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은 공간철학] 칸트의 선험적 표상으로서 ‘공간(空間)은 밑바탕이다’

칸트(Immanuel Kant)의 선험적 표상으로서 ‘공간(空間)은 밑바탕이다’ : 공간은 실체의 범주라기보다는 대상이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 표상이다.
(뉴스투데이=윤재은 대기자) 존재와 실체의 문제는 대상의 문제라기보다는 공간과 대상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대상은 외부의 공간과 관계하며, 실체한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부 공간과 관계하는 대상은, 경험을 인식하게 하지만 실체화 될 수는 없다. 실체는 일시적 유형으로 나타나는 대상의 경험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변치 않는 유(有)여야하기 때문이다.
공간은 외적 경험을 통해 추출된 개념이라기보다는 밑바탕으로서 근원적 현상이다. 형이상학적 학문에 있어 대상의 실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밑바탕에 무형의 공간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간은 실체의 범주라기보다는 대상이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 표상이다.
공간은 외적 표상으로서 자연의 속성을 담고 있지만, 실체로서 인식되어지지는 않는다. 실체는 질료에 의한 양태이어야 하며, 존재 자체여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형태는 시간에 의해 통제를 받기 때문에 잠시 있다가 살아져버리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반드시 실체가 아닌 것은, 실체의 밑바탕엔 보편성이 존재하여야하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대상은 사라지지만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공간은 선험적 표상으로 밑바탕이기 때문에 대상의 존재여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공간은 대상의 현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험이라기보다는 선험적 표상이며, 대상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어왔던 원인이다.
공간이 인식에 있어 표상이 되는 것은 대상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공간이란 대상의 관계를 추론하는 보편적 개념을 넘어선 순수이성으로, 선험적 순수직관 영역이다.
공간이 갖는 유일성은 대상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무한영역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속성으로 존재하는 모든 보편자들은 서로의 실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고, 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에 공간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공간은 대상의 실체를 알리는 밑바탕이 되며, 무(無)이지만, 유(有)를 보여주는 그 어떤 것의 밑바탕이다.
인간의 경험은 다양한 공간속에서 일어나지만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동일한 공간의 밑바탕에서 실현되어지기 때문에 공간은 단일한 표상으로서 밑바탕인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과 선험성은 대상의 실체를 알기위한 형이상학적 접근으로, 실체의 본질을 알기위한 밑바탕의 선험적 표상을 먼저 인식하여야 한다. 선험적 직관은 경험적 대상에 대한 이성의 오류를 인식하는 것이며, 올바른 선험적 이성을 통해 실체의 밑바탕인 공간을 인식하여야 한다.
공간의 무한성은 선험적이어야 한다. 공간은 무한하며 밑바탕에서 시작되지만 수많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나눠진 부분의 공간도 나눠진 객체의 대상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속성으로서 표상되어지기 때문에 공간은 유일한 하나이다. 이러한 공간의 근원적 표상은 대상에 앞선 선험적 직관으로 인식되어진다. 이렇게 선험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바로 공간(空間)이다.
공간이 유일하고 밑바탕이라 하더라도 실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체란 어떤 무엇임인데 그 무엇임은 보편적 형태를 갖는 대상(對象)이어야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선험적 직관이 공간의 표상을 인식한다 할지라도 대상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순수이성은 실체와 존재를 말 할 수 없다. 결국 공간은 선험적 표상이지만 실체가 될 수 없으며, 실체는 대상이어야 하는 것이다.
대상의 자연은 수많은 속성들로 이루어져 공간속에 존재하게 되고, 이러한 대상의 끝없는 반복은 대상의 경험적 실체보다, 보편적 실체로 자리한다. 인간은 이러한 인식의 기반에서 대상이 실체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 속성은 운동과 정지를 반복하며, 끝없이 진화하지만 실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체는 시간에 따라 생겨나고 살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체란 보편적이어야 하며, 항상 그 자체여야하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의 세계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싸워온 실체의 문제는 창조의 정의를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신의 창조 없이 어떠한 대상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대상은 신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것이 된다.
대상의 근원으로서 신은 세계를 만들고 그곳에 수많은 대상을 자연의 이름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신은 만물의 창조원인이며, 실체의 원인이다. 그리고 신의 창조에는 공간이라는 선험적 표상이 선행되어야 한다.
공간은 스스로 존재의 근원을 만들지만, 스스로는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모든 사물의 존재적 근원으로서 표상될 뿐이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공간을 통해 인식되어지기 때문에 공간은 존재의 밑바탕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밑바탕으로서 공간은 칸트가 말하는 순수직관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

윤재은(Yoon Jae Eun)
건축가이며 공간철학자.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익대건축학박사, Pratt Institute Master of Interior Design, New York, USA, Denmark International Study, affiliated with University of Copenhagen, Architecture &Design Program, 홍익대 디자인 학사를 졸업했다. 또한 UC Berkeley 건축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디지털건축을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건축전문서적 Archiroad 1권(Hyun), 2권(Sun), 3권(Hee)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으로 건축은 나무다, 건축은 선이다의 저서가 있다.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헤이리 블랙하우스, 25.7 하우스, 송해븐, 유진타워, 성북동 보현재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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