸로 액세서리를 만들면 얼마나 색다르겠냐. 아직은 물고기 비닐이라고 하면 괜히 비릿내난다며 별로 안 좋아하는 추세다. 그렇지만 그런 편견을 깨고 제대로 된 명품을 만들어내고 싶다.”  - 앞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새로운 소재나 디자인이 있나?  “많다. 요즘 SNS를 조금씩 하는데, 매일 짧은 시 한 두편 올리고, 좋아하는 꽃 사진도 올리고, 내 작품사진도 올리니 참 재밌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 있다. 서각하는 공예가에게 손바닥 반절 정도의 크기에다가 멋있는 글자를 새겨달라고 하고, 그 위에 보석을 붙인 새로운 디자인을 할 계획이다. 우리 전통 서각이 새겨진 액세서리를 한다면, 그야말로 전통예술품을 착용하고 다니는 것이다. 꼭 어떤 걸 개발해야겠다고 정해놓고 하는 것보다도, 그때그때 생활 속에서 번뜩이는 생각들을 실천하는 편이다. 항시 내 관심사가 액세서리이다 보니까, 그런 생각들이 많다.” -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머무르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성격상 새로운 것에 재미를 느낀다. 돈 벌려고 했으면, 상가만 운영하는 것이 더 많이 벌었을 것이다. 나는 돈 보다도 내가 개발한 새로운 공예의 지도자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에 거 베끼지 않고, 항시 새로운 걸 하면서 앞서나가고 싶다. 외롭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다. 그래도 지금은 외로움에서 벗어나서 내 공예를 좋아해주는 분들이 생기고 있다.(웃음) 현재 롯데백화점 본점에 우수 중소기업으로 선정되어 입점했다. 적지 않은 금액에도 새로운 걸 발견했다며 구매해주시는 마니아 고객들이 생기면서 힘을 얻고 있다.” -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목표는?  “내 작품들이 전통공예현대화사업단의 일환으로 2015년 3월에는 파리에서 1개월간, 4월에는 밀라노에서 1개월간 전시할 예정이다. 그 전시에서 많은 이목을 받았으면 싶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멋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 “우수한 제자가 많이 있다. 현재는 이곳 공방에서 공예를 가르치고 있지만, 여건이 된다면 학원을 차려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 시작은 내가 했지만, 나보다 더 뛰어난 제자들이 패각공예의 꽃을 피웠으면 좋겠다.” ☞김상실 명인은 누구? 한국예술문화 명인(귀금속 부문, 제13-1103-21호), (사)평생교육진흥연구회 악세사리아카데미 교육원장, (사)MK발전협회 설립 상임이사, 한국문화예술전문인협회 공예분과 대표, (사)한국공예예술가협회 이사, 조달청 제1회 국가 공예조달 공모전 특선, 국회의원회관 확장 준공 기념 전통공예현대회전 전시, 국회의장 초청 국회의원회관 아웅다리전 전시, 중소기업청 공예인 선정 인사동 전시. 
    • 사람들
    • 지난기획
    2014-09-02
  • [한국의 명장] 유숙자 명인이 수원 화성서 자수 놓는 사연
    ▲ 수틀에 수를 놓는 유숙자 명인. [사진=양문숙 기자] 전통자수로 ‘전통도시의 부활’ 꿈꿔(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우리 자수가 이렇게 예쁘다는 걸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유네스코로 등재된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의 효(孝)로 지어진 성이다.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배봉산에서 수원 팔달산 기슭으로 이전하기 위해 지었다. 아버지의 묘를 이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도시로 수원을 택한 것이다. 이런 정조의 효로 지어진 전통도시에서 유숙자 명인은 전통자수를 하며 전통도시의 부활을 꿈꾼다. 최근 전주, 서울 북촌 등 한옥 마을의 인기가 뜨겁다. 다른 한옥마을에 비해 정조의 효와 혼이 묻어있는 수원 화성에 어느 곳보다도 전통자수와 꼭 맞는 도시이다.  유숙자 명인이 수원에 공방을 연지는 2년.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다. 원래는 전주 한옥마을을 염두해 두었지만, 수원에 한옥마을이 예정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원을 찾았다. 수원 화성 근처 마을을 둘러보고는 그대로 마음을 뺏겼고, 직접 발품을 팔아 돌아다니며 수원 팔달구에 공방을 차렸다. 유숙자 명인의 공방이 특별한 이유는 국내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게스트 하우스를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성 성곽이 감싸고 그 안에 옹기종기 아담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수원 팔달구 장안동에 위치한 유숙자 명인의 공방 송아당을 찾았다.   ▲ 유숙자 명인이 자신의 딸이 시집갈 때 지어준 당의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당의에는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을 수놓았다. [사진=양문숙 기자] ■ 서양자수에서 전통자수로 - 전통자수는 어떻게 시작했나?  “원래 손을 쉬지 않고 이것저것 많이 했다. 바가지 공예도 했고, 매듭도 했었다. 특히 십자수와 서양자수를 줄곧 해왔다. 제가 십자수 놓는 걸 보던 지인이 동양 자수를 추천해줬다. 그렇게 전통자수와 연이 닿았다.” - 경험으로 느낀 서양자수와 전통자수의 차이는? “저는 전통자수가 훨씬 더 재밌다. 십자수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다 정해져있는 반면에 전통자수는 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다. 물론 전통방법이 있긴 하지만, 마음에 드는 도안이 있으면 얼마든지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킬 수도 있어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다. 그러나 사실 접목은 많이 못했다. 전통만으로도 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일단은 전통을 충실히 하고, 그 뒤에 새로운 작품을 많이 하고 싶다.” - 처음 배울 땐 어려웠을 것 같은데……?   “2000년 무렵 고행자 선생님께 배우며 시작했다. 처음 배울 때부터 선생님께 인정을 받았다. 같이 배운 다른 제자들에 비해 속도도 빨랐다. 자수를 시작하고 1년 뒤에 바로 전시를 할 정도였다. 선생님께서 마지막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장롱 수를 직접 나에게 시키셨다. 어려운지 모르고 계속해서 수(繡)를 놓았다. 시어머니께서 24시간 병간호를 해드려야 하는 상황이였는데, 그때 어머니 곁에서 수를 놓으며 함께 했다. 자수를 하면서 어머니 임종도 지켰다. 후에 시아버지도 임종을 지켰다.” “고행자 선생님 돌아가신 뒤에는 한상수 선생님의 수법도 배우고 싶어서 선생님을 찾았다. 나름 자수 경력이 있었음에도 선생님께서는 기초부터 다시 탄탄히 배우게 했다. 이때도 남들 2~3개월 걸리는 과정을 보름 정도 걸려 배웠다.”  - 원래 손재주가 좋았나 보다. “고향이 남원인데, 남원이 수(繡)로 유명하다. 친어머니께서 한복 바느질을 하셨다. 그때 어깨너머로 배우며 재능을 물려받은 것 같다.” ▲ 유숙자 명인이 자신이 만든 '풍뎅이'를 직접 착용해보이고 있다. [사진=양문숙 기자]    ▲ 유숙자 명인의 작품으로 왼쪽부터 여아·남아 풍뎅이와 2층 장. [사진=유숙자 제공] ■ 유숙자 명인의 손을 거친 자수 - 주로 어떤 작품을 하나? “족두리, 신발, 반지 고리, 결혼함, 2층장, 수젓집, 미인도, 병풍 등 다양한 작품을 하고 있다. 주로 생활용품이다.”  - 주요 작품 몇 개 소개해 달라. “이번에 공모전에 낸 작품으로 ‘풍뎅이’를 만들어 봤다. 유럽 가는 친구들에게 단체로 풍댕이를 만들어 줬다. 머리에 쓰고 브로치를 꽂아 사용하게 만들었다. 뒤집어서 다른 색상으로도 착용할 수 있다. 여행가서 외국인들에게 너무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더라.” - ‘풍뎅이’라는 것이 원래 있던 건가? “원래는 조선시대 유수 가문의 아기들이 쓰던 모자이다. 그걸 털모자로 만들고, 귀걸이 까지 만들어 이번 전승대회에 출품했다.”  - 게스트하우스에 외국인도 많이 올 텐데? “맞다. 전시되어 있는 작품 보고는 참 많이 좋아하신다. 병풍을 제작할 때에는 외국 손님에 맞춰서 4쪽으로 제작한다. 사용하기 좋고, 소장하기도 좋고, 들고 가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 ▲ 유숙자 명인이 직접 수를 놓은 신을 들어보이며 신에 얽힌 에피소드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양문숙 기자] ■ 명인이 운영하는, 공예품이 가득한 게스트하우스 송아당 - 말이 나온 김에, 공방에서 게스트하우스를 겸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전주에 공방을 차릴까 알아보던 중에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있는 와중에 모교 이사님을 만나게 됐다. 그걸 둘러보면서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공예 작업만 해서는 경제적으로 힘든 부분도 있어서, 게스트하우스를 겸하게 됐다. 수원에서 게스트하우스로 사업자등록을 받은 1호이기도 하다. 인터넷을 잘 못해서 홍보도 거의 못했는데, 오히려 다녀가신 손님들이 후기를 작성해서 그 후기를 보고 많이 찾아오신다.” - 투숙객들에게 자수 작품 반응은 어떤가?  “단지 머무르고 떠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서 많이 좋아해주신다. 장기투숙하는 분 중에서 배우고 싶다고 하는 분이 있어서 알려드리기도 했다. 그래서 요새는 체험코스로 단기간에 자수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 마을 공예인들끼리 교류도 한다고 들었다. “그렇다. ‘마을 살리기’라고 해서 매주 월요일마다 작가들이 회의를 하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두 번째 네 번째 토요일엔 벼룩시장(프리마켓)을 운영하기도 하고, 등을 만들어 마을에 걸기도 했다. 또 작가들이 엽서를 만들면 방문객들이 그 위에 편지를 쓰고 일정시간이 흐르면 발송하는 것도 논의 중이다. 계속 토론하고 상의하고 있는 단계다. 앞으로도 더 많은 활동을 해서 수원 한옥마을을 살릴 예정이다.” - 마을에 어떤 작품을 만드는 공예인들이 있나? “조각보, 꽃담, 매듭, 도자기, 조각 등 다양하다. 작품하면서 카페를 운영하는 등 다른 일을 겸하는 작가들도 있다.” - 한옥마을이라 하면 전주와 서울 남산 등이 떠오른다. 그 곳들에 비해 수원이 더 나은 점과 부족한 점이 있다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공간이라 그런지 먹거리가 부족한 편이다. 그렇지만 수원 화성 근처에 통닭이나 만두 등 유명한 맛집들이 많다. 마을 안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간식 먹거리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나은 점은 정조의 효를 느낄 수 있는 수원 화성이 자리 잡고 있어 볼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야경 또한 멋있다. 또한 나혜석 생가가 있던 장소이다. 수원시에서도 마을 곳곳을 사들여 한옥으로 예절관 체험관 등을 짓고 있다. 바람이 있다면, 유네스코에 등재된 만큼 올레길이나 외국인이 즐길 수 있는 관광요소가 더해지면 좋겠다.” ▲ 유숙자 명인이 전통자수에 대한 앞으로의 바람을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양문숙 기자] ■ 전통자수 전성시대, 다시 돌아오길 - 작품 활동과 게스트하우스 운영까지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아침에 공방(게스트하우스 겸)에 와서 청소하고, 정리하고, 간단하게 아침을 제공해서 손님들을 보낸다. 그리고선 틈틈이 수를 놓는다. 그렇게 새벽 1~2시까지 있다가 집으로 넘어간다. 집에 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수틀이 또 있다.(웃음) 수를 더 놓다가 잠자리에 든다.” - 두 가지를 병행하는데 힘들 것 같은데? “어쩔 때는 정말 힘들다. 지인들도 만나고 싶고, 전시도 많이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시간에 쫓긴다. 두 번 갈 거 한번밖에 못 간다. 그래도 수원 한옥마을 속에 들어왔으니까, 여기에 멋있는 전시관을 만들고 싶다. 내 작품과 더불어 좋은 작품을 수집해 전시관을 차리는 게 꿈이다. 어디 시골에만 가면 집에 오래된 자수 작품 없냐며 다 내보여달라고 하고 다닌다.(웃음)”  -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품은? “다양한 전통 나비 문양 자수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응용하고 싶다. 직물에 나염해서 기발하다 싶을 정도의 큰 자수를 하고 싶다. 손으로 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은데, 동양적인 기계수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많은 인내가 필요한 전통자수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제대로 된 한국의 자수는 40~50년 정도 그 맥이 끊겼다. 1960년대 자수가 흥하던 시절처럼 다시금 자수의 붐이 일어나서, 동양자수가 세계화되면 좋겠다. 또한 많은 분들이 우리 자수가 이렇게 예쁘다는 걸 볼 수 있게끔 전시관을 짓고 싶고, 박물관에 기증도 하고 싶다.”  
    • 사람들
    • 지난기획
    2014-08-18
  • [한국의 명장] 이연욱 화공 “국내서 유일하게 ‘황금탱화’ 그려요”
    ▲ 작업중인 이연욱 화공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불교미술은 인물, 산수, 화조, 동물, 문양 등을 그릴 수 있어야 하고 또 탱화, 벽화, 별화 등 다양한 분야를 그릴 수 있어야 하기에 ‘종합미술’이다.” 우리나라에서 불교는 종교 이상이다. 종교를 떠나 우리 고유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교의 내용을 그린 ‘불화’는 단지 종교화가 아닌 전통미술로 볼 수 있다.  불교미술은 종합미술이라고 설명한 이연욱 화공은 불교미술과 40여년을 함께 해왔다. 경상남도 산청군이 고향인 이연욱 화공은 17살 소년 시절, 처음으로 불교미술을 접하게 됐다. 서울에서 김한옥 선생(단청문양보존회 부회장)이 비각 단청을 칠하기 위해 이연욱 화공의 고향 마을에 찾은 것이다. 단청을 마주한 소년은 그 길로 선생께 단청을 배우고 싶다고 졸랐고, 그렇게 불교미술과 인연을 맺게 됐다. 종합미술이라 할 정도로 불화는 방대한 분야를 두루 섭렵해야 했다. 이연욱 화공은 나름대로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불화라는 게 소질만 갖고는 안 된다. 단청과 불화를 처음 배울 당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10년간 매일 3시간 정도 밖에 안 잤다”며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늘까지도 그는 끊임없이 불화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108배 기도를 드리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서 불화에 대한 연구도 하고, 책도 찾아보고, 베껴 그려본다. 그 뒤 아침을 먹고 오후 6시까지 작업을 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가서도 연구와 공부를 계속한다. 방대한 양의 전통만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공부를 놓을 수 없는 것이다.   ▲ 이연욱 화공 [사진=양문숙 기자] 청 적 황 흑 백색의 오색을 기본으로 조성하는 ‘오색탱화’, 바탕을 먹으로 칠하는 ‘먹탱화’, 바탕을 붉은색으로 칠하는 ‘홍탱화’ 등 다양한 색상으로 후불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지장탱화 등 다양한 종류의 탱화를 그리고 있다. 이 외에 부처님설법도, 팔상성도(八相成道), 십우도(十牛圖) 등 벽화와 단청까지, 그야말로 방대한 종류의 불교미술을 작업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40여 년간 전국 방방곳곳으로 뻗어나갔다. 전통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전통만 따라하더라도 양이 방대하다. 그렇지만 모사를 하더라도 그대로 따라하지만 않고, 아름다움을 더 증가시키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한다. 불화에 추상적인 단청문양 꽃을 그려보기도 한다.” 새로운 시도 중 ‘황금탱화’에서 절정을 이뤘다. 황금탱화는 바탕을 원형이나 선으로 고분하여 황금을 붙이고 그 위에 채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탱화이다. 장엄미가 뛰어나고 조명의 빛에 따라, 또한 각도에 따라 색상이 다르게 보이는 특징이 있다. 은은하면서도 화려하고 화려하면서도 은은하다. 이는  이연욱 화공이 약 10여 년간 열정을 다해 연구해낸 새로운 방식이다.   ▲ 이연욱 화공이 그린 황금탱화 '황금삼세여래후불탱화'(채광사) [사진=이연욱 화공 제공]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황금탱화를 그릴 수 있다. ‘황금탱화’는 예전에는 없던 기법이다. 탱화에서 전통 고분생채색 기법은 탱화일부분에만 금을 붙이던 기법을 연구하여 발전시켜 과감하게 전체면에 금을 붙이고 그 위에 채색을 올린다.” 이연욱 화공은 황금탱화 기법으로 제14회 불교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단청을 처음 배우면서부터 오늘까지도 불교미술에 대한 공부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이연욱 화공은 자신의 지식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는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에서부터 세밀한 작업과정까지 기록해둔다.  “우리나라에 불화 교본이라고 할 책이 없다. 나도 공부할 적에 중국책을 사서 공부했다. 불화의 기초부터 탄탄히 배울 수 있는 기본서를 집필하고 싶다. 예를 들어 부처님 눈을 어떻게 그리고, 입꼬리는 어떻게 그리는지 등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내용들을 두루 다루고 싶다. 기초가 탄탄해야 안정적인 그림이 나온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 단청 3년, 불화 10년. 이연욱 화공이 말한 단청과 불화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걸리는 시간이다. 배움의 시간이 길기 때문에 불교미술에 관심이 생겨 배우고자 하더라도 끈기를 갖고 꾸준히 배우는 사람들이 적다. 이연욱 화공은 그렇다고 전통미술인 불교미술을 손 놓고 바라볼 수는 없다. 지금까지 그가 정성을 쏟아 일궈낸 불교미술 지식이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길 바라고 있다.   한편 이연욱 화공은 양양 낙산사 의상 기념관에서 지난 8월 1일부터 약 2년간 황금33관음도를 상시 전시중이다. ▲ 이연욱 화공 [사진=양문숙 기자] ☞이연욱 화공은 누구? 화공 1088호 등록(문화재청),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이수,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불교예술 수료, (사)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 문화이사, (사)한국중요무형문화재기능보존회 정회원, 문화재청장 표창, (재)황실문화재단 명인선정(불화장), 대한민국불교미술대전 특선(2004),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입선(2010), 한국문화재기능인작품전 최우수상(2012) 등 수상.
    • 사람들
    • 지난기획
    2014-08-12
  • [한국의 명장] ‘규방공예’ 김영금 “느림의 미학 공유하고 싶어요”
    ▲ 김영금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우리나라 옛 여인들은 시집을 가면 그 길로 친정은 고사하고, 외출 한 번도 쉽지가 않았다. 자유롭게 밖을 다니고 싶었던 여인들은 불을 떼면서 피어나고 날아가는 연기를 보며 위안 삼았다. 자기 대신 연기라도 훨훨 날아가길 바랐던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염원은 그들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생활용품에 ‘연기문양’으로 표현됐다. 이렇듯 전통공예 ‘규방공예(閨房工藝)’에는 우리 여인들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녹아있다. ‘규방’이란 여인의 거처인 ‘안채’를 이르는 말로, 규방공예는 규방에서 여인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공예품을 뜻한다. 바느질은 물론 염색, 매듭 분야도 걸쳐있고, 조각보, 노리개, 방석, 주머니 등 규방공예는 이처럼 생활주변에 널려있다.   ■ 만능재주꾼, 규방공예에 빠지다 김영금 명장(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소속)은 옛 여인들의 이야기가 녹아있는 ‘규방공예’에 푹 빠졌다. 그녀는 규방공예 옛 작품을 보노라면 장식 또는 문양 하나하나에 모두 다른 이야기가 있어, 하면 할수록 재미를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원래부터 손으로 만진다는 건 뭐든 좋아했다. 구슬공예, 한지공예, 리본공예, 퀼트공예 등 취미에서 시작한 공예로 취득한 자격증만 해도 30여개에 달한다.   ▲ 김영금 명장이 꼽은 자신의 대표작 ‘괴불 노리개’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는 괴불 108개를 100일간 제작했다. 괴불 하나하나, 고운 바람을 갖고 임했다. [사진=양문숙 기자] 그중 특히 규방공예에 빠지게 된 것은 전통과 현대를 가미할 수 있는 폭이 넓어서다. “특히 조각보에는 틀이 없다. 대부분 다른 공예들은 형태나 뼈대가 정형화되어 있는 데 비해 조각보는 소재, 색, 크기를 무궁무진하게 바꿀 수 있어 할 수 있는 형태가 굉장히 많다.”  같은 규방공예라도 자신만의 색을 풍기고 싶었던 그는 “규방공예를 할 땐 정확하고 반듯하고 올바르게 한다. 대충 넘어갈 수 있는 부분도 완벽하게 될 때까지 무조건 한다. 이것이 나와의 약속이다”며 그녀만의 철학을 갖고 작품에 임하고 있다. 또한 작품에 들어가는 소재는 인공소재, 화학소재를 쓰지 않는다는 철칙도 있다. 천연소재, 천연염색된 소재만을 고집한다.  규방공예에 빠진 또 다른 이유는 혼자 할 수 있는 공예이기 때문이다. “칠(漆)을 하게 되면, 백골(白骨)은 다른 분께 맡겨야 한다. 아는 백골장이 없어 일반 공장에 주문하면 한 디자인 당 최소 제작단위가 1천개를 넘어 개인 작가에게는 너무 힘든 환경이다. 그렇지만 규방공예 조각보 같은 경우는 재료 선정부터 재료구매, 디자인, 바느질 등을 혼자 다 할 수 있다. 나한테는 그게 딱 맞았다.” 이런 이유로 김영금 명장은 규방공예에 빠졌다. “할 수 있는 공예가 30가지가 됐지만, 그 중 나만의 색깔을 내는 공예는 없었다. 모두가 다른 데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공예품처럼 보였다. 그러다 청와대 내 사랑채에서 시연작가로 활동하면서 이를 계기로 우리 것을 하면서도 내 색을 낼 수 있는 것이 규방공예라고 깨닫게 됐다”며 규방공예야말로 전통과 더불어 자신의 색을 낼 수 있는 분야라 확신했다.  ▲ [사진=양문숙 기자] ■ 규방공예 매력, 다 같이 누렸으면 김영금 명장은 지난 10일 서울 연남동에 자신의 공예갤러리를 개관했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갤러리는 규방공예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벽면은 물론 테이블 밑까지 그녀의 정성과 구슬땀을 담은 규방공예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곳은 작품 속에 둘러싸인 카페 공간인데, 그렇다고 주목적이 장소대관이나 음료판매가 아니다. 원래 작업실로 쓰고 있던 공간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개방했다고 한다. 더 많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규방공예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시공간으로 대관하거나, 음료를 팔거나, 강의를 개설해 상업적으로 돈을 벌려는 목적이 아니다. 지금 맡고 있는 외부 강의가 많아 그것만으로도 시간내기 어렵다. 단지 내 작품을 좋아해주는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고, 방문객들에게 규방공예를 더 친숙하게 느끼게 하고 싶었다.” 특히 그녀는 하루 2~3시간 단시간에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는 강의를 계획 중이다. 커리큘럼에 묶여 지정된 공방에서 강의를 들으면 원하는 것만 만들 수 없다는 불편함을 해소하고 싶었다. 복주머니 하나를 만들고 싶어 하더라도 계획된 커리큘럼에 맞춰 불필요한(원하지 않는) 공예품까지 만들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 김영금 명장은 그렇게 되면 오히려 규방공예에 흥미를 느끼다가도 금방 싫증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영금 명장은 “규방공예는 참 예쁜 문화다. 느리게 가는 미학도 있고, 누구나 쉽게 시도해볼 수 있으며, 만든 것을 바로 실생활에 쓸 수 있다. 그러다 싫증이 나면, 다시 바꿀 수도 있다”며 규방공예를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 [사진=양문숙 기자] 김영금 명장은 ‘10년 뒤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나’는 질문에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규방공예 책을 쓰고 싶다. 과정뿐 아니라 재료구입처부터 관련TIP까지 모두 나누는 책을 집필할 것이다”고 답했다. 그녀는 또 “퀼트 패키지처럼, 규방공예 패키지도 만들고 싶다. 구성품으로 만들 공예품의 도안과 더불어 실, 천, 장식 등 그것을 만들기 위한 모든 재료가 들어있는 패키지 말이다. 그래서 간단하고 쉽게 규방공예를 접근하게 하는데 노력하고 있을 것 같다”며 웃어보였다.  요즘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바느질을 거의 하지 않는다. 간편한 재봉틀기가 우리의 손바느질자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영금 명장은 기계와 손바느질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확신한다. 서양의 큼직한 바느질이 아닌 우리의 섬세한 바느질 한 땀 배워보는 건 어떨까. 참 예쁜 문화라니 말이다. ☞김영금 명장은 누구? (사)한국예술문화총연합회 명인(13-1124-21). (사)한국공예사랑협회초대이사 역임. 2008 FIMO CONTEST 은상 수상. 2011 청와대 사랑채 시연작가. 2012 청와대 사랑채 전통공예시연작가 작품 초대전 개최.
    • 사람들
    • 지난기획
    2014-07-23
  • [한국의 명장] 송창일 “운명적으로 만난 불상, 지금까지 10만점 이상 조성”
    ▲ 송창일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어쩌면 정말 운명적으로 부처님 조성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어려울 때도 있지만, 보람된 일이에요.” 국내 방방곳곳 사찰에도, 또 바다 건너 해외에도 송창일 명장의 혼이 깃든 불상이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 주조 명장이자 천종사 대표이사인 송창일 명장은 명실 공히 우리나라 청동주조 1인자다. 송창일 명장은 어린 시절부터 신심(信心)이 깊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절을 다녔고, ‘스님이 될 팔자’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정도로 불교와 인연이 밀첩하게 닿아있다. 전라남도 고흥에서 16살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주물을 배웠다. 이후 홍익대학교 최기원 교수에게 조각을 사사했으며, 전통방식으로 주조하던 이종옥 스승을 만나 기술을 면밀하게 다졌다. 청동불상을 비롯해 철불상, 범종, 불탑 등 불교 관련 주물을 다루고 있는 그의 작업현장인 경기도 광주 천종사를 찾았다.  ▲ 천종사 전경 [사진=양문숙 기자] ■ 운명처럼 들어선 불교 주조 - 불교 관련 주조를 집중하게 된 계기는? “대목장인 아버지 밑에서, 머슴이 두 명이 있을 정도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어요. 그러다 보니 많이 배우지 못하고, 기술을 배우러 서울로 올라오게 됐죠. 처음 주조를 배울 때에는 이순신 동상, 연세대 독수리상 등 불교 관련 주조가 아니더라도 국내 큰 작품들을 다뤘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전통방식으로 불상만 전문으로 다루는 선생님을 만나 그 밑에 10여 년 있으면서 우리나라 국보 모조만 500점 가까이 다루게 됐어요. 그 인연을 계기로 완전하게 불교 관련 주조로만 접어들었죠.” - 운명처럼 이 길로 접어들었네요. “네. 정말 처음부터 운명적으로 다가 와서 부처님을 조성하게 됐는지도 모르죠. 이 일은 제 직업이기도 하지만, 저의 종교이기도 해서 다른 건 전혀 생각 안하고 항시 이 일에만 몰두해있어요. 또 청동작업이 어렵기 때문에 힘들긴 해도 제가 만든 작품들이 국내에 엄청나게 있으니깐 뿌듯한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죠.” - 불상은 다른 공예와는 다르게 종교 관련이기 때문에 다루는 마음가짐이 남다를 것 같은데. “지금도 불상이나 범종을 만들 때는 마음가짐부터 남달라요. 작업실 내 사무실에 법당을 차려놓고 아침저녁 기도를 드리면서 작업을 해요. 저와 30여 년을 함께 일해 온 직원들이 10명 이상인데, 직원들도 마찬가지죠. 어느 정도 신심을 가지고 하지 않으면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봐요. 아직도 미신적인 걸 많이 지키는 편인데, 특히 범종을 만든다거나 주물을 붓기 전에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곤 하죠.” - 불상의 종류와 국내에 주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일단 불상의 종류는 굉장히 많죠. 대부분 석가모니 불상을 주로 떠올리지만, 다른 불상 종류도 굉장히 많아요.(불교상은 크게 여래상, 보살상, 나한상, 산신상 등으로 나뉠 수 있고, 부처의 모양이나 재질로도 나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국내에 주물을 하는 사람을 많지 않습니다.” ▲ 송창일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 불상은 얼굴 - 범종은 소리가 중요해 - 우리나라 대부분이 청동불상인가요? “그렇죠. 이순신 동상, 세종대왕 동상 혹은 건물 앞에 있는 조각작품(동상)들 대부분이 청동이에요. 그렇게 현대 동상들도 대부분 청동이고, 대불들도 거의 다 청동입니다.” -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드나요? 아니면 현대적인 방식으로 바꾸어서 만드나요? “옛날 전통방식만으로는 제작비용을 따라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은 거의 현대방식으로 만들면서 꼭 필요할 때만 전통적인 방법을 가미해요.” “하남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철 불상 ‘철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332호)’을 재현할 때 현대방식과 전통방식을 가미해서 작업을 했어요. 제가 이 작업을 의뢰 받기 전에 재현을 시도했던 분들이 규모가 워낙 크고, 톤수도 엄청나서 주물을 한 번에 붓지 않고, 따로따로 부어서 붙이려다가 실패를 했거든요. 그것을 제가 전통방법과 현대방법을 가미해서 하나로 부어 성공했죠. 저도 걱정이 많았는데, 주물이 생각보다깨끗하게 나왔어요. 전문위원들도 깜짝 놀랄 정도의 주물을 보여줬었죠. 지금도 그 작품을 보면 고무돼요. 국내 철불 중에서 저렇게 큰 사이즈는 최초일 거예요. 앞으로 저런 작품을 얼마나 만들는지 모르겠지만, 전통 방법을 가미하지 않으면 어렵다고 봐요.”  - 완성하고 나서, 기분은 어땠나요? “주물을 부어놓고 해체할 이틀 동안 잠을 설쳐가면서 기다렸어요. 이틀 뒤 열어보니 생각보다 깨끗하게 나와서, 기분이 너무 좋았죠. 저런 작품을 만들 기회가 또 있다면 한번쯤 또 시도해보고 싶다고 생각해요.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굉장히 뿌듯해요.”  - 범종은 모양도 모양이지만, 소리까지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처음엔 불상보다 더 힘들지 않았나요? “불상은 얼굴이 가장 중요하고, 범종은 소리가 가장 중요해요. 부처님을 조성할 때는 전체적인 아름다움과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 표현이 어렵죠. 범종은 모양이나 문양도 중요하지만 당연 소리가 첫째죠. 그래서 아직도 주물하는 데는 범종이 더 힘들어요.”   ▲ 송창일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 지금까지 만든 작품이 얼마나 될까요? “글쎄요. 작은 불상은 몇 천불씩 만들기도 하니까, 숫자상으로 몇십 만점은 될 거예요.” - 전국에 돌아다니면 직접 주조한 불상을 많이 볼 텐데, 다시 가서 보면 느낌이 어떤가요? “예전에 만들었던 작품과 최근에 만드는 작품에 차이가 조금씩 느껴져서 계속 발전해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돼요. 외국에도 제 작품이 많이 있어요. 스리랑카의 한 박물관에서 제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도 봤어요. 실제로는 제가 한 절에 스님께 조성해드린 불상인데, 그 스님이 스리랑카 국립박물관에 기증을 했더라고요. 박물관에 번듯하게 진열되어 있는 걸 봤는데, 기분이 참 묘했죠. 여기까지 내 작품이 와있구나 싶어서.” - 작업 하면서 가장 보람됐던 때는? “범종은 춘천 '시민의 종'을 만들었을 때, 불상은 부산 홍법사 대불을 만들었을 때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춘천 ‘시민의 종’ 소리가 굉장히 좋았어요. 강원대의 한 교수가 와서 음 측정을 해보더니 자신이 음 측정한 중에서 소리가 가장 잘났다고 해줬는데, 그때 참 보람됐어요. 요즘도 누가 종에 대해 물어보면 춘천에 가서 종소리를 들어보라고 해요. 홍법사 대불은 제 손으로 조각부터 주물까지 맡았던 작품이기도 하고, 크기도 제일 크고 100t 가까이 가는 대작이에요. 국내 불상 중에서 제일 큰 불상이기도 하고. 불상을 처음 공개하는 행사에 2만 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고, 절에서 감사패도 받고,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들어서 가장 보람되고 기억에 남아요.” ▲ 그가 꿈꾸는 청동박물관 모형(맨 왼쪽) 앞에 선 송창일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 청동 박물관, 최첨단 법당을 꿈꾸다  - 불상 1인자가 되었는데, 처음 시작할 때 이런 성공을 예상했나요? “글쎄요. 처음에 일반 작품 쪽에서 일을 하다가, 우리나라 국보 모조 쪽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어려움이 많이 따랐어요. 자금줄도 힘들었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겠지만, 불교 관련이다보니 많은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큰 작품을 계속 하게 됐고, 그러다보니 명성도 얻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 운도 많이 따랐고요.” - 그만두고 싶단 생각은 한 적 없나요? “주조를 처음 배우면서 지금까지, 딱 한 번 이일을 그만두려고 했던 적이 있었어요. 직장생활하면서 일을 관두고 다른 일을 해보려고 마음을 먹었죠. 아는 사람을 따라 장사를 해보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안 나와서 다시 불상을 잡게 됐어요. 장사에 소질도 없었고, 내가 장사를 하는 것 보다는 일단 먼저 시작하고 배운 주조를 더 열심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돌아왔죠.”  - 좌우명이 있다면. “‘장인의 혼을’이란 좌우명을 벽에 걸어 두고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다짐해요. 이 곳에 일하는 직원들에게도 다들 ‘장인의 혼을’ 갖고 만들자고 하고 있어요. 우리 선조가 했던 것을 봤을 때 정말 대단하구나 감탄할 때가 많은데, 우리도 우리 선조들처럼 후대들이 봤을 때 감탄할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항시 제 좌우명인 ‘장인의 혼을’이란 마음을 가지고 작업에 임합니다.” -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뭔가요? “중요무형문화재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우리나라에 아직 청동불상을 만드는 문화재가 없어요. 지방문화재 한 사람도 없죠. 한 번 도전했다가 실패했는데, 지금 다시 준비해서 곧 도전하려고 해요.” “또 제주도에 청동으로 된 박물관을 지으려고 해요. 모델로 만들어 논 모형도 있는데요, 손이 천개, 눈이 천개인 천수천안 모형에 45m 높이로. 이 안에는 청동 제품을 팔 수 있는 상가를 두고, 우리나라 국보 모조품을 한 데서 볼 수 있는 공간과 외국인과 함께 할 수 있는 최첨단 법당이 들어서도록 계획하고 있어요. 법당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몇 개 국어를 동시에 통역할 수 있는 법당이에요. 이 박물관이 현재는 꿈이지만, 언젠간 실현되면 기네스북에도 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돼요.”  
    • 사람들
    • 지난기획
    2014-06-10
  • [한국의 명장] 백골장 김의용 “다시 태어나도 소목장 할 거예요”
    ▲ 김의용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목수(木手)는 건축물을 짓는 ‘대목장’과 가구 등을 만드는 ‘소목장’으로 나뉜다. 소목장은 옷장, 경대, 소반, 약장, 궤 등 목가구를 포함해 문이나 창문 등도 취급한다.  소목장 중에서도 백골(白骨)은 칠을 하지 않고, 나무로만 제작된 상태를 이른다. 생활에 밀첩하게 쓰이는 목가구를 만드는 만큼 소목장은 사용하는 나무의 특성을 고려해 실용적이면서도, 한국적인 멋을 담아 목가구를 만들어 낸다.  경기도 무형문화재인 김의용 명장은 소목장으로, 목재가구, 나전칠기 백골 등을 만들고 있다. 인척 소개로 서울에 와서 백골 공방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무를 잘라 서로 맞추는데 딱 맞아떨어졌을 때의 묘미가 있다”는 그는 소목장이 적성에 딱 맞았고, 그렇게 나무와 부대끼며 함께 한 지도 50여 년이 됐다.  실생활에 쓰이는 소품 종류를 만들다 보니, 김의용 명장은 사용하는 사람이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중요시 한다. 그는 “옛날엔 장롱 서랍을 빼려면 두 손으로 낑낑대며 어렵게 꺼냈다. 그러나 요새는 손가락으로 살짝만 빼고 넣어도 쉽게 할 수 있는 현대식 방법을 가미해 만들고 있다. 고칠 점은 고치고, 좋은 점은 그대로 이어나가야 한다”며 옛 방식만을 고집하기 보다는 현대 감각에 맞게끔 만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그 전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하자 없이 만드는 것’이다. 특히 뒤틀림이 생기지 않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는 뒤틀림 없는 백골을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첫째 보관, 둘째 건조”를 꼽았다. 그러면서 “나무를 바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잘 묵힐수록 좋다”고 말했다. 그렇게 50여 년 백골을 짜오면서 ‘하자’로 인한 반품이나 수리 요청이 없었다. 제 손을 떠난 백골은 그대로 새 주인을 만나 잘 쓰이고 있다.   ▲ 김의용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이런 마음과 자세는 그가 처음 숙련공으로 일할 때부터 갖고 있었다. 김의용 명장은 “숙련공 때부터 돈 받고 남의 일 해준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 일이자 내 손님이란 마음 가짐으로 했다. 그러니 더 책임감을 느끼고, 더 꼼꼼히 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그런 마음가짐이 50년간 소목장으로 살아온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50년간 왜 힘든 일이 없었을까. 나무를 건조하던 건조장에 불이나 아끼던 나무들이 타버리기도 하고, 목재를 다루다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다시 털고 일어나 열심히 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과거 일에 자신감이 붙은 김의용 명장은 직원들을 많이 채용해 사업체를 확장했다. 오히려 사업체 확장은 어려움을 불러일으켰고, 그를 주저 앉힐 뻔 했다. 쓴 맛을 맛보고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보다 싶었다”던 김의용 명장은 그렇다고 백골을 관둘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대량생산, 양산체제보다는 작품성에 몰두하기로 결심하고, 큰 공방을 접고 작품성 있는 백골 만들기에 열을 올렸다. 아예 다른 길이 아니라, 같은 길에 다른 통로로 극복한 것이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절대 안했다는 그는 “이 좋은 걸 왜 관둡니까”라며 “소목장은 평생 직업이다. 내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계속 할 거다”고 말했다. 작품의 길로 접어든 그는 그렇게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만든 이의 믿음과 가치가 올라서 인지 이후 주문도 전 보다 많아졌다. 항상 1년치 일감은 쌓여있다. 많은 직원과 함께 일하던 그는 현재 아들과 단 둘이 백골을 만든다. 대학원까지 졸업한 아들이 자신과 함께 자신의 일을 한다는 것에 기특하고 고맙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 김의용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사실 요즘은 소목장 구하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백골을 진득하니 배우려는 사람이 많이 없기 때문. 김의용 명장은 “요즘 사회초년생들은 웬만하면 대학 문턱까지 밟은 친구들이라 봉급이 적은 숙련공 생활을 잘 견디지 못 한다. 또 먼지 폴폴 날리며 위험한 작업을 해야하기도 해서 선호도가 낮은 편이다”고 전했다. 전문으로 배우는 숙련공은 줄었지만, 오히려 취미로 배우는 사람들은 늘었다. 이에 김의용 명장은 교육관을 마련하고, 준비 중이다. 경기도 측의 제안으로 시작하게 된 교육은 문화재 투어 형식으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문화재를 체험하고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나무 짜는 기술 등을 직접 알려줄 예정이다.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절대 복이 없다”가 인생의 좌우명이라는 김의용 명장은 “내 직업에 애착없는 사람은 일을 못 한다. 운만 바라보고 있으면, 절대 안 된다. 복권을 사는 등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노력해서 번 돈이 정말 알찬 돈이지, 그렇지 않은 돈으로 사는 건 행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소목장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끝으로 김의용 명장은 “소목장으로 살아온 50년, 스스로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아주 만족스럽다. 다시 태어나도 무조건 소목장으로 살 거다”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 김의용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 사람들
    • 지난기획
    2014-05-26
  • [한국의 명장] ‘나전칠기’ 손대현 “보물 만드는 마음으로”
    ▲ 손대현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제 작품이 어딘가에서 귀중하게 보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참 보람을 느껴요. 하나하나가 보석이라 생각해요.” 수곡 손대현 명장의 나전칠기 작품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일본 천왕 등 세계 각국의 귀빈들에게 한국의 멋을 담은 선물로 주어졌다. 그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3호이며,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문화재관리국장상, 국무총리상, 대통령 표창 등 다수의 수상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은 옻칠장이다. 손대현 명장은 자개 빛에 매료되어 1960년대부터 칠(漆)을 시작했다. 첫 3년은 화학 칠을 이용한 카슈제품을 다루는 공방에서 배웠다. 그러다 카슈칠과는 다른 ‘옻칠’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본격적으로 옻칠을 배웠다. 그렇게 칠과 함께 한지도 벌써 50여 년이다.  ▲ 나전칠기 손대현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 나전칠기, 반짝이는 아름다움에 매료되다 칠공예 장식기법 중의 하나인 ‘나전칠기’는 옻칠한 목제품에 얇게 간 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형태로 오려내어 박는 것으로, 과거에는 목제품에 주로 쓰였지만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소재에 접목되고 있다. 손대현 명장은 나전칠기의 어떤 매력에 빠져 50여 년을 해오고 있을까. 그를 만나 나전칠기 이야기를 듣고 왔다. - 처음 시작할 때 나전칠기의 어떤 매력에 빠지셨나요. “자개를 보면 자개 빛이 위치에 따라 보이는 빛깔이 달라요. 자개의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에 이끌려 나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죠.” - 배우기 힘들었을 텐데. “그럼요. 사포질도 하고, 칠하는 과정들이 험하게 보이잖아요. 그래도 하나하나 새롭게 완성되어 가면 그 아름다움은 어디에 비할 바가 없어요. 처음에는 험한 과정, 밑바닥부터 배우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배우고 싶은 걸 하고, 아름다움에 빠지니 그리 힘들지 않았어요. 처음 시작할 땐 배운 다기 보다는 선배들 옆에서 잡일을 도맡아 하면서 눈동냥으로 배우는 거죠. 그러다 선배들 잠시 식사하러 가셔서 자리가 비면, 어떻게 하셨나 보기도 하고, 칠해보기도 하고 그랬죠.(웃음)” - 처음 자개 시작했을 때 세웠던 목표는? “처음 배울 때 그곳에 책임자처럼 빠른 시간 안에 저 정도 기술을 익히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죠. 언젠가는 내가 저 정도 실력을 갖고, 또 넘어야 겠다는 욕심이 있었죠.” - 전시장에 두 명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누구인가요? “제 스승님인 민종태 선생님과, 민 선생님의 스승님이자 나전칠기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 전성규 선생님입니다. 저의 배움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에 걸어두었어요.” “우리 선생님의 호(號)가 ‘수곡(守谷)’이었어요.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호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수곡’이란 호는 선생님이 쓰시기 이전에 진성규 선생님께서 쓰시다 물려주신 호라고. 그러면서 이제는 저 보고 그 호를 쓰라고 하셨어요. 유언처럼 남기신 그 말을 듣고, 원래 쓰던 호를 두고 ‘수곡’이란 호를 제가 쓰게 됐죠. 그렇게 3대 째 내려오고 있는 호입니다.”  ▲ 손대현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 과정을 소중히, 옻나무 직접 심기도 - 옻칠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과정이에요. 마감 칠을 해 버리면 그 전에 했던 과정들이 감춰져버려요. 제 스승이신 민종태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밑에 보이지 않은 부분이 정확해야 정말 천 년이 가는 명품으로 남는다’는 철학을 말씀해 주셨어요. 밑바탕이라고, 안 보인다고 소홀히 하면 안 되고 과정 하나하나를 빠트리지 말고 충실히 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라, 지금도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 작품당 작업 소유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기초부터 마감 칠까지, 크나 작으나 과정은 같아요. 보통 3개월 정도는 거쳐야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온다고 보죠. 하루만 말려도 칠은 마르지만, 그래도 충분히 건조를 해서 숙성된 기간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최소 3개월, 길게는 6개월 정도 소요됩니다. 때로는 1년 이상 걸리는 작품도 있어요.” - 칠을 할 때는 먼지 하나도 굉장히 신경이 쓰일 것 같은데. “당연히 그렇죠. 옻칠을 할 때는 먼지가 전혀 없어야 되니깐 일단 작업실 청소를 말끔하게 한 다음에, 옷에 묻은 먼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 윗옷을 벗기도 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칠을 합니다.” “항상 옻칠을 끝내고 다음날 칠방 문을 열고 확인을 할 때는, 문을 열기 전에 ‘멈칫’해요. 칠이 내가 원하는 대로 바르게 되어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경건한 마음이 들거든요. 그런 마음으로 칠을 확인하는데 티끌하나 없이 깨끗하게 잘 나오면 정말 너무 기쁜 거죠.” - 칠을 시작한지 40여 년이 흘렀는데, 지금도 칠방 문을 열기 전에 멈칫하나요? “그럼요. 한결같죠.(웃음)” - 칠하는 것 외에 디자인이나 문양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제가 학교에서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 했기 때문에, 문양 책이나 디자인 책들을 틈만 나면 보죠. 보면서 이 문양은 어떤 작품에 어울리겠다, 다른 것과 이렇게 접목시켜야 겠다 등 다양한 생각들을 하고, 그것들을 기록해 정리 해 놨다가 작품에 접목해요.” - 옻의 원재료인 옻나무도 직접 심고 기른다고.  “네. 제가 옻칠을 하면서 제가 직접 기르고, 채취해서 칠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거든요. 그런 의미로 땅을 마련해 옻나무 묘목을 심었어요. 그 나무에서 옻을 채취해서 실험용으로 직접 칠을 하기도 해요. 그런데 제가 심은 양으로는 작품에 쓸 만큼의 양은 전혀 안 돼요.(웃음) 제가 직접 기른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으로, 실험용이라도 만들어 보는 것에 의미가 남다르죠.” -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예전에 전복 중에서도 아주 아름다운 것으로 골라 3층장을 세트로 만든 적이 있어요. 어떤 분께서 사가셨는데, 그 분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저는 혹시 장식이 잘 못 되었거나, 녹이 슬었나 라는 생각으로 찾아갔는데, 그 분이 ‘정말 좋은 작품을 해줘서 고맙소’라고 인사를 하려던 거였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분이 어느 날 밖에서 아주 마음이 상해서 들어 오셨데요. 노한 마음을 가지고 방에 있었는데, 자기도 의식하지 못 하는 순간 마음이 너무 차분해져 노여움이 가셨다는 거예요. 본인도 놀라서 보니깐, 제가 만든 3층장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데요. 화사한 나전에 빛깔과 문양이 자신의 마음을 씻어줬다고. 늘 봐왔지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며, 시집가지 않은 두 따님에게 제 작품을 꼭 사주겠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제 작품 하나하나 다 애정이 가지만, 그런 말을 듣다 보니까 그 작품이 제 머리 속에 계속 남더라고요.(웃음)”  ▲ 손대현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 기법은 전통 그대로, 디자인·형태는 현대화 손대현 명장은 전통방식 그대로 만드는 전통답습보다는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현대화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오고 있다. BMW의 자동차 내장재의 나전 장식을 맡기도 했으며, 삼성TV에 일본 유명 전자업계 CEO 영문 이름을 그가 직접 나전으로 작업하기도 했다. - BMW, 삼성TV 등 산업적인 면에서의 작업은 평소 하던 작업과 또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  “전통공예라고 하면, 예전걸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먼 훗날 봤을 때는 이것이 조선시대 것인가, 아니면 그 후 시대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이 시대에 살면서, 이 시대에 모든 분들과 소통할 수 있는 그런 문양과 소재를 사용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소재도 많이 달라졌죠. 예전에는 나무에 옻칠을 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는데, 하지만 지금 이 세대는 여러 가지 소재가 많이 나오잖아요. 금속, 알루미늄, 플라스틱 등 다양한 소재에 옻칠을 접목해서 이 시대에 맞게 계속해서 도전해 나가고 있어요. 그래서 아마 그런 산업 쪽에서 일이 들어오고, 결과가 좋지 않았나 싶어요.” - 고급스런 옻칠의 대명사가 됐다. 자신의 어떤 면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특별한 건 없다고 봐요. 단지 제가 한 가지 꾸준히 해오면서 다양한 방향으로 작업을 해왔기 때문 아닐까요?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아주 오래 전 작품들을 재연해보면서, 그 시절 그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이 작품을 만들었을까 라고 고심도 해봤고. 현재 이 시대에 맞춘 작품을 만들더라도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서 해왔어요. 또 무엇보다 제 작품을 직접 사용하고, 선물하던 분들이 좋아해주시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 답습이 아닌 현대화하는 이유는 뭔가요. “‘현대화’ 혹은 ‘새롭게 한다’는 것에 일반인들은 오해를 할 수 있는데, 기법과 재료 등은 절대 변화면 안 되고 옛날 그대로 사용을 하되 디자인과 형태 등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재료와 기법은 절대 손상 되서는 안 되는 것이 철칙이죠. 현대 우리가 하고 있는 나전칠기 기법이 고려 때 이미 하이퀄리티 기술로 완성이 된 것이에요.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벽하게 완성된 기술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거랍니다.”  ▲ 손대현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 나전칠기의 아름다움, 세계로 알렸으면 - 공예를 하면서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은데. “제가 지하 공방에서 작업을 할 때, 그 곳이 수혜를 입어서 힘들었던 때가 생각이 나네요. 그때 그 어려움은 그저 열심히 일하는 걸로 이겨냈죠. 힘들었던 적은 여러 가지 있지만, 그런 어려움 보다는 작품을 하면서 보람을 느낀 적이 더 많기 때문에, 그런 어려운 기억은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지 않아요. 다 상쇄되고 사라지죠.(웃음)” - 그럼 가장 보람됐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1992년 신라호텔에서 초대전을 열었을 당시인데, 어느 날 한 손님이 저를 꼭 만나고 싶다는 가이드의 연락을 받고, 호텔로 갔어요. 70세 정도의 노신사분이 제 작품을 보고, 저에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검(劍)자루에 나전 문양을 해줄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흔쾌히 수락해 작업을 하고 완성해서 보여드렸는데, 너무 기뻐하더라고요. 그분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얼굴이 순간 기쁨으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말 뿌듯했죠. 거기다가 그것을 가보로 계속 내려갈 거라니 더 기뻤어요.” “제가 민종태 선생님 아래서 일을 할 때 한 일본 바이어가 찾아와서 자기네 문양을 가지고 칠을 해달라고 했는데 선생님께서 거절한 적이 있었어요. 직접 디자인한 도안이 아니면 칠하지 않는다고. 결국 선생님께서 디자인한 도안으로 작업을 했고, 제가 칠을 해서 마무리를 하게 됐어요. 완성된 날에 선생님께서 작품을 보여주니, 일본 바이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작품을 받고는 너무 아름답다고 감탄했어요. 받는 사람이 그렇게 정성스럽게 받는 걸 보고, 나도 언젠가 저런 기회가 있을까 싶었는데 그때 신라호텔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어요. 물론 그 분이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일본 바이어처럼 기뻐하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저에게 정말 좋은 기쁨으로 남아있죠.” -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나전칠기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예기술이에요. 물론 다른 훌륭한 공예들도 많이 있지만요. 옻칠은 일본이 더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옻칠과 나전을 접목한 나전칠기는 일본의 옻질장들도 와서 배울 정도로 독보적이거든요. 그런 좋은 나전칠기가 해외에 많이 알려질 기회가 없었어요. 우리 장인들이 스스로 그 부분을 해결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많고, 한계가 있어요. 저의 바람은 해외 유명한 미술관이나 전시공간에서 나전칠기를 전시해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공예를 더 많이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손대현 명장이 직접 심은 옻나무 앞에서 사진촬영에 임하고 있다. [사진=양문숙 기자]
    • 사람들
    • 지난기획
    2014-05-19
  • [한국의 명장] 픽시스 정진석 대표, 보석 상자서 전통 상자 명인 되기까지
    ▲ 정진석 명인, 그 앞에 놓인 상자는 공모전에서 수상한 ‘한옥을 담은 보석함’이다.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옛 전통방식 그대로 고수한 전통 상자는 정말 고풍스럽고 멋있지만, 가내수공업 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구매하기에는 부담되기도 하죠. 제작 공장을 갖춘 우리는 대량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통 상자를 현대화, 대중화해서 더 많은 분들이 전통 상자를 접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현대적, 서구적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현재, 우리 전통 공예를 계승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뒤따른다. 전통 방식을 고수해 공예품을 만들시 비용이 상당할 뿐만 아니라, 전통 공예품을 사용하는 소비층도 과거에 비해 상당량 줄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늘 어려움이 있는 것. 이에 중요한 우리 전통 공예의 계승, 발전을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이 이뤄지고 있지만, 이마저도 현저히 부족하다. 때문에 전통을 지키면서, 경제적 이익을 내기란 녹록치 않다. 하지만 오늘 만날 정진석 명인은 전통을 새로운 측면에서 접근해 전통과 이익 창출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 대부분 먼저 전통 공예를 만들고 그 뒤에 그것을 통해 이익을 내려고 한다면, 정진석은 경제적 이익이 뒷받침 되는 전통을 만드는 식으로 전통에 접근했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 픽시스 개성공장 [사진=픽시스] ▲ 서울 본사 내 전시실 [사진=양문숙 기자] ■ 국내 최초 보석상자 전문 회사 ‘픽시스’ 정진석의 전통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살펴봐야할 것이 그가 운영하고 있는 ‘픽시스’사(社)다. 픽시스는 국내 최초 보석 상자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회사로, 주로 보석 상자와 디스플레이 제품을 디자인, 제조, 판매하고 있다.  “24살에 창업을 해서 30여 년 됐어요. 10대 때 보석 상자를 만드는 길에 들어섰어요. 당시 취직을 해 회사에 다니면서 보석상자를 만들 때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보석 상자를 다른 상품 케이스처럼 주문한데로 만드는데 그치고, 더 이상 발전하기 못 했죠. 당시 인식 자체가 그랬어요. 상자 안에 있는 내용물만 중요하게 생각했지, 그것을 싸고 있는 상자는 단순한 ‘포장’의 개념이었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보석상자나 진열대는 보석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으로, 단순 포장의 개념에서 벗어나 고급스런 보석상자를 만들고 싶었죠. 그래서 어린 나이었지만 스스로 창업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1984년 전문 보석상자와 디스플레이 제작 회사 ‘신라케이스’를 만들었고, 현재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귀부인들이 귀중한 물건들, 보석이나 화장품 등을 담는 상자를 뜻하는 ‘픽시스’로 상호명을 변경해 운영되고 있다. ‘상품’이 아닌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보석상자를 만들고 있다는 픽시스는 현재 서울 본사의 디자인개발연구소와 파주의 고객맞춤제작공장, 그리고 개성공단의 제1공장과 곧 준공될 제2공장을 토대로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 진출에도 앞서고 있다. 또한 파주 공장에 전통공예연구소를 두고, 전통공예를 좀 더 심층적으로 다루려는 노력도 열심이다. ▲ 정진석 [사진=양문숙 기자] ■ 포장명인 정진석이 만드는 전통 상자 여기까지 본다면 정진석을 단순 CEO로 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포장명인’으로 당당히 인정을 받았으며, 전통상자를 만들어 ‘KDB전통공예산업대전’에서 이화문양을 접목시킨 작품으로 입선했고, ‘대한민국 국가상징 디자인공모전’에서 팔각 형태의 ‘한옥을 담은 보석함’으로 한국무역협회 회장상을 수상하는 등 다수의 전시회에서 ‘전통상자’로 수상한 바 있다. 회사의 전체 상품 중 약 90%는 보석상자와 디스플레이 제품이 차지하지만, 그가 절대 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전통 상자다. - 신라케이스 때부터 전통 상자도 같이 다뤄왔나요? “그렇죠. 결혼할 때 사용하는 혼수함이나 패물함 제작을 주로 했어요. 특히 비단을 응용한 케이스를 처음으로 만들었죠. 기존함에는 ‘우단(羽緞)’이라고 해서 비단 보다 질이 좀 떨어지는 재질을 사용했는데, 저희는 색다른 우리만의 전통 케이스를 만들고 싶어서 비단을 활용했었습니다. 우단 보다 가격은 좀 비싸더라도, 저희가 추구하는 고급스러운 함을 만들기에는 적합했죠. 비단에 한국적인 분위기의 상자를 만들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 국내에 고급 보석 상자를 다루는 곳은 없다고 하더라고, 패물함 등 전통 함을 다루는 곳을 여럿 있었을 것 같은데. “많이 있죠. 그런데 완전 전통을 고수해 함을 제작하면 아무래도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듭니다. 나전, 옻 등 고급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이죠. 국가에서 지정한, 정말 전통을 고수하는 분들이 제작한 함은 물론 보기도 좋고, 고급스럽지만, 대중들이 아무나 쉽게 접하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운 부분이 많죠.” “전통을 고수해 함을 만드는 분들의 함은 쉽게 구할 수 없을 만큼 가격도 많이 나갔고, 그 외에 패물함은 사실 허접한 함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희는 그 중간 지점에 자리를 잡은 거죠. 품질이 우수한 전통 함으로 고급스러우면서도 적정한 가격에 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 하지만 전통 상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 “맞아요.(웃음) 제가 제일 아쉬운 것이 이론이 조금 부족하다는 거였어요. 감이나 끼는 가지고 있지만,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지 못 해서 항상 아쉬웠죠. 그래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대학교에서 공예 디자인 분야를 배우고, 올해 3월에 졸업했어요. 디자인의 이론적인 부분을 많이 공부했는데, 더 배우고 싶어 또 전통문화 관련해서 한국문화재단에서 하는 강의를 듣고 있어요. 오늘도 들으러 갑니다.(웃음) 전통과 제품을 연결하는 부분에서 계속해서 이론적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중이에요. 계속 알아야죠. 이론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도 아는 것이 재밌고, 꼭 필요한 것 같아요.” - 전통 상자를 깊이 있게 다루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처음 할 때부터 전통 상자를 다뤘어요. 또 처음부터 보석 상자를 만드는 회사였기 때문에 보석 상자를 만드는 건 당연하지만, 전통적인 부분 또한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었죠. 그러나 우리가 만드는 보석 상자가 인간문화재들이 만드는 과정(길)을 밟아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 분위기를 어떻게 낼까 라는 생각을 갖고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의 전체 매출 중에 전통 상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10% 밖에 되지 않지만, 제가 계속 해야 된다고 생각해야 된다는 부분이라 꾸준히 공부하면서 발전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 정진석 [사진=양문숙 기자] ■ 전통상자의 현대화, 대중화 앞장 - 어떤 전통상자를 만들고 있나요. “우리처럼 만드는 보석함이나 전통함은 없는 것 같아요. 전통을 고수하는 분들이 만드는 상자는 화각이나 나전칠기 상자를 주로 제작해 1백만 원을 호가해요. 1천만 원을 넘는 것도 있고. 그런데 그런 상자를 구매할 수 있는 소비층은 소수라고 생각해요. 전통 분야에 정말 유명한 분들이 만든 고급 상자를 소수만이 갖기 때문에, 우리는 전통 상자를 현대화하고 대중화해서 만들고 있습니다.” “전통을 전문적으로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그분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대량 생산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그로 인해 대중들에게 소비를 보다 쉽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통 상자를 풀고 있습니다.” - 전통상자에는 다양한 소재가 있는데, 주로 사용하는 소재는. “전통적인 모양이지만, 가죽을 입혀 만들고 있어요. 완전 100% 가죽은 가격이 비싸고, 100% 인조 가죽은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진짜 가죽과 인조 가죽을 섞은 소재로 상자에 입혀 만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지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해요. 그래서 ‘한지사랑’이라고 상품등록 및 서비스포 등록도 끝냈습니다.” - 픽시스에서 만드는 전통상자의 가장 큰 장점은 뭘까요. “전통하고 관련된 함과 멋을 가지고 있으면서, 직접 제조 현장까지 갖고 있는 게 가장 큰 이점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 정진석 [사진=양문숙 기자] ■ CEO에서 명장으로 - 회사 대표가 아닌 명인으로 소개되는 소감은. “회사를 운영하면서 명인이 된 것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어요. 회사 전체의 90%는 전통과 관련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요. 하지만 전통 관련 일을 할 때는 분명 좋은 부분이 있어요. 전통상자를 만드는 회사의 대표가 명인인 것에는 분명 이점이 있죠. 제가 명인을 신청하면서 그런 부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외적으로 제 진짜 목적은 제가 만드는 상자가 ‘작품’이라는 애착과 더 깊이가 있는 과정을 접목시켜 발전해나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에요. 아까 얘기했듯이 일부만 공유할 수 있는 전통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전통을 취급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전통을 만들어내고 싶어요.” “항상 어떻게 전통을 접목시킬까 고민을 많이 해요. 더 전통적인 색깔을 내고 싶은데, 대중화를 시키기 위해서는 또 완전 전통을 고수할 수도 없거든요. 그러나 지금까지 온 과정을 보면, 상자 제조 기술과 디자인적 이론을 이용해 아주 재밌게 많은 전통상자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 앞으로는 어떤 전통상자를 만들고 싶으신가요. “전통 상자를 떠오르면 보통 결혼할 때 쓰는 ‘함’만 생각하는데, 과거에는 궁궐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단순한 소품을 넣을 수 있는 상자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꼭 특별한 상자가 아닌, 일반 소품이나 생활용품을 쉽게 담을 수 있는 그런 상자들을 더 만들고 싶어요. 거울 시리즈, 액자 시리즈 등 전통적인 생활용품으로 분야를 넓힐 계획입니다.”  “전통적인 것을 의미있게 생각하고, 깊이 있게 다루려고 항상 고민합니다. 전통 관련 서적들도 많이 보유하고 있어요. 많이 알아야지 진짜 전통 상자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런 것들을 많이 보고, 느끼고, 저에게 스며들면, 제품을 개발할 때 깊이가 나오거든요. 전통을 배우는 것은 앞으로도 제가 해야 할 숙제라 생각해요.”  
    • 사람들
    • 지난기획
    2014-04-25
  • [한국의 명장] ‘데코파쥬’ 이용란 “싫증나고 낡은 것? 새작품으로 승화”
    ▲ 이용란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달력, 잡지, 냅킨, 연하장, 액자, 시계, 가구 등 한 번 저희 집에 들어온 ‘모든 것’은 버리는 게 하나도 없어요. ‘데코파쥬’ 공예를 통해 모두 ‘작품’이 되거든요.” ‘데코파쥬(Decoupage)’, 많이 들어보긴 했지만 정확하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데코파쥬의 어원은 불어로 ‘잘라낸다’, ‘오려내다’라는 뜻이다. 그림을 오려 붙이는 장식기법 혹은 문양 등을 오려붙여 장식한 물건을 의미한다. 데코파쥬는의 역사를 살펴보면 참 재미나다. 동양과 서양을 오갔으며, 사회적으로 하위 계층과 상위 계층을 오갔다. 17세기 동양의 실크로드를 따라 전해진 ‘칠공예’를 유럽에서 그들만의 스타일로 모방하면서 시작됐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가구 장인들이 개발했다고 알려진 데코파쥬는 당시 유행하던 칠기가구를 살 수 없었던 가난한 계층이 가구에 종이를 붙이고 칠을 하면서 보급이 되나간 것. 그 뒤 이 기법은 프랑스 왕실까지 넘어가 왕족에게 사랑받았다. 그렇게 인기를 얻은 데코파쥬는 이후 미국 등으로 건너갔으며, 칠공예를 전수한 동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데코파쥬는 문화센터 등 주위에서 쉽게 배워볼 수 있을 만큼 자리를 잡았다.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순 없지만, 그 인기가 식었다고도 할 수 없다. 데코파쥬는 우리 주위에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꾸준히 ‘취미 공예’로 자리해있다.  우리 주위에 데코파쥬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몇몇 공예인들이 일조한 덕이다. 그 중 이용란은 데코파쥬를 주제로 논문(다양한 소재를 활용한 데코파쥬 디자인의 표현기법에 관한연구)을 발표해 체계를 잡았으며, 대학과 센터 등 강의를 통해 데코파쥬를 알렸다.   취미로 시작한 ‘데코파쥬’에서 어느새 ‘전문가’가 되어 데코파쥬를 주제로 한 논문을 국내 최초로 펴냈으며, 이후 ‘금박장식공예’까지 그 분야를 넓혔다. 이용란의 데코파쥬 이야기를 들어보자.  ▲ (위) 데코파쥬 작품 촛대와 다용도함, (아래) 금박공예 작품 2단꽂이 및 캔디볼 [사진=이용란 제공] ▲ 데코파쥬 작품 콘솔 및 액자 [사진=이용란 제공] ■ 남들에겐 ‘쓰레기’도 이용란에겐 ‘작품’ - 데코파쥬의 기본 작업 과정은 어떻게 됩니까. “색을 칠하고, 오리고, 구상하고 붙여 마감제로 마감하는 것이 기본 4단계에요. 좀 더 깊이있는 작업은 표면을 연출하는 기법입니다. 예를 들어 크랙 느낌이나 가죽무늬, 앤틱무늬 등 그림의 입체 표현 등이 있습니다.” - 데코파쥬에 대해 알아보니 거의 모든 것에 데코파쥬 작업을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맞나요? “움직이지 않는 모든 고체에 가능해요. 나무를 비롯해 도기, 유리, 프라스틱, 수석 등 모든 것에 가능하죠. 또한 일상생활에서 싫증난 물건이나 쪽이 떨어진 물건, 금이간 물건들을 리폼해 새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죠. 데코파쥬만을 위한 재료들이 시중에 다양해 졌지만, 혼자만의 작업인 리폼이 아무래도 매력이 있어요.” - 그림을 직접 그리지 않으니, 손재주가 없거나 공예에 완전 초보자들도 쉽게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정말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공예에요. 초보자라도 색칠하고, 오리고, 붙이고, 칠하는 원칙만 꼼꼼히 따라하면 만족할만한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죠.” “또 그림을 잘 그리는 분이라면, 자신이 만든 그림을 액자 뿐 아니라 모든 용품에 적용할 수 있으니 더 재밌게 할 수 있죠.” - 잡지 한 권을 사더라도 거기서 만들 수 있는 작품이 엄청 나겠네요. “그렇죠. 그래서 저는 잡지 한 권이 우리 집에 들어왔다고 하면 정말 버리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일단은 다 수집하고, 필요한 건 따로 스크랩을 해놔요. 그림이든 문양이든 다 스크랩해서 모으는 습관이 있어요. 잡지 뿐만은 아니에요. 신문이나 달력, 연하장 등 모든 종이류는 다 작품으로 만들 수 있으니 버릴 게 없죠.(웃음)” - 주로 하는 작품은 어떤 건가요? “저는 주로 생활공예 위주의 작품을 하고 있어요. 액자처럼 감상 위주의 작품도 하지만 이왕이면 실생활에 필요로 하는 것들 시계, 거울, 보관기능이 있는 함이나 콘솔 등을 주로 작업해요.” - 작업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뭔가요. “마감 처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주로 종이류를 붙이고 색칠하는 작업이다 보니 표면이 매끈하지가 않아요. 그러나 마감제를 여러번 발라 붙여준 턱을 없애주는 작업을 거치면 매끈한 표면을 표현할 수 있죠. 데코파쥬의 완성도는 이 마감처리를 얼마만큼 깔끔하게 했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하나 꼽자면. “콘솔 작품을 가장 좋아해요. 콘솔은 데코파쥬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유럽스타일이 콘솔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것 같아서 콘솔에 작업하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곳에 콘솔이 나오면 무조건 저희 집으로 가져와요.(웃음) 남들에겐 쓰레기일지 몰라도 저에겐 작품이거든요. 남들이 쓰레기 버리는 곳이 저에겐 보물창고에요.”  ▲ 이용란 [사진=양문숙 기자] ■ 노후대책도 ‘데코파쥬’로 완성 이용란이 데코파쥬를 시작한 것은 30여 년 전이다. 결혼을 계기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취미생활로 지점토공예를 배우게 됐고, 그러다 우연히 데코파쥬를 접하게 됐다. “좋아하는 명화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었는데, 우아하고 앤틱한 작품에 완전히 매료됐어요. 좋아서 하다 보니 정말 힘든 줄도 모르고 여러 작품을 해봤어요.” - 원래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나요? “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데코파쥬는 기존에 있는 그림이나 문양을 이용하기 때문에 무난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선 작업을 즐기면서 하니 작품대상이나 구성, 컷팅, 터치, 덧칠 마감하는 모든 것을 계속해서 반복했죠. 그런 식으로 계속하다 보니 어느새 흔히 말하는 ‘전문가’ 타이틀이 주어져 문화센터에서 수업을 진행하게 됐어요.” -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요즘에는 바빠서 하루 종일 있지는 못 해요. 오전에는 강의나 개인적인 일을 하고, 오후에는 공방에 가서 작업을 계속 하죠. 그런데 작품을 만드는 시간보다는 작품을 구상하는 상념의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아요.” - 30년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요? “데코파쥬 하는 순간은 매 순간이 정말 즐거웠어요. 전시회 일정이 잡히면 밤을 새는 즐거움이 있었고, 제 수업을 들었던 제자들이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보람을 느꼈죠. 힘들거나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한 번도 해본적 없어요.” - 30년간 데코파쥬를 할 수 있던 힘은 어디서 받았나요. “남편이 없었다면 제가 이렇게 편안하게 하지 못 했을 것 같아요. 금전적인 부분에 쪼들려서 살았다면 숍을 차려 작품을 파는데 주안을 뒀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오히려 강의를 통해 데코파쥬와 금박공예를 알리는 데 더 중점을 둘 수 있었죠. 그런 바탕을 만들어 준게 남편이기 때문에 남편에게 참 고마워요.” - 데코파쥬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취미생활로 충분히 좋은 공예라고 생각해요. 소재 조달에 어려움이 없고, 노후에도 손을 놀려 얼마든지 취미생활과 경제활동을 병행할 수 있어서 좋아요. 적극 권해드리고 싶어요.”  - 데코파쥬 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싫증이 나지 않는 것. 명화를 이용해 색상톤을 조절하면 앤틱한 느낌이 주로 나오니 오래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아요. 그리고 설령 싫증이 난다면, 그 위에 다시 데코파쥬를 해 변신을 시킬 수 있죠.” “여러 공예를 접해보았지만, 30년 가까이 데코파쥬를 놓지 않는 이유는 작은 작품하나를 만들더라도 ‘새롭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같은 소재, 같은 그림이라도 만드는 사람마다 그 느낌이 다 다르거든요. 기계로 찍어내는 것이 아닌 ‘손공예’만의 매력인 거죠.” - 데코파쥬하기를 잘 했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인가요. “친구들한테도 항상 듣는 얘기지만, 제가 지금까지도 무언가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게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워요. 데코파쥬를 하면서 바쁘게 살고 있다는 게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죠. 노후대책은 데코파쥬로 했다고 봐요. 나중에 더 나이를 먹고 무료할 때 앉아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노후대책을 했다고 봐요.(웃음)”  ▲ 금박공예 협탁 [사진=이용란 제공] ■ 데코파쥬와 금박이 만났다 이용란은 지난해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선정하는 ‘제1회 한국예술문화명인’으로 선정됐다. 하지만 ‘데코파쥬’ 종목이 아닌 ‘금박장식공예’로 명인이 됐다.  “정말 2013년도는 한국예술문화 금박장식공예에 명인으로 선정되어 너제게 아주 뜻 깊은 한해였어요. 소감을 말하자면, 일단 너무 기뻐요. ‘명인’으로서의 책임감도 느끼고요. ‘명인’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좀 더 연구하고 싶어요. 그래서 금박공예에도 우리 문양을 접목하는 시도를 하고 있고요.” - 명인으로 지정받은 종목은 ‘데코파쥬’가 아닌 ‘금박장식공예’던데 금박공예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순금을 얇게 핀 종이와 같은 금박을 가지고 공예를 하는 공예 입니다. 데코파쥬에서도 금박을 이용한 기법은 이미 다루고 있긴 했지만, 아주 간단하게만 다루고 있었어요. 그러다 우연치않게 2000년 초반에 해외 전시를 나가서 엔틱한 금박공예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공예였죠.”  “문양을 바닥에 찍어서 나타난 문양 위에 금지를 붙여서 하는 작품이었는데, 새로운 금박공예가 눈에 확 들어왔어요.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 기법을 배운 선생님이 일본에 계셔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기법을 전수받았어요. 우리나라에서 ‘금박장식공예’는 제가 선구자라고 자부해요. 선구자로서 연구도 많이 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우리 전통문양을 활용해 작업을 하고 싶어서 계속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 금박공예의 선두자로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데코파쥬 재료는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금박공예 재료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금박’ 자체는 우리나라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그 외에 부수적인 재료들은 어렵죠. 금박공예하는 인구가 늘어나야 재료조달이 용이할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금박공예를 더 많이 알리고 싶어요.” -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더 많은 분들에게 데코파쥬를 알려서 제가 느끼는 이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어요. 회원전이나 단체전은 상황이 주어질 때마다 하고 있고, 개인전은 8년 주기로 개최하고 있습니다.” ▲ 이용란 [사진=양문숙 기자]
    • 사람들
    • 지난기획
    2014-01-24
  • [한국의 명장] 강미자 “본업은 현대적 노리개 제작, 취미는 전통 노리개 수집”
    ▲ 강미자 [사진=양문숙 기자] ▲ 강미자 노리개 작품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전통 노리개를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는 현대적인 디자인을 접목해 평상시에도 쓸 수 있도록 만들어 널리 알리고 싶어요.”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은 꾸미는 것을 참 좋아한다. 우리 조상들도 자신을 치장하는 일을 즐겼다. 노리개는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저고리고름이나 치마허리에 차던 장신구로 궁중 왕가부터 양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성들에게 애용됐다.  노리개는 패물과 매듭, 술로 구성되어 있다. 패물로는 금, 은, 옥 등이 주로 사용되며, 원형, 사각형, 나비·꽃 모양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여성들이 애용하던 노리개가 더 이상 널리 사용되지 못 하고 있다. 전통복식에 착용하던 장신구인 만큼 그 쓰임이 현저하게 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특별한 날, 한복을 갖춰 입을 때 말고는 장롱 깊숙이 어딘가에 잠을 자고 있는 노리개. 강미자 명인은 노리개의 잠을 깨워 특별한 날만이 아닌, 일상 속에서 항시 쓰일 수 있기 위해 노력 중이다. 노리개를 일상으로 들여온 강미자를 만나보자.  ▲ 강미자 [사진=양문숙 기자] ■ ‘실속파’ 공예인 강미자를 만나러 간 곳은 ‘만물시장’ 남대문시장에 위치한 그의 가게였다. 전통만 고집해서 전통 노리개를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는, 현대적인 디자인을 접목시켜 많은 사람들에게 노리개를 알리기 위한 그녀는 조용한 공방이 아닌 왁자지껄한 시장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생산과 판매를 한 자리에서 이루고 있는 그녀를 ‘실속파 공예인’이라 칭하고 싶다.  - 노리개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처음에는 취미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만드는 걸 워낙 좋아했는데, 친구네 언니가 매듭을 하길래 가르쳐달라고 해서 언니께 배우기 시작했죠. 그게 1981년도네요.” - 처음 배울 때부터 곧잘 하셨나요?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배우면 몇 개씩 응용하곤 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나중에는 주위에서 저한테 가르쳐달라고 하더라고요. 소개소개로 매듭을 가르치다가 아예 공방을 차리기도 했죠. 제가 그때 알려준 분들이 지금도 많이 하고 계실거에요.” - 남대문 상가에는 언제부터 자리를 잡으셨나요. “매듭을 배우기 시작하고, 5년여 후에 바로 이곳에 가게를 차렸어요. 아무래도 금전적인 활동을 무시할 수 없어서, 작품 활동에만 매달리지 못 했어요.”  - 가게를 하면서 작품 활동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 “가게에서 잠시라도 짬이 나면 계속 실을 붙잡고 있어요. 힘들 수도 있지만, 재미있으니깐 계속 잡게 되더라고요.”  ▲ 강미자 [사진=양문숙 기자] ▲ 강미자 노리개 [사진=양문숙 기자] ■ 노리개 응용 비법은 ‘전통 노리개 수집’ 강미자는 처음 매듭으로 시작해 점차 노리개를 중점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으며 이후 목걸이, 귀걸이, 핀, 브로치 등 다양한 장신구로 그 영역을 확대해갔다. 여러 분야의 공예품을 다루다 보니, 전통 부문을 ‘응용’하는 데에는 어느 누구보다 자신있다. “정말 전통공예 응용하는 데는 일인자라고 자부할 수 있어요. 우리 전통을 가지고 응용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다양하고 무궁무진 하거든요. 앞으로도 응용할 수 있는 게 천지에요.” - 응용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다니면서, 살면서 보는 모든 것에서 얻어요. 특히 여행을 다니면서 영감을 많이 얻어요. 해외에 나가 그 나라의 특색이 담긴 공예품을 보게 되면, 그것과 우리나라의 특색을 섞은 이국적인 작품이 만들어 지기도 하죠. 예술인으로서 응용할 수 있는 건 정말 무한대에요. 매듭 작품에 금속을 이용해 보기도 했어요.” - 전통을 그대로 전승하는 것 보다 응용을 중점적으로 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현대인들은 노리개를 착용할 일이 거의 없잖아요. 그러니 현대인들도 착용할 수 있게 현대적인 디자인을 접목시켜서 만들고 싶었어요.” “그리고 전통에만 메달리기에는 금전적으로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노리개 하나에 천만원이 넘는 작품도 있어요. 옥이나 다이아몬드 등이 들어가기 때문에 재료값도 무시 못 해요. 작품 활동은 현대적인 노리개를 주로 하고, 전통 노리개는 수집하고 있어요. 본업은 노리개 제작, 취미는 노리개 수집이죠.(웃음) 전통 노리개 모으는 재미도 있고, 보고 있으면 즐거워져요. 또 전통 노리개에서 응용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으니 참 좋아요.” - 전통 노리개는 주로 어디서 수집하나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발품 팔아 수집해요. 아니면 제가 그렇게 수집하는 걸 주위에서 아시고는, 좋은 노리개 있으면 가져오기도 하세요. 그렇게 모은 전통 노리개는 노리개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종종 보여드리는데, 너무나 좋아라하세요. 그러면 저도 너무 기쁘죠. 가끔 팔라고 하는 분들도 많은데, 수집한 노리개는 제가 너무 아끼는 것들이라 웬만해서 팔지 않아요.(웃음)” ▲ 강미자 작품 [사진=양문숙 기자] ■ “노리개는 섬세함이 가장 중요” - 노리개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섬세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실이나 염색 등 기본적인 재료들은 요즘 잘 나와요. 그런 재료들을 가지고 얼마나 더 섬세하게 만드느냐가 가장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 섬세하게 작업하기 위해선, 차분한 성격의 사람이 잘 어울릴까요? “그건 또 아니더라고요.(웃음) 일단 성격보단 기본적인 솜씨와 감각이 있는 사람이 잘 하더라고요. 색깔 배색하는 감각이 있으면 정말 좋아요. 한복도 보면, 아무리 좋은 원단으로 만들어도 색깔 배색을 촌스럽게 하면, 촌스러운 한복이 되거든요. 그만큼 색깔 배색이 참 중요하죠. 정교하게 색깔 배색 잘 하고 세밀하게 하면,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 지금까지 만든 장신구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뭔가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특히 애착이 가는 건 발고리에요. 발고리는 과거 궁에서 많이 사용했는데, 궁에서 쓰이던 전통 발고리에 원석을 사용해 응용한 작품이 있어요. 전통 발고리를 응용해 만든 작품이 거의 없어서 애착이 가요. 그렇게 만든 발고리는 제가 소장하고 싶었는데, 계속해서 구매하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현재는 판 상태에요.” “또 수를 놓은 머리꽂이도 참 좋아해요. 너무 예뻐요. 자수를 이용하니 다양한 모양을 만들 수 있어서 좋아요. 수를 놓은 노리개와 세트로 하면 더 예뻐요.” -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는지. “아침 7시 반쯤 가게에 나와서 매장 정리 좀 하고, 차분히 작업할 마음을 잡고 매듭을 만들기 시작하죠. 오전에는 비교적 한가해 제 작업을 그나마 많이 할 수 있거든요. 오후 들어서 손님이 늘면 응대를 해야 하니 정신없이 바빠요. 그렇게 오후 5시까지는 정말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가죠.” - 계속 작업을 하다보면 시력이 안 좋아지진 않을까 우려가 되던데, 건강에는 이상 없으시죠? “다행히 아직까진 시력이 안 좋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 매듭, 노리개는 그냥 잘 할 수 있는데, 구슬 등 더 섬세한 작업을 할 때는 돋보기를 쓰고 하죠. 사실 매듭은 안 보고도, 감각만으로 할 수 있으니깐 문제없죠.(웃음)” - 노리개를 만들면서 가장 보람됐던 때는 언제인가요. “프랑스에서 전시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프랑스 가니까 이렇게 수작업 공예품을 너무 좋아해주시더라고요. 노리개는 우리 전통복에 어울리는 장신구다보니 외국인들이 착용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래서 외국인들도 좋아할 만한 목걸이, 브로치 등을 선보였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좋아해주는 모습에 정말 뿌듯했죠.” ▲ 강미자 [사진=양문숙 기자] ■ 노리개와 여유를 느끼며… 노리개를 만들고 싶어서, 금전적인 부분을 포기 할 수 없었던 강미자는 북적대는 시장 한복판에 뛰어 들었다. 30여년을 노리개와 함께 치열하게 보낸 그녀는 이제 노리개와 여유롭게 보내길 희망한다. - 매듭에서 시작해 노리개, 브로치 등 많은 분야를 다루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포장’을 좀 색다르게 하고 싶어요. 몇 선생님들이 열심히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전통 포장 분야가 참 취약하거든요.” - 포장이라고 하면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전통 보자기를 응용한 포장이요. 규방공예에서도 보자기를 이용한 포장을 다루긴 하는데, 저는 그거와는 다르게 좀 더 색다른, 전통을 현대화한 포장 방식을 만들어 내고 싶어요.” - 특별히 전통 포장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다면. “판매를 하다가 든 생각이에요. 가게에서 판매를 하다보면 구매한 상품을 포장해주잖아요. 그런데 사실 여기 시장에는 검은 비닐봉지에 주로 담아서 줘요. 아무리 좋은 상품이라도 검정 비닐봉지에 넣어지면 괜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전통기법이 가미된 포장 기법을 만들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아직도 하고 싶은 건 참 많아요.(웃음)” - 꼭 이루고 싶은 최종 꿈은 무엇인가요? “서울 외곽 쪽에 기와 올린 공방하나 차려서 제 작품에만 매진하고 싶어요. 전통차도 만들고, 그동안 만들고 수집했던 노리개도 전시하면서 말이에요.(웃음)”  
    • 사람들
    • 지난기획
    2014-01-08
  • [한국의 명장] 이종열 “설탕공예 원조 영국, 이젠 내가 기법 전수해”
    ▲ 이종열 [사진=양문숙 기자](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설탕공예는 영국에서 시작됐지만, 한국적인 것을 접목시켜 새로운 설탕공예를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이제는 영국 사람도 저에게 배우러 와요.” 설탕공예(슈가크래프트 Sugarcraft)는 설탕가루를 반죽해 색을 넣고 원하는 모양대로 케이크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로 결혼식이나 돌잔치 등 각종 기념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설탕공예는 영국에서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제과제빵의 한 분야로만 명맥을 유지하던 설탕공예를 전문으로 취급해 저변 확대시킨 슈가 크래프터가 있다. 그녀가 바로 이종열이다. 전업주부에서 세계적인 설탕공예가가 된 이종열을 만나 설탕공예 이야기를 듣고 왔다.  ▲ 2004 BSG 골드트로피 수상작 [사진=이종열 제공]■ 책 속에서 ‘운명’을 만나다 전업주부였던 이종열은 1997년 경기대 부설기관에서 서양음식과 제과제빵을 배우다 ‘슈가크래프트’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수업 시간에 우연히 보게 된 슈가크래프트 관련 외국 서적을 통해 말이다. “세상에 이런 케이크가 다 있나, 너무 놀랐어요. 그 책을 보고 관심이 생겼고, 근처에 큰 서점에 가서 관련 서적들을 찾았죠. 그렇게 무작정 책에서 본 케이크를 집에서 따라 만들기 시작했어요.” - 똑같이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원래 손재주가 좋으셨나봐요. “제가 워낙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뜨개질, 지점토도 많이 다뤘고, 기타나 피아노 연주도 곧잘 했죠. 그런 재주들이 설탕공예를 하면서 다시 살아나고 있어요. 모두 다 도움이 되거든요.” - 처음 시작할 당시, 국내에 전문 학원이 없어서 일본에 가서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네. 국내에는 전혀 없었거든요. 일본에 정착하며 배울 수 있는 여건이 안돼서 단기에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들으러 일본에 갔었죠. 영국에서 배워서 일본에서 유명하던 나오미 선생님께 배웠어요. 지금도 가끔 영국에 가면 그 선생님을 뵈어요.”  ▲ 이종열 [사진=양문숙 기자]■ 세계 대회 첫 출전에 3관왕 힘들게 스스로 설탕공예를 배우고 만들어 가던 그녀는 제 실력이 궁금해졌다. 그 무렵 인터넷을 통해 영국에서 케이크 국제대회(CREATIVE WORLD OF SUGAR, 2004)가 열리는 것을 알게 됐고,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심한다. “제 실력이 궁금해 3개 부문에 출전을 해보자고 마음먹었죠. 한 부문에서 입상이라도 한다면 정말 대단할 거라 생각했는데, 상상외로 출전했던 3개 부문에서 모두 상을 받았어요. 축하 케이크 부문 최고상, 국제 부문 은상, 리치 후르츠 케이크에서 동상. 수상하러 세 번을 나가니 다들 엄청난 함성을 보내 주셨는데, 정말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그때 용기를 얻었죠.” - 그 뒤로 많은 것이 달라졌겠네요. “‘하면 되는 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그 뒤로는 교육청에 최초로 설탕공예 부문으로 신청해 합법적으로 아카데미를 설립해 교육도 하고, 제 작품도 만들었죠. 또 대학에서도 강의를 하게 됐어요. 제과제빵과가 있는 학교는 거의 다 가봤던 것 같아요.(웃음)” - 첫 국제 대회 출전, 에피소드가 있다면. “누군가 와서 저보고 직접 만든거냐고 물어보셔서 맞다고 하니까 자꾸 제 옷소매를 붙잡고 전시장 구석으로 끌고 가더라고요. 그러더니 ‘케이크 위에 장미꽃 만드는 방법 좀 알려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장미꽃은 제 이름을 딴 ‘리 로즈’ 기법으로 제가 만든 기법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장미를 만들 때 양면이 다른 꽃을 만들지 못 했지만, ‘리 로즈’는 양면이 다른 색으로 잎을 아무 도구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손으로만 만든 장미였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저에게 기법을 물어보신 분이 그 대회 심사위원이었어요.(웃음)” - 자신의 작품을 처음 선보인 자리기도 했지만, 다른 작품을 처음으로 보는 자리였겠네요.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죠. 정말 기가 막힌 작품들이 참 많았어요. 호주에서 오셔서 웨딩케이크 부문 최고상을 받은 분 작품은 정말 너무너무 섬세해서 대회가 열리는 3일 동안 내내 그 앞에 가서 살펴보고 또 살펴보고, 이리보고 저리보고, 카메라로 확대해서 보기도 했어요. 정말 환상이었죠.” - 그 때 얘기만 해도 얼굴에 웃음꽃이 피네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멋있는 작품 같아요. 그 때 작품 생각에 흥분이 되네요.”  ▲ 이종열 [사진=양문숙 기자] ▲ 특허가방 2008년 호텔림피아 런던 은상 수상 [사진=이종열 제공]■ 특허받은 질감 표현법 “자부심 있어요” 국제대회에서 자신감을 얻은 이종열은 ‘리 장미’와 같은 자신만의 슈가크래프트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한국인 최초로 슈가크래프트 특허를 받기도 했다.  또 이종열만의 슈가크래프트를 배우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그녀는 ‘슈가아뜰리에’ 아카데미를 설립해 교육은 물론 케이크 판매까지 하고 있다. “가죽 질감을 표현하는 것은 제가 처음 개발을 해서 특허도 받았어요. 작년에 영국에서 초청을 받아 은행나무 질감과 가죽표면 질감을 느낄수 있는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어요.” - 원조인 영국에 거꾸로 기법을 전수하러 가게 됐네요. “네. 오히려 영국에서 한국에 와 저에게 배우고 돌아가는 분들도 계세요. 제가 알려드리는 슈가크래프트는 영국과는 또 다르다고 해서 배우러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 그렇게 외국에서 배우러 오는 수강생이 많나요? “외국에서 오는 분들도 꽤 있어요. 지금도 브라질에서 두 분이 오셔서 배우고 있어요. 국제대회 나가서 자꾸 큰 상을 받으니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졌어요.” - 설탕공예를 ‘배웠다’고 하려면 어느 정도 배워야 할까요? “저에게 배우는 분들은 기본 3년 정도는 해야 어느 정도 한다고 할 수 있어요. 연습도 꾸준히 하고, 스스로 새로운 디자인을 연구하면서 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케이크 판매도 하고 있다고. 이렇게 정성스레 만든 케이크가 항상 즐거운 곳으로 가서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주니 기분이 좋을 것 같아요. 어떠신가요. “고객들이 와서 주문을 할 때 마다 맞춤식으로 조금씩 변형이 되어 만들어요. 음악하는 남자친구에게 선물하면 마이크나 악보를 만드는 것 처럼요. 주문한 케이크 받으러 오셔서 너무 좋아해주시면 저도 너무 좋아요. 금전적인걸 떠나서 그렇게 좋아해주는 모습에 보람과 행복을 느껴요.” - 그런데 이렇게 예쁜 케이크를 선물 받으면 아까워서 못 먹을 것 같아요. “그런 에피소드들이 참 많아요. 케이크를 선물 받은 분이 전화가 오셨어요. ‘왜 이렇게 디테일하게 만들어서 칼을 못 대게 만들었냐, 적당히 좀 만들지’라며 ‘아까워서 칼을 못 대겠다. 언제까지 둬도 되냐’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빨리 잘라서 드셔야 또 예쁜 케이크 선물 받으실 수 있다고 빨리 드시라고 했어요.(웃음)” - 영구 보관할 수 있게 만들 수도 있고, 바로 먹을 수 있게 만들 수도 있는 거죠? “네. 모형을 넣어서 만들면 영구 보관할 수 있어요. 영국에는 실제 빵을 넣은 케이크가 115년째 보관 중인 경우도 있어요. 주사기로 내용물을 뽑아 성분검사를 해봤는데, 지금도 먹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 이종열 [사진=양문숙 기자] ▲ 미니어처 케이크 [사진=이종열 제공]■ 이종열, 한국적 케이크로 세계인의 마음 잡아 - 판매와 교육을 하면서 순수 작품에 할애하는 시간은 줄었을 것 같은데. “그래도 틈틈이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해요. 어느 때는 밝을 때 시작해서 어두워지고 다시 밝아질 때까지도 계속할 때가 있어요. 그렇게 몰입이 돼서 하죠.” - 작품에 대한 영감은 어디서 얻나요. “항상 슈가크래프트가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길거리의 광고판이나 간판에서 본 그림들도 어떻게 변형해 케이크를 만들까 생각하게 되요. 그러면 바로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두거나 노트를 꺼내 스케치를 하죠.”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이 저에게 순간순간 다가오는 것이 있어요. 그러니 길거리를 걸어도 그냥 길을 걷는 것이 아니죠, 건물의 질감이나 색, 가로수 등 보이는 질감을 어떻게 케이크로 살릴 수 있을까 수시로 계속해서 연습을 해요.” - 지금까지 만든 케이크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을 꼽자면. “애착이 가는 게 사실 좀 많아요.(웃음) 화관과 정자 등 우리나라 문화를 접목 시킨 작품에 애착이 많이 갑니다.” “설탕공예 즉 슈가크래프트는 서양에서 시작됐지만, 저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문화를 접목시킨 작품을 계속 만들어 내고 싶어요. 외국에서도 한국적인 케이크를 생소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주 좋아해주세요.”  ▲ 이종열 [사진=양문숙 기자]■ 한국 설탕공예 선두자 이종열 - 이렇게 예쁜 케이크에 둘러싸여 있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네.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지만,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저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웃음)” - 설탕공예의 가장 큰 매력은? “만들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시간도 좀 걸리고, 어렵기도 하지만 완성했을 때의 기쁨으로 힘든 건 다 잊어버리게 돼요.” - 최초로 한국예총의 설탕공예 명인이 됐는데, 그 소감이 궁금합니다. “명인 신청하고 가슴을 많이 졸였어요. 욕심으론 되고도 싶고 기대도 되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1차, 2차 합격 될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어요.” “합격 되고는 너무너무 좋았어요. 이루 말할 수가 없죠. 2004년도에 영국에서 상을 받았을 때 ‘아 한국 사람도 열심히 하면 해외에서 이렇게 인정을 받는 구나’라고 생각했고, 국내에서는 이번에 명인으로 지정되면서 인정 받았다고 생각해요. 너무 뿌듯합니다.” -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앞으로도 우리문화를 접목시킨 새로운 것을 계속 연구하고 싶어요. 또 이걸 원하는 분들이 배우러 오시면 열심히 지도해 양성해 나가고 싶습니다.”
    • 사람들
    • 지난기획
    2013-12-26
  • [한국의 명장] 안명자 “전통복식 필수 요소 ‘후수’를 아시나요?”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후수와 망수는 우리 전통공예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아시아권 나라에도 후수와 비슷한 복식문화가 있었지만, 그 중 제대로 보존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에요. 후수를 하는 공예인으로서 참 자랑스럽고 보람도 느낍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후수, 앞으로는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중요민속문화재 제13-3호인 후수(後綬)는 예복을 입을 때 뒤에 달아 늘어뜨린 장식물로 품계를 나타내는 표식 중의 하나다. 1~2품은 금고리, 3~4품은 은고리, 5~9품은 동고리를 달았다. 망수는 후수를 아래서 대는 견직물로 후수와 쌍을 이룬다.  옛 복식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요즘, 후수와 망수는 잊혀진 문화재 중 하나였다. 전통 복식이 점차 사라지며 전통 복식 중에서도 뒷부분에 달려있던 후수는 잊혀져가는 존재가 됐다.  이렇게 쓰러져가던 우리의 후수와 망수를 살려낸 이가 바로 안명자다.  국립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던 그녀는 일에 재미를 느꼈지만, 10년이 지나도 발전이 없는 모습에 회의감이 들었다. 평생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마침 올케가 아는 지인에게 매듭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귀 담아 듣진 않았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 무렵 문득 ‘이게 내가 평생 해야 할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길로 안명자는 후수와 평생을 함께 하게 됐다.  ▲ 안명자 [사진=양문숙 기자] ▲ 복국왕 패옥·패대와 후수·망수 [사진제공=안명자](왼쪽) 패대는 하의 양 옆에 차는 것으로 실로 짠 패대 위에 옥으로 만든 패옥이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찰랑찰랑 '권위의 소리'를 낸다.(오른쪽) 매듭과 같은 것이 후수, 그 아래 받치는 것이 망수다. 망수와 패대는 '천'이 아니라 손수 한땀 한땀 실로 짠 것이다. ■ 운명처럼 끌린 안명자와 후수  안명자는 올케의 소개로 찾아간 공방에서 스승인 이상숙 선생을 만나게 됐다. 그녀와 후수의 첫 만남은 어땠을까.  “사실 그때는 후수와 망수에 정말 문외한이었어요. 선생님께서 짜는 연습을 하라기에 뭔지도 모르고, 어디에 쓰이는 지도 모르고 무조건 짜는 연습을 했죠.(웃음) 명주실도 처음, 염색도 처음이라 실수도 많았어요.” - 그럼 ‘후수’는 언제부터 알게 됐나요? “1987년 쯤 이상숙 선생님께서 장순애 선생님을 소개받았어요. 장 선생께서 필요하다기에 만들어 주었는데, 그 때 왕 예복 뒤에 다는 ‘후수’라는 것을 알게 됐죠.” - 처음 배우실 때, 어땠나요. “알려주시는 대로, 시키는 대로 잘 했어요.(웃음) 한 가닥씩 짤 때마다 문양이 나오는데, 그게 참 재미있었어요. 저랑 잘 맞았던 거죠. 매일 잡고 살았어요. 안 되면 푸르고 다시 해가며 밤늦게까지 작업하는 말이 많았죠.” - 10년간 장 선생과 함께 하다가 독립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 선생님 밑에 있으면서 기능이 많이 늘었어요. 하지만 언제까지 선생님 밑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독립해서 IMF 때문에 힘든 시기라 선생님의 부담도 덜어드리고, 저 스스로 발전하기 위해 98년도에 독립했습니다. 선생님도 환영하고 응원해주셨어요.”  ▲ 안명자 [사진=양문숙 기자] ■ 유일무이 ‘후수’ 이론 체계화 독립한 안명자는 뛰어난 실력에 비해 부족한 이론을 느꼈다. 그 뒤로 후수에 대한 자료를 모으며 본격적인 공부를 했고, 이후 경주대학교 대학원 문화재과를 다녔다. - 경주로 대학원을 다니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별 보며 첫차 타러 나가서 별 보며 집에 들어왔어요.(웃음) 지금 다니라면 못 다니겠지만, 그때는 후수에 대한 논문을 꼭 써야겠다는 생각에 너무 즐겁게 다녔어요.” - 대학원을 다닌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전통복식·면복에 대해서는 저명한 학자들이 훌륭한 저서를 내며 틀을 잡아놨지만, 후수에 대해서는 논문이나 저서가 전혀 없었어요. 우리 후수를 알리기 위해서는 제가 나서서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대학원에 들어가 ‘한국중세후수의 기원과 정착과정’ 논문을 완성했어요.” - 논문을 완성하고, 기분이 어땠나요. “논문 완성하니 너무 뿌듯했죠.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이제야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기분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논문을 쓰고 나니 제작방법에 대해서도 이론화해 체계를 잡아야겠더라고요. 그래야 우리 제자, 후배, 후세들이 계속해서 후수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제작기법에 대한 논문을 준비 중이에요. 내년 봄에야 완성될 것 같아요. 기법을 글로 정리하는 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에요. 너무 무리를 했는지 올 여름에는 대상포진까지 걸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도 여러 교수님께서 도와주시고, ‘꼭 필요한 자료’라며 격려와 응원도 많이 해주셔서 힘을 내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 그 전에는 후수를 이론화한 서적이 전혀 없었나요? “없었어요. 후수는 특히나 유물이 거의 없어서 더 힘든 분야에요. 유명한 사람의 후수가 몇 개 남아있긴 하지만 왕실에서 쓰던 후수는 그 유물이 없거든요. 그나마 문헌이 조금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죠. 흑백 그림만 나온 자료, 그림도 없이 글로만 되어있던 자료를 유희경 박사님(한국복식문화연구원장)의 도움으로 정리해 작업을 해 나갔어요.” - 유 박사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네요.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에요. 저에게 격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후수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렇게 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유 박사님도 전통복식을 하는 분이라 ‘후수’가 필수 요소인데, 하는 사람이 없어서 많이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오히려 고맙다고 했어요. 제자 존경하는 유 박사께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니 더욱 보람됐거든요.”  ▲ 안명자와 그의 제자 김경순 [사진=양문숙 기자] ■ 한 작품에 8개월 소요…인내와 정성의 결과 ‘후수’ 체계가 없던 ‘후수’는 여기저기서 엉망인 모습으로 남아있다. 궁이나 종묘 등에서 전통 행사시 착용하는 복장에 달린 후수가 그렇다.  “5월에 종묘제례를 하면 꼭 가요. 가서 엉망으로 달려있는 후수를 보면 정말 속상해요. 왕에게 왕비 후수를 달아놓기도 하고, 전혀 맞지 않는 색을 사용하기도 하거든요. 거기다가 중국산 싸구려 모조품을 착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더 속상하죠. 이건 아니다 싶어서 저라도 더 꼼꼼히 공부하고 홍보하려고 해요.”  “행사 주체 측에선 한정된 예산안에서 어떻게든 구색을 갖추려다보니 일단은 가장 저렴한 걸 찾아서 했다더라고요. 그런 고충이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두어선 안 되죠. 이제라도 똑바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 면복 필수 요소인 후수는 왜 이렇게 잊혀진 걸까요? “후수와 망수 한 작품을 만드는데 보통 몇 달이 걸려요. 저도 처음엔 7~8개월 정도 걸렸거든요. 금방 만들 수 있지도 않고, 손이 너무 많이 가니까 하려고 달려든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요. 또 전통예복은 한복만큼 자주 입지도 않으니 수요도 없죠. 더군다나 전통예복이 그나마 많이 보이는 사극에서 조차도 뒤에 달려있는 후수는 굳이 달 필요가 없던 거죠.(웃음) 그러니 요즘 사람들이 후수를 모른다는 건 당연해요. 이제라도 많이 알리려고 노력해야죠.” - 한 작품을 만드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네요.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다섯시 반이면 일어나서 헬스장으로 가서 운동을 해요. 운동하고 샤워하고 다시 집에 오면 7시 반 정도. 간단히 식사를 하고, 신문 좀 보다보면 9시죠. 그 때부터 바로 작업을 시작해서 오후 10시, 11시 넘어서까지 하게 돼요. 무슨 일 없으면 그렇게 계속 작업만 하는 거죠.” “가끔 집에 손님이 방문하면 참 좋아요.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가려나’하면서 전전긍긍해요. 빨리 작업이 하고 싶거든요. 같이 수다는 떨어도 마음은 작업대 의자에 앉고 싶어져요.(웃음)” - 후수 작품을 처음 선보였을 때 반응은 어땠나요. “1989년도에 후수 망수 작품을 처음으로 만들어 선보였어요. 그때 사람들이 ‘아 저게 바로 후수‧망수구나’라고 알게 됐죠. 당시 전통공예 부문 교수나 한복하시는 분들도 ‘후수’라는 걸 처음 본 거죠.” - 공모전에 출품도 많이 했나요? “독립한 뒤 10년간은 전승공예대전에 작품을 계속 출품해서 ‘장려상(2회)’, ‘특선(1회)’, ‘입선(3회)’ 등 6번 수상 했어요. 하지만 공모전마다 낼 수 있지는 못 했죠. 워낙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요. 그래서 한 번을 출품하더라도 굵직한 공모전에 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2010년까지 제 작품을 주로 하다 제 뒤를 이을 제자가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때마침 10년간 매듭을 해 온 친구가 후수의 뒤를 이어보겠다며 들어왔죠.” - 제자 분은 잘 따라오시나요? “매듭을 10년간 해서 워낙 매듭을 잘 짜요. 그러다보니 후수도 곧잘 해요. 열심히 하고. 처음으로 나간 전승공예대전에서 바로 특선을 받았어요. 본인이 좋아서 열심히도 하고, 저도 안심이 되죠.(웃음)”  ▲ 안명자 [사진=양문숙 기자] ▲ [사진=양문숙 기자] ■ 후수 명장의 자존심 - 후수가 쓰이는 곳이 한정적이니 경제적으로 힘들 것 같은데. “우리 전통하는 사람들 다 넉넉지 못 하잖아요. 스스로 좋아서 하는 사람들이 많죠. 한복 하는 분들이 의뢰를 해서 후수를 만들기도 하지만 제 값을 다 받진 못 해요. 그분들도 한복 한 벌 팔아서 얼마나 벌겠어요. 한복은 그나마 수요가 있지만, 후수는 후수만의 수요가 없기 때문에 생활을 위해서라도 값을 덜 받고서라도 만들죠. 그래서 제 욕심대로 가격을 부르지 않고, 형편에 맞춰서 받아요. 돈은 못 벌어도 밥은 먹고 살아요.(웃음)” “저도 돈 벌고 싶죠. 손으로 안하고 기계로 빨리빨리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전통을 해야된다는 제 고집이자 자존심이에요. 그 자존심으로 지금까지 해왔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예요.” - 지원 받는 곳은 전혀 없나요? “현재는 지원 받는 곳이 없어요. 서울시에서 사라져가는 전통공예로 지원을 신청해서 지원 받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신청하지만 워낙 후수를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원하면 꼭 받았어요. 그렇게 4~5번 받았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역지사지라고 공예인들의 마음을 제가 다 아는데, 혼자만 그렇게 지원을 받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정말 열심히 하는 실력 있는 공예인들이 많거든요. 못 받은 사람들에게도 고루 혜택이 가야겠단 생각에 그 뒤로 지원 자체를 안 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아무런 지원 없이 자비로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서울시에서도 몇 번 이상 받은 지원자는 제외시키는 걸로 바뀌었더라고요.” - 문화재가 되면 좋을 텐데. “안 그래도 서울시에서 문화보유자 신청하라는 공고가 떴어요. 그런데 제가 그 공고를 너무 늦게 봤어요. 일찍 봤다면 충분히 좋은 자료를 많이 준비했을 텐데 갑작스럽게 준비해서 신청 마지막 날 간신히 접수했어요. 신청서 쓰는데도 정말 논문 한 편 쓰는 것처럼 힘들었어요.(웃음) 그래도 그렇게 까다롭게 하는 것이 맞죠. 평생 영예고 쉽지 않은 타이틀이잖아요.” - 발표는 언제 나나요? “내년쯤 전문위원이 실사를 나온다고 하는데, 정확히 언제 발표가 나는지는 모르겠어요.”  ▲ 안명자 [사진=양문숙 기자] ■ 안명자, 후수를 위해… 잊혀져 가던 우리의 후수를 직접 만들어 내고, 이론화해 체계를 잡았으며, 자신의 뒤를 이을 제자 양성까지 해낸 안명자. 후수를 위해 많은 것을 했지만 앞으로 그녀가 후수를 위해 해나갈 것들이 더욱 기대가 된다.  - 후수에 대한 이야기가 막힘없이 술술 나오네요! “저 원래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거나 발표하면 엄청 떨어요. 우황청심환까지 먹고 해요. 그래도 지금은 후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술술 나오나 봐요.(웃음) 저는 실수할까봐 오히려 말을 아끼는 편이에요. 개인적인 이야기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지만, 후수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하고 싶어요.” - 후수를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을 꼽자면. “서대문에 있는 국립역사박물관이 개원할 때 제가 만든 왕 후수가 유희경 박사님 추천으로 그 곳에서 소장하게 됐어요. 첫 작품이라 저에게도 아주 남달랐죠. 아주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 마지막으로, 후수를 위해 앞으로 또 계획한 것이 있습니까. “개인전을 열고 싶어요. 개인전을 열어야겠다고 계속 생각했는데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어요. 대학원 다닐 때는 수업 듣느라, 졸업하고는 논문 쓰느라 계속 바빴고, 지금은 의뢰 들어온 작품을 해내니라 순수작품 할 시간이 부족하거든요. 그래도 내년이나, 늦어도 2015년에는 개인전을 꼭 열고 싶습니다.”
    • 사람들
    • 지난기획
    2013-12-19
  • [한국의 명장] 강병인 “캘리그래피 시대 올 거라 확신 했어요”
    ▲ 강병인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캘리그래피 회사를 차리고 6개월간 일이 들어오지도 않았고, 몇 년간 힘들게 회사를 유지했지만 한 번도 후회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생각을 한 적은 없었어요. ‘캘리그래피’ 문화가 자리 잡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거든요.” ‘캘리그래피(calligraphy)’는 ‘아름답게 쓰다’라는 어원에 맞게 멋스런 손글씨를 말한다.  무조건 ‘손’으로 쓴 글씨라고 모두 캘리그래피는 아니다. 글자가 갖고 있는 고유의 뜻과 이미지를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해 내어 글자에 감정을 실은 것이어야 진정한 캘리그래피라 할 수 있다. 이미지와 디자인을 중시하는 광고 산업이 사회주요산업으로 발전하면서 캘리그래피도 꽃을 피웠다. 현재 캘리그래피는 어디서든 쉽게 찾을 수 있고, 캘리그래피를 전문으로 하는 캘리그래퍼도 정식 직업군으로 자리를 잡았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캘리그래피 시장에 일찌감치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강병인 캘리그래퍼를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에 위치한 ‘강병인 캘리그라피연구소 술통’에서 만났다.  ▲ 강병인 [사진=양문숙 기자] ■ 캘리그래피 1인자 강병인, 그 시작은? 확신하건데 강병인 캘리그래퍼의 작품을 보지 않은 이는 없다.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때 기울이던 소주병에, 인상의 무료함을 달래는 영화와 TV드라마에, 삶의 길을 찾기 위한 책에 그의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주류 ‘참이슬’, ‘산사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대왕세종’, ‘무자식 상팔자’, ‘착한남자’, 영화 ‘의형제’, 음료 ‘아침햇살’, ‘레몬에이드’ 등 그의 작품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이처럼 강병인은 대한민국 캘리그래피의 1인자이다. ‘우리나라 대표 캘리그래퍼’라는 기자의 말에 강병인은 “아휴.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여전히 그런 말이 여간 쑥스러운 모양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직까진 그에게 붙은 ‘캘리그래피 1인자’라는 수식어를 부정할 수 있는 반박이 없으니.  본격적으로 ‘캘리그래피 1인자’, 강병인 캘리그래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쓰셨나요? “좋아했어요.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으면 시간이 참 잘 갔어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글씨 쓰는 것도 좋아했죠. 어린 시절 제 노트에는 전부 낙서 투성이었죠. 워낙 쓰는 걸 좋아하니까 많이 썼던 것 같아요.” - 부모님 중에 글을 잘 쓰셨던 분이 계셔서 재능이나 환경을 자연스레 접한 건가요? “참 신기하게도, 전혀 그런 건 아니에요. 뭐 동네에 흔히 있는 서예를 잘 쓰는 어르신이 있어서 ‘그 분처럼 돼야겠다’ 이런 것도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 권유로 서예부에 들어가면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고, 선생님께서 칭찬해주시니까 더 열심히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였지만, 서예를 배우며 성숙해지는 느낌을 받아서 좋기도 했고요.” - 스스로도 서예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웃음) 학교 대표로 서예 대회에 나가기도 했으니까요.” - 어렸을 때 한 낙서 중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 것도 있습니까. “어렵게 살다보니 그런 것들을 모아두지 못 했죠. 자연스레 다 없어졌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쯤 친구에게 글씨를 써서 선물한 것이 있었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친구가 보관 중이었다는데, 이사하면서 분실했다고 해요.” ▲ 강병인 [사진=양문숙 기자] ■ 한국에 캘리그래피를 알리다 - 서예와 캘리그래피의 가장 큰 차이는 뭔가요? “서예와 캘리그래피 모두 글을 예술로 표현한다는 범주는 같아요. 쉽게 나누면 서예는 순수예술, 캘리그래피는 상업예술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 서예는 서예가의 철학이나 서풍을 그대로 담아내는 표현하는 장르라면, 캘리그라피는 글에 감성을 담아내어 소통하는 장르에요.” - 서예를 배우다가 캘리그래피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항상 같은 서체로 글을 쓴다는 것이 싫었어요. 이해가 안 됐다고 해야 될까요? 같은 글씨라도 상황이나 감정에 따라 다르게 쓰고 싶었죠.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글은 단순하다며 예술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 했어요. 하지만 제가 본 한글은 조형적으로 참 아름답고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더군다나 이 분야가 상업적으로도 커질 거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 어째서 캘리그래피가 커질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캘리그래피 분야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1990년대 부터에요. 일본을 보면서 분명히 우리나라에도 캘리그래피 문화가 자리 잡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일본은 그 당시부터 글씨를 상업적으로 거래하며 제품 등에 넣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거든요. 같은 동양 문화권인 우리도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던 거죠. 그때부터 계속 하려고 생각을 했었어요.” - 캘리그래퍼로 자리 잡기까지 힘들었을 것 같은데. “네. 본격적으로 캘리그래피 사업을 시작하는 데는 참 힘들었죠. 일단 그 전에 광고회사를 다니다가 그래픽 잡지사를 운영했다가 2년 여 만에 망했거든요. IMF 탓도 있지만, 저의 경영미숙이 잡지사 문을 닫게 했고, 신용불량자가 됐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누가 잡지 만든다고 하면 뜯어 말리고 싶은 심정이에요.(웃음) 그렇게 나름대로 한 번에 도전을 실패로 끝내고, 또 다시 가장의 책임을 잠시 뒤로 한 채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이 가족들에게 미안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아내가 허락해주어서 2002년에 ‘강병인 캘리그래피 술통’을 설립하게 됐습니다.”  ▲ 강병인 [사진=양문숙 기자] ■ 캘리그래피, 꽃을 피우다 - 그렇게 설립하고, 일이 순탄히 풀렸나요? “회사를 차리고 나서 한 6개월 이상은 일이 없었어요. 캘리그래피 문화가 자리 잡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죠. 광고회사에서 조차 디자인은 그 대가를 지불했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대가를 지불한다는 인식이 없어서, 직원들 중 글을 좀 쓴다는 사람이 글을 쓰는 방식으로 진행을 하던 시기거든요. 물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진 않았고요. 그래서 회사를 차리고 2년 정도 후에 아는 지인의 디자인 회사에 다시 취업을 했어요. 수입이 없으니 유지하기가 힘이 들었거든요. 다자인 회사에 다니지만, 제 회사까지 투잡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전제조건으로 다녔었죠.” -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리면서 상업적으로 성공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회사를 열었는데, 일이 잘 안되던 그 몇 년간 후회되거나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확신이 있었거든요. 한글도 예술적으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인정받고 그런 문화가 생길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후회가 되거나 포기하고 싶단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럼 상업적으로 첫 스타트를 끊은 글씨는 무엇입니까. “정확하게 생각나진 않는데, ‘해바라기’라는 글씨일거에요. 아는 지인 분이 교회에 걸 포스터에 들어갈 ‘해바라기’라는 글을 부탁해서 쓰게 됐죠. 아무래도 교회에 걸리는 글이다 보니 ‘해바라기’란 뜻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뜻하기에 그런 분위기와 감정을 담아 글을 쓰게 됐었어요.” - 이제는 주변 곳곳에서 강병인 작가의 작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실생활에서 마주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각이 들어요. 일단은 제 글을 보고 다른 분들이 좋아해주시면 뿌듯하죠. 그래도 아쉬운 마음도 들어요. ‘저 획을 왜 저렇게 썼지’, ‘저게 최선이었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가끔은 제가 보낸 글씨가 디자인과 접목되면서 변형될 때가 있는데, 그 때는 참 안타깝죠.” - 요즘에는 캘리그래퍼들이 많아졌나요? “많아졌어요. 제가 대한민국 최초의 캘리그래퍼가 아니에요. ‘필묵’이란 서예가 단체에서도 저와 같은 시기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캘리그래피 작업을 시작했더라고요. 그 때는 몰랐다가 나중에야 알게 됐죠. 캘리그래피가 자리 잡는 데는 이렇게 여러 사람의 노력이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 캘리그래퍼를 꿈꾸는 지망생들에게 꼭 필요한 자격 요건을 말해준다면. “무슨 분야든지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일단은 좋아해야 합니다. 유망 직업군으로 떠오르고, 돈을 많이 번다고 분야를 선택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돈을 쫒아서 시작하다보면 제대로 할 수 없어요. 열정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거죠.” “또 아까도 말했듯이, 캘리그래피의 전통이 되는 서예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시작을 해야 해요. 서예가 기본이 되지 않고는 좋은 캘리그래퍼가 될 수 없어요. 마지막으로 항상 공부하는 마음으로 시장 상황을 지켜봐야 합니다. 가령 어떤 기업에서 새로운 제품이 출시가 되었다면, 제가 그 제품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어떤 디자인에 어떤 글꼴을 사용했는지 유심히 봐야한다는 거죠. 시장의 흐름을 알아야 그에 맞춘 캘리그래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 강병인 [사진=양문숙 기자] ■ 강병인, 아름다운 글씨를 그리다 - 상업적인 작업 요청이 늘어나면서 순수 작품을 하는 시간은 줄어들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그렇긴 하지만, 전시를 위한 순수 작품들도 될 수 있는 한 많이 하려는 편이에요. 상업적인 작품을 할 때는 아무래도 저의 감정 보다는 많은 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주된 감정을 투영하지만, 순수 작품에는 제가 하고 싶은 실험적인 작업들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 실험적인 시도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대부분의 캘리그래피는 서예 할 때 사용하는 붓을 사용한다면, 순수 작품에서는 그림 그리는 붓을 사용하는 등 쓰는 도구를 변화해보기도 하고, 평면적인 글자에서 입체적인 글자를 만들기 위해 입체작업을 통해 조각으로 만드는 등 이 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들을 하려고 해요. 요즘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입체적인 캘리그래피입니다.” - 글씨를 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캘리그래피는 어째든 서예에 속해요. 글을 예술로 표현한다는 거죠. 감정적으로 글을 표현하되 기본적인 서예의 틀을 깨면 안 됩니다. 캘리그래피로 쓴 글을 보면 ‘그림 같은 글씨’라는 말을 많이 하곤 하는데, 여기에서 완전히 글씨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없는 그림으로만 비춰지면 안 된다는 것이죠. 서예라는 기본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한글을 캘리그래피로 표현하는데 어떤 매력이 있나. “한글은 의미를 가진 상형문자인데, 여기에 한글 창제 원리가 더해지면 더욱 재미있어요. 한글의 모음은 천지인의 원리로 만들어 사람의 형상을 나타내고, 자음은 초성과 중성에 모두 쓰일 수 있으며, 그 형태를 자연이나 사물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꽃’을 쓴다고 한다면 ‘ㄲ’은 꽃망울의 형태로, ‘ㅗ’는 줄기, ‘ㅊ’은 땅 속에 뿌리로 표현할 수 있는 거죠.” “한글은 과학적인 글자이긴 하지만, 그 모양 자체가 하나의 그림이기도 하죠. 지금 여기(강병인 캘리그라피연구소 술통)에도 있는 ‘꽃’이나 ‘봄’과 같이 그 글 자체만으로도 예쁜 모양을 하고 있죠. 여기에 그 느낌을 더 감정적으로 살려 그린다면 재밌고 아름다운 글씨가 됩니다. 더군다나 캘리그래피에서는 그 글의 쓰임새나 제가 그 글자에서 느낀 감정들을 총체적으로 담아내 표현하기 때문에 재밌어요.” - 캘리그래피가 큰 인기를 모으면서 어디든지 캘리그래피를 넣으려는 움직임도 적지 않았다. “그렇죠. 어떻게 보면 캘리그래피가 남발되었다고 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모든 곳에 캘리그래피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캘리그래피는 감성을 담은 글자이기 때문에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곳엔 참 잘 어울리죠.” “예를 들어 ‘된장’, ‘고추장’, ‘김치’ 등 우리 음식을 표기할 때는 캘리그래피가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삼성’ 그룹에서 그룹의 이름을 캘리그래피로 표기한다면, 어색하겠죠? 이 때는 이성을 더 중시하는 글자이기 때문이죠. 이는 책 표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소설 등 감성적으로 쓸 수 있는 도서에는 캘리그래피가,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의학서적이나 과학서적에는 활자체가 어울리는 것이죠. 쉽게 정리하자면, ‘감성’엔 캘리그래피, ‘이성’엔 활자체가 기본적으로 어울립니다.”  ▲ 강병인 [사진=양문숙 기자] - 스스로 어떤 캘리그래퍼라고 소개하고 싶은가요? “와. 참 어려운 소개네요.(웃음)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글을 몰라 힘들어하는 ‘우리 백성’을 위해 만들었다고 했어요.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냥 예삿말이 아니에요. 중국의 ‘한자’를 쓰는데 어려워하는 백성들이 아니라 ‘글’을 몰라 어려워하는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한자를 알고 있던 소위 양반 계층 이상의 백성이 아닌, 그 아래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던 하층민들을 위한다는 말이죠. 민주적인 사고방식이었던 거죠. 제가 세종대왕을 따라갈 순 없겠지만,(웃음) 세종의 한글 창제의 사고를 이어가는 작가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 앞으로 10년 뒤에 강병인 캘리그래퍼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요즘 제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고민이기도 하네요. 아, ‘고민’은 아니네요. 10년 뒤에도 저는 캘리그래피를 계속해서 하고 있을 테니까요. 어쨌든 요즘 제가 스스로 ‘10년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이 생각해 보곤 해요. 이 일을 시작한지도 10년이 넘었거든요. 10년 전에도 저의 10년 뒤를 그려봤었고, 그때 그린 그림이 지금과 얼추 많이 닮아있어요. 10년 전에는 캘리그래피 문화가 자리 잡길 바랐고, 저도 캘리그래퍼로서 자리 잡고 활동하길 바랐거든요. 10년 뒤에는 ‘한글’에 예술적인 면이 더 부각되고 인정받길 바라요. ‘한글’이 문화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을 수 있을 정도로요.” “요즘 들어 참 안타까운 것이 있어요. 영어를 쓸 떼 없이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쓸 떼 없이’라고 말하는 것은 굳이 영어가 아닌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곳에서도 영어를 사용한다는 뜻이에요. 그렇다고 제가 영어 사용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가령 외국인을 초대해 한국에서 행사를 개최한다고 하면, 보통 우리는 행사명을 영어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외국인을 초대했으니 영어가 표기되는 것은 맞죠. 하지만 한글로 표기하고, 그 아래 영어를 써야하는 것이 맞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방송국이나 언론사 등 너무 쉽게 영어를 쓰죠. ‘힐링’이란 단어가 그 예가 될 수 있죠. 우리의 한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한글을 사용하려는 문화가 다시 자리 잡아야 하고, 또 한글에 대한 예술적인 가치가 더 높아졌으면 좋겠어요. 10년 뒤에 저는 한글이 그렇게 되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네요.” ▲ 강병인 [사진=양문숙 기자]
    • 사람들
    • 지난기획
    2013-12-11
  • [한국의 명장] 윤인수 “민화는 왜 문화재가 없는지…이해 안돼”
    ▲ ‘한국의 명장’ 윤인수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우리 고유의 민화는 왜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는지 참 의문이고, 불만입니다.” 민화 화가 윤인수가 날선 비난의 말을 내뱉었다. 실제 한국중요무형문화재에 ‘민화장’은 없다. 민화 화가들이 꾸준히 문화재 신청을 하고 있지만, 계속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중요무형문화재는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만 된다고 하네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민화보다 하는 사람이 더 많은 ‘불화’는 문화재고, ‘민화’는 아니라고 하는 건 형편성에 어긋나지 않나요?”라고 반문한다.  ‘민화(民話)’는 한 마디로 전통 대중그림이다. 정식으로 그림교육을 받지 않은 화가들이 그린 그림으로 서민들의 일상생활공간의 장식을 위해 그려졌다. 민화의 화제는 실로 방대하다. 꽃과 새를 그린 ‘화조도(花鳥圖)’, 장수의 상징을 그려 넣은 ‘십장생도(什長生圖)’, 물고기를 그린 ‘어해도(魚蟹圖)’ 등 어떻게 보면 무엇이든 그 주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 민화다. 작가 미상의 민화들은 세월이 흐르며 그 정체성이 모호해진 것이 사실이다. 확실한 계보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민화’가 다른 공예만큼 인정받지 못 하는 것은 예전부터 계속되어온 ‘이름 없는 설움’의 연장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민화는 확실히 재밌는 그림이다. 그 종류가 방대한 만큼 다양한 그림을 포괄하고 있으며, 우리 조상들의 일상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옛 문화의 고증이 된다. 알면 알수록 재밌는 민화에 대한 이야기를 서울 종로에 위치한 한 공방에서 윤인수 화가에게 듣고 왔다.  ▲ 윤인수 [사진=양문숙 기자] ▲ 윤인수 민화 작품 [사진=윤인수 제공] ■ 친구 따라 강남? 친구 따라 민화! 윤인수 작가는 방황하던 젊은 시절, 친한 동네 친구의 권유로 함께 민화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렇게 민화와 함께 한 세월이 35년이다. 처음 민화를 배우던 시절의 이야기를 물었다. “정말 배고프고 힘들었어요.” “그 당시 저와 함께 민화를 배우는 사내들이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워낙에 밥벌이가 안돼니 힘들어 다들 떠났죠. 그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나이는 어려도 원로급이죠. 지금 민화가 이만큼 성장한 건 그런 몇 사람의 노력 때문이에요.” - 현재 민화 작가의 수는 대략 얼마나 됩니까. “정확히 따질 수는 없겠지만, 10만 명이 넘었다고도 해요. 예전에는 서울에만 국한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민화 화가들이 많아졌거든요. 민화를 살린 제자들의 제자, 또 그 제자의 제자… 이런 식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요새는 전국 어디든 민화 작가가 없는 곳이 없죠.” - 맥이 끊겼던 민화의 확산이 빨리 이루어진 거네요. “네. 다른 동양화나 서양화 보다 민화가 빨리, 또 많이 보급된 이유는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민화 같은 경우는 도안만 만들어주면 바로 그려볼 수 있으니 참 좋죠. 동양화와 서양화는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고요.”  “또 민화가 많이 보급된 것은 사극의 열풍도 한 몫 했어요. 사극 속에 민화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죠. 저도 KBS ‘진품명품’을 비롯해 ‘태왕사신기’ 등에 제 작품을 출연시키고 있습니다.(웃음)” - 민화가 확산되기 이전에는 민화 작가로 활동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35년 간 해온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힘들었죠. 제자들도 그런 질문을 하곤 해요. 그럼 ‘똑똑하지 못 하고 멍청해 계속 한 길만 고집했다’고 농담식으로 답하곤 하죠.(웃음) 진짜 대답은…글쎄요. ‘그냥’ 민화가 좋았어요.” “35년간 배고파도 저를 이해해주고 지금까지 함께 해준 집사람에게 참 고마워요.(웃음)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 옛날엔 정말 힘들었거든요.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도망갔을 텐데 말이죠.(웃음)” - 민화의 매력에 빠졌기 때문이겠죠? 민화의 매력을 꼽자면. “민화는 그 종류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한 번 하다보면 끝이 없어요. 다양한 종류의 민화를 계속해서 그리다가 다시 초기에 그렸던 종류를 그리려고 하면 새로운 느낌이거든요. 그러니 도돌이표처럼 계속해서 답습해나가는 거죠. 종류가 많다는 것이 매력입니다.” - 민화 화가로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전시를 개최하면 제 민화를 본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 ‘너무 좋다’고 해주면 그게 가장 뿌듯하죠. 또 그런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제 제자가 되기도 했고요.(웃음)” - 민화를 그릴 때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통을 답습하는 자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민화가 엉뚱한 길을 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민화의 종류가 워낙 많다 보니, 전통을 제대로 답습하지도 않고 식상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답습을 제대로 채 끝내지도 않고, 중국이나 일본 그림을 모방해서 그리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문제는 그렇게 그린 그림들을 ‘민화’라고 하고 있으니, 참 너무 답답해요. 민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고서는 그 그림을 ‘민화’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문제죠.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 즉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자꾸 새로운 것에 욕심을 내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민화’라고 내보이려면 전통 민화를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 윤인수 [사진=양문숙 기자] ■ 윤인수가 빠진 ‘민화’의 매력, 우리도 빠져볼까요? “민화는 그 분야가 다양해 참 재미있어요. 반추상적인 부분도 많아요. 추상미술의 거장 ‘피카소’ 보다도 훨씬 앞서 추상적인 그림을 그린 것이 우리(우리나라)입니다. 하하. 민화는 정말 하면 할수록 빠져들어요.” 파격발언이 아닐 수 없다. 피카소보다도 우리나라가 먼저 추상기법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니! 그가 계속해서 들려준 민화 이야기는 ‘피카소 발언’만큼이나 퍽 재밌었다. - 동양화와 민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차이는 동양화는 계보가 있고, 민화는 없다는 거죠. 아니, ‘없다’가 아니라 ‘알 수 없다’가 맞겠죠? 계보가 있는 동양화에 경우에는 도장이나 서명으로 작가를 알 수 있지만, 민화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 계보를 알 수가 없는 거죠.” - 작가미상의 작품들을 모두 ‘민화’라고 하는 것이 맞나요? “사실 ‘민화’라는 말은 일제 때에 생긴 말이에요. 우리나라 민예품 수집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예품을 수집하면서 조선의 흔히 있던 그림들을 보고 ‘민화’라고 칭하기 시작하면서 ‘민화’라는 말이 생긴 거죠. 지금도 그에 대한 이런저런 말이 많아요. ‘왜 일본 사람이 지어놓은 말을 지금까지 써야하냐’고. ‘겨례화’, ‘민속화’ 등 ‘민화’를 표현할 다른 말은 많지만, 그래도 이미 ‘민화’라는 말이 보편화됐고, 또 잘 어울리기도 해요.” “작가미상의 작품을 ‘민화’라고 부르지만, 그보다는 우리 전통 서민들의 민예적인 그림을 민화라고 칭합니다.” - 민화는 어떻게 생겨났나요?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들의 그림을 전시하면, 일반 뜨내기 화가들이 몰려와 그 그림을 보고 베껴서 그린 것이 ‘민화’에요. 그렇게 베낀 그림을 누군가가 또 베끼고, 베끼며 전국으로 퍼져나갔었죠. 모방이 계속되다 보니 같은 구도라도 색이 달라지거나, 도안 자체가 조금씩 달라지거나 했겠죠? 그런 민화들을 보고 있으면 참 재밌어요.(웃음)” - 그렇게 끊임없이 모방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 당시 병풍은 필수품이었어요. 제사를 지낼 때 꼭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 병풍에 그림을 걸어야 하니, 민화가 보급될 수 밖에 없었죠.” “병풍과 관련된 민화의 이야기도 재밌어요. 병풍은 꼭 있어야 되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종이만 붙여진 병풍을 쓰기도 했데요. 그림을 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죠. 반면에 부유한 집에서는 병풍에 화려하고 다양한 채색의 그림을 붙였고요.” “또 병풍에 그림이 훼손되거나 지겨워지면 다른 그림으로 바꾸는데, 그림을 띄었다가 다시 붙이기 힘드니 그냥 있던 그림 위에 그림을 덧붙인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니 병풍 하나에도 우리 민화를 몇 작품이나 발견할 수 있기도 했죠. 어쩔 때는 숨어있는 민화가 더 멋있는 경우도 있고요.(웃음)” - 과거에는 민화 없는 집이 없었겠네요. “그렇죠. 참 우리 조상들은 그림을 좋아했어요. 예술적인 기질이 다 있었던 거죠. 옛날에는 정말 많았는데, 지금은 다 사라졌어요. 구하기도 힘들고.”  ▲ 윤인수 민화 작품 [사진=윤인수 제공] ■ 그 많던 민화는 누가 다 가져갔을까 “지금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귀한 민화들을 쉽게 찾을 수가 없어요. 일본 침략과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민화에 대한 예술적 인식이 없어졌기 때문이죠. 민화 작품과 엿 가락을 바꿀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약탈해간 작품들도 많고요. 그래서 좋은 민화 작품들은 오히려 해외에 많아요.” - 우리나라 민화 중 가장 명작은 어디에 있나요? “그래도 다행히 삼성미술관에 훌륭한 민화 작품이 많이 있습니다. 삼성에서 해외에 나가있던 우리 그림들을 다시 많이 가지고 들어 왔어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돈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우리의 훌륭한 작품들을 한 데 모았으니까요.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훌륭한 민화들이 해외에 많이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 민화, 앞으로도 영원히 - 앞으로 민화는 어떻게 나아갈까요? “민화의 쓰임새가 참 많아요. 가방에도, 옷에도, 가구에도 민화를 많이 넣거든요. 민화와 디자인을 접목시킬 방향이 충분히 많다는 뜻이죠. 저는 전통이 있는 다음에 현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전통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접목 시킨다면 새로운 민화가 탄생되고, 우리 전통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그런 디자인을 접목한 민화가 많이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공모전을 통해 더 많이 민화를 알리고 싶어요. 서울에 있는 민화협회에서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수상자는 ‘도화서’에 화원으로 지정을 해줘요. ‘도화서’는 예전 조선시대 처럼 실력있는 화가를 선발해 제대로 민화 화가를 길러내기 위한 곳이에요. 공모전을 통해 매년 대상을 수상한 한 사람을 화원으로 뽑는 형식입니다. 지금까지 6명의 화원이 있어요. 그런데 1년에 한 명은 너무 적은 것 같아 최우수까지, 총 2명을 화원으로 지정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아직 협회와 더 상의해야할 문제지만요.(웃음)” - 민화 화가로서 꿈이 있다면. “죽을 때 까지 민화를 그리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나라에 꼭 민화 전문학과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물론 중요무형문화재도 지정되길 바라고요!” ▲ 윤인수 [사진=양문숙 기자]
    • 사람들
    • 지난기획
    2013-12-04
  • [한국의 명장] 임영주 “전통문양, 한 분야로 정립한 것 자부”
    ▲ 임영주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문양이란 한 분야를 만들었다고 자부해요. 제가 문양을 연구하고 나서야 문양의 역사를 다룬 ‘문양사’가 정립됐으니까요.” 한국무형문화예술교류협회 임영주 이사장은 한국전통공예와의 운명을 타고났다. 살아있는 문화재라 불리던 고고미술가 임천(林泉/1908~1965)의 아들로 태어나 말 그대로 문화재 속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개성 태생의 임영주는 3살 때 서울에 와 국립박물관에 근무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박물관 관사에서 생활했다. 당시 이전이 많았던 박물관은 경복궁, 남산, 덕수궁 내에 자리 잡고 있어 임영주와 문화재의 인연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아버지 덕에 주요 문화재들 사이에서 지내다보니 관심이 저절로 생겼죠.” 아버지 덕에 아버지 뒤를 이어 ‘살아있는 문화재’가 어색하지 않은 임영주를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한국무형문화예술교류협회 사무실을 찾아 만나고 왔다.   ▲ 임영주 [사진=양문숙 기자] ■ 문화 특혜 받고 자란 임영주를 사로 잡은 ‘문양’ 불국사 대웅전을 비롯해 수원 팔달문, 경복궁, 보신각, 남한산성 등 국보급 건축물 보수 및 중수공사를 도맡아 했던 임영주의 아버지 임철 선생은 단청(丹靑)에도 조예가 깊었다. 단청은 목조 건물의 여러 가지 문양과 색으로 장식한 것을 말한다. 임영주는 그런 아버지의 재능을 꼭 이어 받아 단청, 그 중에서도 아무도 깊게 파고 든 적 없는 ‘문양’을 심도 깊게 다뤘다.  홍익대학교 재학시절 목칠공예를 전공한 임영주는 이후 조선호텔 디자이너로 취업했다. 디자인 업무는 물론, 당시 고소득군이었던 은행원보다도 3배가량 높은 월급을 받았으니, 그에게는 아주 만족스런 직업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조선호텔에 다닌지 1년 여 지났을 무렵 박물관 측에서 강진고려청자 발굴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그 길로 임영주는 국립박물관에 들어가게 됐다.  박물관에 들어간 임영주는 왜 하필 아무도 심도 있게 연구하지 않았던 ‘문양’을 연구했을까? “처음 박물관 들어가서 제 전공분야인 공예를 연구하려고 열심히 했어요. 박물관에 있는 공예품들 다 조사하고, 글로 남기는 작업을 했어요. 또 도자기 발굴 작업에 많이 참여했어요. 발굴을 하고 나면 문양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요. 문양은 시대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시대 편년을 맞출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죠.” - 문양 연구는 어떻게 이뤄졌습니까. “일단 도자 문양을 계속해서 수집했어요. 그렇게 모은 도자 문양만 만장이 넘었죠. 그 뒤로는 박물관 안에 있는 모든 공예품의 문양을 조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렇게 공예품에 있는 문양들의 실측을 모은 것도 수 만장이 넘었어요. 그 뒤로는 전국을 돌며 문양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량을 다 합치면 용달차 1대는 거뜬히 실었을 거예요.” - 그렇게 모은 자료, 어떻게 쓰였습니까. “도자문양을 수집할 때 김수근 선생께서 박물관에 놀러오셨다가 제가 수집한 자료를 보고는 깜짝 놀라시며 책으로 내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펴낸 것이 ‘고려청자편 문양집’이었어요. 그 뒤로 ‘조선백자편 문양집’도 내고.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라 전부 일일이 그리고 다듬어서 펴낸 거라 5~6년에 걸린 작업을 했었죠.“ “그 후에 ‘한국문양사’라는 책을 썼어요. 꼬박 10년이 걸렸습니다. 방대하고 희귀한 자료에 처음에는 큰 출판사에서 욕심을 냈지만 잘 안됐어요. 그렇게 출판사 찾는 데만 2~3년 걸렸어요. 자료가 하도 광범위하다보니 출판사에서도 굉장히 어렵게 작업을 했죠. 출판사에서 편집진을 아예 새로 뽑아서 이 작업에만 몰두했을 정도니까요. 분량이 너무 많아지니깐 조선시대 문양은 넣지도 못 했어요. 나중에 펴내기로 했는데, 그게 또 잘 안되더라고요.(웃음)” - 그 전에는 문양을 연구하는 사람이 없었나요?  “없었어요. 저 이후에도 거의 없어요. 제가 박물관에 있을 때 미술과 직원이 7~8명 정도였는데 각자 불상, 도자기 등 분야을 선택해 연구를 했는데, 제가 택한 문양은 어떤 장르에도 속해있지 않았어요. 제가 문양을 연구한 뒤로 ‘문양사’가 처음 생겼어요. 홍대, 숙대, 명지대, 단국대 등 몇 군데 대학에 문양사 수업이 생기면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생겨났죠.”  ▲ 임영주 [사진=양문숙 기자] ■ 문화재 전문위원이 되다  박물관에 있으면서 문양사를 정립한 임영주는 본격적으로 문양사를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교수를 위해 박물관을 나온 임영주. 그러나 그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 많았다. 이번에는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고, 그렇게 그는 전문위원이 됐다.  박물관장, 교수, 학예관, 전문위원 등 다양한 직함을 지닌 임영주가 지금에와서 돌이켜볼 때 가장 즐거웠던 때로 꼽은 것이 바로 문화재관리국 전문위원 당시였다.  “문화재관리국에 잠시만 있다가 교수를 하려고 했는데, 막상 일하다보니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문화재관리국에서는 건축물을 담당했어요. 단청을 전공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죠. 우리 아버지께서 끊어지던 단청의 맥을 이어서 하시면서 책도 많이 내셨거든요. 그러니 저도 어려서부터 아버지 밑에서 많이 봐왔고, 단청에 대해 좀 아니깐 단청을 맡을 사람이 저뿐이었던 거죠. 그렇게 단청 전문가가 되어 전국에 있는 단청을 다 손보러 다녔어요. 건축문화재 지정도 하고, 보존 공사 등을 지휘하며 다녔죠.” - 우리 단청의 유래는 언제부터인지. “단청의 기원은 고구려 벽화라고 볼 수도 있어요. ‘단청’은 삼국시대부터 발달했고요. 주변에 중국이나 일본이랑 비교해도 우리나라가 일찍 발달했어요. 지리, 환경 등 모든 면에서 봤을 때 중국은 문화변동이 너무 크다보니 종교도 다양할 뿐 아니라, 지역적인 문화의 특성도 달라서 오히려 단청이 퇴보했어요. 특징이 있다고 하더라고 한국 만큼 뚜렷하지가 않아요. 우리나라 단청은 줄곧 시대마다 발전을 해왔어요.” - 단청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와 쇠퇴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불교가 왕성할 때 단청도 활발했습니다. 그러다 조선시대 유교가 자리 잡으면서 쇠퇴했죠.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수준 높은 그림문화가 단절되었던 겁니다. 그랬던 것이 조선 후기에 몇몇 사찰에서 간신히 살아나긴 했어요. 그렇지만 훌륭한 단청에서 변천이 된 거예요. 더군다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 취향에 맞는 건축문화가 들어오면서 많이 변질되기도 했고요.” - 우리나라 문화재 중 특히 아름다운 단청을 볼 수 있는 문화재를 꼽자면. “많아요. 우리나라 고건축에서 가장 고격하게 남아있는 것이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무위사의 벽화, 화엄사 등 몇몇 고려풍의 단청이 남아있는 곳을 꼽을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단청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수덕사 대웅전입니다. 수덕사 대웅전은 보수를 하면서 속 안에서 찾아낸 단청이 있는데, 아주 수준 높은 단청을 엿볼 수 있어요. 무의사 벽화는 고려시대 아주 좋은 채색을 볼 수 있어요. 요즘 보는 문화재 채색하고는 급이 다를 아주 고격한 채색과 문양을 볼 수 있습니다.”  ▲ 임영주 [사진=양문숙 기자] ■ 한국무형문화예술교류협회 현재 임영주는 한국무형문화예술교류협회의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사실 이 협회는 임영주의 주도아래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 2008년 세계 최초로 열린 세계무형문화재엑스포를 준비하던 임영주는 우리나라 무형문화재의 문제를 직시하게 된다. “현재 문화재 제도가 2개가 있어요. 문화재청에서 지정하는 중요무형문화재와 각 시도에서 지정하는 시‧도 무형문화재. 엑스포를 준비하면서 제도가 다른 문화재 간에 갈등이 있더라고요. 사실 실력만 본다면 백지 한 장 차이로 모두 그 실력들이 뛰어나지만, 중요무형문화재에만 혜택이 많았던 거죠. 중요무형문화재는 지원도 받고, 그들만의 협회도 탄탄하게 있는 반면 시도무형문화재는 지원도 없고, 협회도 없었죠.”  “그러던 중에 몇 년간 전국의 무형문화재를 아우르는 협회를 설립하려던 분들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 때를 계기로 협회 설립을 위해 노력한 것이죠.” - 협회 설립, 무엇이 어려웠나요? “몇 년간 협회 설립을 위해 찾아갔던 곳이 문화재청이었어요. 저도 부탁을 받고는 문화재청에 찾아갔죠. 그런데 사실 문화재청은 이미 중요무형문화재를 지정해 지원‧관리하고 있으니 새로운 협회를 설립해 지원해 주는 것이 어려웠던 거죠. 그래서 외교통상부와 문화체육관광부로 시선을 돌렸고,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협회를 설립하게 됐습니다.” - 협회 운영은 힘든 것이 없는지. “협회를 유지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에요. 지방문화재들이 다 흩어져 있기 때문에 친목회 정도로는 유지가 쉬운데, 함께 일을 꾸리기에는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협회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이렇다할 성과를 내진 못 했지만, 협회로써 마땅히 인정받을 일들을 해서 지원도 많이 받고 싶어요.” - 한국전통문화예술교류협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세계 공예가협회에 가입하고 싶어요. 현재 세계 공예가 협회에 우리나라만 빠져있거든요. 협회에 가입하게 되면 매년 회원국을 돌면서 전시를 개최할 수 있어요. 그 전에도 협회에서 우리나라에 초청 공문을 받았는데, 엉뚱한 곳으로 그 공문이 갔고, 현대 공예하는 사람들이 끼면서 허가를 받지 못 했거든요. 저도 그 사실을 알고 현대공예와 전통공예를 합치려고 노력했으나, 잘 안됐어요. 이제는 한국전통문화예술교류협회로 세계 공예가협회에 가입하려 합니다.” ▲ 임영주 [사진=양문숙 기자]
    • 사람들
    • 지난기획
    2013-11-27
  • [한국의 명장] 최병인 “저승길 안내 ‘꼭두’, 체험 통해 알리고파”
    ▲ 최병인 꼭두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꼭두? 생소하다.  어렴풋이 머릿속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꼭두의 모습이 떠오르더라도 대충 나무인형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꼭두 명장을 만나기 전에 ‘꼭두’를 알 필요가 있다. ‘꼭두’는 우리 전통 장례에 망자를 운구하는 상여를 장식하는 나무 조각상이다. 꼭두로 상여를 장식하는 것은 죽은 망자가 저승길을 편히 또 정확히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주로 사람과 동물 형상을 띈 꼭두로 그 종류가 나뉜다. 전통적인 장례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요즘, ‘꼭두’는 더더욱 낯설어지고 있다. 그런 꼭두를 옆에 꼭 끼고 살아가는 이가 바로 최병인이다. 과거 ‘목재골목’이라 불릴 정도로 목공소가 즐비했던 거리지만 현재는 많은 목공소가 문을 닫은 서울 중구 을지로에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목공소 ‘한성조각’에서 최병인 명장을 만나고 왔다. 알면 알수록 재밌는 꼭두이야기를 들어보자.  ▲ 최병인 꼭두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저승길, 즐겁게 안내해주는 ‘꼭두’ “만두의 기원을 아시나요?” ‘꼭두’의 유래를 묻자 되돌아온 질문이다. 중국의 제갈공명이 산 사람의 머리 49개를 제사상에 올리던 야만적인 제사 방식에서 ‘사람의 머리’를 대신하기 위해 사람 머리 모양을 빗대어 만두를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꼭두를 만드는 최병인은 이런 만두의 유래를 말하며 ‘꼭두’의 유래도 이와 비슷하다 설명했다. “오래전 생애 망자를 따랐던 하인 등을 함께 묻던 장례문화가 있었잖아요? 만두와 마찬가지로 산 사람을 대신하기 위해 ‘꼭두 상여’를 만든 것이 시작이라 보고 있어요.” - 쉽게 말해 ‘꼭두’는 무엇인가요. “망자의 저승길을 함께 가는 것이 꼭두에요. 저승 가는 길을 안내해주고, 잡귀도 물리쳐주고, 또 즐겁게 갈 수 있도록 재주도 부리고 음악도 들려주는 것이 바로 꼭두입니다.” - 꼭두의 종류는 어떻게 나뉘나요? “꼭두는 사람, 동물, 상상 속 동물, 식물 등 다양하게 나뉘어요. 일단 사람으로 본다면 잡귀를 물리쳐줄 호위무사들, 길을 안내해줄 시종들, 즐겁게 해줄 악사들 등이 있어요. 호위무사들은 용, 해태, 호랑이 등을 타고 있기도 하고, 악사들은 피리 대금 등 악기를 들고 있죠. 대표적인 동물로는 용과 봉황이 있습니다. 용은 잡귀를 물리쳐주고, 봉황은 망자를 하늘로 안내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봐요. 식물로는 종교적인 의미를 담은 연꽃이 있고요.” “무궁무진한 종류로 꼭두를 만들 수 있어요. 꼭두는 그 시대상을 반영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현대식으로 만든 꼭두는 총을 들고 군복을 입고 있는 군인도 있거든요. 현대적인 요소로 얼마든지 혼합해서 만들 수 있는 거죠.” - 꼭두는 언제부터 쓰였습니까. “꼭두의 재료로 쓰이는 나무들은 다른 나무보다 약한 나무를 써서 오래되면 삭아요. 또한 꼭두상여는 장례를 모두 치르고 나서 태우기 때문에, 사실 꼭두의 유래를 정확히 알기는 힘들어요. 현재도 많이 소실되어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는 실정이라 참 아쉬워요. 남아있는 꼭두로만 보자면, 조선시대에 많이 쓰였습니다.” - 상여는 보편적으로 꽃상여(꽃으로 장식한 상여)를 많이 쓰지 않았나요? “꽃보다 꼭두를 만드는 데 시간과 비용이 더 많이 들기 때문에 돈이 있던 지배계층이 주로 꼭두 상여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꼭두들도 지위가 높았던 사람들의 것이고요.” “예외로 공동 상여로 꼭두를 만드는 경우도 있었어요. 마을 단위로 꼭두를 만들어 보관해 놓고, 마을 사람들이 장례를 치를 때 마다 사용하고 다시 보관하는 방식에 공동 꼭두를 만들기도 했었죠. 대신 아무래도 공동 꼭두는 개인 꼭두 보다 화려하진 못 했습니다.”  ▲ 최병인 꼭두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40년 목조각 외길인생 전라남도 영암이 고향인 최병인은 청년기에 이웃집 아저씨의 소개로 서울에 한 공방에 취직을 하게 된 것이 목조각과의 첫 만남이다. 그것이 1974년이었다. 그가 목조각과 함께한 시간이 무려 40년이다.  “학창시절에 그림에 소질이 꽤 있었어요. 그림을 한 번 그리면 누가 옆에서 불러도 전혀 모를 정도로 집중을 하곤 했거든요.(웃음) 나름 예술 쪽이 저랑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시작한 목조각 일이 참 재밌었어요. 조각을 하기 전에 도안을 그리는데, 조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재밌었죠.(웃음)” - 처음 목조각을 배우실 때, 어땠나요? “사실 그때는 ‘공방’이란 개념이 별로 없었어요. 그냥 ‘목조각집’이라 불렸죠. 공방이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수업을 받는 식은 아니었죠. 주로 조각하는 일을 했는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도안을 그리던 분 뒤에서 눈대중으로 배웠죠. 잘 그린 도안들은 복사하면서 그려보기도 했어요.” - 처음 목조각을 배웠을 때와 현재를 비교해본다면. “제가 배우던 70년대는 한창 경제가 살아날 때라서 일자리도 많았고, 사업도 엄청 잘됐어요. 뭐 저는 봉급 받고 일하던 직원이라 휴일과 봉급은 적었지만, 그래도 참 재밌고 행복하게 일했었죠. 그때에 비하면 지금 시장은 정말 많이 죽었죠. 그래도 어려운 시기 견디고 나니 이제는 조금 괜찮아졌어요.” - 40여 년간 한 비결이 무엇인가요? “주위에서도 어떻게 40년 간 했냐고 물어봐요. 오래한다는 건, 그냥 하는 거예요.(웃음) 그냥 하다보니 어느새 40년이 흘렀네요. 지금 공방에 함께 있는 친구도 목조각을 처음 배우던 시절에 만나 40여 년간 같이 조각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약삭빠르지 못 해서 다른 길을 못 가고 있는 거죠.(웃음)” - 그래도 40년간 할 수 있었던 원동력 하나를 꼽자면. “좋아서 했기 때문이죠. 스스로가 좋아하니까 지속할 수 있었던 거죠. 좋아하지 않고 억지로 하라고 하면 아마 하루도 제대로 못 했을 거예요.”  ▲ 최병인 꼭두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알면 알수록, 하면 할수록 재밌는 ‘꼭두’ - 꼭두는 어떻게 만들기 시작했나요? “민속박물관에서 우연히 꼭두 상여를 보게 됐는데, 정말 멋있었어요. 보존 상태도 좋았고요. 특히 그 꼭두가 남달랐던 이유는 저와 같은 전주 최 가(家)가 쓰다가 기증한 상여였기 때문이었어요. 그 때부터 꼭두에 매력에 매료되어 틈나는 대로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어요. 의뢰받아 만드는 목조각과 다르게 꼭두는 순수하게 제가 좋아서 만드는 것이죠.” - 꼭두 하나 만드는데 작업 소요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요? “하나만 가지고 딱 이야기 할 순 없어요. 제가 만들고 싶은 꼭두 여러 개를 틈나는 대로 동시에 만들거든요. 한개씩 작업하는 것이 아니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말할 순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2~3일에 하나씩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 꼭두를 만들 때는 주로 어떤 나무를 사용합니까. “주로 적송과 은행나무를 많이 사용합니다. 건축재료로도 주로 쓰이는 적송은 나무가 아주 부드럽고 칼을 잘 받아요. 또 은행나무도 우리나라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나무라 많이 사용하죠. 그 전에는 피나무를 많이 썼고요.” - 요새는 왜 피나무를 안 쓰나요. “피나무로 바둑판을 만들면 아주 고급 바둑판이 되는데, 예전에 바둑판 만든다고 다 베어서 지금은 거의 없어서, 못 쓰는 거죠.” - 직접 만드신 꼭두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자면. “다 좋아요.(웃음) 천경자 선생이 ‘어떤 작품이던 간에, 다 자기새끼라서 아픔으로 낳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똑같아요. 크기가 작건 크건, 화려하건 그렇지 않건 다 또 같이 애착이 가는 제 새끼들입니다.” - 공예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공예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 텐데, ‘인성’이 가장 중요해요. 나보다는 남 먼저 생각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분들도 간혹 있는 것 같아요. 인성이 좋지 않으면 조각 자체를 잘 할 수가 없어요.(웃음)” - 조각에도 조각가에 인성이 묻어나나요? “그럼요. 옛날 물건들을 재현한 것들이 있는데, 만들다 보면 그 옛날에 이 분이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만들었겠구나가 다 느껴져요. 그리고 칼질을 어떻게 했는지 보더라도 만든 사람의 심정을 알 수 있죠. 정확히는 아니지만 느낌으로 느껴져요. 참 재밌죠?(웃음)”  ▲ 최병인 꼭두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꼭두를 살리자! 전통 분야가 힘들다고 하지만, 그 중 실생활용품이 아닌 장례문화 속 전통공예인 꼭두는 더욱 힘들어하고 있다. 상여를 사용하는 전통 장례문화가 사라지면서 꼭두는 물론 상여도 점점 현대인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다. 전통 장례가 사라져 버린 현재, 꼭두를 살릴 방안은 없을까? - 꼭두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꼭두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전통장례가 사라진 지금은 체험을 통해 꼭두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 고군 벽화에 나오는 인물상이나 기물들을 꼭두로 전부 만들 계획을 갖고 있어요. 그 다음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용으로도 만들 거예요. 학생들과 함께 꼭두로 유물을 만드는 체험을 통해 꼭두도 알리고, 우리 역사 공부도 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꼭두 상여를 만들어서 임사체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옛날 방식 그대로 상여를 들어보기도 하고, 상여 소리도 내보기도 하고. 그런 체험을 통해 꼭두를 알리는 것은 물론 죽음을 체험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도 갖는 거죠. 또 외국인에게는 이러한 체험이 깊은 생각을 나누는 것과 동시에 우리 전통 문화도 알릴 수 있으니, 아주 유익한 체험이 될거라 생각해요. 정말 꼭 해보고 싶어요.” ▲ 최병인 꼭두 명장 [사진=양문숙 기자]
    • 사람들
    • 지난기획
    2013-11-20
  • [한국의 명장] 규방공예 정은자 “삯바느질이냐고요? 종합전통공예입니다”
    ▲ 정은자 [사진=양문숙 기자](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규방공예를 그냥 돈 받고 바느질을 해주는 ‘삯바느질’ 정도로 취급하는 시선으로 볼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규방공예는 매듭, 자수, 염색까지 종합적인 전통공예에요. 우리의 것을 우리 국민이 제대로 인정해줬으면 좋겠어요.” 예와 규범이 중시되던 조선시대에는 남성의 거처인 ‘사랑채’와 여성의 거처인‘안채’로 엄격히 분리되어 생활했다. ‘규방’은 ‘안채’를 이르는 말로, ‘규방공예’는 규방에서 사용했던 가구, 생활용품 등 모든 수공예를 통틀어 ‘규방공예(閨房工藝)’라 한다. 조각보와 장식소품이 대표적이다. 한국적 색을 담은 보자기를 보고 반해 규방공예에 거침없이 뛰어든 규방공예가 정은자는 무형문화재 김계순에게 특수침선을 사사하고,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을 졸업해 현재 갤러리 미르를 운영하는 대표다.  자신의 작품은 물론 제자양성에 힘을 쏟고 있는 그녀를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위치한 갤러리 미르에서 만났다.  ▲ 정은자 [사진=양문숙 기자]■ 규방공예는 예술입니다 - 규방공예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원래 학부는 호텔경영을 전공했어요. 그 뒤 호텔에서 근무를 했는데, 당시 외국인 손님들이 와서 ‘한국의 전통이 담긴 기념품이 뭐가 있느냐’고 자주 물었어요. 그 때만해도 기념품으로 제작되는 전통공예품이 많이 없던 시절이라, 직접 인사동에 찾아가 둘러봤습니다. 그 때 우연하게 보자기 전시를 보게 됐고, 그 전시를 계기로 규방공예를 시작하게 됐어요.” - 어떤 매력에 끌려서 규방공예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까. “보자기 색감이 참 예뻤어요. 화려하기도 하고, 현대적이기도 하고. 항상 봐온 듯한 보자기지만, 자세히 들여다 본 보자기는 정말 아름다웠죠. ‘예술이 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해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 어디에서 어떻게 배웠나요. “저희 때는 공예를 가리치는 문화센터가 없어서 직접 공예를 하시는 선생님을 찾아가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그 수밖에 없었죠. 저를 반하게 한 김계순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 찾아가서 배우고 싶다고 하니 알려주셨습니다.” “선생님 댁에 직접 찾아가 배웠어요. 선생님께서 알려주시다가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자수, 염색 등 분야별로 다른 선생님을 소개시켜주셨어요.” - 막상 배우니 힘들었던 점은 없었습니까. “우리나라 전통공예가 생각보다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에요. 그래서 손도 많이 가고, 1m의 오차도 없어야 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항상 봐오던 공예품인데, 막상 만들려니 만드는 과정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됐죠.(웃음) 공예전공이 아니다보니 대학원은 다시 디자인계열로 배웠습니다.” - 원래 손재주가 좋았나요? “아니요. 선생님께 처음 배울 때 저 말고 4명 정도 같이 배웠는데, 그 중에 제가 제일 못하고, 손재주도 없었어요.(웃음) 그래도 숙제는 정말 잘 해가고, 하라는 대로 열심히 했어요. 선생님께서도 제가 이렇게 끝까지 할지 생각도 못 하셨대요. 손재주가 없어도 정말 열심히 하면 다 할 수 있어요.” - 호텔경영을 전공했는데, 공예를 좀 더 빨리 시작했으면 좋았겠다고 후회한 적 있나요. “많아요.(웃음) 좀 더 일찍 했으면, 훨씬 더 섬세한 작업과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도 배울 게 많거든요. 규방공예는 매듭, 천연염색, 자수 등 해야 할 게 많으니 그것만 쫒아서 하기도 바빠서 새로운 시도를 해볼 시간이 부족하다 느껴집니다. 일찍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죠.”  ▲ 정은자 [사진=양문숙 기자]■ 전통 종합예술, 규방공예 “규방공예는 안채에서 만들어진 모든 생활소품을 말해요. 그러다보니 노리개 하나를 만든다 해도 자수, 매듭 등 종합적인 공예가 들어갑니다. 그러니 다른 공예보다 좀 더 광범위하죠. 그만큼 시간도 많이 들고요.” - 그 중 주로 하는 작업은 무엇입니까. “저는 보자기 작업을 많이 합니다. 조각보라고도 하죠. 조각보는 흔히 ‘자투리의 미학’이라고 해요. 예전에는 의복을 짓고 남은 자투리 원단으로 만들었다면, 요즘에는 멀쩡한 원단을 잘라서 만들죠.(웃음) 제가 주로 하는 작업이 이 조각보 작업입니다.” - 조각보를 만들기 전에 색이나 위치 등 디자인을 먼저 하고 작업을 하나요?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그냥 해요. 기본적인 사용 색상은 골라놓기는 하는데, 그 다음부터 배치 등은 자연스럽게 하죠. 디자인을 미리 해놓고 하면 좋긴 한데, 조각보라는 것이 딱딱 떨어지지가 않아서 의도하는 대로 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러니 이제는 제 속이 가는대로 그냥 편하게 하는 편입니다.” - 작업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정교함이죠. 규방공예는 1m가 틀어지면 형태 자체가 안 나와요. 그러니 정교함이 정말 중요해요.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죠.” - 공예하면서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는지.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계속 해요. 규방공예 뿐만 아니라 전통공예인들이 대부분 다 어려워요. 전통분야에 대한 지원이 있어 작업만 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않으니 작업 외에 스스로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힘들어요. 작업만 할 때는 며칠을 밤을 새도 힘들지 않고 즐거워요.” - 반대로 가장 보람됐던 순간은 꼽자면. “장애가 있는 수강생이 종종 있어요. 그 분들이 전시할 때 가족들이 와서 감사하다고 했을 때, 또 성격이 내성적이거나 까칠했던 분들이 규방공예를 통해 부드러워졌을 때 정말 뿌듯해요. 정서적으로 힘들었던 분들이 치유되는 과정을 보면 참 뿌듯하고 보람됩니다.”  ▲ 정은자 [사진=양문숙 기자]■ 규방공예 저변확대를 위하여 정은자는 규방공예, 보자기, 섬유 작품을 만들고 교육하기 위해 ‘갤러리 미르’를 오픈해 정성을 쏟으며 작품을 만들고,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 지금까지 배출한 제자 수가 1천명 이상이라고. “규방공예를 위해서는 먼저 저변확대가 돼야한다고 생각해요. 지방에서 올라오시는 분들은 ‘지방에는 배울 때가 없어요’라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만큼 아직도 저변확대가 많이 되지 않았다는 소리죠. 수업을 많이 해서 규방공예를 많이 알리고 싶어요.” - 수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요. “초급, 중급, 고급, 연구 과정으로 진행되고, 이 과정이 모두 끝나면 심화 과정이 있습니다. 수강생들과 함께 2년에 한 번은 전시를 꼭 열어요. 배우고 나서 아무것도 안하면 소용이 없잖아요. 계속해서 공예를 해나가라는 취지에서 전시를 열고 있습니다.” - 수강생 연령층은 어떤가요. “예전보다 평균 연령이 많이 낮아졌어요. 예전에는 60~70대 분들이 주를 이뤘다면, 지금은 20대가 많아요. 결혼적령기에 직접 혼수를 위해 배우시는 분들도 있고, 단순한 취미활동을 벗어나서 작가의 개념으로 깊게 배우려는 분들도 늘어났습니다.” - 규방공예 범위가 넓은데, 처음 배울 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분야는 무엇입니까. “보통 제일 처음에 하는 것은 예단보 등 보자기 종류로 시작을 해요. 쉬운 것에서 점점 어려운 것으로 배워갑니다.” - 해외에서 전시를 개최하면 반응은 어떠한지. “이번에 캐나다 수교 50주년 기념으로 전시회를 다녀왔어요. 저희가 기대도 많이 하고, 자비도 많이 들여서 가는 전시였는데, 준비할 때 영사관에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영사관 측에서는 전시를 열어도 하루에 많으면 10명 정도 올 거라고 예상을 했거든요. 그런데 하루에 1백명 넘게 왔어요. 예상보다 10배가 넘는 관람객이 찾아 준거죠. 한 번 오셨던 분들이 지인들 데리고 다시 찾아주신 경우가 많았어요. 마지막 끝나는 날에는 공예품을 다 포장해놨는데도 보여 달라던 분들이 계시고, 반응이 참 좋았어요. 교민들도 우리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며 아주 좋아해주셨어요.”  ▲ 정은자 [사진=양문숙 기자]■ 우리의 조각보를 지켜주세요 - 규방공예의 매력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자신과의 싸움과 반듯한 정신력이라 말하고 싶어요. 반복되는 작업을 계속하게 되는데, 단순해보이지만 잡념을 가지고 하면 바늘이 손에 찔릴 수도 있고, 공예품이 예쁘게 안 나와요. 반복되는 작업을 자신과의 싸움으로 이기며 해내다보면 반듯하고 맑은 정신을 얻을 수 있답니다.” - 규방공예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꿈 보다는 바람이 있어요. 규방공예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아직은 규방공예 분야로 무형문화재 지정도 안 됐고, 대학교에 전문학과도 없어요. 규방공예에 대한 학문이 정립이 되고 체계가 확실하게 잡혀서 무형문화재도 지정되고, 학과도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선 대중들의 인식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규방공예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요. 규방공예를 그냥 돈 받고 하는 ‘삯바느질’ 정도로 취급했죠. 규방공예품을 보고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해외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하면 그제야 되돌아보곤 하죠. 우리의 것을 우리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아직 규방공예 관련 책이 아직 많지 않아요. 일본이 우리의 ‘김치’를 ‘기무치’라며 자기네 거라고 주장하듯 지금 조각보도 똑같이 일본 거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우리 국민조차도 조각보의 원조가 어딘지 모르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규방공예 관련 책을 집필하려 합니다.” ▲ 정은자 [사진=양문숙 기자]
    • 사람들
    • 지난기획
    2013-11-13
  • [한국의 명장] 오정표 “비즈공예 하는 남자, 편견서 ‘반전’으로 승화”
    ▲ 오정표 [사진=양문숙 기자](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남자로서 비즈공예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아무래도 ‘편견’이죠. 하지만 그런 ‘편견’이 오히려 ‘반전’의 계기가 됐어요.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구슬공예’를 기본에 충실한 기법 연구를 통해 작품으로 선보이면 따라할 수 없는 화려함에 한 번 놀라고, 남자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라니까요.(웃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는 한국예술문화의 산업적 가치증대와 한국문화 계승 및 보존을 위해 ‘명인’ 을 선발, 지정했다.  제1회 ‘한국예술문화명인인증’은 총 111명의 명인에게 수여됐다. 오정표 명인은 그 중 ‘구슬공예’로는 최초이자 단독으로 명인이 됐다.  ‘구슬공예’라고 동그란 구슬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오정표의 작품은 ‘구슬’ 형태보단 ‘비즈’의 형태로 ‘비즈공예’로 보는 편이 이해가 빠르겠다. 그렇다고 누구나 쉽게 한 번쯤 도전해 볼만한 비즈공예로 생각해도 또 오산이다. 비즈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자태를 뽐내니 말이다. 한국예총에서 명인으로 지정된 비즈공예는 과연 어떨까? 작품을 만드는 작가이자 비즈공예품을 판매하는 이오클래식, 이오드림의 대표인 오정표 명인을 만나 구슬공예와 그의 공예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왔다.  ▲ 오정표 [사진=양문숙 기자]■ 구슬공예와 비즈공예 - 구슬공예와 비즈공예가 같은 맥락인가요.  “쉽게 설명해 ‘구슬공예’ 분야 안에 ‘비즈공예’가 있다고 봐야해요. 과거에는 진주를 끼는 공예만 구슬공예라고 표현했다면, 현재에는 구슬에 구멍을 뚫은 비즈로 하는 공예도 포함을 시키는 거죠. 일반적으로는 그냥 ‘비즈공예’라고 부르고요.” - 비즈공예가 성황 하던 시작 시기는 언제입니까. “우리나라에 비즈공예가 가장 성황 하던 시점은 IMF시절이에요. 가정을 책임졌던 남성들이 사회에서 무너지다 보니, 대체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었던 시기가 바로 그 시기거든요. 여성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 적은 돈을 들여서 무언갈 만들어 내는 수공예 분야였어요. 그래서 그 당시 일본에서 유행이던 비즈공예가 그대로 우리나라에 흡수가 됐던 것이죠. 일본에서 발행되는 모든 비즈 책자들이 다 교본으로 들어오게 됐고, 그로 인해 일반 여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겁니다.” - 그 당시 구슬공예를 배운 여성들은 주로 어디에서 활동했나요.  “학교 CA나 특별활동에 강의를 하던지, 아니면 창업으로써 공방을 차리기도 했죠. 소자본을 통한 핸드메이드로 가치를 인정받는 시점이었어요. 그래서 구슬공예가 발달을 하게 됐고, 저도 그 시기에 유리를 가공하던 한 사람으로서 더 자연스럽게 이 분야를 접하게 됐습니다.” ▲ 오정표 [사진=양문숙 기자] ■ 크리스털 다루는 남자 오정표 오정표는 1989년도부터 크리스털 가공 업체에서 기술을 배워 스스로 공장을 운영했다. 주로 크리스털, 유리, 수정 등을 컷팅하는 작업을 주로 했다. 그렇게 크리스털을 만지다보니, 비즈공예와의 연결도 자연스러웠다. “그 당시 크리스털을 가공하는데 흙 속에서 보석을 캐는 느낌이었어요. 가공을 마치고 크리스털이 광을 내면 그 기쁨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 크리스털 가공을 하다가 비즈공예를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컷팅을 하고, 남대문 시장에 납품하면서 굉장히 활동적인 삶을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작스럽게 다리에 큰 수술을 하게 됐어요. 굉장히 활달했던 사람이 다리가 다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까 우울증이 걸릴 것 같고, 너무 힘들었죠. 휠체어 생활을 하던 시기여서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어요. 그 때 당시 동호회 중심의 비즈 공예가 성황 되던 시기였습니다. 인터넷에 비즈공예 관련 카페를 보는데 다른 사람들이 한 작품을 보면서 ‘내가 하면 훨씬 잘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주변에 재료를 사다달라고 부탁해서 만들기 시작했죠. 정말 밤을 새면서 만들고, 또 연구했어요. 스스로 기본기를 다지는 시점이었다고 생각해요.” - 어떤 연구를 하셨나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비즈공예를 전파한 일본까지도 비즈공예의 기초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한 마디로 하라는대로 따라하는 수준이었던 거죠. 그래서 제가 그 기초 체계를 스스로 잡았어요.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은 ‘비즈를 낚싯줄에 엮고 줄을 교차하라’고 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비즈를 엮고, 교차하고, 엮고, 교차하고만 반복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러면 정교한 작품을 만들 수 없어요. 낚싯줄을 교차할 때도 오른쪽 줄을 위로 교차하느냐, 아래로 교차하느냐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지거든요. 일정한 방향으로 교차를 시켜야 한다는 그런 간단한 원리조차도 잡혀있지 않았던 거죠.” “또 저는 크리스털 가공부터 했던 사람이니 어떤 원재료를 어떻게 가공해야 이러한 비즈가 나온다는 원리부터 알고 있었으니 더 좋았어요. 그렇게 원재료의 기초부터 공예의 기초까지 체계를 잡았습니다.” - 그렇게 스스로 연구했지만, ‘남자’라는 이유로 비즈공예를 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남자로서 이 일을 하면서 어려운 것은 아무래도 ‘편견’이죠. 하지만 그런 ‘편견’이 오히려 ‘반전’의 계기가 됐어요.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구슬공예’를 기본에 충실한 기법 연구를 통해 화려한 작품으로 선보이면 따라할 수 없는 기법에 한 번 놀라고, 남자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라니까요.(웃음)” - 편견에서 반전으로 바꾼 일화가 있다면. “일본에 강의를 하러 갔는데, 수강생들은 전부 여성이었고 강사인 저만 남자였어요. 더군다나 일본이 구슬공예의 원조인데, 제가 강사로 가니 ‘한국의 남자가 와서 일본에서 교육을 하냐’라며 말이 나올 정도로 선입견이 심했죠. 일본은 교육을 하고 나면 강의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바로 강사에 대한 평가를 합니다. 제 강의가 끝나고 저의 강평도 실시됐어요. 그런데 평가 중에 ‘눈에 안개가 걷힌 기분이었다’는 말이 있었어요. 그 수강생이 말한 ‘안개’란 남자에 대한 편견부터 제가 강의한 비즈공예의 기초 원리를 뜻하는 거죠.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강의를 할 때도 단지 비즈공예를 하는 방법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유리를 가공하고 컷팅하는 것에서부터 어떤 기법을 이용해 얼마큼의 입체를 표현할 것인가 까지 전반적인 내용을 알려주거든요. 그러니 단순하게만 알았던 비즈공예의 깊이를 알게 되는 것이죠.   - 요새는 편견이 많이 사라졌습니까.  “제가 좀 많이 바꾸었죠. ‘남자’라는 편견 외에도 비즈공예와 관련된 교육과 사업 등 ‘비즈공예는 단순한 거야’ 혹은 ‘비즈공예로 교육과 사업은 불가능해’라는 인식들도 없애고 있고요.” - 비즈공예 교육과 사업에 관한 편견은 어떤 방식으로 없애나요? “그런 편견이 생긴 이유를 찾아야 해요. 비즈공예가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일본의 비즈공예를 그냥 그대로 베껴서 따라하기만 급급했기 때문이죠. 그렇게 할 수 있는 카피를 전부 다 해버리고 더 이상 할 게 없으니 비즈공예가 하향세를 타게 되는 거죠. 카피 그 이상으로 발전이 없는 거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바로 디자이너 개인의 능력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처음 비즈공예를 보는 사람은 쉽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비즈공예는 알면 알수록 그 깊이가 아주 깊은 분야입니다. 때문에 디자인으로 얼마든지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어요.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 능력은 비즈공예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죠.” ▲ 오정표 [사진=양문숙 기자] ■ 일본을 앞지른 한국 비즈공예 “저는 비즈공예의 기본 원리부터 디자인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했어요. 처음엔 일본보다 더디게 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저는 정말 자부합니다. 지금 우리의 비즈공예는 일본 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것을요. 세계 시장에서 인정을 받고 있고, 일본에서 들어온 비즈공예를 이제는 거꾸로 제가 일본에 가서 강의를 해주는 것으로 이미 입증한 부분이죠.” - 현재 일본 비즈공예와 오정표의 비즈공예는 어떤 차이가 있나.   “일본은 자기가 만든 핸드메이드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요. 예로 30여 명의 작가들이 저희와 함께 작품을 판매하는 이벤트를 하면 하루 매출액이 10억 정도 돼요. 작품이라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그렇게 매출이 놓은 이유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죠. 이런 기본 개념이 다르니 일본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비즈공예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물론 쉬운 비즈공예도 하지만, 작품으로 내놓는 저만의 비즈공예는 배우지 않고서는 절대 구현해내지 못 할 화려한 비즈공예를 만든 다는 것이죠.”  - 예술성은 우리가 우위지만, 대중성은 일본이 우위겠죠?  “맞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지하철을 타면 비즈공예부터 퀼트공예까지 DIY키트를 한 봉지씩 들고 타는 승객이 많아요. 또 일본에는 DIY 부재료만 살 수 있는 도매상도 엄청나게 크게 자리 잡고 있고요. 이렇게 DIY 문화가 전반적으로 깔려있죠. 편의점에서도 손쉽게 DIY키트를 살 수 있을 정도니까요. DIY 문화가 깔려있으니, 비즈공예도 대중화가 될 수밖에 없죠. 우리나라는 한 분야에 빤짝 붐이 일어나면 확 인기 있다가 사라지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십자수가 붐을 일으켰다가 시들해지는 것 처럼요. 하지만 정말 기술력 만큼은 자부합니다.”  - 일본에 자주 왕래를 하나요.  “네. 강의도 많이 나가고, 수출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타 기업과 거래를 안 하고 저희가 아예 일본지사를 만들었어요. 오사카, 동경, 후쿠오카에 지사를 만들어서 더 본격적으로 일본 시장을 공략할 계획입니다.   - 다른 나라의 비즈공예 수준은 어느 정도 인가요?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손이 커서 이런 섬세한 작업을 정말 못 해요. 그리고 장시간 앉아서 진득하니 하는 성향이 아니라서 동양의 작품을 선보이면 ‘이걸 어떻게 손으로 만들었냐’며 깜짝 놀라요. 때문에 서양인들은 주로 단순한 비즈공예를 하죠. 서양 시장에 접근하려면 손으로 이런 작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공예로 다가가면 됩니다. 너무 어려운 걸 보여주면, 굳이 하려고 하지도 않아요.(웃음) 물론 서양에도 세밀한 비즈공예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양만큼 대중적이진 않죠.” ▲ 오정표 [사진=양문숙 기자]   ■ 두리안과 같은 비즈공예만의 매력  - 주로 만드는 비즈공예는 무엇인가요.  “두 가지로 나뉘는 데요. 일단 비즈 패션쇼나 주얼리 페어 등에 출품하는 저의 개인적인 작품 위주의 비즈공예와 또 하나는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비즈공예에요. 앞으로는 일본처럼 비즈공예 시장이 커질 것을 예측하고, 비즈공예 하나를 만들기 위한 모든 것이 담겨있는 패키지를 판매하고 있어요. 디자인 도안부터 만드는 법, 필요한 재료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정식 디자인 등록되어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 총 95개의 키트를 만들었습니다.” - 개인적인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저의 작품에는 다 스토리가 있어요. ‘마지막 사랑의 하트’, ‘여덟 가지 사랑 이야기’, ‘가을의 전설’ 등 그 당시 시대와 문화를 대변하는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제 혼을 담아 만들죠.  제가 그렇게 만든 작품을 제자들에게 알려줘 제자들이 그대로 만들고 나면, 저의 감성까지도 그대로 느끼더라고요. 참 신기해요.(웃음)” - 작품에 담긴 스토리 영감은 어디서 받습니까. “저의 이야기를 담아요. 저의 스토리를 모르고 보시는 분들은 그냥 작품명이겠거니 하시죠.(웃음) 제가 정말 가슴 깊이 사랑을 했는데, 가슴이 너무 아프고 더 이상의 사랑이 없을 것 같은 마지막 사랑이라 느낀 적이 있어요. 그 감정을 살린 작품이 ‘마지막 사랑’이었죠. 그런데 마지막이라 여겼던 사랑이 또 돌아오더라고요.(웃음)” - 가장 최근의 작품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나요. “완성은 했지만 아직 공개는 안 된 ‘홍콩 거북이’라는 작품이에요. 전시 때문에 홍콩에 갔을 때 혼자 야경을 보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거예요. 그 모습을 스케치해서 그 때 그 느낌을 담아 홍콩을 기리는 작품으로 만든 것이죠.” - 비즈공예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두리안’이라는 열매를 아시나요? 두리안은 냄새는 역하지만 그 역한 냄새를 참고 한 입 딱 베어 물면 정말 천상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과일이에요. 저의 작품은 만드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굉장히 어려워요. 정말 배우시는 분들이 막 욕을 할 정도에요(웃음). 그런데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해서 완성을 하면 그 감동이 닭살이 돋을 정도로 감동이 밀려옵니다. 과정은 어렵지만 그 과정을 참고 완정하면 정말 최고의 전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비즈공예의 매력입니다.” ▲ 오정표 [사진=양문숙 기자] ■ 공예사랑으로 이룬 한국공예사랑협회와 이오드림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여성들이 공예분야로 많이 진출하면서 여러 가지 협회가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어요. 하지만 진정 공예를 위해서는 이렇게 체계 없는 협회 설립은 더 이상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로 지방자치단체에서 인가를 받은 협회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던 오정표는 문화체육관광부를 찾아갔다. 공예의 높은 가치를 알고 있던 그는 자신이 만든 작품을 보여주고, 일본에서의 활동, 앞으로 공예의 문화가치와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 등을 제시하며 전국적인 협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렇게 2006년 ‘한국공예사랑협회’가 정식 출범하게 됐으며, 오정표는 초대 회장을 맡게 된다. - 초대 회장으로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문체부에서 승인을 받을 때부터 지원은 일체 받지 않겠다고 했고, 협회의 다른 임원들에게 돈을 걷지도 않았어요. 지원을 받지 않아도 협회 자체적으로 수입을 내는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계획했거든요. 지금까지 지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현재 협회에 6천명의 회원이 활동한 다는 것은 다시 보면 공예만으로도 밥벌이가 된 다는 거예요. 공예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증명해보이고 있는 협회라고 자부합니다.” “그렇게 초대회장으로서 시스템의 초석을 만들어 놓고 4년째 되던 해에 회장직을 물려주고 2011년도에 주식회사 이오드림을 설립했습니다.” - 초대 회장직을 내려두고 이오드림을 설립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협회를 만들어 공예로 수입을 내는 시스템을 만들었으면, 그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게 뿌리를 내리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공예별로 독립적인 노력이 필요하죠.” “이오드림은 저의 재능을 기부하고 싶기도 했고, 사회적 기업으로 공예 문화를 나누고 싶기도 해서 설립을 했어요. 저는 다친 다리로 인해 장애인 1급입니다. 지금 여기 사무실 공방에서 비즈공예를 만들고 있는 직원 중 2명의 청각장애인이 있고, 다른 장애인 직원들도 여럿 있어요. 이오드림의 설립목적은 함께하는 사회에요.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기업문화를 만들고 싶었고, 취약계층에게 조금이라도 그 문화를 함께 나누려 했던 거죠. 저는 취약계층에게 하루 한 끼의 걱정을 해결해주기 보다는 문화갈증을 해소해주고 싶었어요. 재능기부를 통해 취약계층에게는 무료로 재료를 제공해 강의를 해드리고, 그 중 실력이 있는 분들은 채용해 일자리를 주어 제가 만든 기업문화를 함께 누리고 싶어요.” - ‘이오드림’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드림(Dream)’은 꿈을 말하는 것이고요, 앞에 ‘이오’는 경영 개념에서 가져왔다고 볼 수 있어요. 경영은 기획, 제작, 판매, 관리 이렇게 4가지로 나뉘는데, 그런 개념으로 봤을 때 과연 저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론은 무엇이 됐든 최고로 잘 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제가 생각한 ‘최고’의 기준이 25%가 되는 것이죠. 100% 중 기획, 제작, 판매, 관리 4가지로 나뉘니까요. 하지만 최고치인 25%만 가지고는 회사가 운영될 수 없겠죠? 최고치 25%를 달성할 수 있는 4가지 분야의 최고들이 모두 모여야 제대로 된 경영이 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 공예인들도 공예품을 만드는 제작만 최고라고 해서 잘 될 수 없다는 것이 되죠. 다시 말해 각자의 분야의 최고가 되자는 뜻입니다. ‘이오드림’은 총괄 관리를 하는 회사로 보시면 되고, ‘이오드림’ 외에 이오클래식, 이오와이어 등 많은 브랜드가 있는데 모두 최고를 뜻하는 ‘이오’가 항상 들어가죠.”  - 구슬공예 명인으로서 앞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명인이 되고서 더욱 사명감을 느껴요. 이렇게 된 이상 구슬공예가 뿌리를 내리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후세들이 지금 저의 비즈 기법들을 더 개발시켜서 더 훌륭한 작품을 계속해서 만들어 갔으면 좋겠어요. 자신만의 창작을 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 명인으로서 저의 책임이라 생각해요. 저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 사람들
    • 지난기획
    2013-11-06
  • [한국의 명장] 변도연 “닥종이 인형, ‘인형’아닌 ‘작품’으로도 봐주길”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아직도 닥종이 인형 공예를 ‘인형’으로만 보고, ‘작품’으로 보는 시선이 부족한 것 같아요. 이 인형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많이 이해해줘야 하는데, 그 과정을 궁금해 하지도 않고, 이해해주지도 않은 채 그저 인형으로만 보는 시선들이 안타까워요.” 손재주가 좋아 어린 시절부터 만들기를 좋아했던 변도연은 20살이 되어 대학생이 되자 본격적으로 다양한 생활 공예를 찾아다니며 배우기 시작했다. 꽃꽂이, 한지공예 등 손으로 만다는 것은 뭐든 좋았다고.  부모님의 반대로 공예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취미로 다양한 공예를 끊임없이 배워왔다. 말 그대로 ‘좋아서’ 계속 한 것이다. 큰 꿈을 안고 시작한 여행사가 IMF를 겪으면 좌절하게 되자, 그녀는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리라 결심한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 늦었지만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바로 공예인으로 말이다. “사업을 접고 공예활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내가 작가로서 어떤 작품을 할 것인가 고민할 때 ‘한지’를 선택하게 됐어요. 어린 시절 이웃집에 살던 어르신에게 한지를 배울 때 한지가 주는 오묘한 매력에 빠졌던 기억이 있었거든요. 다양한 것을 창작해 낼 수 있는 좋은 소재라고 느꼈죠.” 그렇게 한지공예를 시작했다. 한지공예를 배우던 변도연은 돌연 닥종이 인형에 빠졌다. 어떤 사연이었을까? 창덕궁 성벽을 따라 자리 잡고 있는 고즈넉한 한옥에서 그녀의 닥종이 인형 공예 이야기를 듣고 왔다.  ▲ 변도연 [사진=양문숙 기자]■ 변도연과 닥종이 인형이 만났을 때 - 닥종이 인형과의 첫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닥종이 인형과의 인연은 인사동 전시장에서였어요. 우연히 인사동 전시장에서 젊은 작가의 닥종이 인형 전시를 보게 됐어요. 보는 순간 가슴에 딱 닿았어요. 살포시 웃고 있는 인형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아, 닥종이 인형을 배워야 겠다’는 생각이 그냥 바로 들었어요.” “전시장에서 도록을 가져와 작가에게 무작정 연락을 했죠. 그랬더니 그 작가가 군포에서 주3회 수업을 하는데 그 시간이 저랑 안 맞아서 배울 수가 없었어요. 순간 가슴에 와 닿았던 작품이었기에 꼭 그 작가에게 배워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죠. 그 뒤로 닥종이 인형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바로 찾아보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닥종이인형작가로 활동하는 분도 많지 않고, 교육하는 곳도 흔치 않았는데 발표된 작품들을 보고 그중 표정이 섬세하고 표현이 남다른 선생님을 교실을 찾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 때 제 스승이신 박순애 선생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탁월한 선택이고 행운 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 그렇게 닥종이 공예를 시작한지가 얼마나 됐나요. “닥종이 공예를 작업한지는 15년 정도 됐네요.” - 닥종이공예도 한지공예에 속하죠? “네. 한지공예에요. 닥종이가 한지의 다른 이름이에요.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기 때문에 이를 닥종이라 하거든요. 한지공예 분야에는 만드는 기법에 따라  ‘지호공예’ ‘지승공예’ ‘지장공예’ ‘전지공예’ ‘색지공예’ ‘지화(紙花)공예’ ‘닥종이인형’ ‘후지공예’ ‘줌치공예’로 세분화 되어 있습니다. 한지공예 작가라면 이런 부문들을 모두 배워야 하는데 대부분 한 분야만 공부하고 활동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 또한 닥종이인형 작가로 활동하지만 한지공예의 다양한 종목들을 모두 공부했습니다.” - 염색도 배우셨던데, 닥종이 인형 공예를 하는데 도움이 되나요?  “염색도 필요해요. 시중에서 판매되는 색한지는 화학 염색지로 대중적으로 흔한 색들이라 저만의 독창적인 색을 갖기 위해서는 직접 염색하여 색을 입혀 사용해야 하거든요. 특히 한지는 천연 염색을 하면 은은한 색감을 갖게 되는데 작은 차이에도 다양한 색이 발색되어 나만의 독특한 색으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공예라는 분야가 다른 분야를 공부하여 접목하면 새롭고 흥미로운 창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어요. 그래서 가능한 많은 분야를 공부할 필요성이 있죠.”   - 앞으로 더 배우고 싶은 분야가 있습니까. “전통분야에서 배우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요. 매듭도 배우고 싶고, 민화도 배우고 싶고.(웃음) 일단은 제 작품과 접목이 가능한 것은 무조건 배우고 싶고, 접목이 불가능한 것은 전통에 대해 많이 알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배우고 싶은 거죠.” “현재는 옻칠을 배우고 있어요. 제가 지금 개인적으로 작업하고 있는 것 중에 우리나라 전승적인 부분에 ‘지불(紙佛)’을 연구하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제작을 시작하고 있어요. 지불은 한지로 만든 불상인데 지금은 많이 사라졌죠. 우리나라에 지불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 박물관 및 사찰 등 27여 군데 정도밖에 없습니다. 지불 작업을 하는 분도 많지 않아요. 사라져가는 유물 중 하나가 되어버린 지불을 재현해보고자 시작한 작업입니다. 이런 지불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 옻칠이거든요. 특히 옻칠에서도 건칠기법을 배워야 할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에 옻칠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 전통 공예분야가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적어도 10년 이상은 지속적으로 할 생각으로 배워야 하는 것들이거든요. 옻칠 공부를 시작한지 1~2년 밖에 안됐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공부할 예정입니다.”    ▲ 변도연 [사진=양문숙 기자]■ 다작을 꿈꾸다 - 평소 작업량은 얼마나 되나요? “특별한 작업이나 강의가 없으면 보통 하루에 12시간은 계속해서 하는 것 같아요. 저희 작업이 한 번 시작하면 기본 6시간 정도를 하니까요.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말이죠. 작업을 하다보면 시간이 가는지도 몰라요. 밤새는 경우는 뭐 대다수고요. 나이가 드니 요즘엔 밤샘이 힘들긴 힘들더라고요.(웃음) ” - 주로 어떤 작품을 만드시나요?  “작품은 주로 다양하게 작업하는 편입니다. 순간순간 작품 구상이 될 때마다 메모하고 스케치해두었다 선별하여 작업을 시작하죠. 그러다 보니 작품으로 탄생되지 못한 기본 스케치들이 정말 많아요. 작업하고 싶은 것들은 많지만 시간이 모두를 허락하지는 않죠. 제 작업이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많은 시간과 작업을 요하다보니 열심히 작업해도 완성되는 작품 수가 많지 않아요. 가끔 스케치한 것들을 보다보면 이것 먼저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정말 작의 욕심이 발동하죠.(웃음)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작업을 해 나가면서 무엇보다도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만들고자 노력해요. 작품 하나하나마다 따뜻한 마음이 피어나고 생명이 느껴지는 작품을 만들고 싶거든요.”   “의도한 표정이 나오지 않을 때는 고통스러운 진통도 겪지만 작업하는 순간만큼은 정말 행복해요. 이 외에 콜라보레이션 또는 초대 기획전에는 주제를 가지고 작업하는 경우도 많아요. 요즈음도 11월에 전통 한복 작가들과 콜라보레이션으로 진행하는 전시가 있어 우리 풍속화를 재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전체적인 구도와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의상 표현이 더 중요한 작업이죠. 가급적 고증된 의상을 한지로 구체적인 표현을 주기 위해 신윤복과 김홍도의 작품 해설집까지 판독하며, 작품 표현에 온힘을 다하고 있죠. 전시일자가 가까워지니 바쁜 마음과 긴장감이 마치 홍역을 치르고 있는듯해요.”   “제 작업은 크게 나누면 창작품과 우리의 문화를 주제로 한 작품, 유물재현 작품으로 나눌 수 있어요. 해외 초대전인 경우 인형 컨퍼런스나 인형작가 협력전시인 경우는 창작품으로 한지의 독창성을 강조하지만 그 외에는 우리 전통 문화를 보여주는 작품을 주로 선보입니다. 닥종이 인형 작품을 통해 우리 전통문화를 보여주고 이해를 돕는 거지요. 해외 전시를 위해 현재 작업하고 있는 것은 ‘시집가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전통 혼례식 과정을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하는 작품입니다. 작년 해외 전시 때 선을 보였는데 흥미롭게 관심을 갖는 관람객들이 많았고 우리의 전통 혼례에 대해 구체적인 질문이 많아 작품을 좀 더 구체적인 현장 모습으로 보강하고 있죠. 간단한 혼례식 장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럭 아범과 오는 신랑 모습부터 시작하여 초례청, 초야의 모습, 시집으로 가는 장면까지 혼례의 전 과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거죠. 초례상의 상차림부터 전통에 기반해 완벽하게 재현하려고 하고 있어요.” - 닥종이 인형 전시를 개최하면 판매는 어느 정도 되나요? “주로 소수 마니아층이 구매 하거나, 외국인 관광객이 사는 경우가 있지만, 거의 판매되지 않죠. 아직도 닥종이 인형 공예를 ‘인형’으로만 보고, ‘작품’으로 보는 시선이 부족한 것 같아요. 닥종이 인형 공예에도 ‘공예’를 빼고 말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 그럼 주요 수입원은 무엇인가요. “박물관이나 과학관에서 닥종이 작품 의뢰가 들어오곤 해요. 그건 사실 작품이라기보다는 재현을 하는 거죠. 작품이 판매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그런 의뢰가 들어오면 닥종이 공예 하는 사람에게 큰 수입원이 되는 거죠. 그런 작품은 혼자는 못 하고, 협회 사람들끼리 여러 명이 뭉쳐서 작업을 하죠. 아마 혼자하려면 몇 년을 걸릴걸요?(웃음)” ▲ 변도연 [사진=양문숙 기자] ■ 닥종이 인형을 배우고 싶으십니까? - 닥종이 인형을 배우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나요? “인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긴 한데, 인내심을 갖고 하는 분들은 많지가 않아요. 중간에 포기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초보자가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3개월 정도 소요되는데 앞선 마음만큼 완성도가 빠르지 않다보니 흥미가 떨어지는 거죠. 인형의 예쁜 모습만 보고 배우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는 과정의 어려움과 인내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 지금 가르치고 있는 제자들 연령층은 다양한가요? “그럼요. 연령제한을 따로 두지 않으니까요. 나이 지긋하신 분부터 고등학생 까지 다양합니다.” - 닥종이 인형 공예를 배우기 가장 제격인 연령층이 있을까요? “어르신들은 이해력이 빨라서 좋고, 어린 친구들은 손이 빨라서 좋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에요. 하고자 하는 마음, ‘열정’이 가장 중요하죠. 열정이 있으면 마음처럼 작업이 되지 않아 어려움과 좌절이 부딪쳐도 그 순간들을 잘 극복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열정이 없으면, 금방 포기를 해버려요. 당연히 거기에 타고난 손재주가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손재주는 열정 다음에 문제에요. 손재주가 없으면 타인보다 조금 느릴 뿐이지 기본적인 과정만 지나면 차이가 없어요. 공예분야도 숙련이에요.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많이 작업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거죠.”   - 닥종이 공예를 하면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금 전에 말했던 ‘열정’과 ‘인내’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꼽자면 관찰력이 정말 중요해요.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작품에 담기 위해서는 많은 표정과 모습을 표현 할 줄 알아야 하거든요. 창작하고자 하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주변 사물이나 인물들의 표정 하나하나도 무심히 넘기지 않고 관찰하는 습관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다른 분야의 작품 관람도 좋은 공부가 되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색채 공부도 자연스럽게 되죠. 닥종이 인형을 작업하는데 색채 부분도 아주 중요하거든요.  교육과정 중 제자들이 쉽게 해결하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부분이 인형의 옷감(한지)선택입니다. 물론 색에 대한 고민이죠. 이런 부분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많은 작품들을 감삼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터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기적인 전시장 방문을 권유하고 있어요.”  - 닥종이 인형 공예, 앞으로의 전망을 예측해본다면. “전망은 두 가지로 볼 수가 있겠죠? 상업적이냐 아님 작가로서의 예술성이냐. 전문적인 작가는 말 그대로 본인이 좋아서 창작을 위주로 하는 분야이고, 상업적인 분야는 인형 제작 의뢰를 받아서 상품을 만들어 판매를 하는 분야죠. 상업적으로 본다면 그 중에서도 콘텐츠적인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전망은 매우 밝죠. 캐릭터 산업이 커나가고 있어서 닥종이 인형과 접목할 수 있는 부분이 참 많거든요. 어린이 동화책에 그림 대신 닥종이 인형으로 대체하기도 하잖아요? 디지털 시대의 젊은 친구들이 아날로그적인 닥종이 인형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방식으로 접목을 시킨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문화 콘텐츠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닥종이 인형도 권해드리고 싶어요.”  ▲ 변도연 [사진=양문숙 기자]■ 한옥마을서 전통공예 배우세요! 북촌 한옥에 살고 있는 변도연은 북촌한옥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공예인들의 모임 ‘북촌공예협의회’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다. 또한 그의 공방은 ‘지형공방 홍벽헌’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 고즈넉한 한옥에서 거주하셔서 너무 좋을 것 같아요. “공방을 방문하시는 분들이 다 그렇게 말씀하셔요. 한옥에서 산다는 것이 좋은 점도 많지만 불편한 점도 많아요.(웃음) 이곳 한옥마을은 관광객들이 오지 않는 시간에는 정말 조용해요. 그러나 단체나 학생들이 오면 시끌벅적하죠. 겨울에 너무 추워요. 그래도 버텨야죠.(웃음)” - 북촌공예협의회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북촌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다양한 전통공예 장인들이 모인 단체에요. 약 30여 명이 함께 있어요. 옛날의 북촌은 궁궐의 경공방들이 운영되었던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서 공방을 운영하며 전통 공예의 맥을 전승하며, 국내외 많은 방문객들에게 우리의 아름답고 훌륭한 전통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또한 다양한 전통 공예 프로그램을 직접 체험 해 볼 수 있는 ‘북촌전통공예체험관’을 운영하며 학생 및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우리 문화의 이해를 돕기 위한 활동도 하고 있어요.”   - 주로 어떤 사람들이 체험하러 오나요?  “가족 및 학생 단체, 외국인 관광객, 기업 바이어 등 다양한 분들이 방문 또는 예약으로 신청합니다. 꼭 체험을 목적으로 오는 분도 있지만 한옥을 관람하기 위해 찾는 관광객들도 많아요.”  - 체험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이 됩니까. “북촌 전통공예 체험관은 요일별 3종목으로 진행되며, 체험객이 짧은 시간에 완성 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요. 닥종이 인형의 경우도 미리 한지로 만든 몸체를 준비하고 옷과 표정을 지기접 표현해 볼 수 있도록 하죠. 이렇게 체험을 한 번 해보면 기본적으로 닥종이 공예를 하는데 사용하는 기법 5~6가지는 경험을 하는 거죠. 인기가 좋아요.”   - 다수의 인원과 한꺼번에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힘드시겠어요. “정신없을 때가 많죠.(웃음) 어제 100명 단체 체험단을 받았어요. 견본품으로 인형 4개를 진열해놨는데, 체험 끝나고 보니 한복 입혀놓은 인형 2개가 없더라고요. 100명이 동시에 진행하니까 각자 만드는 것 돌보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누군가 가져간 거죠. 속상하네요. 그래도 끝나고 만족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합니다.”  ▲ 변도연 [사진=양문숙 기자]■ 닥종이 인형 공예가로 살아가기 - 닥종이 인형 공예만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매력이 굉장히 많아요. 가장 큰 매력은 내가 원하는 표정과 감정을 담아서 또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것 같아서, 매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느끼는 희열감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닥종이 인형을 하면서 가장 큰 만족감은 바로 그 희열감이죠.” “또 전시장에서 작품을 선보였을 때 제 작품을 본 관람객이 제가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를 그대로 보고 느꼈을 때는 그 희열감이 배가 되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작품을 보고도 평가가 다 다르잖아요. 그런데 가끔 공감되는 평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럴 땐 특히나 기쁘죠.” - 닥종이 공예를 하면서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나요? “사실 작품 때문에 힘든 것은 없었던 것 같아요. 굳이 뽑자면 짧은 시간에 작품이 나오지 않으니 계획한 작품을 다 하지 못 한다는 게 개인적으로 괴로워요. 그리고 교육이나 체험 활동에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작품에만 온전히 시간을 쓸 수 없다는 것도 조금은 아쉽고요. 교육이나 체험을 할 때 딱 그 시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시간도 필요하잖아요. 그러니 그 만큼 작품 시간이 줄어드는 거죠. 온 종일 작업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웃음) 제자를 양성하는 것에 의미가 있어 필요하지만, 아무래도 작업시간이 줄어드니 외부활동을 좀 줄였으면 하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있는 거죠.” “결론적으로 저는 지금까지 닥종이 공예를 해오면서 힘들거나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아직도 아쉬운 부분은 이것만 하고 싶다는 거죠.(웃음)” - 외부활동을 줄이고 싶다는 바람과는 달리 한국닥종이협회에서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닥종이 인형 작가들간 상호 정보 교류와 창조적 연구 활동을 하기 위해 뜻을 같이 하는 작가들과 5년 전 발족시켰습니다. 동안 6회의 회원전을 하였고, 닥종이인형 작가를 양성하는 교육과 양로원의 정기적인 프로그램 봉사 활동들을 하고 있어요.  우리 분야를 많이 알리고 활동 하기위해서는 협회도 필요하고, 협업도 필요한 거죠.”   -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전시는 늘 꾸준하게 있고, 2014년이나 2015년에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또 전승 작업으로 지불작업도 계속 할 거예요. 1, 2년 한다고 완성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꾸준히 공부하면서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고, 완성이 되면 그 분야를 이끌고 나갈 제자를 양성하고 싶습니다.” - 닥종이 인형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닥종이 인형 박물관과 세계 인형 작가들과 교류하고 싶어요.”  “다양한 작업으로 만들어진 많은 작가들의 닥종이 인형 작품을 보여 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고 싶어요. 닥종이 공예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더 나아가 닥종이 인형에 국한하지 않고 국내의 많은 인형작가와 해외의 훌륭한 인형 작가들과의 교류의 장이 될 수 있는 공간을 꿈꾸고 있어요. 북촌 한옥마을에 마련된다면 정말 더 좋고요.(웃음)”     “미국이나 유럽은 인형 작품이 예술적 가치가 높은 나라들입니다. 다양한 소재로 활동하는 인형 작가들도 많고요. 특히 독일은 ‘인형’을 예술적으로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 나라로서 인형 컨퍼런스도 매년 열려요. 저도 독일 인형 컨퍼런스에 출품해 수상을 했는데 닥종이인형에 대한 호평과 관심이 대단했어요. 세계의 많은 작가들이 출품한 행사였는데 정말 훌륭하고 좋은 작품들이 많았어요. 그걸 계기로 갖게 된 앞으로의 계획 중 하나가 세계 인형작가들과 교류입니다. 그 첫발로 내년에 미국 컨퍼런스에 참가 합니다. 전 세계 인형 작가들과 함께 한국의 닥종이 인형도 처음으로 참여하는 의미 있는 행사이죠.” ▲ 변도연 [사진=양문숙 기자]
    • 사람들
    • 지난기획
    2013-10-30
  • [한국의 명장] 백용식 “1200년전 동탑사리구 2년넘게 제작, 재현”
    ▲ 백용식 명인 [사진=양문숙 기자] (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리함 공예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있긴 하지만, 아직까진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많거든요.” 참 소박하다. 금속공예, 사리함 제작부문으로 한국예술문화명인에 선정된 백용식 명인이 밝힌 바람이다. 어찌 보면 ‘변화’보다는 ‘일관(一貫)’이 더 어렵다. 더구나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았던 전통공예 분야에서 일관되게 한다는 것은 특히나. 그렇기에 백용식 명인의 바람이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또한 지금까지 일관되게 전통공예를 하고 있는 그가 대단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서울정도600년 기념 공예품 경진대회’ 금상(1996), ‘우리공예 한마당 큰잔치’ 대상(1996), 국회문화 체육 공보위원장 표창 수상(1996), 한국 청소년지도자 금속공예부문 수상(2009) 등 공모전 수상은 물론 대형 사찰의 사리함을 제작해 오고 있다. 서울에 위치한 백용식 명인의 공방을 찾아 사리함과 금속공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백용식 명인 [사진=양문숙 기자] ▲ 백용식, 연꽃 사리함 ■ 사리함을 아시나요?  사리함,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조금은 생소할 수 있다. ‘사리함’은 ‘사리(舍利)’를 담는 함을 말하는데, 사리는 유골을 화장한 뒤에 나오는 구슬 모양의 담석이다. 원래는 석가모니의 유골을 뜻했으나 현재는 스님들을 화장한 뒤 나오는 담석을 말해, 사리가 곧 오랜 공덕의 결과라고 이해하면 된다. - 주로 하고 있는 작업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예전에는 사리함을 주로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리함의 수요가 많지 않다 보니 사리함만으로는 공방을 운영할 수 없어서 금속공예 등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쓰일 수 있는 은 식기들, 차기 세트 등 다양한 공예품을 만들고 있어요.” - 그럼 원래는 ‘사리함’만 만드셨던 건가요. “네. 주종이 사리함이었어요. 하지만 사리함만 고집하기에는 공방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해 변화를 시도한 거죠.” - 사리함 제작 의뢰는 얼마나 들어오시는지. “요즘도 사찰에서 쓰긴 하지만, 거의 없어요. 뜸하죠.(웃음)” - 사리함의 종류는 어떻게 되나요? “사리함의 종류는 딱 구분 짓을 순 없어요. 스님들이 사찰에서 쓰여질 용도에 맡게 주문을 하면 그 주문대로 제작을 하는 방식입니다. 사천왕성, 연꽃, 사찰 내에 있는 탑 등 그 분들의 취향에 맡게 주문한대로 제작을 해요. 맞춤제작인 셈이죠.” - 사리함 크기도 다양한가요. “다양해요. 크기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종류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각각이죠. 탑 형식으로 만드는 것도 있고, 원형도 있고, 서찰의 대웅전의 모습을 그대로 본 따서 하는 것들도 있거든요.”  ▲ 백용식, 금탑사리함 ■ 화려하고, 화려하고, 화려하다! 감은사지 동탑사리구  - 의뢰받은 것 외에 작품으로 사리함을 만들기도 하시죠? “그렇죠. 제가 좋아서 만드는 작품들이 있죠. 여유시간이 생기면 사리함 작업에 열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 그 중 가장 대표작을 꼽자면. 경주 동탑사리구라고 우리나라 사리함 중에 제일 훌륭하고 가장 만들기 어려운 사리함이 있어요. 1200년 전에 만든 동탑사리구가 지금은 중앙박물관에 있는데, 오랜 시간에 부식이 되어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에요. 그 사리함을 한 교수님께서 1:1 비율로 책자를 기록하셨는데, 그 것이 숙명여자대학교 도서관에 있습니다. 그 기록을 일일이 열람해서 그대로 재현을 했어요. 그 작품이 저의 대표작이죠. 굉장히 화려하고 제작 시간도 오래 걸렸어요.” - 제작 과정이 기간은 어느 정도 인가요? “저 혼자 모두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로 한 작품이었어요. 총 3사람의 손을 거쳐 2년 2개월 정도 제작했어요.”  ▲ 백용식 명인 [사진=양문숙 기자] ■ 공예와 함께 한 삶 - 어떤 계기로 사리함을 만들기 시작했나요. “21살 때 얻은 첫 직장이 사리함 공방이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거죠.” - 불교신자인가요? “네. 불교신자로서 불교문화가 익숙하다보니 사찰에 가더라도 편하고, 그래서 사리함과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만들 때는 어렵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고 있고, 그래서 좋은 작품들이 나오지 않나 싶어요.” - 작품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정교함이죠. 의뢰하는 분들이 원하는 부분을 빨리 캐치해서 정확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 지금까지 공예를 해오면서 가장 고마웠던 분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아무래도 제가 첫 직장으로 사리함 제작을 처음 시작했을 때 도와주셨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스승님이 가장 감사하죠.” - 공예를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동탑사리구 완성 됐을 때 정말 뿌듯했어요. 물론 다른 작품들도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완성된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죠.”  ▲ 백용식, 통도사 대웅전 사리함 외함 및 내함 - 공방 꾸려나가시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럼요. 뭐 지금 공예 하는 분들이 다들 어려워요.” - 공방 운영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아이들 공부 때문에 외국에 나간 적이 있어 그 동안 몇 년 쉬었어요. 그 뒤 귀국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무래도 계속 해왔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재기하는데 조금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래도 잘 견뎌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죠.” - 외국에 있을 때는 작업을 전혀 못 하신건가요? “못 했죠. 아이들 뒷바라지 열심히 했어요. 공예를 다시 하고 싶단 생각 많이 했어요.” - 힘들어 관두고 싶은 적은 없었나요? “사실 없다고 하기엔 그렇고.(웃음) 있었죠. 금전적으로 힘들기에 다른 일을 하려고도 생각해봤지만,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은 이 일 만의 매력이 있어서 입니다. 결국 다른 일은 한 적은 없었어요.” - 그 매력이 뭔가요? “작업하는 동안에는 오롯이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다른 일들은 생각도 안 나고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죠. 힘들 때도 있지만 할 때만큼은 너무나 행복해요.” “둘째딸이 미술을 전공했는데, 제 일을 많이 도와주고 이 일을 좋아해요. 저를 이어 하고 싶다고 하니까요.(웃음) 딸이 함께 해주니 힘도 되고, 도움도 많이 받아요.” - 따님처럼 다른 청년들도 전통에 관심이 많으면 참 좋을 텐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우리세대보다 보는 것도 많고, 아는 지식도 많기 때문에 빠르고 다양한 방법으로 전통을 재해석할 수 있을 텐데 관심이 많이 없으니 아쉽죠. 음식만이 아니라 공예에도 수작업에서 나오는 손맛이 있는데, 아직 그 손맛을 모르고 있죠.(웃음)” - 화려한 은 식기들을 보니 실제로 사용하기 보단 고이 보관해야 할 것 같아요.(웃음) “하하. 그래도 은 식기를 사용하면 좋은 점이 아주 많아요. 은은 해로운 물질이 있으면 검하게 변하잖아요. 그래서 예전에 임금님 수라상에는 꼭 은수저를 사용해 음식 안에 독이 있는지 확인했을 정도니까요. 요즘은 은으로 된 차기 세트를 많이 사용하는데, 은 주전자에 물을 마시면 은이 물을 정화해 차 맛이 좋아요.”  ▲ 백용식 [사진=양문숙 기자] ■ 한국전통공예가 여러분, 힘내세요! - 한국예총의 제1회 명인으로 선정되셨는데, 소감 한마디 해주세요. “좋고, 고맙죠. 공예에 대한 관심, 이제부터 시작이라 생각해요.” “공예인들이 공예에만 열중하도록 하고, 전통을 개선시키고 발전시키려면 정부의 지원이 꼭 있어야 해요. 대부분의 공예인들이 여유롭지 못 하거든요. 공예를 발전시키고 전승해야 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정부의 지원책이 없어요. 정부 지원으로 사양되어 가는 전통공예를 살려야 해요. 전통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공예가들이 안정적으로 공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해요. 그래야 전통이 발전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겁니다.” - 한국공예예술가협회에서도 활동하고 있죠? “협회 활동에 전적으로 나서서 참여하지는 못 하지만, 공예인들이 뜻을 모으는 자리에는 함께 하려고 해요.” - 함께 전통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아쉬운 마음이 있어요. 전통공예가로서 자부심을 갖고 작업하는 분들이 많이 없거든요. 아무래도 정부나 사회적으로 전통공예가로서 인정을 받아야 성취감도 올 땐데 그런 여건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보니 그런 것 같아 아쉬워요. 전통공예가, 제대로 인정받는 날이 꼭 오면 좋겠어요.”  ▲ 백용식 [사진=양문숙 기자] ■ 오늘도 열심히 살자 - 앞으로 사리함공예,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스스로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변화한다면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안 좋았던 상황들도 있었지만, 한 길로만 계속 해나가니 지금까지 할 수 있었거든요.” - 새로운 변화를 위해선 공부도 계속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계속 배우게 되죠. 다른 분들의 새로운 작품을 봤을 때 그 완성품을 보고 제작과정을 추측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저것 많이 찾아보며 배워요.” “일본 공예가 발달이 많이 되어 있어요. 일본은 정부의 전통 지원이 탄탄하기 때문에 공예가들이 시간도 많이 투자하고 정교하게 만들거든요. 훌륭한 작품들을 보면 아무래도 더 배우려고 하죠. 하지만 제가 만드는 것도 정성을 들여 정교하게 만듭니다.(웃음)” - 좌우명은 무엇인가요. “좌우명이라기보다는 ‘오늘 하루 열심히 살자’라는 마음가짐이에요. 무엇이든 그게 가장 중요하죠.” ▲ 백용식 [사진=양문숙 기자]
    • 사람들
    • 지난기획
    2013-10-16
  • [한국의 명장] 서예가 문관효 “한글은 한 마디로 예술이에요”
    ▲ 서예가 문관효가 병풍에 쓴 훈민정음 언해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양문숙 기자](뉴스투데이=강이슬 기자) “중국에서는 붓글씨를 ‘글씨가 곧 법이다하는 뜻으로 서법(書法)’이라 불러요. 일본은 ‘서도(書道)’라고, 수양을 하는 것이라 하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서예(書藝)’라고 합니다. 유일하게 붓글씨 예술이라 봐요. 서예와 한글의 매력은 바로 ‘글씨’도 ‘예술’이라는 거예요.” 2013년 10월 9일. 22년 만에 공휴일로 지정된 한글날이 567돌을 맞아 여기저기 한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무수히 많은 반대 세력에도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께 감사한 마음도 들었지만,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은 지난 22년의 세월 동안은 그런 생각들에 무심하지 않았나 반성이 되기도 했다. 지났다고 잊지 말자. 한글의 고마움! 세종대왕이 전세계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청농 문관효 서예가를 만났다. 그를 찾아간 곳은 문관효 서예가의 서예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 한국미술센터였다.  ▲ 청농 문관효 [사진=양문숙 기자]■ 세종대왕 얼을 담은 ‘청농 문관효 서예전’ 이번 서예전이 뜻 깊은 이유는 그가 지난 3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8M에 이르는 훈민정음 언해본 서예작품을 완성해 걸었기 때문이다. 문관효 서예가가 선보인 ‘훈민정음 언해본’은 기존의 한자 중심의 문헌과는 다르게 한글 중심의 붓글씨로 써 단순히 붓글씨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한글을 한자보다 더 크게 써서 민족의 정신 한글에 담긴 세종대왕의 뜻을 높이 산 작업이다. 다시 말해 한글의 사랑을 듬뿍 담은 것이다. 또한 ‘2013 대전 국제 푸드앤 와인 페스티벌’에 (주)한국와인이 생산한 오디와인도 볼 수 있는데, 와인병에 붙여진 ‘동행’이 그의 작품이다. 딱딱한 분위기 속에 서예전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렇게 와인에 쓰여진 서예도 볼 수 있고, 네모가 아닌 원에 쓰여진 서예도 볼 수 있는 볼거리 풍성한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 이번 전시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15세기에서 19세기 한글의 전통에서 넘어와 21세기 현재 우리가 쓰는 한글, 우리 세대에 우리가 편안하게 볼 수 있는 한글을 썼어요. 다시 말해 전통을 살려서 현재의 한글을 만들귀한 여러 가지 시도들을 볼 수 있는 전시죠.” - 전시를 개최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제가 올해 회갑이기도 하고, 붓을 잡은 지도 50년 정도 돼요. 그 정도 되다보니깐 남들이 안 한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는데, 훈민정음 언해본을 보고 나서는 ‘이거다’ 한 거죠. 그런데 언해본을 처음 볼 당시에는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못했어요. 2010년 직장을 그만 둔 뒤에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서예 강의를 했습니다. 하면서 느낀 것이 교육적인 측면에서 조명을 해보자는 생각이었고, 그렇게 생각이 맞아 언해본을 전문으로 쓰게 된 거죠.” - 언해본은 어디서 어떻게 보게 됐나요.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을 할 때는 남의 작품을 보지 않고 꼭 원본을 보러가요. 공모전 준비를 위해 중앙도서관을 애용하는데, 다른 자료를 찾다가 언해본을 보게 됐죠. 그게 20년 전이에요. 20년간 누군가 쓰면 안 쓴다는 생각으로 지켜봤고, 회갑전시 하기 전 까지 아무도 안 쓰면 내가 한 번 써봐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쓰게 된 겁니다. 하지만 원본과 똑같이 쓰려고 하진 않았어요. 예전에는 한문을 가지고 한글을 설명하다보니 한문을 크게 쓰고 한글을 작게 썼지만, 지금 21세기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세계적으로 한글이 우수하다고 정평이 나 있기 때문에 한글을 앞세워 써보자고 생각을 한 거죠. 우리글이 참 멋있어요.(웃음)” - 또 원본과 다른 점이 있나요? “훈민정음을 제일 처음 쓴 ‘해례본을 보면 모음이 점으로 처리됐고, 13년 뒤에 발표한 언해본에서는 모음이 짧은 선 처리로 나왔어요. 그래서 8M 언해본은 선으로 했고, 병풍 작품은 점으로 썼어요. 뭐라도 다르게 하고 싶었거든요.” -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작품은 아무래도 언해본이겠죠? 작업 일화가 있을까요? “그렇죠. 3년 전부터 시작해 정성을 쏟은 작품입니다. 작가 한명이 작업을 하기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이 분야에 뛰어난 학자의 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훈민정음에 박식하고 저를 도와줄 수 있는 학자를 찾는데 만 6개월이 걸렸죠. 중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대학교 교수까지 정말 수소문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세종대학교 김슬옹 교수가 이 분야에서는 최고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학자는 찾았지만, 전화번호를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 분이 출간한 책을 보고 무작정 출판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쉽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시진 않았지만 제가 이런 작업을 하려고 하는데 그 분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며 교수님께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교수님께 전화가 왔고, 그렇게 만나게 됐죠. 어떻게 학자도 생각하지 못 한 작업을 서예가가 생각해 낼 수 있냐고 놀라시더니 이렇게 완성되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 언해본은 이번 전시뿐만이 아니라 서예가 인생에서도 가장 대표작이겠네요. “그럼요.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을 할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해 온 작품 중에서는 대표작이라 생각합니다. 완성한 순간 정말 뿌듯했어요. 올해 567돌 한글날인데 오늘 날까지 한글을 앞세워 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니 더 자부심을 느껴요. 하지만 반면에 쓰면서 힘들기도 했어요.” - 어떤 부분에서 힘드셨나요. “글씨가 고문이다 보니, 그와 관련된 전문 지식이 많지 않아 어려웠죠. 그래서 김슬옹 교수님께 자문을 많이 구했어요. 혼자 할 순 없고, 교수님과 계속 같이 할 수도 없으니 자문을 구하고 작품으로 옮기고 하는 과정들이 어려웠죠.” “10번 이상을 다시 썼어요. 쓰다가 방점하나 잘 못 찍으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으니까요. 아무래도 한문과 한글을 바꿔서 쓰다보니까 실수가 많았죠. 지난 5월~6월 즈음에 글을 다 썼어요. ‘아 드디어 완성했다’고 생각하고 배접을 하는데, 그 때 먹이 번져버렸어요.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다시 칩거하면서 몰두했습니다.” - 어디서 칩거하셨나요. “연구실이 있는데, 이 작품 할 때는 집에서 했어요. 연구실에서 하면 아무래도 방문객이 많아요. 못 오게 할 순 없으니, 집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열중했죠.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남이 하는 거 다 하면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여러 가지 자제를 하면서 정말 몰두 한 거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정말 작업만 했어요.” - 한 종이에 쓰신 건가요? “8M가 조금 넘는데, 저렇게 큰 종이가 없어서 종이 4장을 이어서 했습니다.”  ▲ 청농 문관효 [사진=양문숙 기자]■ 즐기다보니… - 언제 처음 붓을 잡으셨나요. “제 고향이 진도인데, 할아버지께서 학식이 높으신 외지 사람을 모셔다가 우리 집에서 서당을 운영하셨어요. 마을 청년들 모아다가 겨울 농한기에 글을 알려주셨죠. 할아버지께서 ‘글을 배우는 데 최소한 10살은 넘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형들, 삼촌들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공부하는 방에 못 들어오게 했어요. 그래서 만 10살을 꼭 채우로 10살이 되던 해부터 붓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 10살 되기 전부터 글을 빨리 배우고 싶으셨나요? “그럼요. 글 읽는 소리 들으면 참 재밌었어요. 어린 시절에 부엌에서 불을 지필 때면 옆 공부방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려요. 그럼 부지깽이로 글 읽는 소리에 맞춰 아궁이를 치기도 했죠. 우리 가락이 참 재밌잖아요? 글 읽는 소리에도 그런 가락이 있어서 신났어요.” - 청농체를 개발하셨는데, 어떤 배경에서 하게 되셨습니까. “사실 개발했다고 말하기는 부끄러워요. 즐기면서 쓰다 보니까 이 글씨가 써진 거지, ‘서체를 개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한 게 아니거든요. 뭐든지 작가는 무의식중에 무언가 만들어진다고 봐요.” - 서예가로서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첫째는 즐겨야 돼요. 뭐든지 즐기면 안 되니까요. 예술의전당 아카데미에서 서예 수업을 하는데, 정말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 들이 오세요. 그 분들께 항상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붓 끝에다가 풀어버리세요. 2시간 즐기다 가세요’라고 해요. 즐기는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 다음은 늘 생각해야 돼요. 모든 글을 볼 때 어떻게 쓸까를 생각해야 하는 거죠. 예를 들어 길을 걸어 다니다 보면 무수히 많은 간판을 보잖아요. 그런걸 보면서도 ‘나라면 어떻게 쓸까?’라고 생각하고, 좋은 쓰임이 있다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새기고, 집에 와서 한 번 써보는 거죠.”    ▲ 청농 문관효 [사진=양문숙 기자]■ 한글 567돌, 22년 만에 공휴일로 “우리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도 어떻게 우리가 우리글을 등한시하고 있었는지…정치하는 분들이 잘못한거라 생각해요.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시킬 때 솔직히 욕도 많이 했습니다. 우리글을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디서 대접을 받겠어요? 그래도 정말 이제라고 공휴일이 되어서 늦었지만 참 다행이고 감사하단 생각을 합니다.“ - 선생님께 한글은 어떤 의미인가요? “우리 한글은 한 마디로 예술이에요. 제가 붓으로 표현해보니깐 그야말로 예술이에요.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예술이 돼요. 한자에 비해 한글은 단조로워서 작품을 하기에 심심하다고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 단조로움 가운데서도 무언가를 찾아내야죠. 그게 작가의 몫이에요. 어떻게 표현하고 구성하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지니까요. 한글이 이렇게 아름답고, 예술적인 글씨를 우리가 표현을 못 했을 뿐이지 단조롭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정말 세종대왕님이 세계에서 그 보다 더 훌륭한 분은 없다고 생각해요.” - 은어, 신조어 등 요즘 청소년들의 한글 파괴…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말 잘 못 된 거예요. 특히 교육정책이 잘 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에는 당근과 채찍이 꼭 필요해요. 잘못한 아이들에게는 우리 서당에서 훈장님께서 쓰신 회초리를, 잘한 아이들에게는 아낌없는 칭찬으로 교육을 해야 요즘 청소년들의 잘못된 언행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청농 문관효 [사진=양문숙 기자]■ 아직도 푸르다…청농(靑農) 문관효 - 가장 좋아하는 글귀를 꼽자면. “이 전시에 있는 글귀들이 다 제가 좋아하는 글이긴 한데, 한 가지만 꼽자면 ‘함께 즐겨라’라고 말 할 수 있겠네요. 독불장군은 없어요. 뭐든지 둘 이상이 함께 동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즐기는 걸 빼먹을 순 없죠.(웃음) 즐거워도 같이 즐거워야지 한 사람만 즐거우면 나머지 사람이 괴롭지 않겠어요?” - ‘청농’이란 호는 어떤 뜻인가요. “푸른 청(靑), 농사 농(農)을 쓰는데 푸른 농사를 뜻 합니다. 황농(黃農)은 이제 수확을 앞둔 늙은 농사로 비유하자면 (청농)농사가 푸르다는 것은 아직 젊다는 거예요. 언제나 젊게 지금처럼 작업을 하고 싶어요.”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사실 저는 계획을 딱 정해놓고 가기 보단 오늘 하루 즐겁게 즐길 거리를 만들자는 생각이에요. 그렇게 살면 1년 후, 2년 후, 어느 시기에 기회가 왔을 때 제가 바로 할 수가 있거든요. 늘 노력해야 해요. 스트레스 받으면서 하는 노력이 아니라, 즐기면서 노력하자.” - 서예가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제가 만든 작품을 단 한 점이라도 역사에 남기고 싶어요.” - 이 언해본이 역사에 남을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그건 역사가 평가해 주겠죠. 앞으로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활동을 할 거예요. 역사에 남을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서예가 문관효가 8M 훈민정음 언해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양문숙 기자]
    • 사람들
    • 지난기획
    2013-10-10
비밀번호 :

주요기업 채용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