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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병두의 K-Sapience (30)] 한국인의 연애, 결혼이야기⑦ 모던 걸, 못된 것, 毛斷걸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신여성(new woman)이라는 단어가 영국에서 시작하여 일본을 거쳐 한국에 오기까지는 상당한 시차가 있었다. 19세기말 영국에서는 수천년간 지속했던 여성들의 태도와 가치관과는 다른 여성들이 출현했다. 임노동여성이 수백만명(1851년 283만명- 1901년 475만명)이나 늘어나고 노동조합에도 가입했다. 교사 간호사 사무원등의 숫자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고,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들도 출현했다. 대학의 문도 여성에게 개방되었다. 이들 신여성들 사이에서 “여성이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시작되었다. 보호자 없이 현관문 열쇠를 갖고 걸어다니는 여성, 치마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여성,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는 여성, 신인류이자 신여성이었다. 이들은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이 가정인가, 직장인가, 사회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부르주아적인 가정이데올로기(sweet home)에서 답을 찾는가 하면 페미니즘에서 길을 물었다 1920-1930년대로 가면 미국에서 도시화, 대량생산, 소비사회, 라디오, 대중음악의 등장으로 여성들의 자기 표현이 더 과감해졌다. 일부에서는 참정권 운동 등 여성해방운동으로 나갔지만 다대수의 여성들은 유행에 더 민감해졌다. 일본에도 그 흐름이 전파되었고 머리모양, 의상, 취향에서 서구를 쫓는 여성들이 등장했다. 일본만 해도 여성노동이 상당한 정도로 늘어나고 중등교육을 이수한 사람들이 많아 과거의 여성과는 다르게 독립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 긴자거리를 빠른 속도로 활달하게 걸어가는 단발의 머리를 한 여성들을 콕 집어서 ‘모던 걸’(Modern Girl)이라고 처음 특정화<잡지 ‘여성’>한 것이 1924년이다. 다음 해에 ‘모던걸의 윤곽“<‘부인공론’ 1925년4월호>에서 서구식 복장, 길고 곧은 다리 등 시각적 스타일로 그 개념을 구체화했다.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조선에서는 도쿄의 유행을 모방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경성의 풍경이 변모했다. 카페에서 비루(맥주)와 칵테일을 마시고, 영화관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축음기에서 재즈 음악을 들었다. <신여성> <별건곤> 등 여러 잡지와 신문에서 모던걸 특집을 다루었다. 초반에는 쾌활하고 활발한 새로운 여성군으로 묘사되고 장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모던보이 모던걸이란 말이 우리에게 처음 수입될 때에는 거기에 여간 신선한 맛이 내포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든 것이 요즘 와서는 어떤가, 벌써 이 말은 얼간이란 말과 상통되지 않았을까”(조선중앙일보. 유치진) “이지적으로 월등… 쾌활하고 활동적인 것이 장점… 반면 사회인으로서 자각이 없는데서 비롯되는 허화부박(虛華浮薄) … ”(김기진) 도덕의식의 희박. 도회문명의 연독 . 마치 동경을 옮겨놓은 듯한 착각…. 점차 부정적인 묘사로 발전했다. 일본에서도 모던걸을 단발을 한 모단(毛斷)걸이라고 하여 한가지 특징만을 갖고 비하를 하게 되었는데 조선에서는 ’못된걸‘이라는 부정적 묘사로 까지 발전했다. 조선에서는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의 수도 많지 않았고, 직업여성의 수도 빈약했다. 도시화 정도도 낮았다. 여학생에서부터 카페 여급, 기생과 여러 종류의 신종 여성 직업인을 망라하여 모던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의사 교수 교사 기자 간호사 등 엘리트 직업군도 포함되었고, 당시 인기가 있었던 직군도 망라됐다. 데파트걸 즉 백화점에서 판매를 하는 여성이 200여명 되었는데 미모를 구경하러 백화점을 찾는 남성도 적지 않았다. 버스걸(버스안내양. 1930년 경성에 처음 등장. 48명) 헬로걸(전화교환원) 엘리베이터걸도 인기가 있었는데 그 수가 얼마 안됐다. 그렇게 보면 다수는 학생과 기생이었다. 화류계가 학생계의 유행을 따라하면서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런 점이 모던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늘어나게 했다. <별건곤>에서는 특집을 통해 “카페 극장 딴스장 과 같은 화류 우거진 곳에 다니는 낭비군 퇴폐군”으로 묘사했다. ”모던뽀이는 나팔통바지에 폭넓은 넥타이, 길다란 발모“가 특징이었다. 모던걸은 단발이 다수였지만 파마를 하기 시작했다. 모던보이들은 자본가의 아들로 탕아에 비유되었다. 모던걸은 유녀와 매음 생활을 하는 여성들로 비하되기도 했다. 남성들의 현대여성을 보는 부정적인 인식이 작용한 면도 있다. 이들은 급진주의자도 아니고 사회주의자도 아니다. 비정치적이었다. 의복과 화장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단발한 젊은 미인들이라며 경박자(輕薄者)라는 딱지가 붙어다니기도 했다. 일본인 상권이 밀집해 있던 명동성당 남쪽의 진고개가 번창해지고 데파트가 일반화된 1930년대에 와서 신여성은 짦은 치마에 뾰족구두를 신는 허영심 외에 아무 것도 모르는 여성으로 비하되었다. 서구와 일본의 모던걸이 자본주의의 병폐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조선의 모던걸은 사회적 토대가 없는 가운데 외향을 따라했다는 점에서 기형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사회경제적 토대가 약한 탓에 사실 모던이라는 개념도 부정확했다. '모던'이라는 말을 갖다가 붙이면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되기도 하고 전근대와 다른 무엇을 표현하는 듯이 보였다. “모던! 모든 것이 모던이다. 모던껄 모던뽀이 모던대신 모던왕자 모던과학 모던종교 모던예술 모던자살 모던극장 모던스타일 모던순사 모던도적놈 모던잡지 모던연애 모던건축 모던기생… 무제한이다" (‘별건곤’ 1930년1월호) 제국주의 지배의 전박적인 억압과 세계대공항의 여파,빈곤과 대량실업으로 인한 고통은 청춘세대의 방황을 촉진했다. 퇴폐적 성격의 도시 소비문화의 확산은 대중을 체념과 무기력으로 빠트렸다.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했고, 일각에서는 정사(情死)가 하나의 사회 풍조가 되어버렸다. 막연한 불안감과 억압 아래 에로틱시즘의 극단적인 형태로 자살을 택했다. "연애의 가치란 차라리 실연에 있으며 실연으로 말미암아 광열하며 사랑에 초민(焦悶)하여 죽는 것은 절대 미의 극치"(윤근 1922)라는 생각이 발전했다. 현실의 악착한 경제적 고난과 봉건적 유습의 철벽에 부딪힌 수많은 청춘남녀들이 “천국을 찾아서 현세와 고별”(이석훈 1932)했다.<‘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김경일 지음. 푸른역사> 1930년대 성의 특징은 퇴폐적 쾌락주의와 향락주의로의 도피로 특징지워진다.(김경일) “불안이 증대되고 사회적 중압이 격화하며 오늘과 같이 전시적 분위기가 창일하는데 있어서는 향락, 그중에서도 단적으로 말하자면 먹는 것과 성적인 것 가운데 전 신경 계통을 매몰시키는 것은 어느 단계에서나 공통적“(윤규섭 1938)이었다. 하지만 이런 진통을 거쳐가면서 서구화도 정착되어갔다. 1930년대 들어 양장이 늘어나면서 색채도 전보다 더 과감해졌다. 계절에 따라 색상도 달라지고 소비문화의 대중화가 진전되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여 '현대여성'이라는 신조어가 모던걸을 대신해 나갔다. 일제하의 사회상의 변화를 다룬 많은 저서와 논문을 보면 조선 동아 조선중앙등 신문, 삼천리 별건곤등 몇몇 잡지에 기초한다. 하지만 신여성이나 모던걸, 그리고 현대여성에 이르기까지 여성사의 변화는 아주 소수의 삶을 대표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새로운 조류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신여성 모던걸이 그 시대의 삶을 과다대표하고 있다. 절대다수의 삶은 그보다 몇 발 늦게 서구화의 영향을 받았다. 결혼에서 우리가 갖는 또 다른 관심은 가정, 집안, 가족의 구성에서 누가 중심이냐는 것이다. 앞서 19세기말 영국 여성의 질문'은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냐는 것이었다. 산업화 도시화의 반영이다.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 우리는 조혼금지, 이혼 및 재혼 허용등이 이슈가 되었다. 전근대성에서 탈출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개화파와 외국인 선교사, 일본 유학생들이 잇달아 오래된 가족제도를 비판했다. 조선시대 가족제도에서 ‘주인’은 가장인 남자였다.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이웃이 방문할 때 “주인 양반 계신가”라고 묻는 경우가 많았다) 주부의 위치는 종속적이었다. 부부는 평등하지 않았다. 남편이 하늘이었고 시아버지와 죽은 조상들은 섬김의 대상이었다. 그 다음 서열이 장남과 아들들이었다. ”전제적인 가정에서 부인은 문 밖에 나가지 못하고… 암흑무식한 부인이 될 밖에 없고 그 아이들은 나약 나태한 사람이 된다“고 지식인들은 한탄했다. 결혼식에서 폐백을 할 때 신랑의 부모가 대추를 던져주면서 축복을 하는 것은 ‘다산이 다복’이라고 믿었던 우리의 신앙에서 유래했다. 농경사회에서 힘이 센 남아가 선호의 대상이었다. 여아는 어차피 남의 집으로 보내는 노동력에 불과했다. 오래 키울수록 밥만 축내고 손해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거의 모두 ‘부부’가 가정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부부가 중심이 될려면. 가족제도가 변화해야 한다. 서구식 사회학 용어로 핵가족, 1920년대의 우리 표현으로는 단가(單家)를 이루어야 한다. 1920년대 신가정운동론자들이 주장했던 것은 첫째 부부가 가정의 중심이고 둘째 대가족 대신에 단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들은 가정의 개조가 국가의 개조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나라를 고쳐 만들고자 하면 반드시 국민 각 개인을 고쳐야 할 것으로, 국민을 양성하는 곳-선남선녀를 기르는 곳은 즉 가정이라. 이 가정을 새롭게 함이 개조의 첫 일이 아니리오… 우리 가정을 개조하려면 먼저 무엇을 할까. 먼저 가정의 기초는 무엇인가… 이는 물을 것도 없이 부부이라 할지니라‘(김창재 신가정에 대하여 . 신가정 창간호 1921) 가정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뼈대 중의 하나가 성별분업론이다. 성별분업론은 산업혁명 이후 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중후반까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했다. 성별분업론은 남성이 밖에서 돈을 벌어 집안을 책임지고, 여성은 가사와 양육을 책임지는 구조이다. 남자는 경제, 여성은 정서라는 역할분담은 신현모양처론으로 발전했다. ”가정이라는 회사의 지배인은 남편이 아니오…가정은 부인의 유일한 영토이니 가정의 통치권은 부인의 것… 아이를 가정의 중심에 두어 길러야 민족발전”(전영택),“이 직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남자에게 정서적 위안을 제공…여자의 한번 웃음은 남자의 만사를 성공케 하고 여자의 일은 남자의 만가지 걱정을 환기케 하나니 꽃 보담도 향기로운 것은 여자의 정이요 봄날 보다도 따듯한 것은 여자의 사랑이니다“(김필순) 동반자인지, 보조자인지 그 위상이 논자에 따라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근대적인 부부일심동체론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양처현모론을 교육이념의 하나로 채택한 바 있다. 현모양처와 양처현모는 선후관계, 비중의 차이가 있다. 여성은 결혼하지 않고 현모가 될 수는 없다. 양처가 되어야 현모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래로 우리 조선 가정에서는 남편이 어디를 갔다가 돌아올 때 그 부인이 생글거리며 마중 나아가 두루마기를 벗기고 모자를 받으며 한 상에 겸상하여 밥을 먹는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이는 기생이나 첩들의 잔혹한 수단이라 하며 그 정실부인은 이를 욕하고 흉보았습니다.”<‘저녁에 돌아오는 남편을 어떻게 맞을까‘부인 창간호 1922.6> “밥이나 짓고 먹기나 하면 그것만이 여편네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안됩니다… 가장 가깝게 통정할만 친구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남편의 이상이 어떠한지 밖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면 변변치 않은 일 큰일이나 난듯이 잔소리를 퍼부어 더 한층 머리가 괴롭게 하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신여자 창간호 1920.3 편집부 가정의 책임을 가지신 부인들에게> 여자가 집안의 중심이 되어 가정을 남편과 아이들의 오아시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가정신성론은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일제와 신여성, 현대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주택개조 식탁개조 부엌개조와 같은 물질적 토대의 개조와 함께 가정생활의 일정한 변화를 가져온 측면이 있다. 한편 카페여급의 조선인 거주지 진출 등 위험요소는 주부들에게 보다 능동적인 가정 내 역할을 촉진시켰다고 보는 관측도 있다. 신현모양처론은 서구에서는 결혼의 황금기(1950-1960년대)에 꽃피웠다. 우리나라에서도 베이비부머들의 결혼 황금기인 1990년대까지 가장 일반적인 사고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정의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처음 경험해보는 미국문화의 직수입은 한국인의 연애과 결혼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부를 여기에서 마치고 해방 이후 부터 현대까지는 2부로 다룬다. 해방 이후의 자료 수집에 시간이 걸릴 듯…. 참고도서 / 이 글에서 일제 시대 신문 잡지의 인용은 아래 김수진 김경일의 책에서 대부분 재인용. · 신여성, 근대의 과잉/ 김수진/ 소명출판 ·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김경일/ 푸른 역사 · 한국인은 누구인가/ 박혜경 이여봉/21세기북스 · 우리 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배용/ 청년사 ·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최혜실/ 생각의나무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9-19
  • [민병두의 K-Sapience (29)]  한국인의 연애, 결혼이야기⑥ 일제하 페미니즘 사회주의의 결혼관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일제하에서 여성운동은 크게 세가지 조류가 있었다. 후에 일본군국주의에 타협하거나 투항한 자유주의, 나혜석과 김일엽으로 대표되는 급진주의(페미니즘), 그리고 사회주의 계급운동으로서의 여성해방론. 나혜석(1896-1948) 김일엽(1896-1971) 김명순(1896-1951) 등 급진주의자들은 여성의, 여성의 입장에서 선, 여성을 위한 정조론을 들고 나왔다. 이들에게는 남성과 여성의 정조가 다를 수 없다. 여성에게 정조는 의무이고, 남성에게 외도와 매음은 낭만이어서는 안된다. 이들은 ”정조는 자유다. 밥을 먹고 싶을 때 밥을 먹고 떡을 먹고 싶을 때 떡을 먹듯이 정조를 지키고 안지키는 것은 오로지 내 선택이다“고 주장했다. 거의 혁명선언이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파리 여행 때 최린(1878-1958)과 사랑에 빠졌다. 나혜석은 최린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남편과 이혼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남편이 이를 알게 되자 자유론의 입장에서 자신을 변론했다. “배우자를 잊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혼외정사를 벌이는 것은 죄도 실수도 아닌 가장 진보된 사람의 행동일 뿐”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1934년 잡시 <삼천리>에 공개한 ‘이혼고백장’에서는 남편이 자신을 성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밝혔다. 여성이 성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도 엄청난 파격이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그는 “세상의 모든 조소, 질책을 감수하면서 이 십자가를 등지고 묵묵히 나아가려 하나이다”고 했다 나혜석은 유학 시절, 일본 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 <세이토. 靑踏>을 보면서 영향을 받았다.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 1886-1971)가 1911년에 창간했다. 어머니가 딸을 위해 모아놓은 결혼자금으로 여성들만 모아서 잡지를 만들었다. 잡지의 제호는 18세기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 모임 ‘Buestockong Society’에서 따왔다. 모임 참가자들은 푸른 모직 스타킹을 신고 다녔다. 이 잡지에서 그녀는 사설을 통해 “원시에 여성은 태양이었지만 …. 지금은 달이 됐다“고 했다. 원시 시대에 여성은 원래 태양이었다는 말은 일본 여성들의 가슴을 뛰게 한 상징이었다. 모계사회에서 가부장제 사회로 이전하면서 여성은 반사체에 불과한 타율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압축적으로 설명한 문장이었다. 라이초는 여성의 성에 대한 결정권, 아동 양육의 사회적 책임, 여성의 경제적 독립등 시대를 앞선 주장을 제기했다. 후에 우생학을 주장하는 등 군국주의와 타협했다. 나혜석은 스승이 파시즘과 혐조하는 것을 알고 강하게 비판했다. 나혜석은 은밀하게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끝이 비참했으나 굴종하지 않았다. 김일엽은 기자로서, 작가로서 활동하다가 마지막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생을 마감했다. 일본 유학기 부터 나혜석과 함께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창했다. 1920년 여성의 손으로 만든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를 창간했다. 개화기 여성헌장이라고도 불리우는 ‘신여자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순결과 정조는 답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강요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봉건적인 여성의 정절 이데올로기에 글과 몸으로 저항했다. ”정조는 결코 도덕이 아니다“라며 ’재래의 성도덕에 열렬히 반항하지 않을 수없다‘고 선언했다. 생물학적 순결론에 반대했다. 정조는 누군가와 연애하고 사귀는 동안 외도를 하지 않는 것이라는 신정조론을 들고 나왔다. 자유연애론의 옹호자인 그는 실제로 많은 남성과 자유연애를 하여 화제가 되었다. 1924년 <부녀지광> 창간호에서 기혼 남성이 원래의 혼인관계를 청산, 이혼함을 전제로 한다면 그 관계는 정당하다는 입장을 전개했다. ’나의 정조관‘(1927.1.8 조선일보)에서는 “재래의 정조관으로 말하자면, 정조를 물질시하여 일단 과거를 가진 여자의 사랑은 신선한 맛이 없는 진부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정조를 잃은 것을 마치 어떤 보옥으로 만든 그릇이 깨어져서 못쓰게 되는 것같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조란 그런 고정체가 아닌 것입니다. 정조는 어디까지나 사랑이 있는 동안에만 있는 것입니다”고 하여 논란의 중심에 섰다. 급진주의 여성들은 오늘날 페미니즘의 맏언니로서, 원조로서 재평가를 받고있다. 당시에는 자유연애를 몸소 실천하고 이를 공개하면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해방운동이라는 견고한 흐름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사회주의 계열로는 허정숙(1902-1991)을 들 수 있다. 여성단발운동의 선구자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지식인 중에서 가장 먼저 단발을 했고 유행을 만들었다. 이를 본 군중들이 물밀듯 모여 혼잡을 이루고 그 해괴함에 놀라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조선일보 1923.3.36)고 한다. 그녀는 유학 후 돌아오면서 귀국 일성으로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하는 등 많은 어록을 남겼다. 그는 동아일보 등에 ‘수가이’라는 필명으로 많은 글을 썼다.후에는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허정숙은 구가정의 부인이나 신가정의 부인이나 스스로 독립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 독립이 근본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남의 아내와 며느리가 되어가지고 한갓 그 집안 시부모와 그 남편 한사람만을 지극히 정성으로 받들고 공경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개성을 살리우고 우리의 인권을 차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먼저 우리 눈 앞에 급박한 큰 문제이다“(동아일보 1924.11.3) 그는 가정이 안락한 휴식처가 아니라 족쇄라며 가정이 지옥이라고 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근거로 설날과 한식, 추석 등의 명절에 여자는 각종 음식과 잡일을 하는데 동원되어 쉬지도 못한다는 점과 성격이 이상한 가족,친척들의 수발과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가정이라는 지옥 속에서 남편의 노예, 부모의 노예, 자식의 노예, 예의도덕의 노예, 가사노동의 노예, 경제의 노예로써 이중 삼중의 노예로“로 존재한다고 강하게 지적했다. 허정숙은 정조는 무엇이며 누가 만들었느냐, 남자들은 여러 여자를 첩으로 두고 술집 여자와도 놀아나면서 왜 여자에게만 정조를 강제하느냐고 반박했다. 정조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하고 자유로운 연애와 동거, 결혼에 얽매이지 않는 것 역시 남성과 가정, 가족으로 부터의 해방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여성에게도 성욕이 있다며 ”성적 해방과 경제적 해방이 극히 적은 조선여성에게 사회가 일방적으로 수절을 강조하는 것은 여성의 본능을 무시하는 허위“라며 반박했다. 그는 성적 만족을 위해서라면 정신적인 사랑 없이 육체적인 결합이 가능하다는 ‘연애 유희론’을 설파했다.(허정숙에 대해서는 위키백과에서 발췌) 허정숙은 ‘조선의 콜론타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에서 여성해방이론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조선과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여성해방이론은 ‘콜론타이즘’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래서 콜론타이즘을 소개하고 가는 것이 일제하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콜론타이는 프롤레타리아가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듯이 여성도 남성들에게 착취당하는 구조라고 보았다. 부르주아 여성 가정에서 여성들은 남성의 성적 요구를 충족시켜주고, 가사노동을 제공하며, 남편의 법적 상속자를 생산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녀는 <가족과 공산주의> 등의 문헌을 통해서 여성의 짐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의 공동체양육과 가사노동의 국가책임이 완전한 여성해방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았다. 부르주아 부인들이 자신의 아이들만 귀하게 여기고 남의 아이들은 천시하는 것은 잘못 되었다며, 노동자와 농민 아동들을 위한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체양육이 일터에 나간 주부를 대신해서 아이들을 진정으로 보호하는 방편이라고 보았다. 그는 전문직 독신여성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보았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온갖 노예로 사는 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연애나 결혼제도에 속박되지 않아야 한다며 자기 삶을 스스로 사는 여성상을 제시했다. 부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둘의 연합이지만 이혼도 자유로와야 한다고 믿었다. 국가가 공동육아를 해주면 더욱 이혼이 용이하다고 보았다. 열애와 결혼이 너무 많은 시간과 정열을 요구한다면서 ”해결해야 할 중요사업이 저토록 많은데 쏜살같이 지나가는 현재와 같은 혁명기에 그럴 시간이 어디있어요“<콜론타이의 소설 ‘3대의 사랑’ 중에서>라고 강조했다. 일부일처제를 넘어선 자유로운 연애가 좋다는 것이다. 남여의 사랑이 동지애로서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이같은 논리를 만들었다. 그는 ”성욕은 목마름 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다“며 물한잔 마시는 것에 비유했는데, 이에대해 레닌은 ”그렇다고 아무 물이나 마실 수는 없지 않으냐“고 핀잔을 주었다.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등 근대 여성 문제에 가치를 갖고있는 여러 저서를 발간한 김경일은 <신여성, 개념과 역사>를 통해 콜론타이즘이 조선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자세하게 분석했다. 성의 해방과 결혼 및 이혼의 자유, 정조와 순결성에 대한 부정,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 같은 그의 주장에 다수 사회주의자들이 공감했다. 허정숙은 그뿐만 아니라 연애사사(私事)론등 까지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콜론타이즘에 대해 연애란 사사이다. 매력을 느낄 때에 서로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연애는 육체의 결합과는 다른 결합이다. 우리는 연애로 우리의 용기와 능력을 배가하여 사회의 진보에 공헌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콜론타이는 정당하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연애는 우리의 인간성을 높이고 우리가 신사회를 위하여 싸우는 투쟁을 더욱더 능률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장국현. 우리역사넷에서 재인용) 남녀의 자유로운 연애와 사랑은 동지애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 콜론타이즘을 옹호하는 글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연애자유론에 대해서는 비판이 많았고 다수 사회주의자들이 수용하지 않았다. 전상주는 콜론타이의 자유주의연애가 사회주의자들을 잘못된 연애론에 빠지게 하기 쉽다고 경계했다. “난혼생활은 어디까지든 퇴폐적이며 정력의 낭비이며 혁명과는 아무 인연 없는 것”, “연애를 통하여 점점 계급적 업무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계급적 규율을 문란”케 한다며 레닌의 의견을 빌어 소부르주아적 반동적 연애관이라고 비판했다. <‘프롤레타리아 연애의 고조-연애에 대한 계급성’ 삼천리 1931년7월. 김경일의 논문 ‘1920-30년대 한국의 신여성과 사회주의’에서 재인용> 민병휘는 식민지사회주의운동에 적합하지 않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연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투쟁력을 말살시키고 운동자들의 진영을 문란케 한다고 비판했다. 사실 이러한 논쟁은 소수 사회주의 지식인들간의 문제이었다. 이런 논쟁이 조선 민중 절대 다수의 삶에 구체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봉건적 구속에서 해방하려는 여자 일반의 자유 획득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런 방편으로 대중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가기 위해 단발을 하지 않고 보통 농민의 머리를 하고 접근하는 등 전술적 유연성을 갖기 시작했으나 중일전쟁 대동아전쟁과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지하화하면서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은 별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자유주의 계열은 여권론적 부르주아 여성운동으로, 낡은 인습을 타파하고 봉건적 억압을 철폐하며 남녀의 평등한 권리 확립을 외치는 교육계몽운동이다. 기독교 여성주의의 일각에서는 기존의 가족제도를 비판하며 신가정을 제시했다. 유교와 마찬가지로 가정을 사회의 중심으로 보았다. 유교가 남성을 중심으로 하여 대를 이어가는 가족개념의 효와 충을 강조하는 종적인 것이었다면, 기독교는 부부가 중심에 있었다.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위치를 강조했으며 현모양처 보다는 양처현모를 더 강조했다. 기존의 제도 하에서 좋은 가정을 만들자는 취지였다. 일제는 민족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내선(內鮮)결혼도 장려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일제는 여성에게는 다산을 독려했다. 어머니로서 여성은 군인을 낳고 길러서 국가에 바쳐야 하며, 주부로서 여성은 애국반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근검 절약등 생활개선운동을 벌이면서 군인가족을 후원하고 헌납 물자를 모으는 등 후방 지원을 해야 했다. 노동자로서 여성은 여자근로정신대와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일본에서는 다산 장려와 모성 보호로, 조선에 대해서는 자식을 희생하고 모성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창부의 역할도 강제했다. 모윤숙 최정희 등은 일제의 황국신민론에 입각하여 군국의 어머니 상을 강조했다.<‘일제말기의 여성 동원과 군국의 어머니’ 이상경> 자유주의 여성운동은 일부가 일제에 타협하거나 투항했고 해방 후에는 조선여자국민당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등을 보직하여 우익정치단체를 지원했다. 일제가 전쟁으로 향하여 치달아 가는 시기에 조선에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신여성은 1920년대 후반 부터 시작하여 1930년대에는 모던걸로, 지식인은 모던보이로 더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9-12
  • [민병두의 K-Sapience (28)] 한국인의 연애, 결혼이야기⑤1920년대 조선을 뒤흔든 논쟁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1920년대는 좌절의 시기이다. 만세운동이 좌절된 탓에 많은 이들이 방향을 잃었다. 해외독립운동 사회주의계급운동 브나로드운동에 뛰어드는 이들도 있었지만 패배주의의 틈을 타고 연애병, 연애열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1980년대는 저항과 연대의 시대였다. 민주화 운동이 승리하자 1990년대는 급격히 문화의 시대로 전환한다. 1910년대 저항과 연대의 실패가 1920년대의 좌절감으로 향한 것과 비교된다. 이광수는 “독립운동이 지나가고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식어서 나라나 백성을 위하여 인생을 바친다는 생각이 적어지고 저마다 저 한 몸 편안히 살아갈 도리만 하게 된” 시기라고 묘사했다. 이광수가 친일을 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일 수 있지만 시대의 일단을 드러낸 표현으로 보인다. ”정치가도 될 가망이 없고 실업가도 될 가망이 없고 이것저것이 다 가망이 없구나. 에라 모두 다 낙망이다. 청풍명월에 시나 읊조리고 화조월석에 소설권이나 보면서 되는대로 죽자꾸나. 이런 생각이 조선 남녀의 가슴에 다 각각 숨어 있는데야 어찌하랴“(박달성. ‘남녀 학생의 연병 變病과 문질 文疾’ 신여성 1924) “그 누가 이같은 온유 향중의 취미있는 세월을 버리고 손과 발이 되며 대가리를 도끼 삼아 쓰는 정치 혁명 사회 운동 등 백사일생의 장중에 출입하리오?”(신채호. 문예계 청년에게 참고를 구함. 단재 신채호전집. 형설 출판사) 1920-30년대 결혼과 연애, 이혼을 당시의 신문 잡지와 소설을 통해서 살펴본 책으로는 <연애의 시대. 권보드래. 현실문화연구> <경성고민상담소.전봉관. 민음사>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 김경일. 푸른역사>등이 있다. 기록에 바탕을 둔 것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저서들이다. <연애의 시대>에서는 앞서 인용한 비관적인 시대에 사람들의 탈출구가 된 것으로 연애를 들었다. 1910년대 초기에는 기생들에 의해 과감하게 표현되던 연애가 1920년대에 학생 계층, 독서대중에 의해 유포되었다. 1920년 우리나라의 도시화율은 5.47%로 경성인구가 20만명을 넘은 정도의 시대였다. 대부분이 농촌에서 살았다. 1930년 신문판매부수는 10만부였는데 문맹률은 77.73%로 떨어졌다. 처음에는 ‘신성한 물건’처럼 여겨졌던 연애가 외국소설의 번역과 번안소설을 통해서, 그리고 신문 잡지를 통해서 유통되었다. 그 바탕에는 교육열로 급격하게 늘어난 독서인구가 힘이 되었고, 연애편지 등을 통해서 대중화되었다. 1923년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수가 처음으로 서당에 다니는 학생 수를 추월했다. 1920년에는 약 6,000명이던 보통학교 입학생이 1920년대 말에는 2만명에 달했다. 1920년대 신식교육의 중등(고등보통학교 남자 5년, 여자 4년. 지금의 중고등학교를 합한 학제) 정도를 마친 여성은 1930년대 초가 되면 4000∼5000명이 넘었다. 1924년 동아일보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의결혼, 자유결혼을 선택한 정차숙 사건, 김정옥 사건이 보도되었다. 당사자를 실명 보도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정차숙의 아버지도, 김정옥의 아버지도 양반의 수치라며 죽기를 결심했다고 한다. 김정옥 사건의 보도는 상세해서 당시의 풍속을 접하는데 도움을 줄 것 같아 상세하게 인용하기로 한다. 동양염직주식회사 김덕창 전무의 딸 김정옥(20)과 경성세관출장소 전교환(27)이 결혼하기로 되었다. 식산은행 정읍 지점에 있는 전 모의 소개로 사진을 교환하고 혼약이 성립되었다. 김정옥이 근무지인 학교를 지방인 영천으로 옮기거나 가출하는 방식으로 결혼을 거부, 주례인 목사가 신부의 의사를 확인하고는 집례를 거부했다.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잔칫날을 나흘 남겨둔 지난 12일에 신부 정옥은 양산을 사러나간다고 나간 채로 밤이 되도록 들어오지 않음으로 밤새도록 사람을 팔방에 놓아 갔음직한 곳에는 다 찾아보았으나 종적이 없었다…신부의 아버지와 오빠가 화가 나서 신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오빠 김명호는 분이 머리 끝까지 올라 빰을 치며 발로 차는 등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매우 책망하였으나, (김정옥은) 오직 울기만 하고 시원한 대답은 안하였는데… 마른 벼락을 맞은 듯이 온집안이 떠들며 죽이니 살리니 하다가 시간은 점점 되어오고 신랑집에서는 재촉이 성화같음으로 그 아버지 김덕창씨는 자기가 정한 일이라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서 어디로 종적을 감추고 지금까지도 오지 않는 모양인데 한편으로 신랑집에서는 첫잔치라 넉넉지 못한 살림에 수백원을 들여 국수를 사오느니 과일을 사오느니 남보다 지지않겠다고 힘 자라는대로 준비하고…신랑의 어머니되는 늙은이는 양반의 집에 이게 무슨 창피냐고 당장에 죽어버린다고 야단을 하였음으로 잔치에 얻어먹으러 왔든 양복장이 손님네만 면목없이 돌아가고 말았는데….“ 예비신부가 양산을 사러간다고 하고 나갔다고 한 대목에서 당시 신여성의 풍속도를 읽을 수 있다. 서양식 트레머리(앞머리를 둥글고 풍성하게 빗은 후 뒷머리를 틀어올린 스타일), 짦은 통치마, 양산, 핸드백(책보)등이 신여성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다.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늘상 그랬던 일인데 오빠마저 가세한 것에서 가부장제 하에서 남자형제가 가부장을 보조하는 역할의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인 목사가 신부의 의사를 확인했다는 것은 사회혼 양식의 하나로 서구식 교회결혼이 도입되고 있는 징표이다. 서구혼은 이미 당사자주의(당사자의 동의로 결혼이 성립)에 기초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서양화가 나혜석이 1920년 덕수궁 옆 정동교회에서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구한말 이후 소개된 사진을 통해서 결혼약조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매의 발전사를 읽을 수 있다. 신부가 나이 20살이고 직업이 학교교사인 점으로 보아 당시의 전형적인 신여성이었다. 이때 쯤이면 신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기이다. 조혼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결혼과 연애를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양복장이 손님네만 면목없이 돌아갔다고 한데에서 사회적 신분을 알 수 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수백원을 들여 국수를 사오느니 과일을 사오느니 남보다 지지않겠다고 힘 자라는대로 준비하고”에서 보듯이 당시에도 과다한 결혼비용이 논란이 되었다. 이중에 어떤 것은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의식과 관습에 남아있다. 이 파혼 사건이 보도되고서 갑론을박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신문과 잡지(삼천리, 별건곤)는 조혼 연애 정사 결혼 이혼 등의 이슈를 자주 다루었다. 조혼이라는 감옥, 제2부인의 탄생, 고부갈등의 표면화, 정조윤리의 해체 등은 과거에 없었던 일이어서, 또 대부분은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신여성과 관련된 것이어서 언론의 주요관심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4년 8월21일자에 한 평자(一評者)가 나서서 여성이 원래 사귀고 있는 남성이 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전제로 하여 비판을 하였다. “자유연애라는 것을 모든 남자는 모두 다 여자의 남편이 될 수 있고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의 처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를 한다면 이것은 현대인의 감정의 정도로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이야말로 금수와 같은 추행이다”라며 도덕의 범죄자라고 비판했다. 자유연애를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시선의 반영으로 보인다. 8월24일에 충고자가 나서 “그 약혼은 그이가 한 것이 아니고 그의 부모의 의사로 한 약혼이니 그에게는 시대의 도명자요, 도덕의 범죄자라고 할 수 없을 줄 생각한다”고 옹호했다. 예비신랑인 전교환이 나서서 “충고는 그만 두고 자성이나 하라”며 “애인 유무는 관계치 않는다.부모를 속이고 우리를 속인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고 여론에 호소했다. 그러자 김정옥이 당사자라는 필명으로 “부모는 나의 승락도 없이 약혼하였다. 나는 결혼이 상조(尚朝)함과 계속 공부할 의사를 말하였으나 양친은 신랑될 사람이 얌전하니 두말 말아라. 부모로서 자식에게 해토록 할 리가 있겠느냐고 할 뿐이었다. 결혼은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히 하여 쌍방의 승낙을 얻은 연후에 상약할 것이며 승락이 없고 강제인 이상 부모의 말이 당사자의 의사라 믿을 수 있을까”라고 반박하여 논란이 마무리되었다. 부모의 명령에 따라 어린 나이에 결혼한 남성이 학업(혹은 유학)을 마치고 문물을 깨달아 몇년만에 집으로 돌아오면 세상을 보는 기준이 달라진다. 열 살 전후에 첫날 밤을 보낸 누나 같은 신부가 농삿일과 집안 일로 몇 년을 보내고 나니 식모 같고 하인 같아 보인다. 배운 것이 없어 말이 안 통한다고 느낀다. 조강지처를 냉대하고 신여성과 살림을 차리는 경우, 이 여성을 제2부인이라고 했다는 것은 앞서 두번째 이야기에서 소개한 바 있다. 제2부인은 첩과는 다르다는 뜻으로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는 분위기가 조어에 담겨있다. 나도향의 소설 ’환희‘에서 자신이 취한 애처가 아니라며 부모에게 며느리 될 자격은 있어도 나에게 아내할 자격은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부모의 잘못이지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2부인이 사회적 문제가 되자 <신여성>은 1933년 2월호에 ’제2부인 문제 특집‘을 내놓았다. “현실을 바라볼 때 웬만한 인텔리 여성이 민적(民籍) 없는 아내, 즉 제2부인임을 발견하게 된다”며 인습의 제단에 바쳐진 그들을 기존의 도덕이나 법률로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다수는 제2부인을 동정하지 않았다. 이익상은 “제2부인이라는 칭호는 첩이라는 천박한 명칭을 미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김활란은 “부인이면 부인, 첩이면 첩, 나쁜 여자면 나쁜 여자지 억지로 당치 않은 관사를 붙여 가지고 부인이 무슨 부인이냐”며 남성 본위의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신종 첩을 둔 남성들은 문제가 되지 않고 여성들만 문제가 되는데에 있었다. 문제의 근원은 조혼제도에 있다. 1928년 잡지 <조선농민> 주최 ‘조혼에 관한 좌담회’에서 공개된 통계에 의하면 10세부터 16세까지 조선 내 기혼 인구는 42만4936명이었으며, 5세에서 9세까지가 980명, 그 밖에도 3세가 6명, 2세가 2명이었다. 이 좌담회에서는 “자녀를 물건처럼 취급하는 까닭에 소유욕의 발동으로 자기 자식을 속히 장가보내면 그 집은 장하다고 인식되는 못된 인습에서 비롯된 가장의 우월감이 낳은 악습”,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쾌감과 그 며느리를 부려 먹자는 마음이 낳은 폐단”이라는 비판적인 의견이 개진되었다.<경성고민상담소> 양윤식은 “신분 지위 재산이 있는 상류계급에서는 자손의 경사를 보기 위해, 빈천한 하류게급에서는 가계를 돕기 위해 또한 자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의 발로로 한때는 조혼의 폐풍이 성행하여 심한 예로는 남자는 10세 전후….”라고 ‘현대 조선의 혼입 법제’<삼천리. 1932년9월>에서 그 연원을 분석했다. “옛날부터 조선의 여자는 결혼년령에 달하면 또는 하기도 전에 남의 안해라는 직업을 갓게 되었는데 그것을 소위 결혼이라고는 하나 결혼의 요소되는 연애문제는 있어 볼 여지가 없고 육욕을 채우게 하는 도구가 되기 위해, 아들낫는 생식기계가 되기 위해, 결국 남자의 생활을 편의케 하여 주기 위해서의 결혼이다. 그리하여 그 보수는 그 남자에게 봉사하는 동안 의식(衣食)의 자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이름하여 결혼직업, 인처직업(人妻職業)이라 하는 것이 상당할 것이다”(김평우, 〈조선농민〉,1927) 이정로는 1920년대까지 조혼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를 첫째 늙은 부모에게 하루 빨리 손자며느리를 보여드리고 싶은 그릇된 효심, 둘째 어미 된 자가 병이 있거나 허약해 가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을 때 며느리를 얻어 가사를 돌보게 할 현실적 필요성, 셋째 부유한 계층에서 일찍 며느리를 얻는 것이 유행이 되어 자식을 조혼시키지 못하면 집안의 수치로 여겨지는 그릇된 풍조 세가지를 들었다. 그는 조혼이 자녀를 빨리 늙게 하고, 자녀의 양육과 교육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치며 자녀의 의사를 무시한 혼인이 이혼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이정로. ’조혼의 폐해‘ 가정잡지 1922년5월. ‘경성고민상담소’에서 재인용> 그렇다. 자유연애 자유결혼 못지않게 자유이혼이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이 시대에 이혼은 아주 소수만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1920년대 초반까지는 이혼을 ‘자각 없는 유행병’이라고 치부했지만 1924년에 되어서는 이혼을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받아들였다.(‘주목할 이혼증가, 새도덕을 구하는 새현상’ 1924.3.26 ‘이혼 수 격증 신중히 고려할 문제’ 1928.8.14 동아일보) 동아일보 1925년9월18일 보도에 따르면 그해 8개월간 경성부 부내 혼인 건수는 980여건, 이혼 건수 100여건이던 것이 1929년 보도로는 결혼 대비 이혼이 거의 5%에 달한다. 조선총독부 조사월보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 이혼은 총8,021건으로 연령별로 살펴보면 25세에서 30세 사이에 있는 부부의 이혼은 전체 이혼 수의 12.5%인 1,001건으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최혜실/ 권희정의 ’식민지 시대 한국 가족의 변화:1920년대 이혼 소송과 이혼 사례를 중심으로‘에서 재인용) 이혼 소송과 이혼 건수의 증가는 1920년대 변화하고 있던 민법과도 상관관계가 있다.일제는 1912년 ‘조선 민사령’ 을 공포하면서 가족법 부분은 “조선인의 친족 및 상속에 관해서는 조선의 관습에 의한다”고 규정하며 관습법을 적용시켰다. 하지만 1923년부터 일본민법 규정을 의용(依用)하여 부부 쌍방에 대하여 이혼청구를 허용했다. 아마도 이 시기의 이혼 증가는 그동안 누적된 문제의 폭발에 기인한 점도 있어보인다. 잡지 <서광>는 1921년 벽두호에서 ’목하 우리 조선인의 결혼 및 이혼 문제에 대하여‘라는 특집기사를 다루었다.(이하 권희정 재인용) 나혜석 등 13인이 논쟁에 참여했다. 장용진은 피차 합당한 이유 없이 경솔하게 이혼을 주장함은 “인도상의 죄악”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조혼의 폐해는 심하나 이미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일신을 희생으로 공하여 금후로 오는 청년자녀에게나 이상의 가정을 주도록, 화락을 주도록,행복을 주도록 노력하는 것이 도리의 정당할 것이니, 무교육의 처일지라도 임시교육이라도 보습시켜서 가급적 이상에 근한 배우(配偶)를 작하도록 노력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홍병선은 ”부모가 처를 강제로 취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수년을 동거해 놓고 심지어 자녀까지 있는 부인을 버리려 함은 축첩보다 악한 죄“라고 하며 반대했다. 반면 자유이혼을 옹호하는 이들의 주장도 거세었다. 애정이 없으면 이혼하는 것은 마땅히 합리적인 일이고 이것 역시 가정을 개혁하는 일이라고 논지를 폈다. 황석우는 “조선의 사회개혁의 제1보는 가정의 개혁이 우선이다. 조선의 가정은 사랑과 평화가 없다. 성교의 시간이 지나면 개나 원숭이 같이 일일에도 몇 번식 다투어 으르렁거리는소리가 들릴 밖에 무엇이 있느냐”며 “사랑 없는부부의 이혼은 곧 사랑 없는 사회의 결말을 가지고 올 것이니 나는 적어도 현하 조선에 있어서는 이혼의 맹렬한 주창자가 되려한다”고 적극 옹호했다. ‘사랑 없는 결혼은 평생 강간’이라는 생각이다. 1920년 대 중반에 들면 “이혼과 결혼이란 문제는 신문잡지에서 하도 떠들어서 조금도 신기하지 않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인정에 호소하는 주장도 있다. 남자들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입으로는 아내가 마음에 안맞느니 무식하느니 하고 타매를 하며 힘을 다하여 이혼! 이혼!하나 한번 돌아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풍습의 죄! 부모 현명하지 못한 처사로 인하야 그도 또한 뜻 아니 한 구렁에 빠져서 신음하는 희생자이니 이념에 동정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면 차마 이혼하자는 소리는 못할 줄로 압니다. 비록 마음에 맞지 않는 아내이라도 꾹 참고 데리고 지내면 사랑의 생애는 희생이 될지라도 전 생애에 큰 관계는 없겠으나 한번 이혼을 단행하고 보면 이혼당한 여자편에서는 거의 전생명 전생애를 그르치게 되는 참상을 이루나니 요사히 이혼은 인도상으로 보던지 풍기 상으로 보던지 단연히 반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좀 참지요. 때 못 만난 것이나 한탄하고 가엾은 부인들을 위하여 이혼은 하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다. 한편에서 살기 싫다하면. 또 한편에서는 응하여야만 할 터인데 소박을 해도 공방에 눈물을 흘리며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가엾은 이를 차버린 다는 것은 아무래도 인도상 부덕의한 일인가 합니다”(동아일보 1924년 이혼문제의 가부 2.) 그런데 당시 언론이 보도한 이혼사례를 보면 전체 비율 중 가장 높았던 사유는 남편의 범죄 연루, 알콜 또는 아편 중독아내에 대한 학대와 구타로 인한 것이었다. 당시에 여성이 취업할 수 있는 곳이 극히 제한적이라서 경제적으로 독립이 힘들었다. 친정에 돌아가서 사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학대와 구타 속에서 갈지 않겠다는 여성의 인권의식의 발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권희정의 생각이다. 1920년대는 이렇게 저물어갔다. 신여성들이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을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조선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혼인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여전히 주체적이지 못했다. 자유가 늘어나는 만큼 부정적인 시선도 따랐다. 또 그들의 주장이 여성해방운동으로 발전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조혼 관습은 따가운 여론과 일자리의 증가로 조금이나마 줄어드는 추세에 접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촌에서도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공장에 취직을 해 가거나, 일본인들의 수요에 맞춰 하는 가내부업 등이 생겨나면서 실제로 딸이 가계의 생계를 보조하자 딸을 일찍 시집보내지 않으려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었다. 몇해 더 길러서 시집보내는 것이 타산에 맞았다. 당시 전체 공장노동자 중 여성이 차지한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1922년 20.5%에서 1930년 33.7%, 1940년 31.7%의 수준으로 증가했으며, 1930년대 여공은 전체 공장 노동자의 약 1/3 수준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회경제적 변화는 어떤 변화를 갖고 왔을까? 1930년대, 일제 후반으로 가본다. 사회주의와 여성, 페미니즘과 여성, 신여성에서 모던걸로의 변화 등등.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9-09
  • [민병두의 K-Sapience (27)]  한국인의 연애, 결혼이야기④ 서양의  결혼혁명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동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제와 그 결과물로 일부일처제는 유럽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사유재산제의 발생은 여자에게만 일부일처제를 요구했으며 적자상속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결혼생활에서 남자는 지배계급의 위치가 되었다. 인류역사에서 오랜 기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간음 매춘 같은 습속이 생겨난 것도 이 때부터다. 혼전 여성의 순결, 결혼생활의 정절에 관한 여성의 일방적 의무도 마찬가지이다.<풍속의 역사.에두아르트 푹스. 까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여신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점차 여사제는 사라졌다. 그리스는 민주주의를 발명하고 철학을 통해서 지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플라톤은 질문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가 원래 동등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나 이는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남자들은 마음대로 돌아다녔지만 여자는 주거지에 제한이 있었으며 여성의 외출을 감시하는 관청도 있었다. 여자는 외출할 때는 베일을 쓰고 다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실패한 남자’로 규정했다. 여자는 남자의 장신구였으며 미혼일 때는 아버지, 결혼해서는 남편의 소유였다. 공화정을 개발한 로마에서도 여성은 예외였다. 가장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었으며, 여성은 남자와 남편의 보호 감독을 받아야 했다. 로마 결혼법은 여성은 12세, 남성은 14세부터 혼인할 수 있었으나 여성은 10대, 남성은 30대에 결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여성은 어릴수록 매력적이라는 이유를 댔으나 실제로는 영아와 산모의 높은 사망률에 기인한다. 시민계급과 상류층을 지배계급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여자가 조혼하는 것이 확률상 안전했다. 대부분의 결혼이 혈통이나 재산관계 같은 양가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략결혼이었다.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자녀를 생산하고 사회에 활력을 주고 위대한 로마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키케로는 “가족은 국가체제의 양성소”라고 했다. 후손의 적법성은 로마인의 최대 관심사였다. 로마 시민권자만이 법적으로 결혼할 자격을 가졌다. “원시사회에서 결혼은 일차적으로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어서서 협력적인 관계를 넓히고 사람과 자원을 순환시키는 수단이었다. 사람들이 새로운 집단과 혼사를 맺으면 이방인이 친척이 되고 적과 동맹으로 변했다”<진화하는 결혼. 스테파니 쿤즈. 작가정신> 이런 단계를 거쳐 보다 고도화된 결혼으로 발전한 것이 그리스 로마의 정략결혼이고 이는 중세와 근대 현대를 거쳐 자원의 소유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다. 한정된 자산을 나누지 않기 위해 왕족들이 근친혼을 했지만 우생학적으로 잘못된 결과가 나와 모든 재산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금지했다. 결혼은 개개인으로 볼 때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이상적인 결합이기도 하지만 그 내면에는 재테크가 깔려있는 것이다. 로마에서 결혼은 아버지의 소유인 여성을 남편의 소유로 넘기는 것이었다. 가부권(家父權 Patria Potestas)에서 부권(夫權 Manus)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했다. 필요악인 여성은 상속법상 남편의 딸로 여겨졌다. 귀족의 결혼식은 콘파레티오(confarreatio)라고 해서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의 손을 잡고 직접 신랑에게 건네준다. 신혼부부가 신혼집에 도착하고 나면 신랑은 신부를 들어올려서 문지방 너머로 옮겼다. 신부가 친정 아버지의 소유물에서 신랑의 소유물이 된다는 상징적인 퍼모펀스이다. 고대 로마인의 아내는 의무적으로 날마다 남편의 입에 키스해야 했다. 남편 뿐 아니라 처음 만나는 6촌 이내의 친척에게도 입에 키스해야 했다. 포도주를 마셨는지 음주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여자가 포도주를 마시면 통제력을 잃고 간통을 할 수 있다고 보았고 만약 남편을 배신했다면 죽여도 좋았다.<고대 로마인의 성과 사랑. 알베르토 안젤라.까치>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동성애가 유행했다. 동성혼은 혐오대상이었지만 동성애는 이상적인 사랑이라고까지 보았다. 그리스에서는 젊은 남성들이 여성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동성애를 장려했다. 청년의 이상이나 그 성취는 단지 남성 동료들과만 나누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여성이 남성 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고, 완벽한 남자끼리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여자와의 사랑은 번식이라는 본능에서 나오는 불순한 사랑이다. 번식이 불가능한 미소년과의 사랑이야말로 본능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이다”고 했다. 로마제국에서는 노골적으로 쾌락 차원에서 동성애가 이뤄졌다. 선물이나 돈을 제공하는 성인 남자와 젊은 몸을 제공하며 애인이나 첩이 되는 낮은 계층 혹은 노예 사이에서 동성애가 발견된다. ‘소년사랑’으로서의 동성애이고 성인 남자는 남성의 역할을 했다. 기원 후 4세기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동성애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동성애를 금지하고 화형에 처할 것을 명했다. 1951년부터 동성애가 범죄로 처벌되지 않기 시작했다. 고대 교회는 성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는 금욕과 고행을 강조했다. 처녀와 과부 여성들이 수도원의 생활을 동경했다. 독신생활을 찬양했다. 8,9세기 카롤링거왕조에 들어와서 일반인이 수도사의 생활방식을 똑같이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인정됐다. 중세신학자 이시도르는 사람은 왜 혼인해야 하는가를 세가지로 정리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자손들이 땅에 충만하게 하는 것이 그 첫번째 이유이다. 당사자간의 사랑이 목적이 아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모습이 보기 안 좋아서가 두번째 이유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보기 안 좋아서 이브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 부도덕한 성행위를 금하기 위한 것이 결혼의 마지막 이유이다. 중세시대는 위계질서의 사회이다. 창조 과정에서 여성은 2차적이고 부차적이었다. 교회에서는 여성을 악마에게 이끄는 이브와 동일시했고 열등한 존재로 치부했다. 여성은 인간의 타락 과정에서 육체의 죄인 유혹을 대표하고 이 세상에 악을 가져온 도구라고 생각했다. 로마제국을 대신하여 세속에 대한 최고권능을 갖게 된 교회는 여성을 구원의 장애물로 여기고 결혼생활을 신성시하기 보다는 타락한 형태의 하나로 간주했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통제를 당연시했으며 여성의 복종을 결혼 생활의 이상으로, 여성 다움으로 믿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생전에 모든 불평등을 부정했다. 천국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것이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여자 제자들을 거둬들였으며, 너희 중에 죄없는 사람이 있으면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해서 창녀를 구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남자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어머니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 등 여성들만이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중세시대는 예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여성의 예배 집전권리를 부정했다.토마스 아퀴나스는 “양성간의 평등은 원죄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의 종속은 당연한 것이다. 남성은 여성 보더 더 많은 논리와 분별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라고 까지 말했다. 12-13세기 들어서서는 북유럽에서 마리아에 대한 신앙이 강조되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 인간과 신을 중재하는 성모 관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위로가 되었다. 주기도문 사도신경과 함께 로사리오 기도가 3대 기도문으로 격상했다. 민중들은 엄격한 성부와 성자 보다 마리아에서 위안을 찾았다. 성모 마리아의 영원한 본능을 사랑과 용서라고 믿었다. 중세문화의 전성기 12세기는 덜 전투적인 시대였다. 마리아 신앙이 시작된 시기에 궁정연애, 기사도적 사랑, 여성에 대한 낭만적 찬미와 같은 궁중문학이 싹을 텄다. 귀부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전능한 여신에 대한 헌신이라고 믿었다. 11세기말 궁정 음유시에 처음 나타난 이 개념은 단테를 포함해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시대에 와서 혼인은 신랑 신부가 상대를 위해 올리는 성사로 발전했다. 1276년 하느님이 결혼제도를 도입했다고 보고 7성사 중의 하나로 혼배성사를 결정했다. 결혼은 하느님이 맺어준 것이며 인간이 이를 파기(이혼)할 수 없다고 보았다.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혼례의 예식절차를 정한다. 3주전에 결혼을 공고하며 부당한지 여부를 묻고 두명의 증인이 입회하도록 했다. 성직자는 단순히 두사람을 중재하는 역할에서 공증하는 역할로 발전했다. 로마의 법은 내연관계를 중립적인 성향을 띤 혼인의 대안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서 교회가 단죄를 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왕족과 귀족의 결혼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계급의 결혼에 관여했다. 결혼을 통제하려 한 교회는 결국 자기 뜻을 관철시켰다. 십계명에 ‘살인을 하지마라’와 ‘간음하지마라’는 왕족들이 지키기 가장 어려운 계명이었다. 살인을 하지 않고 어떻게 국가를 유지하고 영토를 넓힐 수 있는지 고민이었다. 그전에도 여성이 간음하면 처벌을 받았지만 남자의 간음도 불법화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에는 세속권력도 내연관계를 범죄로 간주했다. 1530년 독일제국은 하느님이 맺어준 혼인관계를 벗어나 함께 생활하는 경우를 범죄로 인정했다. 1970년대까지 혼인관계없는 동거와 반복적인 성관계는 불법으로 금지되었다.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의 르네상스는 인간이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사고가 시작한 시대이다. 인간의 의식에 눈을 뜨면서 관능적인 활동이 팽창했다. 육체가 멋진 남자가 완전한 인간이었고 나이가 들어도 남자에게 육체적인 연애를 요구하는 여자들이 완전한 여자였다. 여성다움이 새롭게 강조되었다. 옷 외모 행동 모든 면에서 여성이 남성과 다르다는 것이 점점 중요해졌고, 의복혁명을 통해 여성의 복장은 더욱 조신해졌다. 각종 예절서나 의학 서적등은 남성의 활력이나 씩씩함과는 대조되는 연약함과 부드러움의 덕목을 여성에게 강조했다. 여성의 미도 찬미되었는데, 아름다움은 더 이상 위험한 자질이 아니라 도덕성과 사회적 지위에 맞게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 되었다. 절대주의 시대에서 귀족계급이나 소수의 도시 부르조아들은 일부일처제의 지고한 이상을 지향하고 있었다. 연애를 통해서 결혼했고 인간적 완성을 맛보았다. 무위도식이 가장 인간적인 삶이라는 철학이 지배했다. 향락을 방해하는 모든 복잡함을 이 세상의 일이 아닌 것처럼 무시했다. 연애는 피부의 접촉이며 육체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높은 헌신을 필요로 하는 아이는 연애의 손발을 묶는 것으로 자식이 많으면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에서 등장한 구혼광고는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중매결혼 대신 개인이 직접 배우자를 선택하기도 하고 결혼이 사회적 이상으로 자리잡았으며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이 장려되었다. 1695년 7월19일 ‘데일리 애드버타이저’에 광고가 실렸다. 나이 재산등이 기본이고 상대가 어떤 사람이기를 희망하는 내용등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지역 신문에서 흔히 보는 연애광고의 시작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면서 교회의 혼인법은 지탄을 받았다. 교회의 혼인은 때로 법적으로 유효한지가 논란이 됐다. 법적 분쟁으로 가면서 그 효력이 문제가 되었다. 교회법에서 규정한 성사 및 제도의 기능을 개개인의 자유의사로 넘기고, 최종적으로는 국가가 법적으로 규율하는 관계가 되었다. 해당 법규에 의해 결혼했고 혼인의 유효성은 결혼신고를 통해서 성립되었다. 남편의 소유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각이 표면화한 건 18세기 후반부터이다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는 아내 어머니이기 이전에 인간임을 선언한다. ‘신여성’이란 주제가 근대 역사에 등장한 순간이다. 신여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까지는 1세기 가까이 걸렸다. 영국에서는 퀸즈칼리지(1848년), 베드포드칼리지(1849년) 등 여자대학이 세워졌다. 여자들에게 대학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여자를 혼전 순결의 형태로 묶어두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독일에서도 1902-1908년에 여성에게 대학 문호를 개방했다. 19세기 자유주의 사조에서는 스스로의 이익을 실협하기 위해 자유롭게 경쟁하는 개개인들은 사회의진보에 이바지하므로 국가의 간섭은 최소화되어야 하고 세습신문에 기초한 불이익이나 제약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왜 이런 신조가 여성에게는 적용이 안되는 것일까 하는 강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경제적 생산이 가정에서 공장으로 옮겨가면서 남편과 아내는 ‘노동의 짝’에서 ‘영혼의 짝’으로 바뀌었다. (스테파니 쿤즈) 농경사회에서도 생산력이 높지 않아서 부부가 함께 일터에 나갔다. 대표적인 농민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 등 많은 그림을 보면 농삿일을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을 볼 수 있다.빈센트 반 고흐의 농부들의 휴식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도시로 나온 남녀들은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노동의 짝에서 영혼의 짝으로 진화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군혼에서 대우혼으로 결혼제도가 바꿔진 이래로 결혼은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의 결합이었고, 서민들 사이에서는 지역 사회 나아가 왕족에게는 온 나라의 일이었다.그래서 농민들의 결혼도 가족과 지역사회가 개입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뤄지면서 결혼이 어느 정도 개인의 결합으로 변화한 것은 결혼의 역사에서 큰 사건이다. 여성의 사회진출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란이 있었다. 여성 노동을 남성의 일자리 경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여성의 임무는 가정을 지배하는 것이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여성 노동에 대한 제한이 필요하다“ ”가정 내에서 유용성이 없거나 주부로서의 역할을 다 한 후의 여성 노동을 산업 현장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여성해방을 저지하기 위한 독일협회에는 ”모성 자체가 직업이 되어야 하고, 어린이 양육이 여성의 사회적 의무이며, 소녀들을 어머니라는 직업으로 교육시키는 것이야 말로 문화적 사명“라고 강조했다. 교회도 ”여성은 특정한 직업에는 적합하지 않다. 여성은 기질상 가사 일이 잘 맞으므로, 여성은 겸손함을 지키면서 아이를 잘 양육하고, 가족의 복리에 힘쓰는 것이 좋다“고 거들었다. <처음 읽는 여성의 역사. 정현백 김정안. 동녘> 페미니즘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예속. 1869>에서 반박했다. 인간은 타고난 신분에 구속될 필요가 없이 가장 훌륭한 몫을 쟁취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재능을 발휘하고 가장 유리한 기회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이 규칙의 유일한 예외자가 여성이라는 데에 개탄하고 동등한 시민권의 획득, 직업 기회의 개방, 직업을 위한 자질 훈련과 교육, 남편이 갖는 과도한 권위의 제거를 여성해방의 기본조건이라고 설파했다. 이 시기의 여성은 아직 직접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전면에 내세우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나서기 보다는 보다 일반적인 요구를 내세웠다. 노예폐지운동 금주운동 매춘폐지운동이 그 예이다. 파시즘 하에서 결혼관은 엘제 포르베르크의 ‘주부의 사명에 대한 자긍심과 가치에 관한 근본적인 고찰’(1933)에 잘 나타나 있다. “결혼과 가족이란 민족공동체의 토대이자 시발점으로 사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공공의 안녕을 수호하고 장려하기 위해 유전병이 없는 후손을 낳아 유능한 국민으로 양육한다는 사명“을 갖고있다고 해 국가주의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핑크컬러 즉 여성의 국가동원체제라고 불린다. 사회주의적 결혼관을 집필한 독일의 아우구스트 베벨 은 ”자본주의 현금거래가 부르주아의 결혼을 애정없는 정략결혼으로, 프롤레타리아의 결혼을 궁핍과 기아로. 하층여성의 열악한 장시간 노동과 매춘의 증가를 가져올 것이다“고 비판했다. 자본주의는 매춘의 대대화를 촉진했다. 러시아의 콜론타이는 <붉은 사랑>에서 ”남녀의 사랑은 동지애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테제를 제시했다. 여성이 전일노동을 할 수 있도록 모성을 재조직한 것이 사회주의 여성관이다.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전장터로 나간 남성노동자의 공백을 메꾼 것은 여성이었다. 일하는 여성이 대거 늘었다. 이들은 소득세도 냈다. 세금이 있는 곳에 권리가 있었고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기 시작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사상 유례없는 경제부흥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연애와 결혼에 대한 세상의 풍습이 10년 단위로 바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프레드 킨제이가 사람들의 성 활동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1948년 <인간 남성의 성적 행위>는 미국 교도소에 수감중인 남성 18,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그 뒤로 10만명 가량의 일반인으로 모집단을 바꾸었다. 1953년 <인간 여성의 성적 행위>를 출간했다. 조사 대상이 된 여성들 중 절반 가량이 혼전 성경험이나 결혼 후 다른 남성과의 성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성욕은 양성 모두 유사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성은 남성 보다 성욕이 덜 하다는 수천년의 통념을 깨트린 보고서로 성해방의 출발점이 되었다. 한편 1953년 <플레이보이>가 창간되었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남성들의 재량권에 맡기고, 아름다움을 맘껏 즐기도록 지원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결혼의 황금기’는 2차대전 이후 1960년대 초반 까지이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1947년- 1960년대 초반, 서유럽은 1952년-1960년대 후반이다. 경제발전의 기적 위에서 20대 초중반 자유연애에 의한 결혼이 만개할 때이다. 95%의 청춘남녀가 결혼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남성을 부양자, 여성은 전업주부라는 역할 분담 위에 시민계급의 생활형 결혼이 대중 매체에 의해 가장 이상적인 이미지로 그려졌다. 1957년에 미국에서 실행한 조사에 따르면 5명 중 4명은 독신을 선호하는 이들이 어디가 아프다고 보았다. 1978년 이 관점을 고수하는 이들은 25%에 불과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광고는 남성은 가정을, 여사는 가족을 책임지는 역할분업을 이상적인 것으로 묘사했다. 세탁기와 청소기의 등장은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남편에게 아내의 세탁일을 돕기 보다는 세탁기를 사 줄 것을 광고했다. 테크놀로지가 가정 내 노동 분업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의 역할 분담을 확대 재생산했다. 대량소비시대에 여성은 소비의 객체가 되었다. 남성의 성욕에 반응하는 하나의 제품이 되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가꿔야 했다. 미용학원과 미용산업은 점점 더 번창했다. 68혁명과 함께 많은 것이 변화했다. 무조건 해야 하는 결혼이라는 관념이 변화했다. 1960년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피임약은 진정한 브레이커였다. 피임도구의 개발로 성과 결혼이 분리가 되었다. 그 이전에는 독일에서는 여성의 3분의1이 배가 부른 상태에서 혼인을 했다고 한다. 임신을 하면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을 남녀간에 의무로 생각했다. 하지만 싱글인생을 즐기자는 생각과 대학진학 여학생들이 늘어나면서 결혼연령도 늦어졌고 다양한 가족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혼인 연령대기 날로 높아졌으나 결혼의사는 점점 줄어들었다. 1970년대에는 낙태가 합법화되었다. 이 시기에 페미니즘이 등장했다. 미국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에서는 현모양처가 미덕이라고 생각했던 미국의 마지막 어머니 세대가 미국 전역을 뛰어달리며 캠페인에 동참한 페미니스트 딸과의 갈등이 그려진다. 혼인율은 드라마틱하게 내려갔다. 스웨덴에서는 1965년 이래 20년 사이에 50%나 떨어졌다.. 프랑스 독일 이태리는 35%나 내려갔다.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이혼률은 1970년 24%에서 1990년에는 42%로 늘었다. 미혼 커플의 동거율은 1965년 10%에서 1980년에는 31.5%(프랑스)로 늘었다. 24세 여성의 미혼률은 미국에서 1970년 36%-1980년 51%로 급격하게 상승했다. 한부모 가정의 수도 1970년 13%에서 1985년에는 28%(미국)으로 크게 늘어났다. 모든 것이 변화했다. 2000년대 들어서서는 알파걸이 등장했다. 지난 몇천년 동안의 통념은 남자가 가정을 부양하는 것이었다.그리고 여성은 그 아래에서 보호를 받았다. 그런데 남성 보다 수입이 많고 능력이 있는 여성들이 대거 등장했다. 집 안에서의 주도권도 바뀌고 역할도 달라졌다. 남성 전업주부도 등장했다. 유모차를 끌면서 라떼를 마시며 육아 얘기를 나누는 아빠들도 등장했다. 미국과 유럽의 전성기 시대에 고졸 남성은 제조업에서 일했다. 평생을 보장받았다. 가정을 책임질 수 있었다. 그런데 외부에서는 세계화로 그들의 일자리가 상실되었으며, 내부에서는 전문직 여성들의 등장으로 여성들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되었다. 정치에 미치는 파장도 컸다. 비혼 졸혼 황혼이혼 동성결혼 등 결혼을 둘러싼 변화와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상상하던 것 이상이다. 어떤 사회학자는 2050년 인구의 절반이 독신이 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가족의 개념에 반려동물이 들어온 것은 오래됐다. 앞으로는 리얼돌과 로봇이 가족의 개념에 포함될 수도 있는 세상이 왔다. 다시 조선의 1920년대로 돌아가 결혼의 역사를 살펴본다. @ 참고서적 풍속의 역사. 에두아르트 푹스. 까치 처음 읽는 여성의 역사. 정현백 김정안 진화하는 결혼. 스테파니 쿤츠. 작가정신 결혼의 문화사. 알렉산드리아 블레이어. 재승출판 처음 읽는 여성세계사. 케르스틴 퀴커.어크로스 고대 로마인의 성과 사랑. 알베르토 안젤라. 까치글방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자본의 성별. 셰림베시에르. atte 결혼의 종말. 한중섭. 파람 비혼1세대의 탄생. 홍재희. 행성B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9-05
  • [민병두의 K-Sapience (26)] 한국인의 연애, 결혼이야기③ 동양의 현모양처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원시시대에는 성을 숭배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그 당시에는 수명이 짧았고 죽음의 위협이 컸다. 평균 수명이라고 해야 20-30세 정도였다. 온갖 위협에서 오는 죽음은 자칫 집단의 안위를 책임지는 종족의 소멸로 이어질 수 있다. 자식을 많이 나서 씨족과 부족, 종족을 번성케 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초자연적인 신비한 힘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고 믿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은 온 세상에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축복을 받는다. 그런 축복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믿음은 동서양에 보편적이었다. 생식숭배는 여성 숭배에서 출발했다. 원시농경사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도 그저 자연의 일부라고 보았다. 다른 모든 것들에서도 영험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생명체는 바다에서 부터 진화하였다. 우연한 일일까? 생식력의 근원으로 물고기를 숭배했는데, 물고기 두마리를 겹쳐서 놓으면 여성의 생식기처럼 보여서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배가 튀어나온 개구리도 여성의 생식력을 표현한 것으로 믿음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인간이 어떻게 생성되는가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여성생식기를 생명의 원천으로 보고 숭배한 것이다.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뱀이 등장했다. 치열한 권력 투쟁이었고 남성 지배의 불평등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여근 숭배에서 남근 숭배로 신앙의 대상이 옮겨갔다. 고대 중국의 여성이 국가를 건설했다는 여러 신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시작한다는 始(시)도 계집 녀 변에 태아가 나오는 모양을 그린 상형문자로 생명의 시작이 여성에게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흔적이다. 성씨의 한자 姓도 훗날 부성주의를 택했지만 여자에게서 태어난다는 고대의 생각이 남아서 굳어져버렸다.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토템신앙에서 조상 숭배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모계사회에서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고 그것이 남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계사회가 되면서 중요해졌다. 종법제도의 설계자들이 남녀유별을 생각했다. 결혼 이전에 남녀의 성적 접촉 기회를 완전 차단했다. <예기>의 ’ 곡례‘에 자세한 규정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중매하는 이가 오고가고 하는 일이 없으면 서로 이름을 알지 아니하며 예물을 받지 아니하면 사귀지 않으며 친근하게 하지 않는다”는 등 매우 엄격했다. 제자들이 맹자에게 질문을 했다. 남녀는 주고 받는 것을 직접 해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형수가 물에 빠져 죽게생겼으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맹자는 그것을 방치하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답했다. 얼마나 규제가 엄격했으면 제자들이 그런 경우는 상정하고 질문을 했을 정도이다. 제사와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남자조상이다. 남자 귀신이다. 조상이라는 이유만으로 후손들로 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절을 받았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위해서 가문의 대가 끊이지 않아야 했다. 생육의 목적은 조상을 위한 것이다.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를 후손이 필요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도 개인의 포부가 아니라 조상과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였다. 입신양명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효의 출발이라고 했다. 조상(祖上)은 조(祖)와 상(上)이 합쳐진 낱말로서, '조'는 신(神)에게 제물을 드리는 것을 가리키고, '상'은 자신보다 위에 있는 또는 먼저 살던 존재를 가리킨다. 따라서 조상은 신처럼 자신보다 위에 있는 존재이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 등등 먼저 살던 존재에게 제사드리는 행위를 매우 거룩한 일로 보았다. 조(祖)에서 왼쪽의 보일 시는 대포와 같은 남근 모양을 하고 있다. 오른쪽도 고대의 전서체를 보면 남성의 성기 모양이다. 조상 숭배는 남근 숭배 신앙, 남성 우위의 이데올로기에서 연유했음을 알 수 있다. 조상은 이제 종교이고 신이고 신앙이 되었다. 성공하면 조상, 즉 남자 귀신의 음덕 덕분이며, 실패하면 조상을 욕되게 했다고 자책했다. 신은 무오류이고, 잘못은 죄를 범한 인간인 나 자신에게 있다는 종교 공통의 토대가 조상신에게도 해당된다. 철학과 윤리학이 그 경향성을 강화했다. 음양론이다. 남녀의 생리적 특성에 근거하여 양은 남성이고 음은 여성이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하늘은 햇빛을 비롯하여 비와 이슬을 내려주니 남자가 정액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땅은 동식물 등 만물을 낳으니 여자가 분만하는 것과 같다. 하늘은 높고 땅이 낮은(천존지비) 것처럼 남자는 높고 여자는 아래(남존여비)에 있다.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남자를 섬겨야 하며, 그래서 강한 남자는 중요한 바깥 일을 하고, 천한 여자는 집안일을 하는 역할 분담이 이뤄지게 되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가문의 힘을 유지하고 키우기 위해서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우선 남자들간에 서열을 정해야 했다. 사람의 지위가 높고 낮음을 결정하는 종법이(宗法)이 만들어졌다.종(宗)도 알고 보면 남성의 성기위에 갓머리를 씌운 것이다. 혈통을 이을 계승자를 정해야 했다. 혈통의 정통은 아들, 그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다. 재산과 지위가 적자에게 상속되고 그를 중심으로 집안이 뭉쳐야 다른 집안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나이 보다 중요한 것은 항렬이다. 군대의 체계와도 같다고 할 정도로 계급화되었다. 그래야 역시 문중간의 대결에서 비교우위의 힘을 구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여자의 서열은 없다. 여자는 다만 후손을 생산하기 위해 존재했다. 따라서 결혼은 인륜지대사이다. 가족을 계승하고 가문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한 과정이자 수단이다. 이렇게 중요한 일에 결혼을 미루거나 독신으로 남아서는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많아지면 자연재해와 같은 사회적 혼란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결혼연령을 국가가 정했다. 너무 일찍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늦어도 안됐다. 하지만 집안의 안정적 계승을 위해서 혼인연령이 갈수록 앞당겨졌다. 조혼의 습속이 일반화되었다. 임신한 배를 가르켜 혼인을 약속한다는 뜻의 지복위혼 (후한서 사복전) 까지 생겼다. 괜찮은 집안에 누가 임신을 한면 선점을 하려는 욕심이 성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혼인약조를 만들었다. 최소 열살은 지나야 맺을 수 있는 인척관계를 앞당겨 맺음으로써 양가의 이익과 우호 증진을 도모하려 한 것이다. 현모양처는 가족관의 중심이다. 전통사회에서 좋은 아버지, 착한 남편에 대한 가르침은 별로 없었다. 그들이 집안에서 하는 일은 아들을 좋은 선생을 만나게 하거나 가문과 조상에 대한 법도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좋은 아버지의 의무가 없었고, 착한 남편의 책임은 더더욱이 없었다. 현모양처는 부부 사이의 불평등조약이며 일방적이라는 것이다(이중텐 교수의 중국 남녀 엿보기. 에버리치홀딩스) 현모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아이를 낳아야 한다. 아들을 낳은 것은 모든 일에 우선하는 대사이다. 아들을 낳아야 하고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 여인으로서 부인으로서 어머니로서 의무를 다한 것이고 보람이 있는 것이다. 아이를 못낳으면 여성의 책임이 되었고, 이를 칠거지악 중의 하나라 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첩을 들이는 것을 합법화했다. 양처는 좋은 아내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좋은 며느리를 의미했다. 여자는 시부모의 뜻을 무조건 받들어야 했고, 시부모의 감정에 모든 것을 맞추어야 했다. 여자가 좋은 며느리인지 아닌지는 시부모가 결정했다. 시부모가 예쁘게 보면 좋은 며느리이이고 나쁘게 보면 나쁜 며느리이다. 남편은 결정권이 없다. 그나마 요즘 남편은 부모와 부인 사이에서 눈치라도 본다. 아들을 못낳아도 시부모가 예뻐하면 면책이 됐다. 남편은 아무런 권한이 없다. 현모양처의 마지막 조건은 남편에 대한 순종이다. 여성에게 독립적인 인격과 자유의지는 없다. 요조숙녀 처럼 행동하면서도 남편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가 적대적일 부 밖에 없었던 이유는 삼종지도라는 유교의 여성윤리에 기인한다. <예기>에 의하면 여자에게는 따라야 할 세가지 도리가 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따르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 삼종지도는 가부장적 질서유지를 위한 중요한 가르침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동일한 남성에게 삶의 의미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했다. 따라서 고부간에는 각자 자신의 삶을 대신할 주체인 한 남성을 놓고 우위를 확보하려는 적대적 관계가 형성될 수 밖에 없다. 여성의 삶은 한이었고 지옥이었다. 과연 그런 삶만 있었던 것일까. 그렇기만 하다면 고래로 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사랑 얘기는 소설에나 나오는 것에 불과했을까? 각종 문헌이나 소설을 보면 각 시대의 사랑은 그 시대의 생각과 통념에 따라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부부이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사랑이 깊어졌을 것이다. 부모의 명으로 결합했지만 진정으로 사랑에 이르는 과정도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혼후 혼외 혼전의 사랑은 염정소설(연애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 사설시조에서는 음담패설에 버금가는 노골적인 묘사가 나오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애절한 사랑 얘기로는 원이엄마 편지가 있다. 널리 알려진 이 글은 부인이 1586년(선조 19년) 31세의 나이에 운명한 원이 아버지를 그리며 무덤에 함께 넣은 것이다. 죽은 남편이 이 편지를 보며 자신을 잊지 말라고 쓴 편지이다. 고려시대 풍습으로 장인댁에서 살아 사랑표현이 자유로와 보인다. “자네 늘 나에게 이르기를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시는고. 나하고 자식하고 누굴 의지하며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자네 먼저 가시는고. 자네 날 향해 마음을 어찌 가지며 나는 자네 향해 마음을 어찌 가지던고. 늘 자네더러 내 이르길 한데 누워서 이보소 남도 우리같이 서로 어여삐 여겨 사랑하리. 남도 우리 같은가하고 자네더러 일렀는데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고” @참고서적 · 중국 남녀 엿보기. 이중텐. 에버리치홀딩스 · 고대 중국의 생식숭배와 神話 속 女神에 투사된 ‘母性’ 모티브. 李 仁 敬 · 중국 고대의 성풍속. 김원중. 을유문화사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9-02
    • [민병두의 K-Sapience (25)]  한국인의 연애, 결혼이야기② 조선 사람 연애를 시작하다.(개화기-1920년대)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기억이 정확치는 않은데 1999년 어느 미국 잡지의 밀레니엄 특집호에 지난 1000년 간의 10대 사건에 대한 여론조사가 실렸다. 징기스칸의 세계 정복이 첫번째였고, 신대륙발견, 인간의 달 착륙 등이 포함됐다. 10대 발명 중에는 현대적인 칫솔이 상위에 올라 있었다. 칫솔은 아름다운 키스에 대한 환상을 현실로 보장해주었다. 여성들의 압도적인 반응으로 그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비슷한 것으로는 현대적인 피임기구의 발명도 있을 수 있겠다. 지난 2000년까지 천년 간 한반도에서 일어난 10대 사건을 꼽으라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한류의 보급, 분단과 전쟁, 민주공화정제의 도입, 기독교의 다수종교화 등이 나열될 것이다. 여론조사를 하면 결혼제도의 변화도 포함될 것으로 생각한다. ‘연애 없는 결혼’에서 ‘연애있는 결혼’으로의 변화는 커다란 전환이었다. 연애있는 결혼은 현대적인 결혼제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성의 인권과 가족 내 권리 보장도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조혼제도 축첩제도 이혼과 개혼을 금지하는 제도의 철폐도 연애에 눈을 뜨면서 비롯되었다. 조선에서는 미국에서 7년 간 공부를 한 유길준이 ‘서유견문’ 제15장에서 자신이 미국 여행을 통해서 본 결혼제도에 대해 소상하게 소개했다. “남자와 여자의 나이가 충분히 차기를 기다렸다가 자기가 결혼하겠다는 것을 부모에게 알리고 스스로 결혼을 결정하는 권리가 있다”고 하여 사랑에 기초한 성인남녀의 결혼이라는 서구의 풍습을 소개했다. 유길준이 관여한 1894년 갑오개혁에서 조혼을 금지하고 결혼의 적령을 규정하며 과부의 재가를 허용했다. 유길준과 개화파는 결혼제도의 변화가 근대국가의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조선시대 중기 부터 굳어 온 이 악습이 하루 아침에 폐지될 수는 없었다. 혼인연령에 대한 규정은 조선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국대전에 남자는 15세, 여자는 14세를 넘어서 결혼하도록 했다. 이보다 어린 나이의 조혼은 금했다. 부귀를 사모하여 혼인을 너무 일찍하면 부모되는 도리를 알지 못하여 그 폐해가 크다고 보고 결혼 하한 연령을 두었다. 하한 연령 보다 어린 나이에 혼인하는 습속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어 이러한 규제를 도입했던 것이다. 부모의 노환을 핑계로 하여 그 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고, 태어나자 마자 부모가 약정하여 부부의 인연을 맺기도 했다. 갑오개혁에 이어 일제도 조혼 금지를 법(1912. 조선민사령. 남자 만17세, 여자 만 15세)으로 정했다. 조금씩 혼인 연령이 늦어지기는 했어도 여전했다. 1925년 여성의 초혼 평균 연령은 16.7세이고 1940년에는 17.5세 였다. 대부분의 인구가 분포하고 있었던 농촌에서는 그보다 다소 일렀고, 도시에서는 2살 정도 늦었다고 한다. 독립신문과 여러 잡지에서도 조혼의 폐해를 지적하고 나섰다. 당시에 개화된 지식인이라면 침묵하지 않았다. “좋은 가정이 합하면 그 나라도 좋고, 좋지 못한 가정이 합하면 그 나라도 좋지 못하느니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반드시 가정에서 시작할 것이요, 가정을 다스리는 도는 혼인에서 시작할 것이라. 사람의 일은 다 혼인에서 근원되어 여러가지로 흘러가는 연고라”<가정잡지. 1906> 주시경은 ‘일찍이 혼인하는 폐’라는 글을 통해 이처럼 사회의 기본단위로서의 가정과, 그 가정을 이루는 출발점으로서의 결혼에서 미개와 야만과 결별할 것을 촉구했다. 박승철도 “지나(중국)의 전제가 세계의 공화적 사상에 무너졌듯, 가정의 전제도 두드려 부수고 가정이 공화되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식민지시대 한국 가족의 변화’ 권희정> 연애 없는 결혼, 그것도 10대 초중반에 가족간 결합으로 강제로 하게 되는조혼이 얼마나 인간을 불행하게 했을까. 1930년에 한국 형무소에 갇혀있던 여자 살인범 수는 47명. 남자 살인범 수 53명에 비하면 남자 1백에 여자 88의 고율이다. 독일의 여자 살인범은 남자 1백에 13.5였고, 일본에서는 남자 1백에 여자 11, 타이완은 남자 1백에 여자 3명이었다. 남녀 살인범 비율은 세계 평균 남자 1백에 여자 4가 상식이었다. 한국의 남자 1백에 여자 88은 엄청난 비율이다. 그런데 여자 살인범의 66%가 남편을 살해했다. 남편 살인범의 평균 초경 연령은 16년3개월. 이들의 평균 연령은 15세 1개월. 거의가 초경 이전에 결혼했다. 남편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여건 때문이었다.<’한국여성의 의식구조’ 이규태> . <경성고민상담소>에 따르면 일제 시대 이혼의 원인은 대부분 조혼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훗날 <민족개조론>으로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한 춘원 이광수는 조혼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논설과 소설을 통해서 사랑에 기초한 혼인을 강조한 주창자이다. 우리 근대 문학에서 처음으로 남여가 서로 떨리는 감정을 갖고 사귀며 결혼을 고민하는 과정을 그려서 사랑을 성문화한 ‘사랑의 발견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조혼의 악습’ ‘조선가정의 개혁’ ‘혼인에 대한 관견’ ‘혼인론’ 등을 통해 기존 결혼제도에 대해 통렬히 비판했다. 이광수는 “나는 조선인이로소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듣고 맛은 못 본 조선인이로소이다. 조선 남녀는 아직 사랑으로 만나 본 일이 없나이다. 조선인의 흉중에 어찌 애정이 없으로리까마는 조선인의 애정은 두 잎도 피기 전에 사회의 관습과 도덕이라는 바위에 눌리어 그만 말라죽고 말았나이다. 조선인인 과연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국민이로소이다… 이에 우리 조선남녀는 그 부모의 완구(장난감)와 생식하는 기계가 되고 마는 것이로소이다“<어린 벗에게. 1917> 이에앞서 번안소설과 신파극은 주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었는데 대중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연애’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2년의 일이다. 일본소설의 번안작 <쌍옥루>에서 이다. 조중환은 번안소설 작가로 유명했는데 <장한몽>은 극화되어서 구름 관중을 몰고 다녔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에 넘어가 첫사랑을 배신할려고 했다가 결국은 이를 악물고 성공한 첫사랑 이수일과 결혼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제 사랑은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사였다. 1919년에서 1923년 60편의 소설 중에 40편이 연애를 소재로 한 것이었다. 신소설, 연애를 본격 다룬 번안소설, 신파극, 근대학교는 새로운 유행의 발원지이고 전파자 역할을 했다. 서양의 선교사와 교회를 통해서, 일본유학생의 체험담으로 알려졌다. 중등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에게 전파되었다. 3.1운동 이후에 수많은 신문 잡지가 창간되면서 대중화된 것으로 보인다. 김원주는 1920년 <신여자>를 창간했다. 결혼 이전에 교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서양에서는 교회에서 알기도 하고 무도장에 부모가 자녀를 데리고도 가며, 가정과 가정 사이에 초대도 있고….남녀 교제가 없는 조선에서는 아마 서로 아는 집끼리 자주 왕래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 줄 압니다. 이 외에 교제가 넓은 이가 책임을 가지고 청년 남녀를 위하여 교제하는 회를…“ 라고 주장했다. 1960-80년대의 미팅, 소개팅에 대한 이론적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문화사. 신영숙의 ‘자유연애 자유결혼, 그 이상과 현실’에서 재인용> 김원주는 ‘신세대 신여자 선언’을 통해 여성도 인간임을 선언했다.그는 ‘신정조론;에서 “우리의 인격과 개성을 무시하는 재래의 성도덕에 대해 열렬히 반항하지 않을 수 없다…정조는 결코 도덕도 아니요, 단지 사랑을 백열화시키는 연애 의식과 같이 고정한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관념”이라며 기존의 윤리규범을 비판했다. 그는 동아시아 3국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던 여성해방운동가 엘렌 케이(Ellen Karolina Sofia Key 1849-1926)를 국내에 소개했다. 엘렌 케이의 저서 <연애와 결혼>은 ‘생명의 신앙’ ‘생명의 종교’라고 할 만큼 널리 보급되었다. 아시아 3국에서 교과서와 같았다. ’여성운동의 제1인자 엘렌 케이’(노자영. 1921) ‘엘렌 케이의 연애관’ ‘여성운동의 어머니인 엘렌 케이에 대하여“ 등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연애를 다룬 이광수의 소설 <무정>에서도 주인공의 독서노트에 그의 이름이 언급될 정도였다. 신여성과 여성해방운동론자들에게 평등한 부부라는 지향점을 제시했다. 엘렌 케이의 연애관은 영육일치의 연예관으로, 연애는 독립적 인격을 갖춘 남여의 자유로운 정신적 육체적 결합이라는 것이다. 성적 방종을 의미하는 자유연애(Free Love)가 아니고 연애의 자유(Freedom of Love)를 주창했다. 성숙하지 않은 남여가 조혼을 하는 것은 우생학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유롭게 연애하고 자유의지에 따라 결혼해야 여성도 가족도 행복하다고 보았다.사랑이 사라지면 혼인은 당연히 깨지는 것이라 하여 이혼도 옹호했다. 그의 생각은 연애 없는 조혼으로 남녀 모두 구속되는 삶을 사는 운명에 처했던 아시아 3국의 청춘남녀에게 복음과 같았다. 근대적의미에서의 교제 , 교제를 통한 결혼에 열광하기는 했는데, 그런만큼 고상해 보이는 만남과 사귐을 어떻게 표현할까를 머리 싸고 고민했다. 일본에서는 1870년대에, 메이지 시대에 서구의 문물을 접한 사상가들은 ‘LOVE’라는 관념에 빠져들었다. 애정 색 정 정교이라는 단어가 있었지만 서구의 러브는 달라보였다. 러브는 근세의 유곽 문화와도 다르고 봉건적인 결혼문화와도 달랐다. 육욕을 넘어선 정신적인 사랑이기도 하고 남녀가 평등에 기초한 그런 남녀관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여러 시도가 있었다. 고대로부터 연과 애가 각각 담당해 온 중층적인 뉘앙스를 잘 살리면서도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기에 적합해야 했다. <만엽집>에서 ‘연’은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껴 그리워하는 것‘을 의미했다. ‘애’는 부모 자식 형제 등을 서로 아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불교용어로 ”무엇을 탐내어 집착하는 것, 욕애(성욕) 유애(생존욕) 비유애(생존을 부정하는 욕망) 등 비교적 부정적인 뜻도 있었다. 이 둘을 뒤섞어 놓으면서 뭔가 고상하기도 하고 낭만적이면서 황홀하게 빠져드는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연애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야나부 아키라가 러브를 연애로 번역하면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고 조선 중국으로 퍼져나갔다. <’연애결혼‘은 무엇을 가져왔는가. 성도덕과 우생결혼의 100년간. 한림대학교 일본어연구소> 연애라는 단어가 탄생한 것은 단순히 한개의 어휘가 더 늘어난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인류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초를 이루는 가족의 출발점, 즉 결혼에 이르는 과정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한다. 신구세대간의 엄청난 갈등 나아가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남녀평등이라는 단어가 아시아에서는 20세기 들어와서 처음 등장했다. 1901년 6월 중국 ’국민보‘에 여성참정권을 제안하는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연애라는 단어는 파급력이 컸다. 바로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시대 사상이 그들에게 영향하는 힘은 무서운 것이다. 그들의 결혼관도 전보다는 몹시 변해왔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다 자유결혼을 당당히 주장한다” 경성의 모 여학교 교사의 얘기가 ‘신여성’(1924년5월)에 실린 얘기다. 이제 연애는 적어도 신여성에게는 필수 처럼 보였다. “8.9세에 기숙사에 들어온 학생들은 기독교인 가정의 학생일 경우 1년에 한 번 귀가가 허용되지만 믿지 않는 가정의 아이들은 집에 갔다가 주저앉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외출을 시키지 않는 방침이었다. 그들이 집에 갈 때는 제복을 입은 한 기수(호위)가 학생을 데리고 갔다가 다시 데려오곤 하였다. 그러니까 이화학당 학생들은 기숙사에 한번 들어오면 10년 내지 7,8년을 마치 중세기 유럽의 수도원에서와 같은 생활을 보냈던 것이다. 고스란히 밖의 세상을 모른 채, 더구나 이성이란 그들의 사고에서 자리잡을 수 없는 불칙한 문제였다” <이화 80년사> 집에 가면 부모들이 시집을 보내기 때문에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조혼 폐습에서 구제하기 위해서 외출 외박을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내보내 주지 않자 시집도 못 보낸다고 생각하고 포기했다.. 연애결혼도 아니고 강제결혼도 아닌 제3의 방식으로 학교결혼, 즉 유학을 다녀 온 신식 청년들과 혼인을 했는데 혼인 전야는 축제 기분이었다고 한다. <한국여성의 의식구조. 이규태. ‘여학교의 조혼 레지스탕스’> 그렇다고 모두가 연애를 거쳐 결혼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시 지역의 일부 계층에서 그런 혁파가 가능했을 뿐 대부부은 아버지의 의사가 결정적이었다. 박완서 작가의 일제시대에 대한 기억은 분명하고 구체적이다. 그는 ‘미망’(1994)에서 “이들이 아무리 망측해 하고 단속을 하려 해도 청춘남녀라면 누구나 자유연애를 꿈꿀만큼 당시 새로운 풍조의 매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걸 실제로 누릴 수 있는 층은 사각모짜리에 국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에서건 일본에서건 사각모만 썼따 하면 설사 조강지처가 있는 몸이 순진한 처녀를 유혹해도 자유연애라는 미명으로 멋있게 보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하면 바람이 났다, 난봉이 났다고 하여 비판을 받았다.“고 서술했다. 문제는 연애가 무엇인지 이론적로는 알겠는데 본능적으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연애=성교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서 연애박사 연애전문가 같이 연애꾼을 비판하는 유행어가 등장했다. 김명순은 “재미있는 연애소설을 읽으면…끝없는 공상에 취하여 앉아있는 처녀들의 가슴은 이미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니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올시다”고 자유연애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신여성과 대학생, 유학생 간의 연애는 커다란 사회문제화 되었다. 조혼의 습속으로 대학생이나 일본유학생은 대개 고향에 조강지처가 있었다. 그들이 볼 때 부인은 새까맣게 탄 얼굴, 살찐 허리로 보기 조차 싫었다. 몇 년 만에 돌아와 부인을 만나면 형편없는 배움에 모든 것이 싫었다. 반면 새로 만난 신여성은 비단저고리,흑색의 모시치마,굽이 높은 양화에 대화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연애 감정은 깊어졌고, 이미 조강지처가 있는 줄 알면서도 결혼을 했다. 1926년 발표된 ‘사의 찬미’는 그 시대 사회상의 반영이다.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1897-1926)이 불렀다. 윤심덕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해서 천재극작가 김우진과 연애를 했다. 김우진은 조혼을 하여 혼인을 한 상태였다. 두 연인은 1926년8월 4일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연락선에 탑승했다가 바다에서 사라졌다. “광막한 광야에 달니는 인생아 너의 가는곳 그 어대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차즈려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죽으면 고만잀가 행복찻는 인생들아 너찻는것 서름.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도다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우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잀가 행복찻는 인생들아 너찻는것 서름.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혓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의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업도다. 눈물로된 이 세상아 나죽으면 고만잀가 행복찻는 인생들아 너찻는것 서름”(‘사의 찬미’ 가사 전문) 동거혼 사실혼을 하고 있는 신여성들을 과거의 첩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이들을 ‘제2부인’이러고 불렀다. 이렇게 되자 자유연애는 환상에 불과하며 사회적인 모멸과 고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법적으로 이혼과 재혼을 할 수 있었지만 여성이 독립적인 경제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어서 대부분의 구여성은 진퇴양난이었다. 또 <장한몽>에서 보듯이 황금만능주의가 스며들었다. 연애를 거치는 결혼이 곧바로 새로운 가정과 가족제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은 조선시대와는 그 양태가 달랐을 뿐 현모양처를 요구하는 근대화된 남성 우위로 발전을 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조혼제도는 왜 생겨났을까. 현모양처라는 여성의 이중삼중 굴레는 어떻게 문화와 의식과 도덕으로 발전했을까? 동서양에 걸쳐 가부장제와 현모양처가 정착해 온 역사를 살펴보고 일제 시대의 중후반기 결혼 문화로 넘어간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8-29
    • [민병두의 K-Sapience (24)] 한국인의 연애, 결혼이야기① 들어가는 글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한국인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 지난 백년을 살펴보면 결혼과 가족제도는 가장 크게 변한 사회 습속이다. 조선시대의 구습에서 지금의 만혼 비혼 동성혼까지 가장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연애와 결혼은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족의 문제이고 당시대의 사회적인 통념과 관습의 영향을 받는다. 왜 결혼을 하느냐, 가족에서의 남녀의 역할과 권한은, 가족의 형태는, 결혼적령기는, 가정의 주 수입원 등등 모두 사회적 이슈이다. 크게 보면 원시시대에서 농경사회에서 바뀌면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 남녀가 함께 모여 사는 집단혼은 생산력이 아직 발전하지 않은 단계의 산물이다. 동물과 자연 등 외부로 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모여서 살아야 했다. 남자들은 주로 사냥을 나가고 남녀가 성을 공유하니 아버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혈통만 분명했다. 이런 모계사회는 부계 사회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농경사회로 이전하고 잉여생산물이 생기면서 이를 기록하고 정리할 문자가 생겼다. 또한 농경사회에서 힘이 강한 남성이 주도권을 잡았다. 사냥을 나가던 원시사회에 비해 남성의 안정적 수확률이 높아졌다. 정주사회가 되면서 재산과 지위를 대를 물려 주다 보니까 일부일처제의 가부장제 사회가 되었다. 남자의 혈통이 중요했다. 가부장제를 정당화하는 온갖 신앙과 조상신 숭배의 유교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다. 수천년의 가부장제에 균열이 생긴 것은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혁명 덕분이다. 연애의 자유와 자유로운 결혼관이 생겨났다. 근대적인 결혼제도가 도입되었어도 1970년대 까지는 동서양 모두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다. 68혁명과 페미니즘의 보급으로 가족에서의 성역할이 도전을 받았다. 맞벌이와 공동육아, 사회적 육아 등 새로운 개념이 생겼다. 평균결혼연령이 늦어지는 등 백년 전에 비하면 만혼이 일반화되었다. 21세기 정보화사회로 들어와서는 고수익 여성이 늘어나고 여러 사회적인 변화가 따르면서 비혼도 새로운 사회현상이 되고 있다. 결혼이 ‘사회 안의 결합’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조선 시대의 전통 결혼식은 납채 문명 납길 납징 청기 친영이라는 중국식 여섯가지 예, 즉 육례로 구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랑 신부의 역할이 거의 없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가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치러지는 듯했다. 조선 시대 결혼의 전범이 되었던 중국의 <예기> ‘혼의편’에 “두 성씨가 합하여 위로는 조상을 섬기고 아래로는 대를 잇는 것”, 즉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도 부모를 위해서도 아니며 오래전에 죽은 조상을 위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니 신랑 신부의 일이 아니라 가족의 일이 되어 버린다. 서양식 결혼식이 도입된 지 100여년이 된다. 서양식 결혼에서는 신부 아버지가 신부 손을 잡고 입장하여 신랑에게 인계를 한다. 한 여성이 남자인 아버지의 권한 아래 있다가 다른 남자인 지아비의 권한으로 넘어 가는 부권사회의 가장 상징적인 표징이다.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주인공 같지만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순서에 따라 입장하고 예물을 주고 받고 축가를 듣고 퇴장한다. 결혼이라는 개인사가 교회와 같은 공공의 장소에서 치러지면서 결혼의 사회성이 강화되었다. 요즘 신세대는 신랑 신부가 결혼 이야기를 하고 가족이 축사를 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제는 주인공을 찾아가는 느낌이 든다. 요즘의 결혼정보회사의 원조는 중매, 중신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매자가 있었다. 연애가 없었던 과거에는 중매인의 역할이 중요했다. 디아스포라의 오랜 기간을 경험했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인정받는 직업이었다고 한다. 서양에서 중매자가 개입한 이유는 혼인이 일종의 사회적인 행위이기에 사회적인 약속으로 반드시 공증과 승인을 거쳐야 한다는 논리에 기인했다. 나중에 이 공증을 교회가 떠안았다. 가톨릭의 칠성사 제도가 정착되면서 부터이다. 중매인이 있으면 신분이 내려가는 강혼의 위험성이 적어진다. 신분이나 재테크를 돕는 승혼 혹은 같은 계급끼리 결혼을 하는 동질혼을 돕는다. 가족간에 지참금 예물을 직접 조율할 때의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도 한다. 지난 백여년간 연애와 결혼에 얽힌 한국인의 삶을 십여회에 걸쳐 살펴본다. 연애의 시작부터 미팅 소개팅 데이팅앱에 이르는 결혼의 전사, 조혼에서 만혼 비혼에 이르는 결혼적령기의 문제, 가족계획에서 한국인의 멸종 위기까지, 시월드에서 친월드로 중심의 변화, 축첩에서 제2부인 자유부인 논란등 다양한 이슈를 짚어본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8-27
    • [민병두의 K-Sapience (23)] 한글의 세계화는 가능한가? ④한글전용이냐, 한자병행이냐 (1945-)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우리나라에서 왕의 명칭이 중국식으로 바뀐 것은 신라 지증왕(500-514) 때 부터이다. 국호도 신라로 통일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는 백제어와 고구려어가 시간을 두고 사라졌을 것이다. 기원 후 500년 경부터 상당히 많은 고유어가 중국한자어로 대체된다. 멸망한 고구려 백제의 언어들은 아주 제한적으로 남아있다. 고려가 중국식 문화를 흡수하면서부터는 귀족들의 이름이 중국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고려 상류층이 주자학을 도입하면서 성씨가 보급되었다. 이름까지 한자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우월한 문화권이 침투하면서 강세언어가 함께 유입된다. 허세와 유행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제도와 문화가 된다. 어느 새 우리의 사람 이름은 완전히 중국 스타일이 된다. 일본이 1910년 민적부를 도입하고 1922년 조선호적령을 실시하면서는 성이 없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 전에는 성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한자로 이름을 등록해야 했고, 1939년 이후에는 창씨개명까지 해야 했다. 일제의 영향으로 여성들의 이름 뒤에 자(子)가 들어갔다. 1948년 한글전용법이 시행되면서 한글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6년에 서울대학교 국어운동학생회가 '고운이름자랑하기대회'를 열면서 우리말 이름이 복권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유어로 이름을 사용했던 시기가 더 길었지만 지금 고유어 이름은 아주 극소수이다. 중국식 이름은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지명도 한자어로 바뀌었다. 사람 이름을 다시 옛날 식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할까. 또 옳을까? 색깔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다섯개이다. 빨강 파랑 노랑 하양 검정. 여기서 파생한 우리 말의 형용사가 많다. 미묘한 차이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경계가 되는 색을 표현하기 위해 형용사가 발달했다. 빨갛다 새빨갛다 뻘겋다 시뻘겋다 검붉다 불그레하다 불그스름하다 불그죽죽하다…. 노랗다 뇌랗다 샛노랗다 연노랗다 누렇다 누르스름하다 노리끼리하다 노르죽죽하다. 우리의 색상 고유어가 다섯가지에 머무는 동안 주황 연두 녹색 청록 남색 보라 자주 같은 말이 수입되었고, 외래어였던 이 단어들에서는 다양한 파생어나 형용사가 발전하지 못했다. 현대 서양 미술이 소개되면서 들어온 색깔의 종류와 코드는 더 많다. 이런 어휘들을 우리 고유어로 대체할 틈도 없었고 시대적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영어로 쓰여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우리가 세계 문화와 문명을 다 만들 수도 없고, 우리 문자가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도 없다. 외국에서 들어온 문명과 함께 수입되는 문자와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가, 아니면 변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영원한 숙제이다. 네덜란드와 일찍이 교류를 한 일본에서는 학문을 적극 수입하기로 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난학(蘭學)이 발달했다. 우다카와 요안 등 일부 학자들이 어휘의 번역에 나선다. 구락부(俱樂部 club)같은 음역어도 적지 않지만, 우다카와 시대에 광범위하게 만들어진 번역어는 동아시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의학 화학 등의 용어는 물론 개인 사회 공화국 등 정치 경제 분야의 많은 단어가 이때 만들어졌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현대 한자어휘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도 이 과정에서 일본식 한자어 어휘를 대거 받아들였다. 문명 문화 문물을 따라 언어도 전파되게 되어있다. 일본의 근대용어가 일본 지식인이 만든 것이라면, 중국 근대 한자 어휘는 서양 선교사가 만든 것이 많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그리스도교(基督) 예수교(耶蘇)가 음역어이고 천주교(天主)교는 번역어이다. 현대중국에서는 새로운 번역어를 만들고 있다. 소리글자와 뜻글자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조어능력이 뛰어난 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라틴어에서 파생한 영어나 프랑스어는 라틴어 뿌리를 갖고 있어서 이것을 갖고 새로운 어휘를 만들 수 있다. television telegraph telescope(microscope) telephone... 여기서 tele는 멀다(far)는 뜻이고 vis는 본다(see)이다. 어근을 조합한 것이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문화와 문명이 전진하고 어휘도 풍부해졌다. 현대 기술 용어의 상당수가 영어에서 생산되고 있다. 뜻글자인 한자의 조어능력도 뛰어나다. 한자는 쓰기 불편하고 복잡하기는 하지만 뛰어난 글자이다. 한자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상형문자 중에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글자가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는 신조어를 만들기에 용이하다. 그런 관계로 앞서 본 것처럼 근대 이후의 서양 어휘의 다수가 중국식이든 일본식이든 한자어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글전용을 세 단계에 걸쳐 완성했다. 해방 후 일본말 걷어내기 운동에 나섰다. 중국식 한자 어휘와 일본식 한자 어휘를 점차, 그리고 마침내 모두 한글로 표기하기게 이르렀다. 우리말과 글을 지키겠다는 강고한 역사의식과 주체의식이 형성된 덕분이다. 해방 직후 군정청 조선교육심의회는 교과서에서 한자를 제외하고 한글만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글 전용론자와 한자 폐지 반대론자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1948년에는 한글전용법이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고 했다. 해방 직후 한글을 전용하기로 한 것은 우리나라 문맹율을 떨어트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래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대체로 국한문을 혼용했다. 1963년에는 일상생활에서 한글과 한자의 구별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육목표가 세워지고 교과서에 한자를 병용했다. 여전히 조사와 어미 만을 한글로 쓰는 문화가 강고했다. 박정희는 1968년 한글전용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정부 공문서를 한글 전용으로 작성하게 했으며 학교에서 가르치던 상용한자를 폐지했다. 1970년 1월부터 공문서에는 한글만 쓰게 했다. 1948년 한글전용법의 단서조항을 삭제한 것이다. 그러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이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면서 1990년대에는 모든 언론이 한글 전용을 하게 되었다. 한글 전용을 위한 마지막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이 시기에 불어닥쳤던 민족주의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컴퓨터 도입으로 인한 기계화의 영향도 컸다. 2005년에는 국어사용을 촉진하기 위한 국어기본법이 제정되었는데 “공공기관의 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2012년 ‘어문정책 정상화 추진위원회’(회장 이한동)가 국어기본법이 위헌이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국민의 표현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국어정화위원회를 두어 우리말 도로찾기 운동(1948)을 시작했다. 우리말이 있는 것은 일본말을 버리고 우리말을 쓴다, 우리말이 없는 것은 옛말에라도 찾아보아 비슷한 것이 있는 것은 그 뜻을 새로 정해 쓴다(도시락), 옛말에도 없는 말은 다른 말에서 비슷한 것을 얻어 새 말을 만들어 쓴다(단팥죽 메밀국수 통조림 튀김 꼬치 전골), 일본식 한자를 버리고 우리가 전부터 써오던 한자를 쓴다는 등의 원칙을 마련했다. 우리말의 문어체가 미쳐 형성되지 않은 시기인 탓에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식의 문장을 흡수했다. -에 대한, -에 관한, -에 의한 등의 문장은 개선 노력이 있지만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숨 죽인채 귀를 기울였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등 많은 표현이 일본에서 유래했다. 일본어의 유제를 많이 거둬냈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다. 스메끼리 쓰봉 우와기등의 생활용어, 미다시 등의 신문용어, 시다 등의 봉재 용어, 오야봉 등의 사회용어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앗사리(화끈하게) 노가다(막일)등 많은 단어가 일본어인지 한국어인지 모르는 채로 사용되고 있다. 결정적인 것은 근대사에서 유입된 일본식 한자어휘이다. 대통령 헌법 경찰관 도서관 박물관 승강기... 일본에서 근대 이후 들어온 한자 어휘의 80% 이상은 그대로 남아있다. 일본어와 일본식 표현이 정리되는 사이에 영어와 영어식 표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영어에서 유래된 표현법도 많다. -중에 하나(one of - ), -을 의미하지 않는다 (does not mean that), -라 불리우다 (called), -모임을 갖는다(have a meeting) 등등. 우리는 원래 잘 안 쓰던 피동태도 많다. 시제가 발달한 표현을 갖고 오는 경우가 많다. 진행형 완료형 등이다.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일본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과시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영어 단어를 섞어 쓰거나 영어식 표현을 써야만 더 소통이 잘된다는 인식이 늘어났다. 조기영어교육, 기러기 아빠 등 새로운 풍속도가 생겼다. 아파트 브랜드를 포함하여 많은 영어 상표가 범람하고 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때는 모두가 읽고 쓸 수 있도록 한 포용의 언어, 평등의 언어였다. 과도한 외국어의 사용은 한글이 발음기호화되면서 배제의 기능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된다. 외래어와 외국어를 추방하고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이냐에 대해서는 반대도 적지 않다. 어휘가 풍요로워 질수록 그 나라의 언어가 더 강력해진다는 것이다. 언어의 잡종교배를 나쁘게만 보지 말고 서로 교류하면서 성장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글만으로 우리말과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고유언어로 한자어를 대체하거나, 외국어에 대해 가능하면 북한의 조선어처럼 적절한 번역어를 찾는 방법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최현배도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만족할만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원체 한자어의 침투가 심하기 때문이다. 토박이 말을 사용하여 주체어의 어휘를 확장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우리 말이 더 풍성하고 다양한 어휘로 뻗어나가기 전에 침식됐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가 다섯가지 색깔만을 어휘로 갖고 있다가 외국어의 침투를 경험하면서 결국에는 다른 언어에 뿌리를 둔 어휘를 사용하게 된 것을 짚어봤다. 우리가 한글로 많은 어휘를 대체하기에는 우리 고유어 어휘의 수가 적고 외국어가 우리 언어에 2층 3층 4층 건조물을 이미 구축하고 있다. 요즘은 “심심(深深)한 위로를 드린다” “무운(武運)을 빈다”와 같은 용어를 젊은 세대들이 "심심하게 위로한다“ ”운이 없기를 바란다“등으로 오독하면서 한자어 교육을 다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단순히 심심한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한자교육을 하자는 주장은 아닐 것이다. 한글인 사흘을 4일로 이해하는 문해의 한계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문해 능력의 저하를 지적하는데 이는 언어의 유행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 앞세대에서도 뒷세대가 자신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지금은 심심한 위로를 드린다와 같은 고어적인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 힘든 말이나 어휘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언어스타일이 대체할 것이다. 어떤 어휘는 도태하고 어떤 어휘는 새로 만들어지게 되어있다. 언어의 주력은 서울의 중산층 40-50대이다. 표준말이다. 하지만 새로운 언어의 생성은 젊은 층이 담당하고 있다. IT시대의 신조어들이 우리 언어에 대거 흡수되고 있다. 최근 20년간 새로 늘어난 어휘의 증가는 반가반가 등 SNS상의 언어다. 야민정음(야구갤러리+훈민정음)도 특별한 공간에서는 사용하고 있다. 앞서 노년세대는 한자문화권, 중장년세대는 영어문화권, 청년세대는 IT문화권에 산다고 했다. 30년전 까지만 해도 논어 맹자를 인용하여 덕담을 하거나 글을 써야 품격이 있어보였다. 지금은 그렇게 하면 꼰대라고 한다. 어떤 표현은 쇠퇴하고 다른 표현이 등장한다. 언어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이다. 훈민정음이 중국어 발음기호이고, 국한문 혼용을 해야 한다는 뉴라이트 계열의 사고로는 한글을 발전시킬 수 없다. 지금까지 쌓아온 한글의 역사를 뒤로 돌릴 수는 없다. 우리가 너무 많은 외국어 어휘의 침식을 당해 한계가 있지만 첫째 홈페이지를 누리집으로 하는 등의 번역어를 늘리고, 둘째 고유의 어휘로 할 수 있는 것은 복권을 하고, 셋째 한자어에서 유래된 어휘 중에 낡은 것은 대체하는 방향으로 꾸준한 노력을 해야 한다.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현재의 한자어를 우리 말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은 것처럼, 한자를 병용하는 것도 저항이 커서 불가능하다. 언어사 생성되고 발전하고 쇠퇴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춰 우리글과 우리말을 정돈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한자를 공교육에 흡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연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 말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한편 세계화시대에 이웃언어에 대한 능력을 증진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영어만큼 중국어가 중요한 시대이다. 특히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그렇다. 언어의 연관성도 강하다. 그 많은 시간을 들여 영어를 배우면서 한자 학습을 배제하는 것이 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 한자를 가르치다고 해서 한글전용 자체가 흔들릴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도 없다. 그만큼 한글전용이 공고해졌으니 유연성을 가져도 될 것이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8-17
    • [민병두의 K-Sapience (22)] 한글의 세계화는 가능한가? ③고종, 한글을 국문으로 선언하다 (1894-1945)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이 시기는 우리 글이 한글이라는 명칭을 부여받고, 띄어쓰기등 맞춤법을 만든 시기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450년만에 국문의 지위를 확보했다.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의 탄압에 맞서 우리 문자를 지켰는데, 일본제국주의라는 새로운 침탈자에 맞서야 했다. 이 때에 한글이 현대화되고 보존된 것도 한글의 기본정신인 평등주의라는 자산이 있어서 가능했다. 조선왕조의 후반기에 한글 보급은 신흥종교의 몫이었다. 천도교 천주교 기독교는 모두 이 땅에서는 신흥종교라고 할 수 있다. 신흥종교는 신분제 타파와 평등주의를 내세웠는데 따라서 당연히 민중의 문자인 한글을 사용했다. 최제우가 만든 천도교와 동학은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용담유사’를 한글로 만들었다. 교훈가 안심가 용담가 권학가 도덕가 등을 언문 가사체로 만들어 부녀자들이 쉽게 따라하게 했다. 사람이 하늘이라는 만민평등사상은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와 맥을 같이 했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신앙을 가지면 모두가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여 세상을 흔들었다. 조선은 다른 나라와 달리 천주교를 신도들이 나서서 받아들이고, 서방 사제가 들어와서 포교하기에 앞서 조선인 사제를 먼저 배출한 특별한 역사를 갖고있다. 1779년에는 정약전의 십계명가, 이벽의 천주(天主)공경가가 한글로 만들어졌다. 조선에서는 노랫말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학습방법이었다. 정약종이 지은 ‘주교요지’(主敎要旨)는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최초의 한글 교리서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1850년대에 입국하며 ‘한자 한글 불어사전’ ‘라틴어 한글사전’ ‘한글 한자 라틴어사전’등을 발간했다. 천주교의 조선 포교는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교회가 창립된 지 얼마 안되어 일부지역에서는 한글교리서가 집집 마다 보급되었다. 새로운 세상이 오고 열심히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신앙은 백성들에게는 진정 복음이었다. 세례를 받은 일부 양반 계층은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종들과 한 형제로 생활을 했다, 유교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였다. 천주교가 한글 보급의 역할을 하게 되자 신유박해의 빌미가 된다. 이때 압수한 교회서적 201권 중에서 128권이 한글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한글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훗날 대원군은 언문을 잘하면 천주학쟁이라고 했을 정도로 한글은 신흥종교의 무기였다. 개신교는 천주교 보다 후에 조선에 전파되었지만 보다 적극적이었다. 19세기 말 조선에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영사전과 문법서를 작성하고 신식활자를 통한 인쇄기술로 널리 이를 보급했다. 이들은 한글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한글 띄어쓰기 등 한글현대화에 기여했다. 아펜젤러 언더우드 보다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먼저 한 존 로스는 스코틀란드 장로교회 출신이다. 압록강변 접경지역에서 포교활동의 거점을 잡고 있던 중 한글에 눈을 떴다. “여자라 할지라도 며칠이면 해독할 수 있는 훌륭한 문자를 가진 나라”, “매우 단순하고 아름다운 표음문자를 갖고 있어 누구나 쉽고 빨리 배울 수 있다. 성서와 전도문서의 보급이 가장 쉬운 나라”라고 평했다. 1877년에는 신약성서를 번역한 ‘예수셩교젼셔’를 발간했고, 선교사들을 위한 한국어교재인 ‘조선어 첫걸음’(Korea Primer)을 펴냈다. 처음으로 띄어쓰기를 한 서적이다. 가로쓰기도 시도했다. 그리고 1882년 성서번역위원회가 만들어져 최초의 한국어 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를 발간했다. 이때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1892년 장로교선교공의회는 “모든 문서활동에 있어서 한자의 구속을 벗어나, 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목표가 돼어야 한다”며 한글을 선교공용어로 정했다. 고종황제가 1894년 고종이 훈민정음을 국문으로 선포하기 2년 전의 일이다. 호머 헐버트는 한글의 역사와 독립운동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는 인물이다. 1886년에 초대 왕립육영공원 교사 즉 영어교사로 들어와 한글의 위대함에 눈을 떴고, 한글을 업신여기는 조선인들을 보면서 안타까워 했다. 뉴욕트리뷴에 “진정한 소리글자(true alphabet)는 한글”이라는 글을 게재했고, 한국평론(The Korean Review)에서는 어미가 동사로 끝나는 한국어가 힘이 있어서 대중 설득에 더 유용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글 이전에 1000년 이상 쓰여온 이두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했다. “이두는 지식인 사이의 의견교류에 한문이 부적격하다는 사실상의 선언”이라고 했다. 배재학당에 영어를 배우러 온 주시경과 사제지간이자 동지로서 한글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헤이그 밀사로 다녀온 그는 조선에서 추방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자신을 묻지말고 조선땅에 묻어달라고 했는데 유언대로 양화진성당 선교사묘역에 묻혔다. 헐버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세계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만들었다. 개화기의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세계를 들여다 보는 창의 역할을 하는 책이었다. 고종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개혁 조치의 일환으로 1894년 언문을 국문(나랏글)로 선포했다. 공문서에 관한 칙령을 통해 모든 법령을 국문으로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섞어쓰도록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450년만에 우리 문자가 국가 공용 문자의 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외세의 침략에 맞서 민중을 포섭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였다. 이어 1897년에는 광무개혁을 통해 중국과의 속국관계를 청산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개화파인 유길준은 ‘서유견문’(1895)을 쓰면서 “서투르고 껄끄러운 한자로 얼크러진 글을 지어서 실정을 전하는데 어긋남이 있기 보다는, 유창한 글과 친근한 말을 통하여 사실 그대로의 상황을 힘써 나타내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했으나 지식인들의 반발로 한발 물러서서 국한문 혼용체로 집필을 했다. 1896년 서재필 주시경과 호머 헐버트가 함께 만든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신문이다. 본격적으로 띄어쓰기도 시행했다. 띄어쓰기는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면서 보편화되었는데 한글의 가독성과 시각화를 제공하는 일대 변화였다. 독립신문은 사설을 통해 국문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횡서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병합하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은 위기를 맞는다. 1911년 조선인을 일본 식민으로 육성한다며 조선교육령을 발표했다. 국어(일본어)를 보급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때부터 전국의 각급 학교에서 일본어 수업시간이 조선어 수업시간의 두 배 이상으로 강제화되었다. 말과 글을 없애버리려는 포석이었다. 말과 글은 그 나라의 생각과 감정과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독립신문 창간에 관여했던 주시경이 들고 일어섰다.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고 한 그의 말에서 보듯이 말은 민족의 모든 것이다. 훗날 그의 제자인 최현배도 “한글이 민족의 숨”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뜻있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말모이’(국어사전) 편찬에 나섰으나 돌연 세상을 떠났다. 주시경이 남긴 업적 중에 하나는 우리 문자에 바른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그전에는 언문 정음 가갸거겨 가갸글 등으로 불리웠는데 1913년 배달말글몯음 총회에서 모임의 명칭과 관련해 배달말글은 한글로, 몯음은 모로 해서 한글모로 부르기로 정했다. 한글의 한은 하나되다, 크다, 바르다는 뜻을 품고 있다. 1926년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이하여 한글이라는 공식 명칭이 채택되었다. 3.1운동은 전국에서 200만명이 참여한 독립만세운동이다. 그날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만세 소리가 울리기 전까지 일제는 아무런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다. 전국 각지에서 성명서가 인쇄되고 비밀리에 전달된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20세기 초에 우리 민족부흥운동 차원에서 수많은 종립학교가 세워졌다. 특히 개신교는 1교회 1학교 설립운동을 통해 미션스쿨을 대거 개교했다. 1910년에는 종립학교 581개 중에 90%가 개신교 미션스쿨이었다. 조선인구의 1.5%에 불과했던 개신교의 학교 설립 의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3.1운동 당시에는 전국에 823개의 종립학교가 있었다. 개신교 학생들은 주일예배에서 사용할 주보를 등사기로 작성하는 훈련이 되어있었고 YMCA YWCA활동을 통해서 학교간에 소통할 수 있었다. 한글과 3.1 독립운동과의 접점에 평등을 외치는 신흥종교가 크게 역할을 한 것이다. 3.1운동의 여파로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우리 문자를 사용하는 신문이 등장한 것도 한글을 보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29년 각계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조선어사 편찬회가 발족했다.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개편되어 조선어사전 편찬을 시작했다. 1933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었다. 철자법이 최초로 완성된 기념비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40년에는 ‘사정한 조선말 표준어 모음’을 발표했다. 1939년 사전을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1938년 조선교육령을 통해 조선어교육 폐지에 들어갔고, 1942년 5월에는 모든 생활공간에서 일본어를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한글을 보존하려고 했던 그 노력 덕택에 해방 직후부터 우리 글로 교과서를 만들고 교육을 할 수 있었다. 한글은 진정 민족의 목숨이었다. 이어령 등 일제 말기에 학교를 다녔던 많은 이들이 한글을 몰랐다가 해방 후 학교에서 한글을 제대로 배웠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8-14
    • [민병두의 K-Sapience (21)] 한글의 세계화는 가능한가? ②세종, 문자의 역사를 만들다(1444-1894)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중세시대에 동양과 서양에서는 가장 지배적인 문자가 있었다. 서양에서는 라틴문자, 동양에서는 한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독일의 어느 왕은 신과 대화할 때는 라틴어로, 말과 얘기할 때는 독일어로 했다고 한다. 가장 열등한 언어로 독일어를 인식했던 것인데 훗날, 어떤 언어학자가 독일어도 뿌리가 라틴어에 있다는 것을 밝혀내면서 독일인의 언어열등감이 사라졌다고 한다. 영국의 왕도 프랑스어에 비해 영어가 열등하다고 생각하여 부끄러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양에서 한자를 변형하거나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신라시대에 설총이 이두 문자를 집대성했고, 일본에서도 서기 7세기경에 가나가 만들어졌다. 한자를 기본으로 두고, 한자에서 딴 글자를 갖고 문자를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한자는 진짜 문자(眞名), 가나는 가짜 문자(仮名)라고 했다. 이어서 900년경에는 거란문자 그리고 몽고문자등이 잇달아 만들어졌다. 여진족도 여진문자를 만들었다. 조선을 건국하고 네 번째 임금인 세종대왕은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3년 후 양력 10월9일 이를 반포했다. 세종대왕은 동양의 레오나르드 다빈치라고 불리울 정도로 천재성이 넘치는 인물이다. 그는 고려말 조선초의 어지러운 정국에서 외교를 튼튼히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언어가 통해야 한다고 생각해 중국 몽고 일본어등 4개국어의 전문 통역관을 양성한다. 아울러 그 스스로 여러 나라의 문자를 섭렵하면서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가 된다. 세종은 성리학 이념에 기초해 세워진 나라에서 일부 사대부를 제외하고는 그 건국이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국민국가라는 개념은 없었던 시대이지만 적어도 고려왕조와는 차별화되어야 했고, 태조 이성계의 역성 혁명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했다. 해방 후 남북한 모두 가난할지라도 국민국가로 빨리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초등교육의무화와 징집제도 덕택이었다. 학교에서 문자를 배워 각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체득하고, 전쟁을 통해서 애국심을 배양했다. 남북 모두에서 이승만과 김정일을 국부로 만들려는 신격화가 있었다. 세종대왕이 성군으로서 갖고 있었던 특장은 애민사상이다. 그는 공노비의 산후휴가제도를 포함한 많은 복지제도를 도입했다.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을 발명하여 농업에 이용하도록 했다. 당시 우리의 중심 산업이 농업인 점에 비추어 남다른 혜안을 갖고 있었다. 농업이 잘 되어야 백성이 편안하고 국가가 태평할 수 있다는 생각이 기초가 되었다. 세종대왕은 무엇 보다 송사에서 글을 모르는 백성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상소를 보면서, 힘 없는 백성이 자기 생각을 문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가 창제한 훈민정음은 지배계층의 문자인 한자에 맞서 민중들의 언어로 발전을 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곧바로 후속작업에 돌입한 두 가지를 보면 글을 만든 목적이 분명하다. 하나는 동국정운(東國正韻)으로 한자의 발음기호를 편찬한 것이다. 다른 갈래는 용비어천가와 삼강행실로 나라의 건국이념에 대해서 백성들이 쉽게 읽고 동화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훈민정자라고 하지 않고 훈민정음이라고 한 점, 그리고 훈민정음을 통한 첫 번째 집필이 동국정운이라는 점을 들어 한글의 창제 목적이 나라문자에 있지 않고 한자발음기호라고 폄하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훈민정음해례본에서 세종대왕이 친히 쓴 어제와 한글 반대파 최만리의 상소문, 그리고 집현전 학자 정인지의 반박문등을 보면 명확하다. 세종대왕은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서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다며 28자를 창제했다고 분명히 밝혔다. 최만리는 훈민정음을 분명히 독자적인 문자로 보고 중화를 사모하는 사대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했다. 오랑캐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며 “향기롭고 효능 좋은 소합향을 버리고 사마귀똥으로 환약”을 만드는 일에 가깝다고 힐난했다. 그가 직시한 것은 훈민정음이 갖고 올 파장이었다. 결국 그 용이함으로 많은 이들이 언문으로 입신할 것이고, 한자를 쓰는 관리들과 둘로 나뉠 것이며 결국에는 노심고사하여 성리학을 공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정인지는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전개했다. “언어가 다르면 글자가 다를 수 있다. 한자와 이두는 우리 말을 적기에는 껄끄럽고 막힘이 많다. 사용하는데 불편하다. 바람 소리, 학의 울음 소리, 닭의 울음 소리, 개가 짖는 소리 까지 나타낼 수 있는 것이 훈민정음이다. 배우기가 쉬워 하루 아침에 가능하고 어리석은 자라고 할지라도 열흘이면 가능하다”라는 주장을 펴서 독자적인 우리 문자의 창제를 목표로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훈민정음이 우리 문자의 기능과 함께 부수적으로 당시의 세계공용문자인 한자의 발음기호 역할도 했다는 점은 문자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고 훈민정음이 민중의 글자로 자리잡아 나가면서 발음기호적 성격은 쇠퇴하고 독자적인 우리 문자로 정립되었다. 문자의 역사를 보면, 농경시대가 되면서 그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사람의 생각을 소리로 표현하는 것, 즉 말을 만든 것이 첫 번째 혁명이라고 한다면 말을 형상화하여 글자로 만든 것이 두 번째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농경시대가 되어 잉여생산물이 축적되면서 이를 관리하고 기록을 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문자가 만들어진 것인데 지배계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러다가 상인 부르주아 계층이 대두되면서 문자가 다른 계층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사농공상의 신분제 사회인 조선과 부르주아가 대두한 유럽에서 문자혁명이 파급된 정도의 차이는 이런 사회경제적인 차이에 기반한다. 서양에서 종교개혁은 종교혁명이자 문자혁명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1517년 독일의 작은 도시에서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가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반발하여 95개조의 반박문을 써 부치면서 개혁의 불길이 전 유럽에 번져나갔다. 루터는 지명수배를 피해서 수도원에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에게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신과 개인이 일대일로 직접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제가 읽어주는 뜻을 알 수 없는 라틴어 성경이 아니라 혼자 힘으로 읽고 혼자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서는 아름답고 쉬운 표준 독일어성경이 있어야 한다. 그 전에는 라틴어가 신의 언어이고, 다른 언어는 하급 언어라는 인식이 있었다. 라틴어 성경은 누구가 쉽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필사본은 아주 고가품이었다. 루터의 만인이 제사장이라는 생각과 완전히 배치되는 관습이었다. 루터의 독일어성경은 1522년 9월 라이프치히 도서박람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 해 동안 12판을 찍었으며 해적판만 50개가 나돌았고 루터 생전에 50만권이나 팔렸다. 영국 스웨덴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란드등 프로테스탄티즘에 입각한 국가들에서 학교 교육이 발전하게 되었으며 문해력이 급격하게 늘었다. 우리나라 보다 금속활자가 늦게 개발되었지만 대량인쇄를 통한 교육혁명이 일어났다. 루터는 “인쇄는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은총의 선물이다”라고 했을 정도도 고마워했다. 서양의 평등주의에 미친 종교개혁의 영향은 거대하다. 반면에 이슬람에서는 코란을 필사하는 것을 고도의 예술행위로 간주했기에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이 인쇄를 거부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에 열렬히 동참한 것은 자유도시의 부르조아들이었고, 그 뒷배가 되어주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유신에서 상인계급이 중심이 되었다. 에도 시대에 상업의 발전으로 사무라이들에 종속되었던 상인계층이 급속하게 성장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과 같이 무사계급을 뒤집고 사회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향으로 계몽화가 빠른 시일내에 이뤄졌다. 18세기말에 도쿄 인구가 100만 명에 달했는데 성인 남성인구의 상당수가 독서를 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에는 성인 남성의 식자율이 50%를 넘어섰고 여성은 20%로 세계 최고수준이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그와 같은 변화의 중심축이 형성되지 않았다. 사농공상의 신분제 사회였다. 훈민정음을 사용하고 확산하는 계층적 기반이 약했다. 사대부는 기득권인 한자를 놓치지 않으려 했고 농사꾼들은 먹고 살기에 바빴다. 궁궐과 양반가의 여성들이 주로 사용했다. 섬세한 감수성을 표현하기에는 역시 자기 문자가 적합한 탓에 여성들에게 수용성이 높았다. 세종대왕의 노력으로 반포된 훈민정음은 언문 즉 중국 글자와 비교되는 우리 글자라는 대등한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사대부들이 비하하면서 우리 문자를 낮추어 부르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언문, 언문 하면서 강한 소리로 비판하다 보니 언문의 뜻이 변질되었다고 본다. 사대부들은 심지어 여성들이나 쓰는 글이라며 암클이라고 비하했다. 연산군은 자신의 폭정을 비판하는 투서를 접하고 언문의 사용을 금지했다. 하지만 백성들 사이에서는 언문이 꾸준히 퍼져나갔다. 애초에 훈민정음은 민중의 힘이 강할 때는 더 널리 사용했고 지배층의 힘이 강할 때는 그 반대였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와 그 지배층이 보여준 태도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혼비백산하여 피난가는 왕과 그 신하들을 보면서 백성들은 노비문서를 불태우는 것으로 저항했다. 명나라의 참전과 이순신장군의 활약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선조는 1593년에 선조국문유서 즉 언문으로 된 유서를 발표했다. 부득이 왜적에게 협력하고 있는 백성들의 이탈을 촉구하는 방을 써붙인 것이다. 투항한 죄를 묻지 않는다며 공을 세운 자에게 신분에 관계 없이 상을 내린다고 했다. 백성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백성의 문자로 해야 한다는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글과 민중은 절대적 관계로 발전하고 있었다. 훈민정음 초창기에는 위로부터 언문 보급을 위한 서적이 다수였던 반면에 후반기로 가면 우리 말과 글로 된 소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을 사고 파는 서점도 등장했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8-13
    • [민병두의 K-Sapience (20)] 한글의 세계화는 가능한가? ①들어가기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파리올림픽에서 여자체조단체 출전한 이탈리아 선수 엘리사 이오리오의 경기복이 동그랗게 파인 등 부분에 ‘당신 자신을 사랑하세요’라는 한글 문신을 새겨넣은 것이 포착됐다. 미국 체조 영웅 시몬 바일스가 입은 트레이닝복 상의 안쪽 깃에 ‘누구든, 모두가 ‘라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있어서 시선을 끌었다. 엘리사 이오리오는 K-팝 팬이기도 하다. 한글로 K-팝을 배우고 좋아하는 스타에 대한 애정을 한글로 표현하는 K-팝 팬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한글을 아민정음 혹은 돌민정음이라고 한다. 아민정음은 BTS 팬클럽 아미와 훈민정음을, 돌민정음은 아이돌(idol)의 dol과 훈민정음을 합친 것이다. 이들이 사랑하는 노랫말과 BTS의 말을 번역하지 않고 한국어 발음 그대로 옮기는 것이다. lack of nunchi(눈치) Who is nugu(듣보잡) 같은 그들의 언어도 있다. 한글의 세계화라며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문화가 전파되면서 언어가 교배된 결과 세계언어에서 어휘가 풍부해지고 있는 한 예에 불과하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세종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이 한글을 창제하기에 이르렀는데, 요즘은 BTS의 노래가 지구촌에 사랑의 정신을 심어놓는 듯 하다. 한글가사와 한글이 아미와 젊은 세대에게 사랑을 주고받는 공통의 메시지로 기능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교전을 할 때 양국의 소녀들이 “이젠 그만 전쟁을 멈춰야 한다”는 한글 구호를 SNS 상에서 릴레이 게시를 해 휴전에 합의하게 하는 데 힘을 보탰다. BTS의 Love Yourself 시리즈, End Violence 캠페인은 세계의 MZ세대들 에게 큰 힘이 되었다. 미얀마의 군사쿠테타에 맞선 시민 학생들은 한글로 쓴 피켓을 들고 시위를 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혁명을 배웠다고 했다. "당신은 정말 미얀마의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며 한국인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방탄소년단의 노랫말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는데 같은 정서를 갖고 있는 세계의 동세대에게 호소력이 가장 크다고 본 것이다. BTS의 노랫말과 연설은 ‘평화의 언어’로 작용하고 있다. 사랑 우리 꿈등이 키워드이다. 아미들이 공용어와 공용문자로 희망이 담긴 한글 어휘를 공급하고 있다. 이쯤 되니 한글이 공용문자화 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갖게 한다. 게다가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이 이런 저런 문자로 자신들의 고유어를 표기하다가 한글이 가장 적당하다고 해서 표기문자로 한글 차자를 해서 화제가 됐다. 그렇다고 이미 라틴계 알파펫을 차자한 많은 국가와 민족이 관습화된 문자를 폐기하고 한글이라는 알파펫을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도 이런 일들이 한국인에게는 신기하기만 하다. 불과 20년 전 까지만 해도 외국에 가면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그제서야 “빨리빨리”라고 아는 척을 하는 정도였다. 이어지는 질문은 북한에서 왔냐, 남한에서 왔냐였다. 그만큼 한국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이다. 한국계 미국 가수 겸 작가 미셸 자우너(35)는 밀리언 셀러 ‘H마트에서 울다’(Crying in H Mart)에서 어린 시절,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일본계이냐, 중국계이냐고 물었을 때 한국계라고 하면 갸우뚱해서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30년 전 멕시코의 휴양지, 캔쿤의 뒷골목 담벼락에 페인트로 태권도학원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해외에서 코리아타운을 제외하고는 처음 한글을 봤다. 이런 곳에까지 와서 태권도장을 개설하다니 의지의 한국인이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아쉽게도 문을 닫았다니. 태권도는 인기가 없나? 돈 쓰는 사람은 관광객이고 돈 없는 사람은 현지인이니 현지인을 상대로 한 태권도학원이 잘 될리 없다. 만약 태권도가 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무술이라면, 태권도 사범 자격증만 갖고 있어도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먹고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성공한 준 리 사범이나 중동, 스페인의 왕족 자녀들을 상대해 성공한 이들도 많다. 가라테나 유도, 우슈와 쿵푸하고 비교하면 어떨까? 아니 요가 파룬공 혹은 필라테스하고 그 수를 비교해보면. 영어가 모국어라는 이유로 세계를 돌면서 관광도 하고, 공부도 하고, 먹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칠 수 있는 E-2비자가 2020년 1만1326명 발급되었다. 2011년이 정점이었는데 학교에 9320명의 원어민 지도교사, 학원에 1만5363명의 강사가 등록되어있었다. 기타 개인 교습까지 합하면 더 많았을 것이다. 코로나 이후 많이 줄어들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활동하는 원어민 강사의 숫자 까지 합치면 수십만 명에 달할 것이다. 21세기 이후로만 누적 집계를 하면 얼마나 많을까? 이것이 그 나라의 경제력과 군사력과 문화자본이다. 강대국이라는 이유로, 문화적 매력이 있다는 것 때문에 그 나라의 글과 말을 배울려고 한다. 거기에 돈이 있고 정보가 있고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영어가 모국어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빈곤한 부족의 언어를 갖고 사는 이들과 인생이 많이 달라진다. 1960-80년대에 우리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독일문화원 프랑스문화원에 가서 영화와 문화를 접하고 유학의 꿈을 키운 일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해외에 설치된 한국문화원과 세종학당에 외국인들이 몰려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외국인들이 외국에서 한국의 말과 글, 문화를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몇가지가 있다. 대학 세종학당 한글학교 등이 있다. 세종학당은 2007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등 3개국 13개소에서 문을 연 이래 2023년 85개국 248개소에서 14만 7000여명이 수업을 듣고 갔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이에 힘을 입어 정부에서는 2027년 세계 350개소, 50여만명까지 교육대상을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영국의 현대 언어학 대학평의회에 따르면 1999년 151개의 외국에 있는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2022년에는 1400여곳에서 한국어 강좌를 열고있다고 한다. 인터넷 교육 앱 듀오링고에 따르면 세계에서 일곱 번째 인기있는 외국어이다. 2021년 한국어능력시험(TOPIK)에는 75개국에서 33만여명이 응시했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에는 한류 한복 반찬 대박 파이팅 등 한국식 영어가 매년 새로이 등재되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훈민정음해례본을 인류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세계 문해의 날에는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을 시상한다. 국내에서 한국어 교원자격증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이 2006년, 868명이 자격증을 취득했다. 한류 초기이다. 이걸 따서 써먹을 일이 있겠나 하는 회의가 들 때였다. 2022년 6월에는 누적취득자가 7만708명에 달했다. 2019년 이후에는 40,50대 자격증 취득자가 급격하게 늘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에서 은퇴 이후에 해외 활동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인데 그만큼 해외의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장롱에서 썩고 있을 장롱자격증이라면 구태여 그만한 사람이 취득할 이유가 없다 한글과 한국어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 같은데 반면 한국에서는 외국어의 침투가 수십배 수백배에 달한다. 컴퓨터 아파트 같은 외래어의 증가 속도를 훨씬 뛰어넘는 외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셋팅 컨펌 시그너쳐 같은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어휘가 되다시피 했지만 컨틴전시플랜등 분야별로 외국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인지,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사용한다. 한글은 범람하는 외국어휘의 발음기호가 아니다. 이대로 추세를 방치하면 한글의, 한국어의 문명은 어떻게 될까? 우리 말은 아직 글이 없는 상태에서 불교용어와 중국한자의 침투, 그리고 근대서구문명을 일찍이 받아들인 일본식 한자의 침투로 주체성과 창조성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해방 이후 미국식 문화에 편입되면서 서구언어의 대대적인 침투를 경험하게 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 중에서 분야별로 50-90% 가량이 침투언어이다. 최샛별 이화여대 교수는 우리나라의 세대를 조선조 시대의 부모 밑에서 강제침탈기에 태어난 유교문화세대, 해방 이후 서구식 교육에 편입된 영어문화세대, 그리고 IT시대에 성장하고 자라난 SNS언어세대로 구분한다. 서로 다른 세대는 적지 않은 통역을 필요로 한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조한 시대에는 어떠했을까?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8-12
    • [민병두의 K-Sapience (19)] 국가상징공간⑤ 메트로폴리탄 서울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수도 서울의 광화문네거리는 자연스럽게 국민 인식 속에 국가상징공간으로 자리잡혔다. 관광객들도 으레 광화문과 경복궁을 찾는다. 한복 입고 고궁 방문하여 사진 찍는 것이 대표적인 관광 상품이다. 서울에 오면 외국인들이 사진으로 남길만한 이렇다 할 랜드마크가 없다. 남산N타워는 사진으로 남기기에는 특장이 없다. 히말라야 알프스 같은 산은 몰라도 강은 랜드마크가 되기 어렵다, 강은 그 자체로 차별성이 크지 않다. 세느강도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서 의미가 있다. 한강은 제대로 된 스카이라인이 뒷받침을 하지 못하고, 보행접근성이 떨어져 국가상징공간으로 적합하지 않다. 광화문 일대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공간이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이 자리 잡고 있다. 경복궁의 명칭은 “왕께서는 만년 장수하시고 큰 복 받으소서”라는 시경의 구절에서 따왔다. 정도전이 작명했다. 이상적인 유교정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같은 이름을 지었다. 조선시대 정치의 중심이었던 이 일대는 대한민국이 들어서고서도 정치의 중심이었다. 경무대에 이어 청와대, 정부종합청사등 행정시설이 모여 있다. 군정으로 시작하여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의 대사관도 위치해 있다. 강남과 다른 부도심들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시내 하면 광화문 네거리를 의미했고, 여전히 사람들의 이동도 많았다. 따라서 이곳은 국가가 조각이나 동상, 건축을 통해서 상징을 만들고 메시지를 던지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이다. 박정희는 친일파라는 딱지와 반일정서가 늘 부담이었다. 1970년대 까지는 일본 고위 당국자들의 망언이 있을 때 마다 전국 곳곳에서 비분강개한 시민들이 항의에 나섰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는 일이 많았다. 박정희는 국민들의 이런 정서를 고려하여 1968년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를 만들어 이순신장군 동상을 건립했다. 박정희가 헌납(제작시에 동상 뒤편에 기재)했다고 되어있다. 조각가 김세중 측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가 조선왕조의 도로중심축을 복원하는데에는 너무 돈이 들어 어렵다며 그 대신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 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이어서 1969년에 남산의 백범 김구동상 건립에도 금일봉을 내고 휘호를 써 제작을 지원했다. 이순신장군상의 건립은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인세력의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한 의도였다는 분석이 있었다. 이순신장군의 동상을 통해 구국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도가 있었을 수 있겠지만 백범 김구 동상도 함께 지원한 것으로 보아서는 그 자신의 친일파 이미지를 희석하고 국민들의 반일감정에 올라타는 효과를 의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남북대결과 한일간 갈등, 그리고 독재정권의 대중동원을 위해서 충성심을 조성하던 국가주의 시대였다. 이순신장군의 동상은 칼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어서 논란이 되었다. 왼손에 칼을 쥐고 오른 손으로 뽑는 것이 전장에 나선 장수의 결기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동상을 제작한 김세중 측은 전시가 아닌 평시의 모습을 기렸다고 설명했다. 1968년 박정희가 이순신장군 동상을 헌납했을 때, 국무총리 김종필은 세종대왕상을 헌납했다. 덕수궁안에 모셨다가 2012년 이전했다. 이순신장관상과 세종대왕상의 위치를 보면 박정희정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문무를 함께 중시했다기 보다는 무를 더 강조한 것이다. 2008년부터 국가상징공간, 국가상징도 논의가 시작되었다. 서울시장 이명박이 주도했다. 2009년 광화문광장이 조성되었다. 오세훈 박원순을 거치면서 광장이 넒어지고 조형적 의미가 더해졌다. 세종문화회관 앞에 창의와 실용의 정신으로 문화강국을 이루자는 뜻에서 세종대왕상이 세워졌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명의 영웅, 문화를 창달한 세종대왕과 나라를 지킨 이순신장군을 나란히 위치 지음으로써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지향을 분명히 했다. 광화문 일대에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경복궁안에 있는 조선총독부(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는 김영삼의 결단으로 전격 해체됐다. 일본인들이 마지막으로 총독부 건물을 방문하기 위해 대거 관광대열에 나섰는데 일본인에게는 영광의 기억이고, 우리들에게는 치욕의 상징이다. 요욕의 역사도 역사라는 점에서, 후손들에게 교훈을 남긴다는 점에서 보존 혹은 이전을 제안하는 반대론자가 있었으나 30여년이 지난 지금은 해체가 옳았다는 생각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광화문과 월대, 의정부 터도 역대 정부를 거치면서 우여곡절을 거쳐 복원되었다. 하지만 동상 두개와 광장 그리고 세종문화회관(1978) 만으로 국가상징도로, 국가상징공간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광화문네거리의 교보빌딩은 1972년 건립된 주일미국대사관을 지은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같은 모양으로 건축했다. 포시즌스호텔 등 주변 건축물, 그리고 주한미대관 건물은 상징 공간에 맞지 않거나 조화롭지 못하다. 1964년 서울시는 처음으로 현대화계획을 수립한다. 전후 10여년이 지나서여 처음으로 미래 서울에 대한 청사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도시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다. 강북에 200만명, 강남에 300만명 도합 500만명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강남개발에 착수했다.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린벨트제도도 함께 도입되었다. 빈민가와 사창가였던 구도심의 개발에도 착수했다. 길이 1.2km에 달하는 주상복합상가(세운상가-진양상가)는 영화관 사우나 볼링장 옥상정원등이 들어서서 랜드마크가 되었다. 청계천이 복개되고 3.1고가도로와 삼일빌딩(31층)이 만들어지면서 대한민국 부흥의 상징화되었다. 극장에서 애국가가 상영될 때 3.1고가도로를 달리는 차량과 삼일빌딩이 늘 화면에 나왔다. 1960년대는 개발의 연대이다. 급격한 도시화결과로 서울이 신음하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희망을 보기 시작했다. ‘서울의 찬가’는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길옥윤에게 서울을 희망적으로 노래해 달라고 부탁해서 만들어진 곡이다. 수학여행을 다녀오면서 서울이 가까워 지면 ‘서울의 찬가’를 부르곤 했던 기억이 난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 마오 처음 만나고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살으렵니다”(서울의 찬가) “삼각지 로터리에 궂은 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 하며 비에 젖어 한숨 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가는 삼각지…”(울고가는 삼각지. 배호 노래) 삼각지에 로타리가 만들어졌기에 나올 수 있는 노래이다. 1970년대에는 강남 개발과 젊음의 초상으로 혜은이의 ‘제3한강교’, 1980년대는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등 서울을 소재로 한 수많은 노래들이 만들어졌다. 1970년 3.1빌딩이 들어설 때만 해도 도심에 고층빌딩이 올라가는 것이 뉴스였고 자랑이었다. 1969년에는 서울에 10층 이상 빌딩이 모두 59동에 달한다는 기사가 나왔을 정도였다.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의 타이틀이 빠르게 이전되었다. KAL빌딩, 정부종합청사, 삼일빌딩, 63빌딩, 타워펠리스, 해운대아이파크, 포스코타워 그리고 롯데월드타워까지 하늘을 향한 욕심을 뽐냈다. 우리나라 건설회사가 세계의 초고층건물을 시공했다는 것도 우리의 자랑이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한국을 국빈방문(2017)해서 국회에서 연설하면서 63빌딩을 한국경제의 상징 중의 하나로 거론하여 한국사람들의 자긍심에 윙크를 했다. 보통 올림픽은 준비에 7면, 마무리에 3년을 합해서 10년의 역사라고 하는데 88올림픽을 전후한 기간 동안 서울의 대표적 공공건축물이 대거 들어섰다. 프랑스인들의 한국 건축 답사기인 ‘봉주르 한국건축’(강민희. 아트북스)에서는 한국의 발전 속도를 보고 감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1950년대 이 나라에 논과 밭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니. 서울을 보면 믿을 수가 없어. 60년만에 이런 성과를 낸 나라는 전 세계에 한국 밖에 없을 거야. 정말 굉장해. 브라보! 한국은 프랑스 보다 시간이 몇 배로 빨리 가는 것 같아. 내게는 초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다른 세상 같아” 산업혁명 후에 인류는 점과 점, 즉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기 위해 숲을 깎어서 도로를 만들고, 엘리베이터를 발명해 고층빌딩을 만들었다. 길이와 높이를 확장하고 확대한 역사였다. 국력의 과시였다. 역사가 없는 미국은 보존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높이로 유럽과 승부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만들었다. 기후온난화와 환경파괴로 여섯번째 멸종을 우려하는 지금은 오히려 자동차가 지배했던 도로를 덮어 숲을 만들고, 에너지제로 주택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추세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국가건축정책위원회가 발족하여 지금까지 건축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광역 기초 지방자치단체도 총괄건축가라는 직책을 두고 있다. 건축은 역사이고 미래이다. 건축은 아름다움이고 상징이다. 그 건축이 한번 경로를 잃으면 몇 십년을 잘못가는 정도가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을 맞는다. 한국이 아파트 공화국이 된 이상은 앞으로도 오랜 기간을 그 뼈대위에서 도시가 자생할 수 밖에 없다. 건축은 이처럼 중요하다. 공동체를 재구성하고 사람간의 거리를 조직하는 등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제임스 S. 게일은 ‘조선, 마지막 10년의 기록’에서 “서울은 동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서울은 내사산과 외사산, 고궁이 있어서 따로 랜드마크가 필요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했다. 실제로 한양도성길을 따라 한바퀴를 돌면서 바라보는 서울은, 아마도 100여년 전의 수평도시를 유지했다면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을 것이다. 서울이 직주근접과 수평확대정책을 취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은 오히려 고밀도정책을 도입하여 직주근접을 하고 녹지를 확대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다시 국가중심공간으로 돌아가보자. 서울의 DDP가 아무리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했다고 해도 왜?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서울이라는 역사성, 그리고 인근 지역과 동떨어져 존재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국가상징공간은 그 나라의 역사성을 온전히 갖고 있어야 한다. 그 나라의 지향을 담고 있어야 한다. 꺼지지 않는 불꽃과 100m 태극기는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를 연상케 한다. 상암동에 세우겠다는 서울링은 런던아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두바이의 아인두바이에 이어 두번째로 큰 규모가 될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은 전쟁을 기념하고 있다. 그 후 많은 나라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건조물의 원조가 되었다. 에펠탑은 엑스포를 앞두고 프랑스 과학기술의 총화가 만들어낸 기념물이다. 기념물, 랜드마크는 그 나라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위치에 있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와 목표를 갖고 있다. 다른 나라에 가 봤을 때 좋아 보여서 그것을 우리나라에 더 크게 이식한다고 서울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서울은 서울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청와대에서 경복궁 광화문 서울시청 남대문 용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누가 뭐라고 해도 국가상징도로이다. 이곳이 역사성을 가질려면 외국의 뛰어난 조형물을 가져올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녹아있어야 한다. 광화문 광장과 시청광장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성지이다. 여기서 4월혁명 서울의봄 6월학쟁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와 문화국가 건설에 모두 성공한 나라의 자긍심이 있어야 한다.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사이에 민주주의 기념센터를 건립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많은 나라에 영감을 주었다. UN산하의 국제기구로 설립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주한미군이 완전 이전하면 용산공원이 서울의 새로운 보배가 될 것이다. 서울역에서 한강 까지를 국가중심도로로 편입한다는데 맨하튼이 아니라 용하튼이 되지 않는 이상 상징공간화가 쉽지 않다. 용산공원은 도시가 새로이 가야 할 미래이다. 정리를 해 본다 경복궁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와 역사를 보고, 광화문 광장에서 세종대왕과 충무공, 두 영웅들을 만나고, 시청 광장까지 민주주의 역사를 접하고, 용산에서 인간과 환경의 공존을 만나고, 동작동 현충원에서 태극기를 보며 나라를 지킨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국가상징도로, 국가상징공간을 상상해 본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8-02
    • [민병두의 K-Sapience (18)] 국가상징공간④ 거대한 쇼윈도 평양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평양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피해가 가장 큰 도시였다. 소이탄 네이팜탄의 실험장이었다. 3년여간 3000여회의 공습이 있었다. 김일성이 건물 두 채를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졌다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은 정전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다. 민간인 희생자가 많이 나왔다. 평양성 뿐만 아니라 수천 채 있었던 한옥 가옥도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다. 노동당이 미제(미국)을 철천지 원쑤로 선전할 때 주민들이 동의하게 되는 한 요인으로 작동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이 교토를 공습 대상에서 제외한 것과 비교해 볼 만하다. 당시 미국 내 지일파는 천황이 있는 교토와 그 문화재를 공격하는 것이 일본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교토공습을 반대했다. 평양이 폐허가 된 것은 사회주의 수도를 건설하는데 기회가 되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기에 적합했다.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점도 작용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김일성주의 도시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국가의 사상과 가치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지구상의 도시가 있다면 평양을 첫번째로 꼽을 수 있다. 평양은 사회주의 건축이 가장 잘 보존된 야외박물관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건축은 정치인이 가진 가장 강력한 미학적 무기” (G. 버나드 쇼)이다. 그런 점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체제는 그 강력한 무기를 유감없이 실험했다. 국가중심에 도서관과 미술관 역사관을 배치 김일성주의 도시, 평양은 세단계로 발전했다. 전후에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모든 공산주의 국가가 그러하듯이 중심광장을 만드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광장과 TV 송신탑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광장은 인민을 동원하고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낫과 망치 같은 형상이 동원되고 코민테른가 적기가가 울려퍼지는 곳이다. 지도자가 여기에서 해방군을 사열하고 연설을 하면서 인민들의 충성심을 끌어올릴 수 있다. TV송신탑은 인민들에게 해방의 소식을 전달하는 도구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곳으로 치장된다. 상하이의 동방명주타워가 TV송신탑인 것도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본다. 평양의 대동강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른다. 모란봉에서 평양역이 있는 평양 중구역은 과거 평양성이 있던 곳이다. 북한은 여기에 김일성광장을 건설(1954)했다. 뉴스를 통해 접하는 북한군의 열병식이 진행되는 곳이다. 전쟁 직후인 1951년에 중심거리를 조성했는데 남북으로 2.4Km에 이른다. 처음에는 쓰딸린거리로 명명했다. 김일성광장이 이 거리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선전하는 입장에서 쓰딸린거리라는 명칭이 문제가 되었다. 주체사상이 강화되면서 승리거리로 명칭을 바꿨다. 서울의 여의도 공원은 그 전에는 김일성광장과 대척점에 서 있었다. 박정희가 여의도의 남과 북을 잇는 광장을 조성하고 5.16광장이라고 명명했다. 평양 중구역을 명실상부하게 국가상징공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김정일이다. 김일성주의 평양건설의 두번째 단계이다. 김정일은 1980년 당대회에서 주체사상을 유일 지도이념으로 정립하는 것을 주도했다.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김정일은 평양의 동서축에 위치한 국가상징공간에 남북축을 만들었다. 김일성광장의 북쪽에 인민대학습당(도서관)을 만들었다. 인민대학습당은 소련의 신고전주의 양식에서 벗어나 전통건축을 가미한 북한식 건축을 선보인 대표적인 사례이다. 1982년에 김일성의 70회 생일을 맞아 지어졌다. 인민대학습당 앞쪽에 대주석단이 있어서 김일성광장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북한 주민들 입장에서는 올려다 보게 되어있다. 위대한 수령이 조명될 수 있도록 지어졌다. 그 맞은 편 대동강을 건너 남쪽에는 주체사상탑을 세웠다. 김일성의 세계관과 북한의 지도원리를 담은 탑으로 형상화했다. 평양 경관의 중요한 위치에 있다. 높이는 170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조 건물 중의 하나이다. 평양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밤에는 꼭대기의 붉은 색 봉화가 빛을 내면서 흔들리기 때문에 꺼지지 않는 불멸의 사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역시 1982년 김정일의 작품이다. 인민대학습당과 주체사상탑 사이에 주요한 건물들이 배열해 있다. 주체사상탑 쪽으로는 대동강을 건너서 양쪽에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 조선중앙미술관을 두었다. 승리거리를 사이에 두고 인민대학습당 쪽에는 내각종합청사와 대외경제성이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북한을 방문하게 된 한국의 건축가들이 가장 눈여겨 본 곳이 김일성광장의 배치도이다. 체제를 유지하고 우상화를 위한 공간 설계라고 하지만 인민대학습당을 중심에 놓고 양쪽에 역사박물관과 중앙미술관을 놓은 곳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시도해보기 힘든 과감한 상징배열이라는 것이다. 인민대학습당은 우리로 치면 광화문광장의 세종문화회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통양식을 도입한 것도 비교가 되어 신경이 쓰였다고 한다. 김정일, 건축 예술의 창작자가 되다 김정일은 1980년대부터 2010년까지 북한 건축을 총지휘했다. 김정일은 1991년에 그의 건축에 대한 생각을 담아 ‘건축예술론’이라는 책을 펴냈다. 2007년 북한에 학술여행을 다녀온 뉘른베르크 예술아카데미의 크리스천 모스토펜이 이를 영문 팜플렛으로 요약했다. 김정일의 건축예술론을 보면 평양의 건축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아래는 ‘이제는 평양건축’ 필립 뭬제아 엮음. 도서출판 담디) “건축은 계급성을 띤다. 건축은 그것이 어느 계급의 이익을 반영하고 어느 계급을 위하는가에 따라 규정된다. 계급사회에서 계급성을 떠난 초계급적인 건축이란 있을 수 없으며 또 있어본 적도 없다” “건축은 나라의 면모를 종합적으로,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건축을 보고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발전을 이해할 수 있다.” 북한 건축물에는 궁전이라는 명칭이 많다. 압박받고 수탈당했던 노동자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이 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주인이라는 새 신분에 맞게 궁전에 살며 일한다는 것. 그리고 국가는 인민을 위해 모든 것을 하고, 심지어 그들을 위해 궁전을 짓는다는 것이다. 국가는 인민의 신하니까. 그래서 인민문화궁전, 만경대소년학생궁전등이 있다.” (북한여행. 뤼디거 프랑크. 한겨레 출판) 이런 철학은 김정일의 독창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구 소련등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보편화된 생각이다. 중국 천안문광장의 민족문화궁, 동베를린의 ‘노동자들의 궁전’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인민대학습당을 국가상징공간의 중심에 놓은 것도 이러한 철학 원리에 기반한 것이다. 실제로 북한 체제가 인민을 위한 것이냐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어쨌든 그런 건축문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업적과 위대성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가장 직관적이고 항구적인 수단은 기념비 건축이다. 기념비 건축은 인간과 함께 영원히 존재하며, 따라서 사회발전과 세대교체에 관계없이 사람들의 사상 의식에 능동적으로 작용한다. 대기념비는 서사시적 화폭으로 펼쳐 보임으로써 사람들을 키우는데 적극 이바지하고 있다.” “건축을 혁명적 수령관으로 일관시키는 것은 주체건축 창작에서 확고히 지켜야 할 근본 원칙이다.” “건축의 예술적 영상은 수령의 위대성을 높이 칭송하기 위한 담보가 되며… 수령의 위대성을 높이 칭송하는데서 기본은 수령의 영상을 밝고 정중하게 모시는 것이다. 건축 공간에서는 수령의 영상을 중심에 두고 모든 공간요소를 배치해야 하며 모든 건축의 구성 요소는 수령의 영상을 부각시키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수령의 영상을 바라볼 수 있고 그들에게 수령의 품에서 행복을 누린다는 높은 긍지와 자각을 안겨줄 수 있다. 수령의 위대성을 칭송하는 대기념비는 거기에 담기는 사상적 내용이 풍부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웅장하게 만들어야 한다“ 만수대 대기념비 동상 기술은 다른 나라에도 수출 평양의 북쪽에는 만수대가 있다. 천리마 동상, 만수대의사당, 만수대 대기념비로 불리우는 김일성 김정일 동상이 있다. 앞서 김정일이 ‘건축예술론’에서 이 기념비를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서사시적으로 펼쳐 보이고 위대성을 높이 칭송해야 한다, 웅장해야 한다, 경외의 대상이 되게 끔 크고 장대하고 엄숙한 건축물이어야 한다. “만수대 대기념비는 북한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 중의 하나다. 북한의 해방자이자 건국가, 승리자, 승리의 보호자라는 이미지를 모두 담을려고 애를 썼다. 처음에 황금색으로 권위를 더했다가 인민 친화적인 청동색으로 바꾸었다 김일성의 오른팔은 미래를 향해 쭉 뻗어있다. 그와 인민의 성취 모습에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다. 북한에서 미래를 가르키는 사람은 김일성이다. 김정일 사후 그의 동상이 나란히 세워졌다. 왼팔은 김일성 처럼 뒤로 돌리고 있다. 오른팔은 아래로 향해 있다. 뒷 배경은 혁명기념관이다. 70미터 높이의 모자이크 벽화가 있다. 백두산 천지연의 그림이다. 백두산은 북한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곳이다. 김일성 김정은 동상의 양편에 청동으로 제작한 군상이 있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대표적 조각이다. 노동자 농민 지식인에게 할당된 영웅적 자세로. 맨 앞의 노동자는 김일성전집을 들고 있다. 만수대창작사라는 곳이 제작했다. 아프리카에서 해방전쟁을 묘사하는 작품을 만들 때 만수대창작사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앙골라 등 여러 나라에 수출되었다. 세네갈의 ‘아프리카 르네상스’가 대표적이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도 있다”고 뤼디거 프랑크가 기록하고 있다. (북한여행. 한겨레출판) 남서쪽에 있는 김일성 생가에서부터 북동쪽의 김일성 묘지 금수산 태양궁전, 개선문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북한의 건축물 건조물은 모두 김정일의 건축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항미전쟁이다. 전쟁의 영웅이다. 1973년9월 북한에서 지하철을 남한 보다 먼저 개통했다. 북한의 국력의 상징으로 선전했다. 이 모든 것을 영국의 한 언론은 ‘대동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지하철에서 노약자 임산부석 이외에 영웅석이 따로 있다. 전쟁과 복역으로 부상을 당한 이들을 위한 좌석이다. 북한은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준비하면서 능라도에 5.1.노동절체육관을 건립했다. 미국의 클린턴 정부 시절에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평양을 방문했다. 김정일은 전쟁장면을 연출하는 대규모 매스게임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미국이 보는 마지막 전쟁신이라고 했다. 북미수교를 하자는 제안이었다. 평양을 방문하려던 클린턴의 계획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자의 반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능라도 경기장과 함께 대규모 호텔의 건축에 나섰다. 피라미드 모양의 류경호텔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남한에서 가장 높았던 63빌딩을 훨씬 능가하는 높이를 자랑했다. 재정난으로 방치하다가 이집트 통신사가 공사를 재개했지만 다시 무산되었다. 지금은 LED조명으로 미디어파사드를 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김정일은 샹하이를 방문한 후 “천지가 개벽했다”며 평양을 푸동처럼 만들고 싶어했다. 다양성 통일성 입체성 비반복성의 원칙 아래 아파트 거리를 조성하려고 했다. 그가 1980년대부터 살림집의 건축 원리로 획일성 대신 다양성을 내세운 것의 연장선상이다. 평양에 건설하고자 하는 신도시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김정은이 한편에서는 핵무장을 서두르면서도 다른 한편 강력하게 추진한 것이 평양 내 신도시이다. 최고 45층짜리 수직적 거대건축을 서둘렀다. 려명거리 미래과학자거리 보통강변아파트 등이 들어섰다. 김정은의 최고 업적인 인민 생활의 변화를 보여주는 거리이다. 한국의 타워펠리스 등 고층아파트가 들어서자 북한도 영향을 받았다. 평양은 원래 사회주의 이념에 맞게 직주근접으로 계획되었다. 노동자들의 집과 일터가 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고층아파트를 건립하는 것도 직주근접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한다. 평양은 보통 인민의 천국은 아니다. 북한 내부엘리트, 선택된 인민들의 천국이다. 잘 만들어진 쇼위도 같은 평양은 그 존재 만으로도 중요한 체제유지기능을 한다. 여기까지 천리마 속도전을 함께 한 사람들의 충성심을 보상하는 공간이며, 여기로 달려오기 위해 만리마 속도전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동기 부여가 된다. 인구 250만명의 이 도시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유지하는 뼈대이다. 사회주의가 꿈꿨던 평등한 세상은 아니다. 지금은 보통인민에게 선망의 대상이지만 언젠가는 저항의 동기가 될 수있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8-01
    • [민병두의 K-Sapience (17)] 국가상징공간③ 서울이라는 이름을 되찾다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인류 역사를 바꾼 프랑스 혁명은 성난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데에서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감옥일까?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 당장의 시급한 목표이다. 하지만 감옥은 상징으로서 의미가 있다. 감옥은 체제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공포의 이미지로 작동한다. 감옥을 탈취한다는 것은 체제의 밑둥을 흔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울러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을 구출하여 혁명의 지원세력으로 삼을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가장 먼저 한 사업 중의 하나가 감옥을 짓는 일이었다. 1908년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를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준공했다. ‘근대화된 감옥’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조선시대의 감옥인 전옥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규모는 동양 최대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50만명 정도의 독립운동가 등이 투옥되었다. 강우규의사 유관순열사 등을 비롯해 1500여명이 이곳에서 순국했다. 일본 천황이 녹음한 항복선언이 라디오 전파를 타기 직전, 조선의 마지막 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가 여운형을 찾았다. 여운형에게 치안유지권을 넘길 테니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운형은 일본이 미워도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일본인들에게 폭력적인 보복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운형은 정치범의 즉각 석방 등 5가지 조건을 조선총독부가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8월16일 아침 서대문형무소의 문을 열어 정치범에게 해방 조국의 공기를 숨쉬게 했다. 애국투사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전날 칙칙 대는 라디오를 통해 알 듯 모를 듯한 천황의 항복선언을 들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던 조선민중은 이제야 확실히 새로운 세상이 온 것을 알았다.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1950년 4월26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제정된 ‘광복절 노래’에서는 이날의 감격을 이렇게 노래한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식민지의 가장 큰 상징이었던 남산의 조선신궁이 가장 먼저 사라졌다. 일제는 1930년대 황국 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조선인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라고 기록한 황국신민 서사비를 세웠다.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황국신민서사 제창, 궁성요배등을 하게 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자 그들은 전국 각지 신사에 모신 신령을 일본으로 돌려보내는 승신식을 거행하고 신사를 해체했다. 조선신궁의 주요 신전과 배전, 제문이나 제구들이 철거되고 소각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인들이 그들이 모시던 신전이 조선 사람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철거한 것인데 어쨌든 제국주의 상징물 1호가 사라졌다. 점령군 미군의 군정 3년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조선 정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조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행정 경험도 없었다. 식민세력인 일본인과 식민지인 조선 사람에 대한 구분도 모호했다. 처음에는 일제 통치기구와 일제 관료를 그대로 두고 민정을 실시하려고 했다가 조선민중의 거센 반발을 샀다. 구체제를 뒷받침했던 친일세력을 정리해야 한다는 정세인식이 부족했다. 존 하지 미군정청 군정사령관은 경무대에 있었던 총독관저를 그대로 사용했다. 여러가지 혼선을 빚고 갈팡질팡하던 미 군정은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수도 서울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다. 아직 나라 이름도 없었던 때이다. 조선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한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광복 1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시 헌장’을 발표하였다. 9월18일에는 경성부에서 서울시로 명칭이 바뀌었고 경기도 관할에서 독립하였다. 1949년에는 서울시가 서울 특별시로 전환되어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리잡았다. 미 군정청이 발표한 서울시 헌장에서 서울은 Freedom Independent City가 된다고 규정했다. 미국에서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도시를 칭하는 개념인데 이를 그대로 번역하면 자유독립시가 된다. 매우 어색했다. 특별부제(特別府制)라고 번역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특별시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 (‘한국도시 이야기’ 손정목. 한울) 원래 서울이란 신라의 수도이던 서라벌에서 유래한 말이다. 셔블이 서라벌이 되었고, 후에 금성(金城) 등으로 표기되다가 훈민정음 제정 후에 한국 고유어인 셔블이 표기형태로 등장했다. 조선시대에 한양이라고도 하고 서울이라고도 했다. 경성 경성부로 명칭이 바뀌어도 서울이라는 일반 명사도 사용했었다. 서울시 헌장이 발표되면서 서울이 일반명사이자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일본식 지명인 정, 정목, 통을 현재의 동, 가, 로로 일제가 붙인 지역 이름을 바꾸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일본인이 모여 살던 본정(혼마치)는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임을 기려 충무로, 황금정은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서 을지로가 되었다.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일제 청산처럼 일본식 지명 개정 사업도 철저하지 못했다. 서울을 대표하는 명동은 메이지[明治] 천황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접대한 태평관이 숭례문 근처에 있었는데 지금도 태평로로 불리운다. 국가상징물로서 우남 이승만 동상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 대부분 신생 국가에서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면서 그에 맞는 상징을 구축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제대로 된 도시건설과 상징구축은 곧바로 시작되지 못했다. 해방 후 미군정이 통치하고,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시설이 파손되고, 가난과 싸우는 것이 1차적인 목표였기에 무엇을 새로 세우는 것을 생각조차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1960년대에서야 국가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조야하게 시작된다. 대한민국 도시의 역사, 건축사등에서 이승만 시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하지만 가난했어도 일제 시대에 대한 청산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을 최소한의 상징으로라도 제시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은 이승만이 갖고 있는 한계와 관련이 있다. 이승만은 해방정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친일세력을 반공주의 세력으로 재포장하여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민족과 통일 보다는 반공을 앞세웠다. 반공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미국과 연합하여 남한 지역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독립운동의 노선도 결이 달랐다. 무장투쟁이 아닌 외교주의 노선을 택했다. 외교로서 독립을 구하는 것이 희생을 줄이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길이라고 보았다. 이승만은 정세인식과 국제감각이 빨랐다. 1941년에 집필한 ‘일본내막기’ (Japan Inside Out)에서 일본이 머지않아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을 예견했고, 미국이 먼저 제압해야 한다고 했다.해방 후에는 신탁 반탁의 대립구도를 공산주의 대 반공주의로 프레임을 전환하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 미국의 세계전략을 빠르게 포착했다.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의 상징으로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했다. 백범은 1932년 윤봉길 의사에게 지시하여 일본 천장절 및 전승기념식에서 폭탄을 투척케 하는 의거를 감행하게 했다. 중국 국민당 주석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과 4억 중국인이 못한 일을 해냈다며 극찬하고 고마워했다. 깊은 감명을 받은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광복군 창설을 도왔다. 백범 김구는 장제스를 찾아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1943년 국제회담에서 최초로 한국의 독립이 명시적으로 선언되었다. 백범은 환국한 후에 단독정부 수립 반대, 남북회담 추진, 5.10 총선거 불참 등 선명한 민족주의 노선을 밟았으나 이로인해 고립되었다. 해방정국의 거두인 두 인물의 경쟁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백범은 암살되는 것으로 승부가 난 듯했다. 이승만은 개헌을 통해 임기를 연장하고, 조봉암 등 정적을 제거하고 비서정치로 권력을 행사했다. 이승만을 우상화하는 가시적인 조치들이 잇달았다. 국가상징도로와 국가상징공간인 광화문 탑골공원 남산에서 우상화가 진행됐다. 세종문화회관의 뿌리가 된 것은 우남회관이다. 우남은 이승만의 호다. 1955년 6월2일 우남회관 건립위원회가 발족했다. 수도 서울에 다른 나라에 비추어 손색이 없는 공회당을 지어 시민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전후 복구가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에 이같이 큰 공사를 벌이자 비난이 빗발쳤지만 정부는 서울의 체면상 문화시설이 꼭 필요하다고 고집을 부렸다. 실제로는 1960년 정부통령 취임식에 맞춰 공사에 박차를 가한 것인데 4월혁명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장면 정부에서 시민회관으로 이름을 변경하여 준공했지만 1972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훗날 이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지어진다. 1956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남산의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들어섰다. 이승만 동상은 1955년 ‘이승만 대통령 80회 탄신축하위원회(위원장 이기붕)’의 발의로 세워졌다. 그해 개천절인 10월 3일에 기공해서 이듬해 광복절에 맞춰 완공한 것이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동상의 높이는 그의 나이와 같은 81척(25m)이었다 몸통 길이는 23.5척(7m). 동양 최대, 세계 최대라고 자랑했다. 연인원 7만명이 동원되었다. 총 공사비 2억600만환은 극장 입장표에 기금조성비를 포함시켜 마련했다. 전 국민이 성금 모금에 나선 모양새를 갖췄다. 8각의 좌대에는 각 면마다 이승만의 생애를 조각했다. 이승만을 전통적인 두루마기 차림으로 형상화하여 국부 모습을 연출했다. 이기붕 국회의장은 “자주독립의 권화이며 반공의 상징인 이승만 대통령 동상 앞에서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그 뜻을 받들기를 맹세하자”고 말했다. 민주당의원 김영삼은 U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 동상건립에 소요된 비용은 40만 불 이상에 달한다. 적어도 2만명 이상의 굶주린 한국인들에게 1개월간의 식량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김영삼의원은 정부가 서울시의 명칭을 우남시로 변경하려 하고 있다는 주장도 했다. (《경향신문》 1956년 8월25일자) 1960년4월26일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자 시민들은 탑공공원으로 달려가 그의 동상을 끌어내리고 밧줄로 묶어 끌고다녔다. 남산의 어머어마한 동상은 그 해 8월 중장비를 동원하여 철거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일시 폐간되었던 경향신문은 “독재자 이승만씨의 동상도 독재자의 말로 못지않을 정도인 산산조각으로 철거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승만의 동상이 있던 터에는 김구의 동상이 들어섰다. 김구는 1949년6월26일 향년 74세의 나이에 안두희가 쏜 네발의 총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온 국민이 애도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백범 진영에서는 민족장을, 이승만 정부에서는 국장을 주장하다가 국민장으로 타협했다. 임시정부 내무 재무부장을 지낸 조완구는 “자기들이 죽여놓고 무슨 국장이냐”고 큰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이날 오전 10시 경교장에서 출발하여 저녁 8시 그가 안장되는 효창공원에 운구가 도착하기까지 백만 인파가 애도하며 뒤따랐다. 이승만도 민족의 한이라며 남북통일의 서광을 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난 것을 동포들과 함께 애통해 한다는 추도사를 전했다. 이승만 동상이 철거된 후 그 자리에 단군동상과 4·19의거기념탑을 세우자는 논란이 분분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과 대척점에 섰던 백범 김구였다. 김구 동상 건립은 일종의 국가적 사업이었다. 김구선생기념사업회(회장 곽상훈)가 김구 서거 20주년을 맞아 동상건립을 추진하자, 박정희가 금일봉을 내놓았다. 동상 제막식은 1969년 8월 23일에 있었는데, 이날은 김구의 93회 생일이었다. 박정희는 동상에 “위국성충은 일월과 같이 천추만대에 기리 빛나리. 일천구백육십구년 팔월 대통령 박정희”라는 휘호를 남겼다. 박정희가 김구동상을 통해 그의 친일이력을 지우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제스도 특사를 보내 측하하고 휘호를 남겼다. 경무대의 권부화, 경무대 똥지기도 행세 1939년 총독관저가 경복궁의 후원에 해당하는 경무대로 이주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공신들이 임금에게 충성을 서약했던 회맹단이 있던 곳으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탈아입국(脫亞入國)이라는 목표를 가진 일제는 총독관저에도 서양 양식을 도입했다. 제관(帝冠) 양식이라 하여 신고전주의 건축물 위에 일본식 기와를 올렸다. 일본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는 솔선 수범을 보였다. 관저 정원에 있는 느티나무 두 그루를 조선목재통제회사에 제공했다. 1943년 4월30일 배를 만드는데 사용한다는 의미의 조선용재 수여식이 열렸다.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는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획된 행사였다. 고이소는 “느티나무야! 나아가서 배가 되어 미영을 쳐부수는데 도움이 되어라”며 내리치는 도끼로 나무를 내리찍었다. 1948년 8월5일 중앙청에서 열린 제1회 국무회의에서 경무대를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는 것을 의결했다. 이승만은 민심수렴을 위해 9월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에서 5시까지 경무대를 개방했다. 백성의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민성일(民聲日)이라고 했다. 취지와는 달리 청탁이나 취직 부탁이 다수였다. 1인정치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이승만은 1955년 4월19일부터 4월20일 처음으로 경무대를 개방했다. 이승만은 담화를 통해 “조선시대에는 왕이 나라를 모두 자기 것이라고 했고 백성은 왕의 은혜를 입는 것이라고 했지만 민주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 나라가 모두 국민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국민들이 나라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경무대도 이런 뜻으로 문을 열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개방 첫날 6만명, 이틀 동안 10만명이 경무대 구경을 했다. 이후에도 이승만은 경무대를 개방했다. “민주 정부 수립 이후로 이 나라가 다 우리 국민의 것이라는 것을 많이 각성하고 경무대도 이런 뜻으로 몇 번 열어서 구경하게 한 것인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니 대단히 기쁘게 생각되며 이후에도 종종 이렇게 하고자 하는 바이다” (1956.4.28 이승만 경무대 개방 담화) 하지만 경무대는 갈수록 권부의 상징 처럼 되어갔다. 경무대 비서들 앞에서는 장관들도 슬슬 기었다. 이승만 집권12년, 비서정치가 판을 쳤다. 경무대라는 단어가 주는 위압감 공포감이 대단했다. 비서정치가 갈수록 위세를 발휘했고 이승만은 총기를 잃은 듯했다. 경무대라는 위엄의 공간에서 언로가 차단되었다. 국내 신문 스크랩을 하여 읽어주면 못마땅해 했다. 국내 신문을 점차 멀리하고 뉴욕타임스, 시카고 트리뷴을 열독했다. 심지어 한글 맞춤법까지 개입했다. 이승만이 청년 시절 익숙했던 대한제국 시기의 성경 문체를 고집했다. 한글학회 등과 정면 충돌했다. 장안에서 인기가 있었던 김성환 화백의 4컷만화 ‘고바우 영감’에서 경무대는 똥지게꾼도 권력이 있다(1958.1.23)는 풍자를 했다. 경무대 똥지게꾼이 지나가자 다른 똥지게꾼들이 90도로 고개 숙여 인사하는 스토리인데 김성환은 이 만화로 연행되고 유죄를 선고받아 벌금을 내야 했다. 1949년에 경무대에 들어간 경비경찰 곽영주는 명사수 곽경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4월혁명 당시 시위대에게 발포하는 명령에 관여하여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5.16후에 구성된 부정축재조사 위원회에서 조사한 결과 그의 부정축재 규모는 2억2600만환이었다. 그 때 쌀 한 가마니 1만8000환이었다. 소통과 민주주의의 상징이어야 할 경무대가 권위와 부패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윤보선은 대통령이 되어 4개월 정도 주인이 없었던 경무의 새 이름 공모에 나섰다. 독재로 점철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1961년 1월1일 청와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내가 취임 후 전국의 수많은 국민으로부터 경무대 명칭을 갈라는 요청이 있었고 나 자신도 경무대가 구 정권의 실정으로 미루어 국민들의 원부가 되어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이를 개칭하려고 애써왔다. 그래서 몇 개월 동안 생각한 끝에 지금 건물이 푸른 기와로 되어있고 조선 초엽에 경복궁 건물들이 모두 푸른 기와로 덮여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푸른 기와라면 우리나라 고전 문화를 상징할 수 있는데다가…” 그런데 총독관저로 지어졌던 경무대에는 일본식 기와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8년1월18일 김신조 일당이 휴전선 철책을 뚫고 산길을 시속 12km로 달려와 청와대 앞에 당도했다. 김신조는 기자회견에서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수다“고 밝혔다. 청와대에 대한 경호가 강호되었다. 장관급 경호실장이 군인으로 경호 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으며 상시적으로 민간을 통제했다. 주변 산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감시에 필요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북악스카이웨이를 닦었다. 이렇게 하여 여러 정권을 거치는 동안 청와대는 갈수록 국민과 분리되고 불행한 역사의 무대가 되었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7-31
    • [민병두의 K-Sapience (16)] 국가상징공간② 경성, 제국주의의 심장이 되다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고종이 경운궁을 제국의 거점으로 삼은 이유는 정동이 외국공관과 기독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서양세력은 조선에서 맨 처음 경복궁과 가까운 서촌 효자동 지역에 터를 잡을려고 했는데 임오군란 등 각종 정변을 경험하면서 보다 안전한 곳을 원하게 되었다. 정동이 그들의 거점이 되었다. 정동에 있는 서양 각국의 공관이 경운궁을 둘러싸게 되었다. 미국공사관(1883) 영국공사관(1884) 독일공사관(1884) 러시아공사관(1885) 프랑스공사관(1888) 벨기에공사관(1901) 이탈리아공사관(1901). 그중에서도 러시아공사관이 규모가 컸다. 공관의 규모는 그 나라가 조선의 가치를 생각하는 비중에 비례한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의지와 무력 앞에서 공관이라는 담벼락은 덕수궁 담벼락 만큼이나 허약했다 결국 대한제국은 강탈을 당하고 숨이 끊어졌다. 경성의 상징물들도 제국의 상징물에 자리를 내주거나 파괴되었다. 강제 병합을 하면서 일본은 기존의 경성을 중심지로 삼았다. 러일전쟁으로 점령지역에 새로운 중심을 만들 경제력 여력도 없었고, 500년 조선의 도읍지를 그대로 놔두면 저항의 중심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궁궐의 해체 우선 조선왕조의 상징인 궁궐을 개조 해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창경궁을 뜯어고쳐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공개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1907년 고종이 강제 폐위됐다. 고종은 경운궁에서 명칭을 바꾼 덕수궁(순종이 아버지 고종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에서 연금생활을 하고 있었다. 순종황제는 창덕궁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이완용 일당과 일본인들은 우울함과 걱정 근심에 빠진 그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 안에 동물을 들여왔다. 1909년 11월1일 개원식에 순종이 모닝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까지 짚은 서양 신사의 모습으로 참석했다. 동양 최대의 식물원으로 변모했다. 일본인들은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고(1911) 서양식 건물도 짓자고 해 순종의 동의를 얻었다. 현대그룹을 일군 정주영도 어린 시절 강원도 통천에서 경성으로 가출을 했다가 아버지한테 붙잡혔는데 창경원 한번 보고 고향에 가자고 했을 정도로 조선인들의 로망이 되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창경원을 관람하는 순종과 순종비 등 왕실 기사를 자주 다루었다. 왕가가 인정한 ‘새로운 문명의 상징’이 되었고 한없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이미지로 전파됐다. 매주 목요일은 순종이 창경원을 산책 관람하는 날이어서 휴장했다. 순종의 동정은 언론을 통해서 알려졌다. 순종의 관람 모습을 동물원의 동물 처럼 투명하게 보이게 한다는 프로젝트였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선전도구로 이용했다. 일제가 옛 황실을 잘 대우해주고 있는 것 처럼 외국인들과 식민지인들에게 보여주는 유효한 수단이었다.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대규모로 식재했다. 1918년 부터는 밤 벚꽃놀이(야앵)가 크게 유행했다. 지방에서 온 구경꾼들은 볼거리가 났다고 선전을 했다. “모두 마음이 들떠서 야앵! 야앵! 말하느니 야앵이요. 가느니 야앵이라. 분을 한껏 바르고 향수를 뿌린 모던걸에게 장난을 걸 때 양복 친구들의 시선은 야한 곳으로 혹은 젊은 여자들의 다리에 꽂혔다”(별건곤. 개벽에서 만든 취미 잡지) “정문을 들어서면서 막바로 보이는 잔디밭광장은 주위를 삑 둘른 벚꽃의 하얀 울타리에 더 한층 흥을 돋아주나 이 안에 머물으는 자 별로 볼 수 없다. 다만 밤벚꽃의 짦은 시간을 흥에 겨워 뛰놀자는 풍류객들이 삐루(맥주)와 월계관을 밀수입하야 ‘부어라 먹자’하며 창경원이 좁다 하고 떠든다”(동아일보 1935.4.12) 아예 밤벚꽃 놀이를 제목으로 한 소설(김유정. 야앵)도 등장했다. 이미 세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1910년 경희궁 터에는 일본인 2세들을 위해 중학교(경성중학교.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건립되었다. 경희궁은 경복궁의 동궐인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경복궁의 서궁으로 불리울 정도로 위상이 있었다. 경희궁은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조달을 하다 보니 90%의 건물이 없어졌는데 일본인학교가 들어서면서 형체가 모두 사라지다 시피 했다. 지금은 서울시교육청 서울역사박물관이 있는 자리이다. 일제는 1933년 덕수궁도 궁역을 축소하고 중심부를 제외한 대부분 전각을 철거하고 중앙공원으로 개조했다. 이제 남은 것은 조선의 정궁, 경복궁이었다. 일제는 1911년 5월 병합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조산왕조 재산을 관리하는 이왕직에게서 경복궁 전체에 대한 관리권도 인도받았다. 일제는 남산과 용사의 총독부 청사가 공간이 부족하여 청사를 신축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는데 경복궁을 염두에 두었다. 조선을 심리적 문화적 압도하는 데에는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적합했다. 조선왕조는 끝났고 새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한 전제 작업으로 1915년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 병합 5주년을 기념한 전시회에 경복궁 안의 72,000평 부지가 사용되었다. 500동의 건물이 철거되었다. 51일 동안 불야성을 이룬 공진회를 116만여명이 관람했다. 권번(기생조합 겸 기예학교) 기생들도 관람 겸 흥행을 위해 동원되었다. 당시 기생은 인기 스타였다. 전국의 농민들도 동원되어 관람했다. 공진회야 말로 조선의 낡은 정치와 일제의 새 정치를 대조하는 이벤트였다고 조선휘보(1915.10)는 분석했다. 대성공이었다. 여론을 등에 업고 작업에 속도를 가해 1926년에 신청사를 건립했다. 1927년에 광화문을 해체했다. 경복궁 후원 경무대 자리에 총독관저(경무대-청와대)도 건축했다. 1926년에는 경운궁 앞에 경성부청사(현 서울도서관)를 건설했다. 이에 앞서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가 1907년 한성을 방문하게 된다. 훗날 다이쇼 천황으로 불린 인물이다.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한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었다. 위세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행위였다. 엄연히 조선의 황제가 있는데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한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했다. 1905년 조선군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남대문을 대포로 부수려고 했던 일이 있다. 이번에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이것이 출발이 되어 한양도성의 성곽은 조선신궁을 건축하는데 동원되었다. 성곽은 폐허가 되었다. 서대문 돈의문등 대문이 없어지고 문화재는 반출되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왕평(본명 이응호)가 작사하고 가수 이애리수가 부른 노래, 황성옛터는 1932년 4월 레코드로 출반되었다. 5만장이라는 판매기록을 남겼다. 황성은 황제가 머물렀던 수도의 성을 의미한다. 망국의 서러움을 달래주는 저항가요가 급속히 퍼지자 일제는 금지곡 리스트에 올렸다. 금지곡이 되자 더 많이 퍼졌다. “나라 잃은 시대, 나는 민족 저항의 노래인 황성옛터 한 곡으로 겨레의 영혼에 불을 지폈다. 그 불이 꺼지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그 불꽃은 꺼졌는가? 여전히 활활 타고 있는가?” (나는 왕평이다. 이동순. 도서출판 일송북) ​ 2. 신들의 교체 1910년 8월 병합과 함께 맨 처음 도시의 이름을 바꾸었다. 나라를 빼앗긴데 이어 수도의 이름을 빼앗는 것은 지배를 당하는 민족에게 큰 상처가 아닐 수 없다. 수도의 위상도 빼앗겼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이 경기도에 편입되고 명칭도 경성(부)으로 바뀌었다. 고종황제가 중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황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었던 원구단을 1914년에 헐어내고 총독부 철도호텔(조선호텔)을 건립했다. 황제는 일본 천황 하나 뿐이고 천황은 곧 신이었다. 이름과 지위를 박탈한데 이어 신의 자리도 빼앗았다.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 중의 하나인 남산은 조선의 성지였다. 백악산의 산신인 진국백과 남산의 산신인 목멱대왕에 대해서는 왕이 직접 제사를 드렸다. 남산 꼭대기(팔각정)에는 목멱대왕의 산신당, 즉 목멱신사가 차려져 있었다. 조선왕조의 국사 무학대사의 위패를 안치하면서 국사당이라고 불리웠던 사당이라고 해서 국사당이라고 했다. 이런 신성한 곳에 일제는 지배기구를 두었다. 군사지리학적으로도 한양을 내려보고 있어서 가치가 높기도 했다. 1905년에 일제는 조선신궁 일대의 일본인 거류지역인 왜성대(倭城臺.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와 군대의 주둔지에서 유래)에 통감부(훗날 총독부)를 세웠다. 총독 관저, 헌병대 사령부등 지배기구의 핵심이 함께 포진했다. 북쪽 기슭 예장동 일대에 황대신궁을 세웠는데, 후에 조선신궁이 되었다. 민족이 모시는 신은 민족의 운명과 미래를 보살피고, 개인의 내세를 보장한다. 그런데 내가 믿는 신이 쫓겨나고, 신을 모시는 신사 자리도 빼앗기면 백성들이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지는 고통을 겪게 된다. 신앙의 상징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천황을 모시고 참배까지 하라고 했다. ‘조선을 지배하는 상징지리의 정치적 작업’(다시, 서울문화를 이야기하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으로 조선신궁을 성역화했다. 동시에 조선의 국가 기운을 꺾으려는 의도로 1916년에 남산 전체를 공원화했다. 공원화는 원래 유럽에서 도시화가 가져오는 문제를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되었다. 일제는 조선의 상징과 이미지를 격하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도 사용하였다. 일제는 1926년 국사당을 없애려 했으나 남산의 산신령이 갖는 힘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이를 파괴하지 못하고 인왕산 선바위 근처로 옮겼다고 한다. 남산의 동쪽도 유린했다. 고종황제는 을미사변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의 충혼을 제사하는 장충단(충성을 장려하는 제단)을 만들었다. 1900년의 일이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복수를 하여 원수를 갚기 전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원한에 사무쳐 있었다. 장충단 부지는 남산 동북쪽 자락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국립극장, 반얀트리 호텔(옛 타워호텔), 남산 자유센터, 그리고 신라호텔과 장충체육관까지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지금은 장충단 비석이 흔적으로 남아 있는데 전면의 장충단 글씨는 황태자였던 순종이 썼고, 뒷면의 비문은 육군부장 민영환이 썼다. 항일을 상징하는 장소로서 동작동 국립묘지 생기기 이전에 최초의 현충원 역할을 했다. 1919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자리를 공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32년에 공원 동쪽에 조선을 침략하는데 앞장 선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용도로 박문사라는 사찰을 지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다.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의사가 조선 침략의 첨병 이토를 저격한 지 23년이 되는 1932년에 완공했다. 박문사 건축에는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을 사용했으며,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이전하여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의 유산을 골고루 뜯어내 조선에게는 침략자이고 일본에게는 애국자인 그의 신사를 조성했다. 3. 종묘와 사직을 위협하다 조선이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면서 가장 먼저 지은 것이 종묘다. 종묘는 죽은 왕들의 혼이 머무르는 정원이다. 죽은 왕의 몸은 왕릉에 묻히지만 혼은 종묘의 위폐에 모셔진다. 신주를 모시는 이곳은 왕가의 상징이자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종묘의 주인은 승하한 임금의 혼령을 상징하는 신위였다. 위패라고 불리는 신위는 죽은 자의 상징물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왕릉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채택했으나 당시 백성은 물론 사대부에게도 낯설었다. 왕실이 앞장서서 성리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고 그래서 왕실의 권위도 드높여야 했다. 효가 나라의 기본이고 충의 이념적 근원인데 왕실이 나서서 효와 충을 솔선수범했다. 조선신궁이 있는데 종묘가 따로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거슬리는 일이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안국동 돈화문 총독부의원 남부 중앙시험소(방통대 역사관)를 잇는 북부횡단도로를 개설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도로가 아니었던 곳, 도로여서는 안되는 곳에 신작로를 만드는 작업이다.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관통하는 길이다. 총독부 토목부가 1922년7월 종묘 경내의 도로예정선을 측량하고 이를 표시하는 침목을 설치하자 순종이 놀랐다. 창덕궁에 머물면서 종묘를 참배하는 일이 국왕으로서 거의 유일한 공무였던 순종은 처음으로 저항을 표시했다. 효심이 깊은 순종은 차라리 창덕궁을 침범하는 편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표명한다. 나약한 옛 황실을 대신해서 전주 이씨 종약소가 종묘는 신성한 곳이니 침범할 수 없다고 항의를 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미 일제가 제공하는 공원의 효능감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패망한 왕조의 왕들의 영혼의 안식처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혹자는 말하리라. 종묘는 지존한 곳이니 일반 민중을 위하야 지대를 개방함은 그 숭엄을 범함이라고…그러나 이것도 시세의 문제이다. 종묘사직이 계견불문처(鷄犬不聞處 닭이나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만 그 숭엄을 보장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이다. 민중을 가까이 함으로써 민중과 요할 기회가 많음으로써 종묘의 존재가 더욱 의의가 있을 것이나…사직대가 사직공원이 되고 장충단이 장충단공원이 된 금일에 바늘 꼽기도 어려운 인구 조밀한 광활한 지역을 겸한 종묘지대는 경성부민의 보건과 도시미를 위하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민중의 존숭심을 다시 환기키 위하여 공원으로 공개될 것은 금후의 조선 종세가 여하히 변할지라도 필연코 닥쳐올 운명이라고 아니 볼 수 없다” (1929년 6월 동아일보 사설) 순종은 1926년에 승하했고 결국 1932년 종묘와 창덕궁을 단절하는 도로가 개통되었다. 일제가 상징과 이미지를 파괴하는 목적이 한양의 풍수를 단맥하기 위한 것이라는 학설이 있다. 일제의 다양한 도시 개발사업의 목적이 조선의 지맥을 의도적으로 절단하고 훼손하여 우리 민족의 맥을 끊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풍수단맥설은 조선왕조 정도 당시 한양 도성의 조영(건설) 원리를 단일한 변수로 설명하는 전제 위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한양을 수도로 정할 때에는풍수만을 본 것이 아니라 지정학적 위치 등 여러가지가 고려되었다. 따라서 풍수를 단맥한다고 해서 이 나라가 영원히 일어설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북악선과 조선통독부, 경성부를 새의 시각에서 내려다 보면 대일본(大日本)이라는 글자가 된다며 이 역시 조선의 기를 꺾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을 모신 제단이 있는 장소로 종묘와 함께 국가의 상징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사직단의 위상은 종묘 보다 높다. 종묘가 왕실을 상징한다면 사직단은 국가를 지탱하는 근본인 땅과 곡식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사직단의 규모를 축소하고 주변에 도로를 내고 1924년에 이를 공원으로 만들었다. 4. 북촌 대 남촌의 대립 경성은 조선의 지배층이 터를 잡고 있는 북촌과 일본 식민의 거점인 청계천 이남의 을지로 충무로 남산의 남촌으로 갈렸다. 원래 한성은 광화문 일대의 정치 중심과 종로의 경제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남산 일대는 가난한 선비, 딸깍발이들의 마을이었으며 동대문 쪽은 빈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일제가 시내가 내려 보이는 남산에 지배기구를 두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이 그 하부지역에 정주를 하게 되었다. 황금정(을지로입구) 진고개(충무로) 명동일대가 그들의 거주지였다. 이 지역이 구 경제 중심을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 중심으로 부상했다.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앞에는 최초의 계획광장이 조성되었다. 미츠코시 경성점을 비롯하여 일본의 백화점 4개가 포진해 있었다. 엘리베이커 에스컬레이터와 온갖 상품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1933년 종합잡지 ‘삼천리’ 기사를 보면 당시 경성인구가 30만명인데 미츠코시백화점 방문자가 12만6천명에 달했다. (숫자는 과장되었을 수 있다) 아침에 들어가면 저녁에 나올 정도로 볼 것이 많았다며 사람들이 찬탄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핫플레이스가 따로 없었다. “중심을 대한제국의 정궁인 경운궁 앞 광장에서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대체하는 공간의 권력탈취”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염복규지음 이데아)가 이뤄졌다. “남산 비탈에 단조롭고 수수한 백색목조의 일본공사관 건물이 위치하고 그 앞쪽에 근 5,000명이 살고 있는 일본인 거류지가 있다. 다방도 있고 극장도 있으며 그밖에 각종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 곳은 조선인 거리와는 대조적으로 점포와 주택이 들어선 가로가 깨끗하고 말끔하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인들 허리띠를 두른 길다란 일본옷을 입은 남자들이 모두 나막신을 신은 채 일본에서와 같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 단정한 군인들과 헌병, 그리고 스마트한 칼을 찬 장교들, 그들은 시간을 맞추어 거류지의 호위병을 교대시키고 있다. 이러한 조심은 실제로 필요하다. 뿌리깊게 강한 조선인의 배일감정 때문이다.” 비숍이 ‘한국과 그 이웃의 나라들’ (1898)에서 본 남촌의 풍경이다. 반면 일본인이 그린 북촌은 가난하면서 적대적으로 남아있었다. “경성에서 살면서 가지(소설속 등장인물)는 여간해서 종로 부근은 걷지 않았다. 그곳은 순순한 조선인의 거리로, 혼자 걷고 있으면 왠지 아주 불안정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왠지 기분이 나빴다. 좁은 구역에서 한 걸음 벗어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조선 아이들과 싸움이 벌어질까 두려워 항상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지배는 국가 차원의 일로 아이들의 세계는 조선인의 천하였다. 우리는 늘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 나오는 그 종로였다. 일본 상권이 아무리 설쳐대도 감히 넘볼 수 없던 민족의 자존심 종로였다. 경성에서 태어난 일본인 소설사 카지야마 도시유키는 ‘경성이여 안녕’등 9권의 식민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다. 경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일본인 작가 혼다 야스히루가 경험했던 종로도 비슷하다. 북촌과 남촌 사이를 갈라놓은 청계천은 골칫거리이자 또 다른 대립의 불씨였다. 한성에서 청계천은 절대적 수맥이다. 24개의 다리가 놓여있는 청계천은 잦은 범람으로 사고도 많았고 불만도 컸다. 총독부가 한강 주변 정비에는 예산을 투입하면서 청계천 복개를 늦추는 것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가 나왔다. 경성부 협의회에 참가하고 있는 조선인 한만희의 발언을 보자. “당국이 다른 도로를 미장하기에만 몰두하고 각일각으로 위험을 느끼게 되는 이곳에 경비 없다는 당황스러운 이유만 내세우는데 대하여 불평의 기운이 충만하였다. 경성을 명랑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시급히 개수해야 할 것이 청계천인데…청계천이 황금정 이남 남촌에 있다고 하면 부 당국자는 어떻게든지 이미 처단했을 것이다. 남촌 중심의 경성부의 처사로 내선인촌(조선인촌)의 차별문제로 청계천을 방임하는 것이 과연 말이나 되는가. 그것은 청계천이 북쪽에 있는 까닭이 아닌가.” 심훈은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잘있거라 나의 서울이여’ 라는 시는 남겼다. “오오 잘 있거라! 저주받은 도시여,/ <폼페이>같이 폭삭 파묻히지도 못하고,/ 지진때 동경처럼 활활 타 보지도 못한/ 꺼풀만 남은 도시여, 나의 서울이여!/ 성벽은 토막이 나고 문루는 헐려/ <해태>조차 주인 잃은 궁전을 지키지 못하며/ 반 천년이나 네 품속에 자라난 백성들은/ 산으로 기어오르고 두더지처럼 토막(土幕) 속을 파고들거니/ 이제 젊은 사람까지 등을 밀려 너를 버리고 가는구나?// 남산아 잘 있거라, 한강아 너도 잘 있거라/ 너희만은 옛모양을 길이길이 지켜다오!/ 그러나 이 길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겠느냐/ 내 눈물이 마지막 너를 조상하는 눈물이겠느냐/ 오오 빈사(瀕死)의 도시, 나의 서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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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30
    • [민병두의 K-Sapience (15)] 국가상징공간① 대한제국이 세운 독립문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도시는, 특히 한 나라의 정치 경제체제와 문화를 압축하고 있는 수도는 그 나라의 상징이다. 나는 해외여행을 하면 이틀간 그 나라의 옛 도심을 걸어 다닌다. 그러면 이 나라의 현재 속에 보존되어 있는 과거의 기억이 드러난다. 영광의 역사, 오욕의 상처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믿었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 도시는 기억이다. 생각이다. 생각을 공간적으로 조직화하고 표현한 것이 도시이다. 길을 보면 도시가 보인다. 집과 왕궁과 성과 현대적인 건물을 보면 도시의 역사적 지층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는 미래다. 나아가고자 하는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서울시가 국가상징공간과 국가상징도로를 재추진한다. 한국전쟁 74주기를 맞아 국가상징물의 일환으로 100m 높이의 국기게양대 설치 계획을 발표했다가 우왕좌왕한다. 어떤 나라의 이미지는 그 나라의 수도와 랜드마크를 통해서 형성된다. 만리장성, 자유의 여신상, 후지산, 에펠탑은 그 나라의 상징물이다. 한국은, 서울은 어떤 상징물을 갖고 있는가. 경복궁 광화문 N타워 한강 등등이 후보로 떠오르지만 딱 이것이다는 공감대가 없다. 그러면 평양은? 주체사상탑 김일성동상 인민문화궁전 등등. 서울은, 평양은 왜 지금과 같은 도시를 만들었을까? 고려의 수도인 개경(개성)은 풍수도참 사상 위에 올려진 도시다. 조선의 한성(한양, 서울)은 성리학적 기반 위에 세워진 계획도시이다. 조선은 고려의 생각과 이념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숭유억불이다. 구체제제의 기득권과 생각을 누르고 일어서야 새로운 것의 의미가 깊어진다. 조선과 대한제국이 한성에 세운 생각의 건축물과 그 길 위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상징과 생각을 이식했다. 일본은 영구히 조선을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55년 서울이 인구 200만 명 규모의 도시가 되었을 때를 생각하고 여러 구상을 했다. 해방 후 남과 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방식의 도시를 세운다. 질서의 질서화가 평양이라면 무질서의 질서화가 서울이라고 할 수 있다. • '소중화(小中華)'였던 조선에게 '독립'은 새로운 개념 선교사 제임스 S. 게일이 1889년3월 이 땅을 처음 방문하여 남긴 ‘조선 마지막 10년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상을 읽는데 유용하다. “독립은 새로운 개념이다. 단어 또한 그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 만든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한번도 다른 존재로부터 분리된 오롯한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조선은 출발부터 소중화(小中華)로 자리매김했다. 중국을 중심에 놓고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했다. 그런 조선의 역사에서 독립이라는 개념이 들어설 수가 없었다. 민족, 독립은 일본이 만든 서구언어의 번역이다. 중국이 흔들리고 제국주의의 침략이 코 앞으로 다가오면서 독립이 왕조와 지배계층의, 민족이 민중의 주제어가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청나라가 패전했다. 조선은 조공관계의 폐지를 선언하면서 자주독립국임이 되고자 했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 불안감을 느낀 고종과 명성왕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이자 일본은 1895년 명성왕후를 시해(을미사변)했다. 고종과 명성왕후는 살 길을 러시아에서 찾았다. 1000여명의 포위를 뚫고 경복궁을 탈출한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민중들의 반일감정도 도움이 됐다.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다. 10월12일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를 선포하는 등 자주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왕의 지위를 황제로 올렸다. 황제의 나라가 되었기에 이제 부터는 주상전하가 아니라 황제폐하, 대군주전하로 부르고 천세가 아니라 만세를 외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은 조선의 왕도에서 대한제국의 황도가 되었다. 새 황궁인 경운궁을 증축하고 독립국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을 만들었다. 원구단은 대한제국의 성역이다. 제후국 소국의 지위에서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선포한 것이다. “십일일 밤 장안의 사가와 각 전에서는 등불을 밝게 달아 길들이 낮과 같이 밝았다. 가을 달 또한 밝은 빛을 검정 구름 틈으로 내려 비추었다. 집집마다 태극 국기를 높이 걸어 애국심을 표하였고, 각 대대 병정들과 각처 순검들이 만일에 대비하여 절도 있게 파수하였다. 길에 다니던 사람들이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경사를 즐거워하는 마음에 젖은 옷과 추위를 개의치 않고 질서 정연히 각자의 의무를 착실히 하였다.” “십일일 오후 두시 반 경운궁에서 시작하여 환구단까지 길가 좌우로 각 대대 군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었다. 순검들도 몇 백 명이 틈틈이 벌려 서서 황국의 위엄을 나타냈다. 좌우로 휘장을 쳐, 잡인 왕래를 금하였고, 옛적에 쓰던 의장 등물을 고쳐 황색으로 만들어 호위하게 하였다.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지나갈 때에는 위엄이 웅장했다. 총 끝에 꽂힌 창들이 석양에 빛을 반사하여 빛났다. 육군 장관들은 금수로 장식한 모자와 복장을 하였고, 허리에는 금줄로 연결된 은빛의 군도를 찾다. 옛 풍속으로 조선 군복울 입은 관원들도 있었으며, 금관 조복한 관인들도 많이 있었다.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 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쓴 채 붉은 연을 타고 지나갔다. 어가가 환구단에 이르자 제향에 쓸 가색 물건을 둘러보고 오후 네 시쯤에 환어하였다. 십이일 오전 두시 다시 위의를 갖추어 황단에 가서 하느님께 제사하고 황제 위에 나아감을 고하였다. 황제는 오전 네시 반에 환어하였다. 동일 정오 십이시에 만조백관이 예복을 갖추고 경운궁에 나아가 대황제와 황태후, 황태자와 황태비에게 크게 하례를 올렸고, 백관들이 크게 “황제폐하 만세”를 불러 환호하였다.” (독립신문 1897년10월12일. ‘덕수궁’ 안창모 지음에서 재인용) 경성의 중심도로는 경복궁에서 황토마루(광화문 네거리)의 남북로, 황토마루와 동대문의 동서로가 전부였다. 초대 주미 정무공사로 있었던 박정양이 고종의 지지를 받고 워싱턴에서 본 방사성 도로를 바탕으로 한성도시개조사업에 나섰다. 경운궁과 대한문이 고립된 장소가 아니라 교통의 시발점이 되게 했다. 당시 정치의 중심이었던 경복궁과 북촌도 연결하고 상업의 중심지인 종로 등과도 길을 열었다 오늘날 서울 중심지의 기본도로가 이때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서대문-청량리 전차 노선도 개통되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피신해 있을 때 부터 독립 구상을 실천했다. 1896년 고종과 협력하에 독립협회가 출범한다.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도 지원했다. 중국의 은혜에 보답하며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의 영은문 자리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 떠 독립문을 만들었다. 최초의 서구적 양식의 건축물이다. 1897년 11월20일 고종의 동의를 받아서 서재필이 진행한 사건이다. “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 영은문의 옛 터에 독립문이라고 명명할 문을 건립한 것을 승인한 사실을 경축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 문의 조명(彫銘)이 국문으로 조각될지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 부터,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전쟁의 폭력으로 열강들에 대항해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조선의 위치가 극히 중요해 평화와 휴머니티와 진보의 이익을 위해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조선이 동양 열강 사이의 중요한 위치를 향유함을 보장하도록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전쟁이 그의 주변에서 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의 머리 위에 쏟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힘의 균형의 법칙에 의해 조선은 손상 받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독립문이여, 성공하라! 그리고 다음 세대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라!” (독립신문의 영문판 Independent 1896.6.20. 위 안창모)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기념식이 열렸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조선가 독립가 등 세 곡을 불렀다.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림볼트가 작곡한 ‘O Happy Day, That Fixed My Choice’(주의 말씀 받은 그 날’에 가사를 입혔다. 8절까지 긴 노래이다. “일천팔백 구십칠년 건양원년 십일월에 아시아주 독립조선 독립문을 새로세(우)네 (아래 후렴) 기쁜 날 기쁜 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 일월같이 빛나도다 기쁜 날 기쁜 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 태극기를 높이달고 독립가를 불러보세, 이천만중 일심으로 승평악을 화답하네(8절)…후렴” 영은문을 밟고 올라서는 것은 큰 사건이었음을 이광수의 미완성 장편소설 ‘선도자’(1924)에도 엿볼 수 있다. “독립문 앞에는 헐려진 연주문(영은문의 원래 명칭) 재목을 그냥 쌓아 놓고 굵다란 연주문 돌기둥은 섬거적을 싸 놓았다. 그리고 영은문이라는 큰 현관은 바로 독립문 아래 땅바닥에서 서너 조각을 깨트려 놓아 그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밟도록 하였다. 오늘 대황제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나오시면 황제가 앞서고 백관이 뒤를 따라 그 여러 백 년 치욕의 기억을 가진 연주문 현관을 밟고 지나갈 것이오. 그런 후에는 일반 인민들이 한 번씩 밟고 지나갈 것이다” 동아일보에는 독립문에 관한 믿지못할 기사가 실려있다(1924년 7월15일) “…연주문 석주는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전에는 둘러매었든 쇠사슬이 있었는데 독립문이 선 뒤에 누가 끊어버렸답니다. 속박당하는 것이 해방되었으니 쇠사슬이 끊어진 것입니다. 년전에 삼일운동 때 독립문 위에 태극기가 뚜렷이 솟아나서 경찰서에서 씻어버리려고 펌프질까지 한 일이 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는 그러지 못할 곳이라 도깨비 짓이라고 그 당시 떠들었습니다” • 한성에 들어선 최초의 서구식 공원 '탑골 공원' 서구식 공원도 처음으로 한성에 들어섰는데(최초의 공원은 인천의 만국공원)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던 원각사 터였다. 여기에 탑골공원을 만들었다. 1897년 고종황제의 한성개조사업의 일환으로 건축됐다. 북학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백탑파(원각사지 석탑. 흰 빛을 띄어 백탑이라고 불렀다)가 이곳에서 활동했다. 고종의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이 공원의 명칭을 파고다로 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공원의 개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원은 광장과 함께 민주주의의 플랫폼 역할을 한다. 이곳에서 3.1운동 선언문이 낭독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불길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번져나갔다. 민족대표 33인이 요릿집 태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부르며 연행되어갔다. 누군가가 햇불을 들어야 했다. 경신중학생 정재용이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로 시작하는 선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전국에 독립선언문 2만여장이 비밀리에 배포되어 있었다. 경향 각지에서 200여만명의 조선민중이 만세운동에 동참하는데 탑골공원이 그 발원지가 됐다. 당시로서는 민중이 모일 수 있는 경성부 중심에 단 하나의 공원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나와있는 3.1운동의 발원지 탑골공원은 지금 노인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조선 말, 대한제국 시기 동아시아는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영국 프랑스가 세계를 나눠 갖고 네덜란드 독일이 나머지를 차지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스페인 포르투갈은 이미 중남미를 차지했다. 미국은 열강의 잔칫상에 마지막으로 뛰어들었다.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은 서구열강의 땅따먹기 대상이 되어있었다. 영국은 전세계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면서 동양의 끝까지 당도했다. 홍콩을 조차하고 중국을 요리하기에 바쁜 영국으로서는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그런데 일본이 아시아에서 참전했다. 청일전쟁을 치르는 것을 보니 만만치 않았다. 영국은 자신들의 중국 내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를 저지할 목적으로 1902년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특수 권익을 영국에게서 인정받았다. 일본은 1904년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러시아 발틱함대가 지구를 돌아 일본 앞바다에서 궤멸하는 것을 보고 서구 열강은 일본의 실력을 인정했다. 제일 나중에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 미국은 필리핀에서의 지분을 보호할 목적으로 일본과 카쓰라-태프트 밀약(1905)을 맺었다. 조선은 일본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7-29
    • [민병두의 K-Sapience (14)] K-스포츠와 민족주의⑧ 평화와 영광의 시대는 다시 돌아올까?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스포츠는 국가 대항전이라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민족주의적이다. 민족주의적인 정서가 스포츠를 지배한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민족주의가 부추키는 경쟁이 인간한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동력이 되어왔다. 개방적인 자세를 보임으로써 이웃국가의 시민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공동으로 세계시민의 규칙과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방향으로 가면 된다. 선수는 물론 응원하는 시민, 이를 중계하는 언론, 그리고 지원하는 정부까지 스포츠에 있어서는 개방적 민족주의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스포츠 민족주의는 우리 사회의 국민통합, 자신감 증진 등 긍적적인 기여를 많이 해 왔다. 역대 정권이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갖고 활용했든지 간에 좋은 성적을 통해서 얻은 자산은 결국 국민의 것이 되었다. 일시적으로는 정권의 자산이 될 수 있어도, 국민은 올림픽 월드컵 세계선수권대회 등을 소비하고 활용하면서 나름의 문화를 만들어왔다. 전두환 시대에 질서의 올림픽을 통해서 순응하는 시민을 만들려고 했지만, 국민은 더 창조적인 질서를 만들었다. 월드컵은 전 국민이 하나되는 체험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했다. 정부가 나선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활체육 활성화를 통해 국민건강이 증진되고, 꿈을 키우는 청소년들이 미래의 영웅이 될 준비를 하고, 수없이 많은 극적인 승부의 순간을 보면서 공통의 정서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정치와 스포츠가 분리되기 힘든 것은 늘 문제가 된다. 스포츠의 남북 교류협력 시대는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인가? 한국과 일본의 숙명적인 경쟁의식은 과거사와 분리될 수는 없을까? 한국과 중국, 한국과 미국의 경기를 바라보는 국민의 의식은 어떻게 변화할까? 앞으로의 국제정치에 따라 국가간 스포츠 대결을 보는 국민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우리 국민이 어느 편을 응원하느냐에 따라 상대 국가의 국민도 다른 반응을 보인다.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요즘의 좌우 정치대결 처럼 미국전과 중국전 북한전 일본전에서 경기장의 우리 응원단이 갈라질 수도 있다. 일본이 첫번째 도쿄올림픽을 통해 스포츠 강국이 되었다가 추락하는 곡선을 그렸다. 다시 두번째 도쿄올림픽을 통해 스포츠 강국으로 재부상했다. 한국도 비슷한 하향곡선을 그려나가고 있다. 부산EXPO유치와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 실패에 이어 파리올림픽에서 예상되는 성적은 국민 사기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가 2032년 남북한이 동시에 개최하는 평화올림픽을 제안했지만 북한의 무관심으로 무산됐다. 국민이 하나되고 통합하고 다시 일어서는 계기를 당분간 맞기가 어려울 것 같다. 스포츠가 쇠퇴하는 사이에 뉴진스 BTS등이 그 자리를 대신해 가고 있다. 김정은은 2023년 12월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가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되었다”라고 정의했다. 2019년 김정은과 트럼프의 2차 북미정상회담이 성과없이 끝나면서 개성의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등 대남관계를 대적관계로 경색시켜온 것의 연장이다. 이에따라 해방 이후 분단은 되었지만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민족, 화해, 통일과 같은 목표를 폐기했다.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이나 북측으로 부르지 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호명해달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8000만 겨레, 북반부, 자주평화통일, 민족대단결, 동족 등 민족공동체와 관련한 용어를 모두 삭제했다. 대남사업 기구인 통일선전부도 개편하여 노동당 중앙위 10국 (대적 지도국)으로 바꾸었다.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탐 철거하고 북남경제협력법 금강산국제관광특구법 같은 규정도 폐지했다.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민족화해협의회등도 정리했다. 대남 선전, 심리전을 목적으로 운영해왔던 우리민족끼리 구국전선 내나라 조선의오늘 메아리 등 접속이 중단되었다.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를 폐기하고 서로 이웃국가가 되어서 평화적으로 지낸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1970년 양국의회의 비준을 얻어 채택된 동서독 기본조약은 국제법상의 기본 조약이다. 즉 국가 대 국가간의 조약이다. 통치지역도 각자의 영토 내로 제한했다 경계선 불가침을 인정하고 양국 수도에 상주대표부를 설치했다. 문제는 북측이 규정한 남북관계가 정상국가간의 양국관계가 아니라 적대적이며 교전중인 양국 관계라는 것이다. 북한 핵문제의 해결과 정상국가로서 북한을 인정하는 것의 맞교환 없이는 해결되지 않는다. 평창올림픽은 스포츠 문화 등의 교류가 장벽을 녹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남북은 다시 한반도기를 들고 공동입장했고,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등이 열렸다. 하지만 스포츠 교류와 협력은 정치 문제의 해결 없이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남북관계가 좋았던 2018년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단일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양측 선수단이 우정을 나누었지만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북측 선수들은 냉냉했다. 남북관계의 반영이다.조선중앙TV는 남북여자축구대결을 녹화 중계하면서 조선 대 괴뢰라는 표현을 썼다. 스포츠 역사상 처음 등장한 표현이다. 2027년 세계청년대회가 서울에서 열린다. 호주 대회의 전례에 비추어 최소 35만명, 유럽과 중남미 가톨릭 국가의 경우에 견주어 최대 수백만명이 참가하는 행사다. 교황청은 세계가톨릭청년대회라고 하지 않고 세계청년대회라는 명칭을 1986년 제1차 로마 세계청년대회 때부터 견지해 왔다. 종교 연령 이념 등을 초월한 개방적인 행사이다. 매 3년 마다 열리는 대회에 역대 교황이 항상 참석했다. 북한은 평양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한 경험이 있다. 개회 미사는 서울에서, 폐회 미사는 평양에서 교황이 집전하는 상상을 해 본다.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하고 중재하여 남과 북이, 미국과 북한이 다시 악수하는 장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남북이 서로 손을 맞잡고 공동올림픽을 개최하여 DMZ에서 마라톤 경기를 하는 상상을 해본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7-26
    • [민병두의 K-Sapience (13)] K-스포츠와 민족주의⑦ 2002 월드컵 – 꿈★은 이루어진다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너와 나 지금 여기에 두 손을 마주잡고/ 찬란한 아침햇살에 너의 다짐 새겨봐/ 멀지 않아 우리 함께 라면/ We are the champions tonight 이기리라/ 아~ 챔피언 이제는 우리 하나 되어/ 저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를 달려/ 아~ 영광의 승리를 우린 이룰거야/ We are the champions tonight 우리는 할 수 있어// 뛰어라 가슴을 열고 푸른 하늘을 향해/ 챔피언 승리를 위해 함께 달려나가리…..”(조수미 Champions) 2002한일월드컵의 정신은 한마디로 “우린 할 수 있다”였다. 우리 함께 하면 두 손 마주잡고 다짐을 새기면서 영광의 승리를 이루는 참피언이 될 수 있다는 조수미의 응원곡은 2002월드컵의 시대정신과 중심정서, 시대의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 시대정신으로 48년만의 첫 승, 48년만의 16강 진출, 48년만의 4강진출, 48년만의 4위를 국민과 함께 만들어냈고 아시아 국가 최초라는 수식어도 따라 붙었다. 일본과 공동개최를 한 탓에 경기장이 분산되어서 열기가 뜨겁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시작부터 빗나갔다. 6월4일 폴란드전에는 50만명이 거리응원을 했다. 미국전에는 77만명, 포르투갈전에는 279만명.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6강에서 맞붙은 이태리전에는 420만명이 모였다. 경기장 관중석에는 붉은악마가 ‘Again 1966’이라는 카드섹션을 펼쳤다. 북한이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우승후보 이태리를 꺾고 4강에 오른 것을 재현하자는 표어였다.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과 시드니올림픽 남북공동입장 등 화해 분위기가 있어서 가능한 카드섹션이었다. 남과 북을 동질시하는 슬로건이었다. 이태리를 이기고 8강에서 스페인과 맞붙었다. 연장전 끝에 승부차기로 4강에 올랐다. 이런 기세라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500만명이 거리에서 ‘천하통일 대한민국’이라는 구호 그대로 월드컵 우승을 할 분위기를 연출했다. 독일과 맞붙은 4강전에서는 700만명이 거리응원에 나섰다. 연인원으로 볼 때 국민의 절반이 참여한 거리 응원. 그야말로 ‘Dynamic Korea’였다. “대-한 민국” 짝짝 짜짜작은 저절로 입에 붙어서 나올 정도였다, 윤도현밴드와 크라잉넛이 부른 ‘오 필승 코리아’는 전 국민이 한번 이상 부른 응원가가 되었다. “뛰어라 내 다리야.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게 섯거라. 이 세상아 내 노래 끝날 때까지 멀어지는 저 노을빛 어두워가는 세상에 노래하자. 내 친구야 폭풍처럼 가자. 문득 올려다본 하늘. 붉게 물든 구름같은 내 꿈아. 수 없이 반짝이는 별들 …” 이런 가슴 뛰게 하는 가사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오 필승 코리아 오 필승 코리아 오 필승 코리아 오오레오레” 였다. 윤도현밴드는 다른 가사는 부르지 않고 ‘오 필승 코리아’만 정직하게 반복했는데 중독성이 있는 탓에 크게 인기를 끌었다. 12번 째 태극전사 붉은악마가 가로 60m 세로40m 720평 크기에 무게 1.5톤의 대형 태극기를 관중석에서 일사불란하게 들었다 내렸다 하고 그 위에 “꿈★은 이루어진다”는 카드섹션이 TV 영상에 비쳐졌다. 이런 것이 민족적 단결이고 자부심이었다. 해방 이후 정부가 주도한 국가주의, 민족주의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다. 4강전에서 독일의 벽을 넘지 못하고 3-4위전에서 튀르키에한테 패배하여 4위에 머물렀지만 세계가 놀랬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놀랬다. 우리 속에 이런 에너지가 있었는가 스스로 자문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외환위기를 빠른 시일내에 극복했다고 하지만 국민 마음 속에 깊게 드리워져 있었던 상처, 그리고 계층간에 위화감이 다 치유되는 듯 했다. 한일월드컵이 우리 사회에 미친 가장 큰 성과는 축구라는 스포츠를 매개로 '전국민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경험'을 이끌어 낸 것이다. 2002년 6월의 대한민국은 하나가 되었고, 전국은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국민이 하나가 되면서 4강신화도 더욱 빛이 났다. 우리도 세계와 당당히 맞설 수 있다는 자부심을 안겨줬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집단적 동질감과 에너지가 하나로 모여 분출하는 경험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02년을 돌아볼 때 4강 신화 못지 않게 같은 꿈과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했던 집단 응원의 추억이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이유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월드컵 경기의 초점은 축구 자체가 아니라 한국인들이었으며, 그들은 승리를 거듭할수록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단결력을 과시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2002.6.30)라고 평가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과 튀르키에가 4강에 진출한 것은 신흥시장국가들이 장기적으로 성공을 알리는 신호가 될 가능성이 크다”(지 오닐 골드만삭스 2002.6.24) 는 이코노미스트의 평가도 뒤따랐다, 월드컵이 끝난 후 KBS와 공익광고협의회가 만든 광고문구는 이 모든 것을 압축했다. “월드컵은 월드컵 경기만이 아니었습니다. 월드컵은 4700만이 하나되는 거대한 축제였습니다.” “월드컵은 4강만의 드라마는 아니었습니다. 한국인이 자신감과 긍지를 찾은 위대한 드라마였습니다” 거리응원이 보여준 자율과 질서, 그리고 시민의식과 자발성은 한국인이 세계시민으로서 당당하게 입장하는 자격증을 부여했다. 88올림픽 때 처럼 정권이 나서서 보안관 역할을 하며 위로부터 시민들을 계도해서 만든 질서가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시민들이 창의적으로 형성한 질서였다. 정부가 강제하지 않아도 시민들이 스스로 친절 질서 청결의 문화월드컵을 만들어냈다. 외신은 이를 ‘무질서의 질서’라고 칭찬했고 FIFA는 거리응원에 감동을 받아서 다음 경기 부터는 ‘FIFA FAN FEST’라는 거리응원 존을 만들었다. 폭발적인 거리응원이 세계표준이 된 것이다. 홀리건도 없고 폭력도 없는 가장 이상적인 시민들의 축제였다. 2002 한일월드컵이 성사되기 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일본은 1989년에 월드컵 유치 의사를 표명하고 1991년에 J-리그를 출범시켰다. 한국은 1995년에서야 개최의사를 밝혔다, 출발이 늦었다. 주앙 아벨란제 FIFA회장이 21세기 첫 월드컵은 아시아에서 열렸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수차례 표명했었다. 지일파인 아벨란제는 일본 개최를 염두에 두었다. 한국은 일본이 그때까지 월드컵 본선에 한 번도 진출한 적이 없는 축구 최약체 국가라고 지적하며 약점을 물고 늘어졌다. 펠레가 일본 개최를 지지하자, 숙적 마라도나는 한국을 지지했다. 국제적으로도 입장이 나뉘었다. 유럽 측의 중재를 받아들여 한일공동개최라는 타협안이 도출되었다. 2002 월드컵 개최지로 한국과 일본이 확정 발표되었을 때 일본은 침울했고, 한국은 기뻐했다. 일본은 ‘절반의 실패’라고 했고, 한국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했다. 일본은 자칫하면 한국 단독개최가 될 뻔 했는데 공동개최가 되었으니 그나마 절반의 실패라는 것이고, 한국은 단독 유치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 정도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라는 평가였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에 이어 ‘잃어버린 20년’으로 가는 시기였다. 1968년 서독을 추월해서 세계 경제 규모 2위가 된 일본은 2010년에 중국에 추월당한다. 그들은 밀레니엄 전환에 소극적이고 아날로그 시대를 탈피하는 것을 주저하면서 디지털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한국은 첫째도 IT 둘째도 IT 셋째도 IT를 외치며 디지털 전환을 했다. 이때부터 한동안 중국의 WTO 가입의 덕을 봤다. 1998년 일본의 대중문화에 문호를 개방한 한국의 문화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퍼져나갔다. 그런만큼 공동월드컵을 둘러싼 양국의 경쟁은 치열했다. 일본은 알파벳 순으로 해서 ‘2002 JAPAN-KOREA 월드컵’을 명칭으로 주장했다. 한국은 양보하지 않았다. 국제축구연맹 FIFA는 프랑스어로 명칭을 쓰는 비영리단체이기 때문에 프랑스어로 한국인 CORÉE가 앞에 놓여야 한다고 하여 관철시켰다. 대신 결승전과 폐막식은 양보했다. 결승전 덕분에 일본은 경제적으로 우리나라 보다 더 큰 덕을 봤지만, 국민적 자부심이라는 무형의 득은 한국이 더 많이 거뒀다. 한맺힌 대결(Grudge Match.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에서 88올림픽 유치에 이어 연타석으로 일본에 승리했다. 2002 월드컵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거리문화의 메카였던 서울 시청 앞은 후에 광장으로 바뀌었다. 아스팔트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아스팔트를 덮어서 공원을 만든다는 생각을 열었다. 광장문화의 모태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딩크 리더십도 한국 사회에 커다란 질문을 던졌다. 히딩크는 학연 지연 혈연으로 선수를 선발했던 관행에서 벗어나 공정하게 실력만으로 경쟁하게 했다. 얽히고 설킨 고질적인 인맥 축구를 과감하게 도려내고 오직 그라운드에서 평가받는 실전 축구를 지향했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선출된 선수들은 월드컵에서 크게 공헌했다. 끈기와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체력, 멀티 플레이어, 조직적인 팀웍, 주눅 들지 않는 대담성과 도전정신 등등. 팬들은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극복한 강직함과 열린 리더십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히딩크가 제시한 화두는 낡은 관습과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것이었다. 대중들은 히딩크 리더십에 열광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히딩크 리더십의 교훈’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는 선구자였다. 2002 월드컵 축구와 거리응원은 축구를 축구팬들의 경기에서 전 국민의 경기로 발돋움하게 했다. 유소년 클럽 레벨의 축구에 대한 관심 자체가 커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축구 학교가 탄생했다. 지역과 동네에 잔디구장이 크게 늘어났고, 축구에 관심을 갖는 어린이들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동네마다 축구교실이 늘어났다. 지방자치단체 마다 축구장을 증설했으며 조기축구회 회원이 급증했다. 요즘의 풋살 경기까지 다양한 팬층들이 늘어났다. 스포츠는 민족주의이다. 북한과는 국가주의에 입각한, 일본과는 민족주의에 기초한 대결을 벌였다. 늘 상대는 북한과 일본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것이 2002년 미국이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에서 미국계 일본인 안톤 오노가 김동성에 막히자 두 손을 높이 드는 액션을 취했다. 마치 김동성이 진로를 방해했다는 듯한 항의 표시를 한 것이었는데 이는 명백히 헐리우드액션이었다. 안톤 오노는 솔트레이크에서 금1 은1 동2로 미국의 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 중 2개는 오노가 경기를 어지럽힌 대가로 얻은 부정한 승리였다. 한국인들은 미국동계올림필위원회에는 1만 6000통의 항의메일을 보냈는데 오히려 미국에서는 훌륭한 인격을 가진 선수로 묘사되고 있었다. 2002월드컵에서 미국전에서 골을 넣으면, 김동성의 한을 풀어주고 국민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세레머니를 하기로 선수들간에 약정을 했다. 기회가 왔다 안정환이 골을 넣은 후 코너에 가서 김동성 역할을 하고 이천수가 오노 역할을 했다. 한국인들은 재미있어 했지만 미국인과 미국 언론은 불쾌해 했다. 2002년 6월 13일 당시 경기도 양주군에서 중학생 두 명이 주한미군 군인이 조종하던 미 육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사고가 발생했다. 주한미군이 사고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반미 운동이 대중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라는 호칭은 윤민석이 작곡한 노래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Fucking USA' 1편은 안톤 오노와 노근리 학살 사건만 언급되고 이 사건은 2편에서 언급된다. 2002년 대선 국면에서 노무현은 “미국에 한 차례도 가보지 않았다” “반미면 어떠냐”는 등의 발언을 하여 미국을 예민하게 했다. 토머스 허버드 주한미국대사는 당시를 회고하며 퍼펙트스톰이 닥쳐왔다고 했다. 88서울올림픽에서 육상선수 칼 루이스의 불손한 태도, 수영선수의 보석 절도사건, NBC가 방송을 하면서 한국을 비하한 발언등으로 생긴 반미감정은 약과였다. 2002년 거리응원을 할 당시 2030이었던 그들은 지금 4050으로 한국사회의 허리가 되었다. 정치성향도 많이 바뀌었다.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2030이 진보후보 지지, 5060 이상이 보수후보 지지였다. 40대가 스윙보터라고 했다. 2024 국회의원 총선거등에서 보여지는 세대간 대결구도는 4050이 가장 강력한 민주당 지지성향이고 6070이 국민의힘 지지자가 되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최빈국에서 성장했던 6070은 평생 안보를 걱정하며 살았다. 후진국에서 태어나 아시아의 4룡이 되는 과정에서 성장한 4050은 평생 민주를 외치며 살았다. 중진국에서 태어나 선진국에 입장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2030은 벌써 공정을 외치며 살아가고 있다. 6070이 자신들이 이룩한 반공과 자유라는 가치가 자녀세대에게 외면 당하는 섭섭함을 갖고 있는 것처럼, 4050세대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민주라는 차치가 다음세대에 의해서 부차적인 것이 되고 있는데 대해서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7-25
    • [민병두의 K-Sapience (12)] K-스포츠와 민족주의⑥ 대결에서 화해로-우리는 하나다 “(Korea is One)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1991년 4월 29일 일본 지바. 여자 탁구 남북단일팀과 중국과의 결승전 마지막 세트. 북측의 복병, 유순복이 넘기고 중국의 가오쥔이 받아친 공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체육관에 함성 소리가 울렸고 연이어 한반도에서는 더 큰 함성이 물결쳤다. 남북 단일팀은 선수 감독 임원 할 것 없이 경기장으로 쏟아져 나와 서로를 얼싸안았다. 재일 동포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놓아 불렀다. 반세기의 울분과 회한을 털어내는 목소리였다. 친북 계열의 재일 동포 단체 조총련과 남한 출신의 민단은 역사상 최초의 단일팀 경기를 앞두고 하나가 됐다. ‘푸른 한반도’가 그려진 단일기를 함께 흔들었다. 한반도 분단의 첫번째 책임자인 일본 땅에서 이룬 ‘작은 통일’이었다. 이어서 우승팀 코리아가 호명됨과 동시에 눈물 섞인 함성이 쏟아졌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국가로 연주되었다. 한반도기가 올라갔다. 여자 탁구 남북 단일팀 코리아는 1975년 이후 16년간 세계 정상을 지켜 온 만리장성 중국을 꺾고 우승컵을 안았다. 남북의 선수들과 함께 관례를 깨고 남북의 코치 두명 (원래는 국가 당 코치한 명)도 시상대에 올랐다. (2002년 하지원 배두나 주연의 영화 '코리아'가 만들어졌다.) 남북한 탁구는 88서울올림픽 이후 2년 간 중국에 이어 치열한 2위 다툼을 벌였다. 한국에게 북한은 늘 복병이었다. 최강자인 중국과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 실력에 버금가는 북한을 제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남북단일팀이 전격 성사됐다. 2위 끼리 힘을 합치면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 중국을 상대로 하여 우승을 하면 단일팀의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라는 계산 등이 작용하여 여러 종목 중에서 탁구단일팀이 성사된 것이다. “남북 대결을 피했다는 점에서 서로 안도했고, 중국한테는 져도 본전이었으니 심리적으로 너무 편했다”(이유성 남측 코치) 게다가 단일팀이 됐으니 해볼만 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문제는 상호 불신과 이질적인 문화, 그리고 시스템이었다. “국제대회 때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사탕만 줘도 ‘독이 들었다’고 의심하며 안 받았던 북한 선수단”이라고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북한도 우리 측에 마찬가지 불신을 갖고 있었다.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했다. 이유성 코치는 “선수들이 빨리 친해져야 하니 이동하는 버스 만큼은 남북 선수들이 함께 타도록 해달라”고 남북의 정보기관에 요청했다. 그 이후 선수들은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스물하나, 스물둘의 어린 선수들은 몰래 서로의 방을 오가며 고민을 속닥거렸고, 비상계단에서 김치와 통조림을 나눠먹었다. 이분희 선수에서 분희 언니로, 현정화 선수에서 정화 동생으로 바뀌었다. 탁구 용어의 차이는 얼마든지 극복 가능했다. 서브는 쳐넣기, 커트는 깎아치기였다. “어휴, 말째다!”(어렵다)같은 사투리도 따라서 할 정도가 되었다. “결승전을 할 때 관중석에 교포들이 가득해서 우리 홈경기 같았다. Korea is One(한국은 하나다) 현수막도 보이고, 다들 울어서 뭉클했다”(현정화). 그리고 마침내 승리로 7000만 겨레에게 보답했다. 탁구만이 아니었다. 분단 46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단일팀이 만들어진 1991년은 남북 스포츠 역사에서 특별한 해다.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마침 남과 북의 대표팀은 본선 진출권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1991년 5월 단일팀으로 만들어져 46일 간의 합동훈련에 돌입했다. 탁구와 축구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탁구는 기본적으로 개인 운동이라 선수들 각자의 장점이 합해지면 1+1=2라는 등식이 성립하지만 단체경기인 축구는 아니었다. 개인의 기량이 최고치가 되기 위해서는 조직력, 즉 팀워크가 필요했다. 북측에서는 주로 공격을, 남측에서 수비를 맡는 선수를 선발하기 까지 불협화음도 있었다. 실제로 남북선수들의 역량이 그렇게 특화되어 있어도 선수단 구성을 보는 언론과 국민이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 남측에서 양보를 하고 수비를 주로 맡기로 했다. 스무 살도 안 된 청소년들은 용어와 문화의 차이를 빠른 시일에 극복했다. 서로를 흡수하고 무서운 속도로 적응해갔다. 조직력은 눈에 띄게 강해졌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남미의 강호 아르헨티나를 1대 0으로 꺾는 이변이 일어났다. 1승 1무 1패. 포르투갈, 아일랜드 등 유럽의 강자들이 포진한 조에서 2위로 본선에 진출했다. 축구 최강국 브라질에 가로막혀 최종 성적은 8강에 그쳤다. 탁구와 마찬가지로 단일팀 구성에 대한 선수들의 우려가 있었다. 탁구단일팀은 양팀 엔트리를 모두 보장했으나, 축구는 양팀에서 각각 절반이 탈락했다. 내심 불편하고 마음에 안들어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극복을 해나갔다. 그때만 해도 국가와 민족과 대의가 우선하는 시대였다. “민족의 단합을 이룩하고 조국통일의 기운을 높이는” 대업에 참여한다는 의식이 생겨났다. 한민족이라기 보다는 적에 가까웠던 상대방에 대한 인식은 훈련과 경기를 하면서 변해갔다. “이보라우” “이 간나새끼들”이라는 표현에 적응을 했고 쉬는 시간이면 여자친구 얘기를 주고받았다. 마침내 경기 직전 안세욱감독이 선수들에게 “7천만 겨레가 지켜보고 있다”고 하자 마음이 뭉클했다고 최익형 선수는 회고했다. 이승만 시절, 라디오에서 “고국에 계신 3천만 동포 여러분….” 이 흘러나올 때 모두가 뭉클했었는데 이번에는 7천만이다. 더 크게 다가왔다. 감독이 강조한 7천만 겨레라는 단어가 귀에서 아직 맴돌 때 한반도기가 오르면서 민족의 영원한 애국가 아리랑이 연주되었다. 1991년 남북단일팀이 구성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국내외 정세와 조건이 맞아야 했고, 남북의 지도자가 결단해야 했으며 국민이 동의해야 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남북의 스포츠 대결은 한국의 일방적 우위로 끝났다. 중국은 북한의 반대를 무시하고 두 대회에 참여했다. 1952년 헬싱키부터 올림픽 무대에 나타났던 소련도 84년 LA올림픽은 보이콧을 했지만 88년에는 참가했다. 자신감을 얻는 한국은 적극적인 북방정책을 펼쳤다. 1989년 헝가리 폴란드와 수교하고 1990년에는 소련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같은 해 베이징아시안게임에 참여했다. 중국, 베트남과의 수교도 시간 문제였다. 남북단일팀 구성을 먼제 제안한 것은 북한이었다. 이같은 국제정세의 변화 앞에서 현실적인 계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0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남북단일팀을 구성해 출전하자고 선 제안했다. 한국은 1988년 7.7선언에서 남북 관계 개선과 교류 발전을 제안해 놓은 상태여서 북의 요구를 곧바로 수용했다. 1989년 3월에 첫 남북체육회담을 열었고 3차회담(1989.10.20)에서 흰색 바탕에 한반도 지도 모양의 단일기가 탄생했다. 그런데 우리 측이 교류와 개방을 단일팀에 병행, 혹은 우선하는 전략을 보이자 북측이 반발해서 결국 단일팀은 무산됐고 민간 차원의 공동 응원만 진행됐다. 남북고위급 회담과 기업인들의 방북이 이어지면서 체육회담이 재개되었다. 북측이 자신 있는 축구 단일팀을 먼저 제안했는데 남측이 통일축구의 정례화와 체육교류를 선행하자고 해서 또 무산될 지경이었다. 1991년 부터는 전략을 바꾸어 협상을 안기부가 아닌 체육청소년부로 이관했다. 장관은 대북특사인 박철언이었다. 박철언은 북측 대표 한시해와 1985년부터 40여 차례 비밀 접촉을 했다. 5.1능라도 경기장에 임수경이 입장할 때 그 장면을 김일성과 함께 지켜봤던 인물이다. 박철언은 북측의 웬만한 제안을 모두 수용했다. 1963년 남북이 단일팀 구성을 위한 첫 접촉을 한 이래 33차례의 회담 끝에 1991년 처음으로 성과가 났다. 1970년 미·중 간의 핑퐁외교 숨은 조력자로 알려진 오기무라 이치로 국제탁구연맹회장도 기여했는데 한국을 20회, 북한을 15회 방문하면서 탁구 단일팀 구성을 도왔다. 탁구 단일팀의 단장인 북한의 김형진 NOC위원장은 “한 핏줄로 맺어진 민족이 스포츠계에서 벌이는 대결은 마침표를 찍었다”고 감격해 했다.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 대회 단일팀이 성사되었지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단일팀 협상이 진행 중이던 중에 북한 유도선수 이창수가 망명하면서 교류가 경색되었다. 역사를 되돌아 보면 남북단일팀 구성은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먼저 중재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1국1위원회 원칙을 갖고 있다. 해방 직후 한국이 먼저 국제올림픽위원회에 가입하면서 북한은 올림픽 출전이 어려워졌다. 사정은 동독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서독과 단일팀을 구성하여 참가했고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환희의 송가’를 국가로 구성했다. 올림픽 단독 출전 길이 막힌 북한이 동독 모델을 따락서 1958년 12월에 로마올림픽(1960년) 참가를 위해 단일팀 구성을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1962년 8월 국제올림픽위원회는 한국에 북한과의 단일팀 결성을 요구했고. 이뤄지지 않을 경우 다음 올림픽 부터는 북한의 단독 참가를 허용한다고 압박했다. 1963년 스위스 로잔에서 협상을 했다. 북한에서는 “앞의 25초는 남반부 애국가를, 뒤의 25초는 북반부 애국가를 연주하고, 국기는 앞면과 뒷면에 인공기와 태극기”를 합하자고 제안했다. 논란 끝에 아리랑을 국가로(남측), 한반도 지도를 국기로(북측)하자고 한 남과 북의 제안에 합의가 이뤄졌다. 4반세기가 지나서 1989년 판문점에서 열렸던 남북체육회담에서 같은 내용의 합의가 재차 이뤄졌다. 단일기의 명칭은 ‘한반도기’로 하기로 했다. 1963년 로잔, 1989년 북측이 갖고왔던 한반도기에는 제주도를 제외한 다른 섬들이 빠져 있었다. 당시 남북의 수석대표는 3000여개에 달하는 수많은 섬을 다 그려 넣을 수 없으니 상징적으로 제주도만 포함시키자고 의견을 모았다. ('남북단일팀과 단일기' 이준한. 통일정책연구 27권2호)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에 외교부가 “독도가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우리의 고유영토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단일기에 독도를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2006년 도하 하계 아시안게임과 2007년 중국 장춘 동계 아시안게임에서는 울릉도와 독도가 포함된 한반도기를 사용했으나, 일본이 외교력을 동원하여 저지에 나섰다.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베이징하계올림픽(2008년) 남북 공동응원단 구성에 합의했지만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무산되었고 공동입장도 없었다. 보수정부 10년간 입장이 후퇴하면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도 독도가 빠진 한반도기를 사용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평창의 선례가 있다며 독도가 들어있는 한반도기 사용을 허용하지 않았다. 공동입장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이뤄졌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으로 6.15 공동선언이 나왔고 8.15를 맞아 이산가족의 상봉도 이뤄졌다. 9월15일 올림픽을 앞두고 사마린치 국제올림픽위원장이 남북 동시입장을 발표했다. 오륜기 뒤에 남북의 국가올림픽위원회 기를 들고 동시입장하자고 제안했으나 남북이 협의하여 한반도기를 들고 공동입장했다. 그 이후 자연스럽게 2007년 중국 장춘 동계아시안게임까지 공동입장을 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다시 공동입장을 할 수 있었다. 1990년부터 2018년 사이의 각종 국제체육대회에서 13회의 공동입장, 16회의 한반도기 이용, 7회의 단일팀 구성, 9회의 공동응원이라는 역사가 이뤄졌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은 특별한 대회였다. 부산아시안게임은 백두산에서 성화를 채화하고 북한의 미녀응원단이 선을 보였다. 북한은 17개 종목 184명으로 선수를 파견하면서 만경봉호를 통해 부산 다대포항에 응원단 280명을 보냈다.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 차림을 한 응원단이 취주악대의 북한 가곡 “반갑습니다”에 맞춰 인공기를 흔들면서 입장했는데 한결같은 미모에 관심이 집중됐다.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쳐온 북한 인민과 탈북자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산 지역 대학생 단체와 시민들도 통일을 외치면 열렬히 한영했다. 2003년 대구 22회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는 303명의 미녀응원단이 목각 짝짝이, 꽃 모양 나팔, 색깔 부태, 탬버린 등의 응원도구를 갖고 등장했으며 휘파람과 같은 빠른 곡을 불렀다. 2005년 16회 아시아 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와 124명의 청년학생협력단이 응원을 왔다. 대회 폐막일에는 인천 대학생 500여명과 함께 남북대학생 어울림마당을 열었다. “우리는 하나다, 핏줄은 하나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아리랑 고향의봄 찔레꽃 등을 함게 부렀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는 299명이 이겨라 힘내라 우리는 하나다 조국통일을 외쳤다. 미녀응원단은 특정 계층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미녀부대에서 가난과 고난의 이미지는 읽히지 않는다. 세계가 주목한 미녀응원단을 통해 북한이 노린 것은 정상국가라는 이미지다. 평창동계올림픽(2018년)에서 남북이 공동 입장을 한데 이어 여자아이스하키가 단일팀으로 출전했다. 단일팀 구성에 선수들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들이 반발했다. 문재인의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구호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실력으로 선발해야지 남과 북으로 절반씩 선발하는 것이 정의롭지 않다고 반발했다. 정부의 위안부 협상 태도에 견주어 당사자 입장을 청취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이뤄졌다며 반발했다. 세대간에 민족 통일 문제를 바라보는 입장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2018년 남북단일팀 구성을 둘러싼 잡음에 대해 1991년 자바 탁구 단일팀 대표였던 현정화는 그같은 반발을 이해한다면서도 "우리가 함께 해서 값진 순간이었다"는 경험을 들려주었다. 아리랑이 연주되었을 때 "너무 먹먹했다"며 단일팀이 갖고 있는 가치가 크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201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남북농구단일팀으로 출전했던 북한 선수 장미경은 "1+1을 일반적으로 2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2가 아니라) 더 큰 하나가 되었으면 합니다"는 울림이 있는 말을 남겼다. 남북이 하나가 되면 둘이 아니라 더 큰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랬던 단일팀 농구 선수들이 4년 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악수조차도 나누지 않았다며 축구 교류는 정치와 체제 대결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다는 비판도 있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7-24
    • [민병두의 K-Sapience (11)] K-스포츠와 민족주의⑤ 88서울올림픽: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한국은 1980년대 들어서 두개의 국제대회 동시 유치전에 나섰다. 쿠테타로 집권한 정부가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는 길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양대 국제대회를 한꺼번에 유치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재정적자 등을 우려한 전문관료들의 반발도 심했다. 서울은 아시안 게임으로 역량을 쌓아 올림픽까지 성공시키겠다는 명분을 제시했지만 속내는 유치 가능성이 낮은 올림픽 보다는 아시안게임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그래서 경쟁지인 나고야와 만나 아시안게임 개최 지원을 약속받고, 올림픽은 나고야를 밀어주는 협상을 벌였다. 올림픽 경쟁에서는 모양 좋게 후퇴하고, 아시안게임을 따내 실리를 챙기겠다는 계산이었다. (다카시마 고. ‘스포츠로 보는 동아시아사’) 따놓은 당상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던 나고야는 서울의 제안을 무시했다. 1981년 9월 30일 IOC 총회(서독 바덴바덴)에서 개최지 투표가 실시되어, 서울이 52표 대 27표로 압승을 거두었다. 서울은 정부가 주도하고 국력을 동원해서 올림픽 유치를 위한 총력전을 폈다. 한국의 I0C 위원 김운용은 당시 벌어진 유치전이 서울 대 나고야의 경쟁이 아니라 한국 대 나고야의 싸움이었다고 총평했다. 나고야의 패인은 자만과 분열이었다. 일본은 이미 동. 하계올림픽을 모두 개최한 나라다. 시기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급부상하는 것에 대한 유럽의 경계심이 적지 않았다. 나고야 시민들이 바덴바덴까지 쫓아가서 유치 반대운동을 벌인 것도 변수였다. 대신 서울은 매일 같이 투표권자의 숙소로 꽃을 배달했다. 투표 전에 열렸던 올림픽 콩그레스에서, 그리스를 올림픽 영구 개최지로 고정시키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나 되도록이면 지구의 곳곳을 돌면서 개최하는 편이 좋겠다라는 공감대가 만들어진 것도 변수가 됐다. 앞으로 올림픽은 한 번도 울림픽을 개최한 적이 없는 나라에서 하는 게 좋겠다라는 생각이 일종의 모토가 되어서 투표에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의 불안정은 서울의 최대 약점이었다. 나고야는 유치 연설에서 정치적 안정을 부각시켰지만, 지나치게 대국 의식을 드러낸다는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면에 서울은 불안한 안보 정세를 솔직히 인정하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함으로써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후 평화올림픽은 서울의 주제가 되어버렸다. 1년 전 모스크바올림픽(1980년)에서는 서방 국가의 집단 보이콧을 목격한 터였다. 3년 뒤 로스앤젤레스올림픽(1984년)에서는 공산권 국가들의 집단 보이콧이 예상되었다. 냉전의 최전선인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할 수만 있다면, 올림픽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세계 평화에 공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러한 역할을 맡는 것은 나고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IOC 위원들은 서울의 가능성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88올림픽 개최를 거머쥔 한국은 아시안게임 유치에도 나섰다. 나중에는 북한과의 2파전으로 좁혀졌는데 점차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인지한 북한이 포기했다. 이로써 박정희 정부 때부터 남북 체제 대결에서 결정적 한방을 노렸던 한국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서울올림픽의 모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이었다. 일본은 올림픽을 통해서 추축국에서 평화국가로의 이미지 전환에 성공했다. 패전으로 땅에 떨어졌던 국민 사기를 진작시키면서 일본의 미래인 청소년의 열패감을 극복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에 맞추어 모든 것을 진행했다. 서구사회가 일본을 보고 경탄해 마지 않도록 도쿄를 쇼윈도우화 했다. 도시재개조를 통해서 일본의 경제성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철도인 신간선이 올림픽에 맞춰 개통됐다. 세계 최초 정지위성 Syncom3호를 통해 전세계에 동시 중계를 했다. 개회식 브라스밴드를 연주하는 자위대와 개회선언을 하는 천황, 그리고 질서정연하게 히노마루(일장기)를 흔드는 평화로운 민족주의를 선보였다. 의식개조운동은 일본을 새로 나게 했다. 일본은 예의가 민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전쟁으로 모두 망가졌다. 도쿄는 쓰레기가 넘쳐나고 악취가 나며 성적 질서가 타락한 도시로 전락했다. 모든 것을 서구의 시선에 맞추기로 했다. 외국인이 볼 때 일본인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귀가 닳도록 질서와 청결과 친절을 강조했다. 서구인이 되고자, 서구화를 하고자 갈망했던 탈아입국(脫亞立國)의 꿈은 도쿄올림픽을 통해서 이뤄졌다. 서구인이 볼 때 정말 너무도 친철한 세계시민이 된 일본인을 보고서 감탄했다. 전후 복구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을 넘어서 선진국 도약의 발판을 확실히 마련한 것으로 평가했다. 전두환 정부는 일본을 철저히 벤치마킹했다. 도시개조와 생활풍속을 바꾸어 선진국 수준의 시민으로 탈바꿈하고, 오랜 전통의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리고,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는 등의 목표를 세웠다. 도시 미관과 생활풍속의 개조는 일본식 모델을 따라서 하면 됐다. 외국인(백인)이 인정할만한 경관을 만들고, 외국인이 보기에 역겨운 것은 정화하고, 외국인이 봤을 때 마뜩지 않은 생활풍속은 보이지 않게 만들면 되었다. 도시 개조는 낡은 주택과 빈민가를 청소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귀빈로(김포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학생과 시민들이 동원되어 거리 환영하는 길)과 마라톤 코스 주변을 정비했다. 도심의 뒷골목도 정비대상이 됐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의 빈민들이 주거지에서 밀려났다. 보신탕을 비롯한 온갖 보양식 식당이 4대문 밖으로, 그리고 간선도로 뒤편으로 쫓겨났다. 어느 날(1985.1.28.) 대통령은 음식점 주방을 손님들이 볼 수 있도록 식당을 개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시민들의 의식과 문화 수준을 높이는 것은 정권의 숙제였다. 새치기 침뱉기 휴지버리기 등 낮은 시민의식을 교정하기 위해 민관이 총동원되었다. 박정희 시절 새마을 운동을 통해서 농촌을 개량했듯이 사회정화위원회가 만들어져 귀에 딱지가 붙을 정도로 질서 친절 예의 교육을 했다. 질서는 대중 세뇌의 핵이었다. 이 질서는 민주화운동을 향한 경고의 성격도 띄고 있었다. “내가 버린 휴지 한 장, 나라 얼굴 더럽힌다”, “선수는 경기 메달, 시민은 질서 메달” 등 포스터도 등장했다. 친절과 예의는 국가의 자산이라며 모든 국민에게 민간외교관을 지위를 부여했다. 외국어 교육도 장려했는데, 영어를 못하면 부끄러워하는 영어콤플렉스가 조장되기도 했다. 올림픽 경기장과 함께 국가상징물이 대거 건설되었다. 설계하면서 건축하는 시간과의 싸움 끝에 지금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 건축물 등이 만들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 국립국악당 예술의전당 롯데월드 무역센터 등이 문화국가와 고도성장국가의 랜드마크로 등장했다. 몽촌토성이 역사유적의 지위를 부여받고 올림픽공원과 연결되었다. 테헤란로 올림픽로를 공원화된 가로와 상업용 빌딩으로 리모델링했다. 잠실의 아파트와 선수촌의 평수를 늘려 부유한 이미지로 만들어 호수 공원과 함께 수려한 도시의 미를 구축하려고 했다. 마로니에 공원등 수많은 공원이 만들어졌다. 사회정화위원회가 나서서 건전가요를 모집했다.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1982),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1985)가 대표적이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 우리의 마음 속에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 이렇게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 이렇게 우린 이 강산을 노래 부르네. 아아 우리 대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 원하는 것은 뭐든지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그런 나라는 세상에 없다. 있을 수도 없다. 정부가 취한 몇가지 조치 만으로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야간통행금지 해제, 교복자율화등은 올림픽을 치루게 될 국가로서 국제표준하고 맞춘 조치일 뿐이다. 프로스포츠의 창설로 대중의 시선을 돌릴 수는 있지만 민주화 요구까지 잠재울 수는 없다. 박정희 정부 때도 위화감 조성 우려로 주저했던 TV컬러방송을 정권 출범도 전에 시작했지만 TV를 보는 중산층의 눈높이는 더 높아졌다. 대학에서 상주감시 경찰이 철수하고 총학생회를 용인하는 학원자율화 조치는 민주화 운동의 기반을 넓혔다. 과외를 전면금지(1980년 7월 30일. 시진핑의 공동부유론 조치 중에 과외금지가 있다)하고 호화분묘, 호화결혼식에 대한 단속을 했는데 그렇게 한다고 계층적 위화감이 사라지거나 복지국가가 앞당겨 지는 것은 아니다. 서구인의 시선으로, 서구인이 보기에 좋은 사회개조는 당연히 반발을 샀다. “왜 언제부터 우리의 판단기준은 사소한 일에서 까지 외국인 쪽에 가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우리는 이토록 우리들 스스로의 독자적 판단 능력을 상실해 버렸단 말인가... 무서운 것은 외국인의 눈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 속에 신화적으로 날조해 지니고 있는 ‘외국인의 눈’이다... 도대체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시시각각 감시하는 듯한 눈을 가진 외국인은 어느 나라 국적을 가진 사람일까? 때때로 나는 그 외국인이 혹시나 상상력과 독자적 판단력을 상실한 한국인 자신의 망령이 아닐까하고 부질없는 걱정을 하곤 한다”(경향 1983. 6. 2 김화영 불문학자. ‘서울올림픽과 1980년대의 사회정치’ 박해남 박사학위논문에서 재인용.스포츠 민족주의에 대해 쓴 이 글의 올림픽 부문은 상당 정도 박해남의 논문을 기초로 했음을 밝혀둔다.) 그런 가운데 86아시안게임이 치러졌다.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93개(은메달 55개 동메달76개)로 58개의 금메달을 딴 일본을 제치고 금메달 94개의 다음 개최국인 중국에 이어 2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한국 스포츠 역사의 새 장을 열었으며 아시아 스포츠계의 판도를 바꾸었다. 4년 전 인도 뉴델리 대회(1982) 때는 금메달 28개, 한국이 아시안게임 에 첫 출전한 2회 대회 때부터 9회 대회 까지 총 금메달 수 115개에 버금가는 숫자였다. 국민들은 일체감과 자신감을 가졌다. 아시안게임 3관왕은 적절한 때에 나타났다. 가난을 딛고 경제적 번영을 향해 달려야 하는 대한민국을 형상화하는데 적합했다. 가난해서 라면을 먹고 자란 듯한 소녀 임춘애(1969년생)는 영웅이 되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고생하며 자란 슬픈 성장사, 허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체격, 두 눈이 커 왕눈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소녀의 승리는 최빈국에서 아시아의 4룡으로 성장한 조국, 그리고 가난에서 탈출하여 마이카를 타고 다니기 시작한 국민과 오버랩되었다. 북한과 사회주의권이 서울올림픽에 반대하는 것도 마지막 변수 중의 하나였다. 북한의 올림픽위원회(1984.12.17. 김유순 NOC위원장)은 4만명의 미군과 100여개의 핵무기가 있는 남한 땅에서 올림픽을 치르는 것이 불가하다는 서신을 국제올림픽위원회에 보냈다. 국가보안법이 있어서 사회주의권 선수들의 안전이 문제시 된다고 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도 동조했다. 단독올림픽은 전쟁의 상처를 깊게 하고 평화에 기여하지 못하며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힌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국내적으로는 진보세력을 탄압했지만, 올림픽 성공을 위해서 사회주의권에 대해서는 유화적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1983)을 포함하여 동구권과 교류를 확대했다. 소련이 대한항공 여객기를 격추해 승객 등 269면 전원이 사망했을 때, 정부는 문제를 확대하지 않았으며 민간이 만든 추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태원에서 소련을 비방하는 티셔츠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북한은 1986년 9월1일 서울아시안게임 불참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2주 후에 김포공항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 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했다. (1987년에는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1986년 10월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만나 “소련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된다. 서울올림픽은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국제적 제국주의 음모”라고 지적하며 보이콧을 설득했으나 거부당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개최하려는 중국도 한국 편이었다. 그러자 공동개최로 방향을 선회했다. 북한은 개최도시 공동 표기 등 50대50 공동개최안을, 국제올림픽위원회와 한국은 일부 경기를 평양에서 여는 분산개최안을 제시했으나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단일팀 구성도 합의 하지 못했다. 수십년간의 체제 경쟁 끝에 올림픽 성공개최라는 전리품이 눈 앞에 보이는데 양보할 수가 없다. 북한의 계속된 잘못된 전략도 문제였다. 1988년 초 서울대 등의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단독올림픽은 이질감과 적대감을 확산시킬 뿐이라며 반대했지만 반향은 크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문제는 민주화였다. 올림픽 개최는 일찍부터 ‘양날의 검’이었다. 다만 독재정권이 그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지난 7년간 올림픽 성공을 위해 질서를 강조했는데 물리력을 동원한 강제진압도 무질서의 하나이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등의 죽음도 국제사회에서 볼 때는 정권이 만든 무질서이다. 따라서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데 제약이 되는 외생변수가 됐다. 1987년은 우리 역사상 민주화를 향한 민중의 힘이 가장 크게 결집한 한 해 였다. 국민의 요구는 내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겠다는 대통령 직선제로 모아졌다. 내각제 개헌, 호헌 조치등으로 맞섰다. 이 와중에 정권이 가장 빈번하게 대중을 겁박한 수단이 질서가 어지럽혀지면 올림픽이 무산될 수 있다는 불안감 조성이었다. 정권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게 되면 전쟁의 공포와 후진국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고 평화와 번영의 새시대를 맞을 수 있는데 개헌으로 국력을 낭비해서는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야당은 정국이 불안하면 올림픽개최도 어렵다(YS), 민주주의가 되어야 국민의 참여와 협력으로 경제발전도 되고 88올림픽도 성공한다(DJ)고 맞섰다. 미국은 1980년 광주항쟁 시기에 민주주의 운동에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로 반미운동이 태동하고 확산되었는데 여기서 교훈을 얻은 바 있다. 그래서 1987년 6월항쟁 때는 정권에 비판적이었다. 결국 국민의 힘으로 개헌이 되어 형식적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정권이 교체가 되어, 올림픽이 좌초될지도 모르는 마지막 뇌관이 사라졌다. 올림픽의 개막식은 메시지의 총합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성화 봉송의 최종 주자는 사카이 요시노리였다. 그는 전후복구를 상징하는 신체로, 『아사히신문』은 ‘그의 균형잡힌 몸과 가늘고 긴 다리는 성화주자로 적합하다’며 신체를 칭송했다. 그가 올림픽 성화주자로 선정된 것은 그의 신체가 운동으로 잘 만들어졌기 – 실은 서구화의 함의를 갖는 – 때문만은 아니었다.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그날 그는 히로시마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신체는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서구화로 나아가는 일본이라는 네이션의 내러티브를 체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박해남) 서울올림픽 성화 최종주자는 손기정으로 낙점되었다. 20세기 한국 체육사를 돌아보았을 때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한 무대였다.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경기,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에서 베를린 메인 스타디움에 맨 먼저 들어온 마라토너는 셈족도 햄족도 아닌 피억압민족 청년 손기정이 아니었던가. 성화 최종 주자는 당연히 손기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본 언론이 연습장면을 보게 되어 극적효과가 사라지게 됐다. 임춘애로 바뀌고 최종점화자는 노태우의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에 맞춰 보통사람 3인이 선정되었다. 개막식에서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굴렁쇠 소년은 1981년 9월30일 생이다. 전두환 시대에 태어난 소년이다. 기획자인 이어령은 전쟁고아, 해외입양등으로 부정적이었던 한국 어린이의 이미지를 깨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 이념의 벽, 인종의 벽, 빈부의 벽, 남녀의 벽...너와 나를 가로 막는 무수한 경계의 벽을 넘어서 모든 사람이 한 곳에 모이니 서울은 세계의 마당이 되고,인류는 다시 하늘 땅과 더불어 하나가 되었다. 벽이 무너진 자리에는 새싹이 트고 분단의 아픈 상흔 마다 새살이 나니 태초의 빛이 천지를 비추던 그날처럼 신명의 어깨춤이 우주의 내일을 연다. 천지창조의 코스모스에서 카오스 상태가 된 오늘날의 문명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태권도로 벽을 부수는 장면을 보여준다. 폐허가 된 땅, 빈 정적의 자리에서 어린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지나가면 새싹들이 나와서, 전 세계가 손에 손잡고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 이렇게 우주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파멸되었다가 거듭나서, 한국 땅에서 다시 새로운 평화가 넘쳐 흐른다. 이런 큰 스토리를 한국 고유의 춤사위나 소리의 가락으로 보여주었다"('임자, 올림픽 한번 해보지!'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이어령 인터뷰) 올림픽 개막식 공연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 서사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다음은 비판적 시선에서 바라 본 개막식 공연이다. 경제발전과 화합의 상징으로 의미가 부여된 한강에서 배들이 무리지어 주경기장으로 향한다. 거대한 북(용고)가 성화대 앞으로 운반되고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조선시대 궁중무용이 펼쳐진다. 한국선녀와 희랍여신이 춤을 춘 뒤 혼란의 시대가 온다. 60개국 160 종류의 가면들이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20개의 한국 전통 탈이 경기장을 쳐다본다. 혼돈을 시각화하기 위해 안개가 자욱하다. 공수부대원 1008명이 태권도 시범을 보인다. 그 중 상당수는 광주에 투입되었던 3공수여단 소속들이다. 그들의 격파로 장내는 질서를 찾고 ‘벽을 넘는다’는 의미가 완성된다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창조이다. 태권도 시범단이 사라지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굴렁쇠 소년 한 명이 입장한다. 새로운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이다. 이어 초등학생 1200명이 들어선다. (박해남) 그룹 코리아나가 서울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 잡고’를 부른다. “하늘 높이 솟는 불. 우리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네. 이제 모두 다 일어나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길 나서자.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마음되자. 손잡고- 어디서나 언제나 우리의 가슴 불타게 하자. 하늘 향해 팔 벌려 고요한 아침 밝혀주는 평화 누리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마음되자 손잡고 ” LP레코드, 카세트 테이프, CD를 합쳐 그해에만 600만장, 다음해 까지 800만장이 팔렸다. 역대 올림픽 주제가 중에서 최고의 히트였다. 동양인이 부른 노래가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1989년 천안문 시위대가 불렀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동독에서 ’벽을 넘어서’가 금지되었다. 올림픽은 크게 성공을 거뒀다. 세계에서 16번째로 올림픽을 치른 스포츠선진국이 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167개 회원국 가운데 북한 쿠바 알바니아 에티오피아 7개국만이 불참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이래 16년만에 처음으로 집단적 보이콧 없이 지구촌이 하나가 되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는 아프리카 26개국 불참했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 때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여 미국이 불참을 제안하자 서독 한국 일본등 67개국이 불참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는 소련의 보복으로 동구권이 불참했다. 한국은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종합순위 4위를 차지했다. 이를 발판으로 해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금 12개, 은 5개, 동 12개로 종합7위를 했다. 애틀란타(10위) 시드니(12위) 아테네(9위) 베이징(7위) 런던(5위) 리우데자네이루(8위) 도쿄(16위)로 스포츠 선진국으로 부상했다. 사마린치 국제올림픽위원장이 개회사에서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라고 서툰 우리말 발음으로 구호를 읽었다. 그 후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세계화가 진행되었고, 한국은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사회주의권과 교류한 덕에 발빠른 북방정책으로 세계화에 올라탔다. 워싱턴포스트는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가 어떻게 올림픽과 같은 큰 행사를 치를 수 있는가를 보여준 능력시험장”이라며 “경제기적에 이어 정치기적 그리고 세번째 기적을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서울 대회는 닦아낸 듯이 깨끗한 수도와 활기찬 시민들의 TV영상으로 완전히 다른 모습의 한국을 세계 보여주었다”(뉴스위크. 1988.10.10) “한 세대 전쟁으로 황폐화되었던 이 나라는 경제적 강국이 되었다”(로이터 통신 1988.10.02)는 평가가 이어졌다. 독일인의 정확성과 미국인의 기업가 정신과 일본인의 친절이 합쳐진 행사라는 칭송도 잇따랐다. 진보진영에서도 긍적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분단 고착화를 우려하는 등의 토를 달았다. 88올림픽의 성공이 전두환의 업적이라며 재평가를 요구하는 일각의 목소리도 있다. 히틀러가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아우토반을 건설했다고 해서 그를 재평가하지는 않는다. 대량학살범죄의 경우는 재평가 대상이 될 수 없다. 서울올림픽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은 서울시가 하계올림픽을 다시 유치하는 것에 대해 절대다수의 시민들이 동의하는 여론조사로 나타나고 있다. 북한은 체제경쟁에서 밀렸다. 북한의 대응은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었다. 1985년 7월 소련에서 열렸던 12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다음 대회 유치에 성공했다. 반제국주의와 국제평화를 기치로 하여 세계 177개국에서 2만2000여명이 참가했다. 북한은 이 행사를 위해 순안공항 확장, 능라도 경기장, 동평양 대극장, 량각도 축구경기장 등 대규모 건설공사를 많이 해서 경제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한국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도 대표를 파견했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동서 냉전이 본격화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모든 면에서 체제 경쟁을 했다. 핵무기는 미국이 먼저 개발했다. 우주에 먼저 인간을 쏘아 올린 것은 소련이었다.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은 지구에 돌아와서 우주에서 가봤더니 신이 안보인다고 했다. 유물론 입장에서 신을 부정했다. 달에 최초로 착륙한 루이 암스트롱은 우주에서 신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체제경쟁은 스타워즈로 발전했고, 소련이 이를 쫓아가다가 결국 재정부담을 감내하지 못했다. 소련이 붕괴된 여러 원인 중의 하나였다. 북한은 고립과 경제위기를 겼으면서 선택을 해야 했다. 미국과 한국은 당시만 해도 동유럽 처럼 북한도 곧 붕괴될 것이라고 보고 화해제스처를 내미는데 인색했다. 북한은 핵개발을 통해서 체제를 보호하는 길을 선택했다.
      • 스페셜기획 > 민병두의 K-Sapience
      202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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