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인텔 CEO 팻 겔싱어의 '잠 못 드는 밤'...남의 일 아니다

김민구 기자 입력 : 2024.09.20 14:11 ㅣ 수정 : 2024.09.20 14:11

인텔, 주가 60% ‘뚝'...미국 정부에 SOS 요청
기존 인기 제품에만 의존하는 ‘경로의존성’ 희생양
끊임없는 기술혁신과 신제품으로 기술 초격차 갖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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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구 부국장/산업1부장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미국 반도체 업체 인텔의 최근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 두려운 마음마저 든다. 

 

경영난을 겪고 있는 인텔이 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구조신호(SOS)를 보내는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56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며 한때 '반도체 제국'으로 불리던 인텔로서는 치욕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팻 겔싱어(Pat Gelsinger) 인텔 CEO(최고경영자)는 최근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을 만나 미국 기업이 과도하게 대만 TSMC에 의존하고 있다며 이를 해소할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했다. 

 

TSMC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로 엔비디아, 애플, AMD, 구글, 아마존 등 미국 대표 기업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자본주의 본고장 미국에서 특정 기업이 정부에 시장개입을 요청해 다른 기업 고객을 빼앗으려는 것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진풍경이다.

 

이와 함께 인텔은 적자를 기록하는 파운드리 사업부를 분사하기로 하는 등 군살 도려내기에 나섰다. 

 

인텔의 이러한 행보는 생존을 위한 승부수로 풀이된다. 인텔은 잇따른 실적 부진으로 최근 주가가 연초 대비 60% 가까이 폭락해 한때 다우지수 퇴출설(說)이 나올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했던 인텔은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미국 정부도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인텔이 위기에 빠지면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하는 반도체 국산화 전략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텔이 거머쥔 처참한 성적표는 어떻게 보면 이미 오래전 예견됐던 일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라는 로고처럼 인텔은 한 때 글로벌 PC CPU(중앙처리장치) 시장에서 8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보유한 ‘넘사벽’ 이었다. 

 

그러나 인공지능(AI)시대가 활짝 열리면서 인텔 핵심 영역인 CPU가 엔비디아와 AMD 등 미국 그래픽처리장치(GPU)업체에 밀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인텔이 새롭게 추진하는 파운드리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AI에 절대적인 GPU가 눈길을 끌면서 인텔 CPU는 이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인텔이 휘청거리는 신세가 된 것은 비단 AI 흐름뿐만이 아니다.

 

인텔은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 함정에 빠졌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기존 인기 제품에만 집착하는 상품 물신주의(Commodity Fetishism)는 기업을 몰락으로 이끄는 ‘치명적인 처방전’이다. 

 

인텔은 기업이 한번 일정한 경로에 들어가면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로의존성의 대표적 희생양인 셈이다.

 

GPU가 미래 추세라는 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인텔은 마치 ‘사골국물’을 우려내듯 CPU에만 의존했다. 이와 함께 반도체를 위탁받아 생산하는 파운드리가 반도체 업계 새로운 먹거리라는 점에 눈을 돌리지 않은 점도 꼽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인텔은 AI시대 흐름에 뒤로 밀려나는 CPU에만 주력했고 새로운 기술에 대처하지 못하는 우(愚)를 범한 것이다.

 

인텔의 반도체 왕국이라는 간판이 빛바래진 또 다른 이유는 '빈 카운터스(Bean Counters)'의 함정이다. 빈 카운터스는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챙기는 재무-회계 전문가를 꼽는다.

 

재무통(通)이 CEO(최고경영자) 등 기업을 운영하면 투자나 돈 쓰는 일에 주저하기 마련이다. 

 

2013년 인텔 사령탑이 된 재무통 CEO 브라이언 크러재니치는 엔지니어에게 원가 절감과 단기 성과를 주문했다. 또한 PC 산업 성장이 주춤해진 2016년 인텔은 1만2000여명을 감원했다. 인텔에서 짐보따리를 싼 기술자들은 경쟁업체로 둥지를 옮기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처럼 첨단기술 개발보다는 '콩 숫자만을 세는' 사업 효율화만 강조하는 회사 분위기는 밥 스완 최고재무책임자(CFO) 출신 CEO 재임 기간인 2020년까지 이어졌다.

 

결국 인텔은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셈이다.

 

테크기업이 기술개발이 아닌 수익 중심 경영정책에 매몰되면 회사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치명적인 칵테일(lethal cocktail)'을 마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쟁업체가 첨단기술로 세계 무대에 앞다퉈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가운데 인텔은 경로의존성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기술혁신의 길을 가지 못했다. 

 

몇 년 전 타계한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미국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저서 '혁신자의 딜레마( The Innovator’s Dilemma)'에서 세계적 우량기업이 시장지배력을 잃는 원인을 분석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글로벌 기업이 혁신자의 딜레마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달콤한 관성'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게임의 룰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일궈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초접촉사회를 맞아 시장과 고객 변화에 둔감하고 디지털 기술의 혁명적 변화를 외면하는 '나홀로 갈라파고스' 프레임에 함몰되면 AI와 로봇, 사물인터넷(IoT)으로 요약되는 제4차 산업혁명의 높은 파도에 휩쓸려 좌초할 수밖에 없다.

 

벼랑 끝에 몰린 회사 상황에 겔싱어 CEO는 회사 경쟁력을 되살리기 위해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 기업들도 인텔 사례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볼 처지가 아니다.

 

인텔 사례는 한때 시장을 지배하던 기업도 혁신을 게을리하고 시장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추락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과거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혁신과 변화를 추구해야 급변하는 기술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얘기다. 

 

1등이라는 자리에 취하고 안주해 외부 도전에 둔감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졸면 죽는다'는 정보통신기술(ICT) 시장의 경구(驚句)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위기'를 강조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기술 초격차를 외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문득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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