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쏘아 올린 '관세전쟁'은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뉴노멀’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외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화려한 슬로건 뒤에는 한국 등 주요 교역국 경제를 거지로 만드는 '근린궁핍화정책(Beggar thy neighbour)'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취임 100일을 맞은 그는 미국 경제가 교역 대상국 때문에 망쳤다는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피아 구별 없이 관세 폭탄을 매몰차게 떨어뜨리는 모습이다. 이에 따라 미국이 한때 세계 정치 경제 무대에서 뚜렷한 리더십과 1등 국가 면모를 보여준 시절은 지나가고 각자도생의 길로 가는 'G-제로' 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지 않는가. 막말과 기행을 일삼는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의 달인'이라는 꼬리표에 걸맞게 협상전략도 모두의 입을 쩍 벌리게 만든다. 그는 교역국이 미국에 맞서는 공동 대응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미국 눈치를 보며 협상해야 하는 '죄수의 딜레마'를 연출하고 있다. 이는 협상국 운신의 폭을 좁혀 미국이 원하는 결과를 모두 얻으려는 고도의 술책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중국처럼 예외도 있다. 미국과 함께 세계 2대 경제 대국 'G2'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한 중국은 미국과의 정면충돌이라는 치킨게임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세다. 미국과 중국 양측이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이면서 두 나라 가운데 누가 먼저 벼랑 끝에서 핸들을 돌릴지 모른다. 게임이론에서 파생된 치킨게임은 '해피엔딩'이 없다. '모 아니면 도'다. 치킨게임은 '신뢰의 비대칭성' 때문에 공생이 아닌 공멸이라는 역선택(adverse selection)의 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미-중 갈등은 '21세기판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이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 잡은 맹주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급부상에 두려움을 느꼈다. 결국 두 나라는 경제·정치 패권을 놓고 무려 30년에 걸친 지리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휩싸였다. 그 결과 두 나라는 모두 패망의 길을 걷게 됐다.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긴 자가 어느 날 자신을 추월했을 때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의 전철을 미국과 중국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 근간 MAGA의 핵심은 결국 미국 제조업 경쟁력의 복원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이 제조업 부흥을 외치는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가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 으름장을 놓은 행태는 미국 제조업의 근본적 문제점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베리 앨런 블루스톤(Barry Alan Bluestone)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와 베넷 해리슨(Bennett Harrison)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가 1982년 함께 발간한 저서 '미국 제조업 공동화(The Deindustrialization of America)'를 읽어보면 트럼프 분노가 대부분 왜곡됐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미국 제조업 공동화는 미국 강성노조 등장에 따른 제조업 임금 급등과 금융-서비스업 집중 육성이라는 미국 경제정책의 결과물이다. 1970~80년대 미국 기업은 강성노조의 출현과 높은 인건비, 노동생산성 저하에 미국 내 공장을 폐쇄하고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한때 미국 제조업 메카였던 오하이오주(州), 미시간주, 펜실베이니아주 등 미국 북동부 지역은 제조업 몰락으로 녹슬어 버린 공장을 묘사하는 '러스트 벨트(Rust Belt)'의 상징물이 됐다. 미국의 예가 보여주듯 기업이 수익을 제대로 보존할 수 없는 과도한 임금 상승은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똑같은 해법이 나온다. 제조업 기반을 외국으로 옮기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제조업 부흥을 외치고 있지만 미국 근로자 임금이 크게 줄어들지 않는 한 국제무대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이와 함께 국제분업 장점도 트럼프가 간과한 대목이다. 19세기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가 주장한 '비교우위이론'은 한 국가에서 모든 상품을 생산하는 것보다 다른 국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상품을 상호 교역하면 상호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를 통해 세계 경제는 지난 30년간 세계화의 열매를 나눠 가졌다. 리카도 주장처럼 제조업체가 지속적인 투자와 고용을 하려면 수익 구조 개선이 절대적이며 이를 위해 저렴한 해외 생산국에서 만든 부품을 활용하는 게 기본이다. 미국 역시 세계화에 중국 등 해외 시장을 활용해 가장 혜택을 많이 누린 국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트럼프는 이 모든 것을 바꾸려 하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외치는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가 현실이 되면 미국산 제품 가격은 현재보다 최소 2배 이상 치솟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미국 소비자에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이러한 가격정책이 과연 미국을 위대하게 하고 미국에 경제적 편익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트럼프 관세 정책은 우리나라 제조업계 발등에도 불을 떨어뜨렸다. 이른바 '트럼프 발(發) 제조업 블랙홀' 현상이다. 반도체와 자동차 등 대기업을 비롯해 중견그룹이 앞다퉈 짐을 싸 미국행 비행기를 타면 국내 제조업 기반은 더욱 취약해지고 국내 고용을 그만큼 줄 수밖에 없다. 최근 10여 년간 국내 제조업 현황을 살펴보면 한숨만 나온다. 국내 제품이 중국산 저가 제품에 추격당하고 선진국 제품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샌드위치' 현상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의 10대 수출 품목 가운데 8개가 20년째 제자리걸음이다.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 기업 경쟁력이 후퇴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가운데 국내 주력 제조업이 트럼프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면 한국판 러스트 벨트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제조업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28%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큰 상황에서 제조업 위기는 산업 공동화와 경제 위기로 치달을 수 있는 뇌관이다. 이에 따라 현 정부는 물론 오는 6월 3일 새롭게 탄생하는 새 정부는 미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는 국내 기업 흐름을 관리하고 국내 고용 창출을 더욱 늘리도록 하는 게 최대 경제 현안이 됐다.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당선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가뜩이나 국내 제조업 기반이 어려운 상황에서 강성노조가 맹위를 떨치고 반(反)기업 정책이 춤을 추며 강자는 나쁘고 약자는 옳다는 '언더도그마', 공산주의 중국에도 찾아보기 힘든 기상천외한 반기업 정책이 속출하면 제조업의 탈(脫)한국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급증할 것이다. 트럼프가 관세를 무기로 전 세계를 위협해 제조업 기반을 흔들고 있지만 한국은 트럼프 정책만이 제조업 뿌리를 송두리째 훼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복합 위기 파도가 밀려오는데 기업이 투자를 늘려 제조업 기반을 유지하고 고용 창출에 적극 나서 경제발전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는 진보세력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분배정책을 펼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기반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국내 제조업의 해외 엑소더스를 막는 해법의 열쇠는 결국 우리 스스로 쥐고 있는 셈이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최근 인구에 회자되는 업체 가운데 로보락과 BYD가 눈에 띈다. 로봇청소기 업체 로보락은 로봇팔이 부착된 청소기까지 선보여 삼성전자와 LG전자 도전을 물리치고 국내 시장점유율 45%로 업계 1위를 거머쥐었다. BYD도 예외는 아니다. 전기자동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이 이어지는 가운데 BYD는 전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지난해 미국 업체 테슬라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일개 배터리 업체로 출발한 ‘다윗’ BYD가 ‘골리앗’ 테슬라를 제치고 전세계 전기차 시장을 호령하는 게임체인저로 우뚝 섰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이 두 업체는 모두 중국 기업이다. 그동안 우리가 탄탄한 경쟁력을 갖췄다고 자부해온 가전과 자동차 부문에서 중국 기업이 시나브로 우리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로보락과 BYD에 이어 우리에게 얼마 전 큰 충격을 안겨준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까지 중국발(發) ‘기술 굴기(崛起,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라는 뉴노멀(새로운 표준)시대가 활짝 열렸다. 혹자는 BYD 등 중국 업체의 도전이 국내 가전과 TV 맹주의 공격경영에 밀려 결국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날 것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대륙의 실수’라는 꼬리표가 붙어 국내 스마트폰 시장에 진출했지만 국내 시장점유율 ‘0’에 그친 샤오미의 전철을 이들 두 업체가 밟을 수 있다고 내심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로보락과 BYD의 최근 광폭 행보를 보면 국내 업체들이 안심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문득 소니가 떠오른다. 한때 전 세계 전자제품 업계 ‘아이콘’의 위용을 떨친 소니는 지금 전세계 가전 시장에서 예전의 존재감을 잃은 지 오래다. 어디 이것 뿐이겠는가. 전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절대강자로 군림했던 노키아와 모토로라는 급변하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첨단 기술개발에 소홀해 지금은 잊혀진 이름으로 전락했다. 소니, 노키아, 모토로라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과 ‘핵심역량의 경직성(Core Rigidities)’의 대표적인 예다. 폴 데이비드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와 브라이언 아서 스탠퍼드대 교수가 1985년에 주창한 개념인 경로의존성은 일정 제품이나 관행이 자리를 잡으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 되더라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뜻한다. 경로의존성은 ‘고착화(lock-in)’라는 본질적 특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 기업이 기존에 익숙한 경영방식만 고집하면 세계적인 기술 경쟁이 펼쳐질 때 ‘고인물’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첨단 기술 전쟁에서 낙오자가 되는 지름길이다. 핵심역량의 경직성도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 암적인 요소다. 도로시 레너드 바튼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가 1992년 발표한 논문 ‘핵심 역량과 핵심 경직성: 신제품 개발 관리의 역설’에서 처음 등장한 핵심역량의 경직성은 기업 핵심역량이 오히려 변화와 혁신을 방해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전통적인 핵심역량은 혁신을 저해하는 핵심 경직성이라는 단점을 안고 있어(Traditional core capabilities have a down side, called rigidities, that inhibits innovation) 기업이 기존 인기제품 등 특정 역량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면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경쟁력을 잃게 된다는 게 바튼 교수의 주장이다. 그동안 회사를 먹여 살린 주력 기술이 새로운 첨단 기술 등장으로 자칫 회사 발전을 막는 기술력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전세계 TV·가전·스마트폰 등 IT 시장을 놓고 한국은 물론 중국, 미국, 일본, 인도 등이 ‘죽기 살기’ 경쟁을 펼치는 상황에서 잠시 방심하면 천길만길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다. IT업계에서 ‘졸면 죽는다’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한국경제를 위협하는 외생변수는 이것 뿐 만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25%의 상호관세를 부과하기로 한 결정은 동맹국 등 이웃 나라를 거지로 만드는 근린궁핍화정책(Beggar thy neighbour)'의 전형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결정으로 전 세계는 거대한 보호무역주의의 파도가 엄습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그동안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외치며 세계화를 이끌어온 국가가 다름 아닌 미국이다. 미국은 교역국이 자유무역을 따르지 않으면 '슈퍼 301조'라는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며 일방적인 보복 조치를 해왔다. 그런 미국이 이제 보호무역주의 카드를 내세워 자유무역을 도외시하는 것은 자기모순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세계 최대 시장 미국이 보호주의 상징인 관세 카드를 빼들어 WTO(세계무역기구) 중심의 자유무역 체제는 출범 30년만에 중대 위기를 맞았다. 그렇다고 트럼프의 이번 도박이 미국 경제에 반드시 도움을 준다는 보장은 없다. 미국이 1929년 대공황을 맞아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는 유권자 표심을 잡기 위해 보호무역주의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됐다. 후버 대통령은 집권 후 미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2만여 가지 수입품에 59~400%의 관세를 부과하는 '스무트 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단행했다. 이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교역국이 보복 관세로 대응해 세계 교역과 소비가 급랭한 점을 트럼프가 되풀이하면 안된다는 얘기다. 주요 교역국 경제를 희생하며 자국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근린궁핍화정책의 결말은 공동 번영이 아닌 공멸이다. '미국을 다시 부유하게'라는 트럼프 선거공약이 효험을 발휘하려면 자유무역 확대가 정답이다. 이처럼 세계경제가 요동을 치는 가운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모든 계열사 임원에게 ‘사즉생(死則生·죽기로 마음먹으면 산다는 뜻)’을 주문하며 최첨단 기술로 위기에서 벗어나자고 주문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 고(故)이건희 선대 회장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외친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삼성 혁신을 외친 화두로는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재용 회장 요구처럼 삼성전자는 기존 강점에만 매몰되지 않고 모든 사업영역에서 중국 등 후발자 추격을 뿌리칠 수 있는 기술 초격차와 가격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문제는 ‘사즉생 선언’이 삼성전자에만 국한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반도체, 자동차, 2차전지, TV, 냉장고, 스마트폰, 철강, 조선, 기계, 정유, 석유화학 등 우리 주요 산업에 중국, 인도 등이 끊임없는 도전과 기술혁신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력이 경쟁국에 밀리면 우리 기업이 ‘소니’, ‘노키아’, ‘모토로라’의 길을 걷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나. 이제는 국내 모든 산업이 ‘사즉생’을 외치며 끝없이 펼쳐지는 첨단 기술 전쟁에 임해야 한다. 주춤하면 벼랑끝으로 몰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과거 성공에 안주해 경로의존성과 핵심경직성의 칵테일을 들이키면 결말은 치명적이다. 첨단 분야 선발 기업을 따라잡으려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단계를 지나 새로운 혁신을 추구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자리매김하는 중국의 역습을 극복하려면 초격차 기술력과 혁신 정신, 창의적인 기업가정신을 갖추는 것이 해답이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화불단행(禍不單行:불행은 잇따라 일어난다)'이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경기 침체 상황에서도 물가가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2기 행정부의 '관세 폭탄'과 국내 정치 아노미가 겹쳐 한국호(號)는 퍼펙트 스톰(초대형 복합위기)의 짙은 먹구름에 휩싸여 있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무역 정책을 보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을 다시 부유하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국 등 주요 교역국 경제를 거지로 만드는 '근린궁핍화정책(Beggar thy neighbour)'을 펼치고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이를 보여주듯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가 최근 발간한 ‘트럼프 2기 주요 정책과 한국의 잠재적 영향력’이라는 제목의 내부용 보고서를 보면 등골이 서늘할 정도다. 미국 정부의 '칩스법(반도체 지원법)' 감축과 관세 정책으로 한국의 15개 주요 수출 품목 가운데 9개 품목 수출이 감소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왔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이 지난 20여 년간 주요 수출 품목을 다각화하지 못하고 신성장 기술도 확보하지 못해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라고 맥킨지가 지적했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마치 고인 물처럼 기존 제조업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국내 산업 생태계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맥킨지의 쓴소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맥킨지는 2013년 4월 '한국 보고서'를 통해 한국경제를 '멈춰버린 한강의 기적'이라며 신랄하게 지적한 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해 맥킨지는 '저성장 시대 해법'을 주제로 개최한 포럼에서 "한국은 느리게 가는 자전거이다 보니 그만큼 균형 잡기가 어렵다"라며 "이에 따라 한국은 저성장 기조에서 경제적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냈다"라고 맹비난한 점은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관성의 법칙이 한국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게 우리의 엄연한 현주소다. 관성의 법칙은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 그 상태로 운동하려고 하고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는 속성을 드러낸다. 이는 움직이는 물체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데에는 힘이 별로 들지 않지만 멈춘 물체를 다시 움직이려면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경제성장이 경기순환에 따른 하락보다 더 떨어지면 이를 다시 끌어올리기가 어렵다. 저성장이 오래 이어지면 가계, 기업, 정부 등 경제주체는 경제가 다시 성장할지에 대한 확신을 잃기 마련이다. '경제는 심리'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가 잠재성장률 이하로 떨어지는 저성장과 실업 증가가 두드러지면 미래 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이를 경제학에서 '이력효과(Hysteresis Effect)'라고 부른다. 거시경제학자 올리비에 블랑샤르와 로렌스 서머스가 1986년 발표한 '이력효과와 유럽 실업률 문제(Hysteresis and the European Unemployment Problem)'라는 제목의 공동 논문에서 처음 등장한 이력효과는 어떤 물체가 외부 힘에 영향을 받은 후 본래 상태로 쉽게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1990년대 저성장으로 이어진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1980년대 미국의 경기침체가 이력효과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한국경제도 예외는 아니다.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저성장->저소비->저투자->저고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지 않는가. 이에 따라 한국경제 잠재성장률이 2031~2060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 1.8%에도 못 미치는 0.55%까지 떨어져 제로성장에 머물 것이라는 충격적인 예상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미국 소설가 대니얼 퀸이 1992년에 쓴 소설 '이시마엘(Ishmael)'이 문득 떠오른다. 이 소설은 "개구리는 끓는 물이 담긴 냄비에 넣으면 재빨리 냄비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러나 찬물에 넣고 온도를 조금씩 올리면 개구리가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해 결국 뜨거운 물에 익혀 죽는다"라며 위기 불감증을 묘사했다.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에 빠진 '느린 자전거'인 한국경제가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 신세에서 벗어나려면 한국경제 전반의 체질을 강화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를 위해 내수 비중을 늘리는 산업 구조조정과 함께 기업 경쟁력 강화에 나서야 한다. 쉽게 얘기하면 기업이 기업가정신, 생산성 향상, 신(新)기술 개발이라는 삼위일체를 갖춰야 한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특히 기업가정신은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경제를 살리는 꽃'이라고 역설할 만큼 중요하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기업가정신과 그리고 지금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헝그리정신을 갖춰야 한국경제가 '제2의 르네상스'를 꿈꿀 수 있다. 정부 정책이 투명해 기업이 마음껏 투자하고 사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급선무다. 정보의 비대칭성을 초래할 수 있는 모호함이 가득 찬 각종 규제로는 기업이 투자하기 위해 지갑을 열 이유가 없다. 마치 고장난 레코드판이 똑같은 노래를 반복하듯 '경제의 최대 적(敵)은 정치'라는 소리만큼은 이제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권이 국가 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각종 경제활성화 법안을 신속하게 통과해 기업의 투자 의욕을 높이는 것이다. 특히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위기에 놓인 반도체 산업을 되살리기 위해 재계와 정부 여당이 반도체 특별법의 '주 52시간 특례' 적용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지만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국회 모습은 답답하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를 정도다. 공산주의 국가 중국도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주는 정책을 앞다퉈 내놓고 있는데 우리는 국정 운영의 묘를 살리지 못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경제는 타이밍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기회를 놓치면 의미가 없다. 개구리가 위기를 피해 냄비 속에서 힘차게 뛰쳐나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여건을 서둘러 만들어줘야 한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타임머신을 타고 68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옛 소련은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Sputnik) 1호’를 발사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지름 58cm, 무게 83.6kg, 안테나 4개가 달린 알루미늄 공 모양의 스푸트니크 1호는 소련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요란한 굉음과 함께 상공으로 치솟았다. 이 인공위성은 900㎞ 상공에서 1시간 36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 돌며 무선 신호를 안테나로 송출했다. 공교롭게도 그해는 ‘러시아 우주 개척의 아버지’로 불리는 물리학자 콘스탄틴 치올콥스키가 탄생한 지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소련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자국의 첨단 우주 기술을 보란 듯이 뽐낸 것이다. 당시 우주 개척에 가장 앞섰다고 자부해온 미국은 스푸트니크 발사 장면에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에 휩싸였다. 기술 우위를 자신해온 국가가 후발 주자의 앞선 기술에 충격을 받는 순간인 ‘스푸트니크 모멘트(Spuknik Moment)’가 미국 눈앞에 펼쳐진 셈이다. 위성 발사에서 선두를 빼앗긴 미국은 절치부심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은 소련을 따라잡기 위해 그 이듬해인 1958년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해 우주과학 기술에 엄청난 예산을 쏟았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미국은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 선장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 표면을 밟으며 우주개발 경쟁에서 소련을 다시 앞지르는 쾌거를 이뤄냈다. 타임머신을 타고 현실로 되돌아오니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경구(警句)가 자못 뼈저리게 다가온다. 미국이 ‘AI(인공지능) 패권’을 사실상 장악한 골리앗으로 군림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선보인 AI 모델이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윗 ‘딥시크’가 골리앗 미국 AI업계에 도전장을 던진 것 아니고 무엇인가. 딥시크가 AI 개발에 투자한 비용이 558만달러(약 81억원)로 AI 분야 최강자인 미국 오픈AI 대표 모델 ‘챗GPT’ 개발비 1억달러(약 1458억원)의 18분의 1 수준에 그친다고 하니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처럼 딥시크가 저비용으로 고성능 AI 모델을 개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AI 반도체 시장의 맹주인 미국 엔비디아 주가가 한때 17% 넘게 주저앉아 ‘딥시크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준다. AI 개발에 엔비디아의 비싼 신형 칩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딥시크가 ‘AI의 스푸트니크 모멘트’라는 꼬리표가 붙어도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미국 경영학자 겸 위기분석 전문가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가 외친 ‘블랙스완(Black Swan)’이 문득 떠오른다. 촌음을 다투는 글로벌 테크 전쟁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인 블랙스완은 언제든 출몰한다. 딥시크가 이를 웅변하고 있지 않는가. 딥시크의 화려한 등장에 미국 기업과 정부가 잇따라 견제구를 날리는 모습을 보면 미국과 중국 간 AI 패권 경쟁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중국의 ‘AI 굴기’는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중국 정부는 2017년 '차세대 AI 발전 계획'을 발표해 오는 2030년까지 AI 연구개발(R&D)과 인프라 구축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AI 세계 최강'이 되겠다는 야심 찬 청사진을 내놨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일까. 중국의 AI 기술 수준은 2020년 기준으로 미국의 85.8%에 이르며 미국, 유럽에 이어 세계 3위다. 그러나 중국은 AI 논문 인용 수에서 미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는 등 AI 세계 최강의 꿈이 영글어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AI 패권을 둘러싸고 용호상박의 혈투를 벌이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만히 앉아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우리 정부와 기업이 AI를 미래 먹거리로 육성하는 가운데 미국에 이어 중국이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것은 우리 앞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니고 무엇인가. 세계 주요국이 AI 등 최첨단 기술 경쟁에 앞다퉈 뛰어들고 있지만 우리 정치권에는 한가한 남의 얘기다. 공산주의 국가 중국마저 국가 차원에서 자국 반도체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법안을 마련하고 있지만 반(反)기업 정서에 매몰된 정치권은 국가 미래가 달린 반도체산업특별법 등 경제 살리기 법안을 외면하고 있는 게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동화 ‘거울 나라의 앨리스(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Alice Found There)’에서 주인공 앨리스에게 “제자리에 머무르려면 쉬지 않고 힘껏 달려야 해. 다른 곳으로 가려면 이보다 두 배 더 질주해야 한다”라고 역설한 ‘붉은 여왕’의 외침은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AI와 로봇 등 4차산업혁명 첨단기술이 속출하는 글로벌 초경쟁 시대에 ‘붉은 여왕의 법칙’처럼 품질을 끊임없이 개선해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붉은 여왕이 마술봉을 휘두르고 있는데 현재 성과에 안주해 한순간 방심하면 아찔한 천 길 낭떠러지가 발아래 펼쳐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전 세계 산업 지평이 급변해 ‘졸면 죽는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언더도그마’, ‘근거 없는 피해의식’, ‘경제지식의 무지’로 점철된 우리 정치권의 세계관은 그저 한심할 뿐이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해마다 1월 초순이 되면 전 세계는 미국 네바다주(州) 라스베이거스로 눈을 돌린다.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5'가 이달 7일부터 10일까지 라스베이거스에서 ’테크 파티‘의 화려한 막을 올리기 때문이다. CES는 전 세계 기술 산업 추세를 읽을 수 있는 풍향계다. 이를 보여주듯 올해 CES 홈페이지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기술을 뽐내는 행사(The Most Powerful Tech Event in the World)‘라는 야심에 찬 문구가 등장하고 있지 않는가. 이는 CES에서 등장한 기술이 한 해 세계를 풍미하는 트렌드세터(Trend setter)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유력 테크기업이 이번 행사에서 첨단기술을 선보이며 자웅을 겨루고 있다. CES가 보는 이의 혀를 내두르게 하는 IT기술 격전지가 된 가운데 삼성, SK, 현대차, LG 등 국내 대기업을 포함해 900여 개 기업이 CES 2025에 참가했으니 그 도전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CES는 기술 근본주의(Technological Fundamentalism)의 대향연이다. 기술은 사회와 경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물이 넘치는 욕조에서 불규칙한 물체 부피를 측정하는 방법을 발견한 후 ’유레카(Eureka:알아냈어)‘를 외친 고대 그리스 과학자 아르키메데스처럼 첨단기술은 경제에 새로운 성장을 가져오는 촉매제다. CES는 또한 '빈 카운터스(Bean Counters)’에게 ‘반성의 시간’을 준다.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챙기는 재무-회계 전문가인 빈 카운터스에 대한 평가는 명암이 엇갈린다. 재무통(通) CEO(최고경영자)가 기업을 운영하면 투자나 돈 쓰는 일에 주저하기 마련이다. 지금처럼 경제가 불확실한 가운데 빈 카운터스 경영기법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빈 카운터스는 현장을 경시하는 성향이 없지 않다. 수중에 있는 돈을 의식해 최첨단 기술개발에 필요한 과감한 투자를 등한시하면 결국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 함정에 빠진다. 기업은 한번 일정한 경로에 들어가면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로의존성을 드러낸다. 기존 인기 제품에만 집착하는 경로의존성은 기업을 몰락으로 이끄는 ‘치명적인 처방전’이다. 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첨단기술 홍수에 떠밀리는 신세로 전락하는 길이다. CES 2025의 또 다른 관전포인트는 중국이다. 중국은 이번 전시회에 1339개에 이르는 테크기업이 도전장을 내밀어 눈길을 끌었다. 이번 행사에 세계 4500여개 업체가 참가하고 있으니 중국이 전시회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셈이다. 중국이 참가업체 수에서 미국(1509개)에 이어 2위에 머물렀지만 CES 2024에 참가한 중국 기업(1104개)과 비교하면 올해 235개 늘어나 첨단기술에 대한 중국의 야심에 등골이 오싹하다. 특히 중국업체는 이번 행사에 시대적 화두가 된 AI(인공지능) 제품을 비롯해 스마트홈 플랫폼, 심지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플라잉카’까지 내놔 이들의 ‘야성적 충동’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는 중국이 ‘기술 굴기(崛起:우뚝 일어섬)’에 대한 집념이 어느 정도 인지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 아니고 무엇인가. 중국이 자국 기술력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기술 굴기에 가속페달을 밟아 그동안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자리 잡은 두꺼운 ‘기술의 벽’도 어느새 허물어지고 있는 게 글로벌 경제의 현주소다. 세계시장을 상대로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하는 우리로서는 중국의 첨단기술에 손 놓고 있다간 낭패를 당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처럼 지구촌은 업종·영역 간 경쟁 칸막이가 사라져 최고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시대가 됐다. 이에 따라 경쟁기업 간 ‘적과의 동침’, 전혀 다른 분야와의 합종연횡도 비일비재하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구호가 문득 떠오른다. 세계가 초접속·초연결 시대에 접어들어 치열한 첨단기술 개발 경쟁을 펼치고 있지만 여의도 정객에게는 한가한 남의 얘기다. 세계 주요국이 AI 등 최첨단 기술 핵심인 반도체 기술 개발에 사력을 다하고 있지만 우리는 ‘기울어진 운동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은 물론 공산주의 국가 중국마저 국가 차원에서 자국 반도체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법안을 마련하는 게 ‘뉴노멀’이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연쇄 탄핵병’에 걸린 중환자다. 이러다 보니 국가 산업 미래가 달린 반도체산업특별법 등 경제 살리기 법안이 여전히 국회 서랍에서 잠자고 있다. 세상이 급변하는데 여의도 정객들은 반(反)기업 정서에 매몰돼 기업 손발을 묶고 혁신에 족쇄를 채우는 '앙시앙 레짐'에 매몰됐다. 밖으로 눈을 돌려봐라. 각종 규제와 반기업 레토릭이 차고 넘치는 나라 가운데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거둔 곳이 있는지 말이다. 여야가 탄핵 등 정치적 이슈를 놓고 치열하게 주판알을 튕기고 있지만 국민이 관심을 보이는 대목은 정치적 이슈가 아닌 먹고사는 문제다. 정부와 정치권은 경제 성장과 기업 육성 등 경제 활성화 정책에 더 주력해야 한다는 얘기다. 전율과 감동이 충만한 라스베이거스의 ‘기술 대향연’에 우리는 ‘잠 못드는 밤’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학창 시절 읽었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의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사람들 영혼 속에 분노의 포도가 가득하며 수확기를 앞두고 영글어 간다(In the souls of the people the grapes of wrath are filling and growing heavy, growing heavy for the vintage.)" 자칫 정치 구호처럼 들리겠지만 이는 미국의 대표 소설가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이 경제적 어려움에 놓인 이들의 분노와 좌절감을 묘사한 대목이다. 분노로 가득찬 포도가 폭발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다. 스타인벡은 1929년 대공황으로 피폐한 미국을 배경으로 경제적 궁핍에 놓인 주인공 톰 조드의 험난한 인생 역정을 그려냈다. 실업자 캠프에 수용된 조드와 그의 가족에게 삶은 행복이 아닌 질곡의 연속이었다. 이를 보여주듯 스타인벡은 당시 미국 사회 분위기를 "굶주린 사람 눈에는 패배의 빛만 보이고 영혼 속에는 분노의 포도가 가지가 휘도록 무르익는다"고 묘사했다. 한 개 일자리가 생기면 천국 하나가 등장하고 한 개 일자리가 사라지면 지옥 하나가 나타난다는 당시 암울한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셈이다. 대공황이 일어난 지 95년이 지났지만 지금의 상황이 과거와 비교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노의 포도와 현재를 관통하는 주제는 실업 문제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문제가 최대 고민이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의 경우 청년 실업이 최대 화두다. 최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쉬는 청년층(25~34세)이 42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일도 하지 않고 구직 활동도 하지 않는 '쉬는 청년'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한 2022년에 정점을 찍은 뒤 감소세를 보였지만 그 후 2년째 다시 늘어나고 있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들 가운데 25~29세 연령층 실업자 비율이 20.3%로 이른바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개 회원국 중 가장 높다. 국내 실업자 5명 중 최소 1명은 청년이란 얘기 아니겠는가. 이처럼 일하지 않는 청년층이 늘어난 것은 이들이 원하는 일자리가 없는 구조적 요인과 고용 상황 자체가 나빠 이들을 채용하지 못하는 경기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회에 처음 진출하는 청년층에게 일자리 한 개가 사라진다는 것은 불행의 씨앗이 한 개 뿌려지는 것과 같다. 이는 정치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잠재적 뇌관이다. 청년 일자리가 단순히 먹고사는 차원을 넘어 나라 명운을 좌우하는 문제로 여겨야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청년 구직난에 '3포(연애·결혼·출산 포기)세대', '5포(연애·결혼·출산·취업·주택)세대', '7포(5포세대+꿈·희망)세대'를 넘어 이제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N포 세대'라는 자조적인 신조어마저 등장하고 있는 것을 손놓고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청년 실업률이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암울한 현실에서 뭐든 혼자 하는 외로운 청춘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리언 페스팅어(Leon Festinger)가 주장한 '인지부조화 이론(Cognitive dissonance theory)'처럼 청년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암울한 시절을 보내 안타까울 따름이다. 청년층의 구직 활동 둔화는 생산인구 감소와 더불어 청년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비용을 늘린다. 이들의 실업이 오랫동안 이어지면 노동시장에서 영원히 벗어나거나 일할 의지가 없는 무직자, 즉 '니트(NEET)족'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청년층을 위한 일자리 만들기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정부는 이들이 다시 노동시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다양한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이와 함께 친(親)기업 정책으로 국내 기업은 물론 외국기업이 지갑을 열어 많은 청년층을 고용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에 따라 기업 발목을 잡는 각종 규제를 없애고 노동 개혁을 펼쳐 기업의 투자 의욕을 높이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기업도 청년실업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글로벌 경기침체에서 국내 기업이 그나마 숨통을 틀 수 있는 곳이 내수시장이다. 인구 14억명인 중국과 3억4000만명이 넘는 미국에 비해 국내 시장 규모는 작지만 전세계적으로 인구 5000만 명이 넘는 국가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젊은 층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고 내수시장에서 돈을 써야 디플레이션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정치권과 재계는 청년이 곧 국가 미래라는 점을 깨닫고 이들이 국내 경제를 되살리는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최근 '비상계엄령 선포' 해프닝으로 온 나라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어수선 하지만 젊은 층의 분노의 포도가 폭발하지 않고 잘 무르익을 수 있도록 사회와 재계, 정부가 힘을 모아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얘기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설마설마했는데 결국 현실로 다가왔다. ‘분노와 갈라치기 끝판왕’ 도널드 트럼프 전(前) 미국 대통령이 약 4년간의 공백을 끝내고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이번 미국 대선을 앞두고 근거가 없는 분노를 부추기며 각종 추문과 기행, 도발적 언행을 일삼은 트럼프에 미국 유권자들이 집단 이성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다. 자신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다른 정보는 무시하는 트럼프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과 왜곡된 정치생태계는 미국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결을 달리한다. 또한 다민족 사회인 미국 현실을 도외시한 채 정치와 경제 문제를 인종과 문화 충돌로만 여기는 트럼프의 터널 비전(tunnel vision)은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트럼프의 기이한 행태를 눈 감아주고 압도적 지지를 보낸 미국 유권자들의 어두운 이면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의 막말 시리즈에 미국 백인사회 등 지지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낄지 모르겠지만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 위상과는 한참 동떨어진 결과물이다. 그러나 미국 대선 결과에 더 이상 왈가불가할 생각은 없다. 미국 유권자 선택에 따른 책임도 고스란히 그들의 몫이다. 이제 전 세계는 ‘트럼피즘(Trumpism)’을 앞으로 4년간 다시 지켜봐야 하는 신세가 됐다. 불만 원인을 밖으로 돌려 위험을 차단하고 국민 결속을 강조해 반대자를 억압하는 것은 나치즘과 파시즘의 공통된 속성이라는 점을 트럼프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세계는 이미 ‘분노의 파도’가 넘실댄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제 양극화가 시대적 화두로 등장하면서 2011년 미국에서는 ‘1%대 99%’라는 구호를 앞세운 월가 점령 시위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이후 유럽과 아시아에서 경제적 불평등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내뿜는 분노를 목도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 아닌가.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일갈한 것처럼 세계는 분노의 정치학에 뿌리를 둔 ‘극단의 시대(The Age of Extremes)’로 치닫고 있다. 그렇다고 트럼프의 해괴한 정치 행보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의 재등판으로 한동안 잠들었던 보호무역주의가 관(棺) 뚜껑을 열고 되살아났다. 이에 따라 미국 호(號)는 자유무역주의와 결별하는 모습이다. 트럼프 당선자는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가 1817년 발간한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칙(The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에서 향후 정책적 혜안을 찾아야 한다. 리카도는 한 국가가 상대적으로 더 적은 기회비용으로 제품을 생산할 때 비교우위가 있다며 자유무역을 통해 일반 국민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유무역주의는 소비자들이 좋은 물건을 싼값에 살 수 있어 개인은 물론 국가에도 좋은 정책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자신의 경제정책 ‘트럼프노믹스’를 강행하면 소비자는 질이 안 좋은 물건을 비싼 가격에 사야 하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미국 인건비가 높지만 트럼프 차기 행정부가 ‘메이드 인 USA’ 레토릭을 강조하면 지난 1990년대 초처럼 제품 가격이 한 대당 200만~300만 원대인 비싼 미국산 노트북 컴퓨터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 비싼 가격에 소비자들은 미국산 제품을 외면할 수 있다. 이는 트럼프노믹스가 원했던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패착이다. 트럼프는 또한 과거 미국 정부의 실패 사례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미국이 1929년 대공황을 맞은 가운데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는 유권자 표심을 잡기 위해 보호무역주의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됐다. 후버 대통령은 집권 후 미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2만여 가지 수입품에 59~400%의 관세를 부과하는 '스무트 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단행했다. 이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교역국이 보복 관세로 대응해 세계 교역과 소비가 급랭한 점을 트럼프가 되풀이하면 안된다. 그동안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외치며 세계화를 이끌어온 국가가 다름 아닌 미국이다. 미국은 교역국이 자유무역을 따르지 않으면 '슈퍼 301조'라는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며 일방적인 보복 조치를 해왔다. 그런 미국이 이제 보호무역주의 카드를 내세워 자유무역을 도외시하는 것은 자기모순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주요 교역국 경제를 희생하며 자국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근린궁핍화정책(Beggar thy neighbour)'의 결말은 공동 번영이 아닌 공멸이다. '미국을 다시 부유하게'라는 트럼프 선거공약이 효험을 발휘하려면 자유무역 확대가 정답이다. 리카도가 ‘비교우위론’에서 강조한 것처럼 자유무역에 토대를 둔 국제교역만이 교역에서 재미를 보는 국가는 물론 조금 손해보는 국가에도 혜택을 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트럼프가 추진하는 미국의 신(新)고립주의는 결국 ‘자국 이기주의’라는 국제적 비난을 피하려고 다른 곳에서 명분을 찾으려는 ‘거짓순수(Pseudoinnocence)’에 불과하다.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챗GPT, 로봇 등 디지털 혁신의 파고가 기존 경제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는 제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국경을 걸어 잠그고 보호무역주의 깃발을 내건 그의 모습은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가는 퇴행적 행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미국이 진정으로 다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이 있는 국가가 되려면 기술혁신 등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특히 글로벌 전체 발명 특허 출원 건수에서 중국이 전 세계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을 미국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가 기술혁신의 핵심 지표이자 국가경쟁력 척도인 기술특허에서 경쟁국 중국에 밀린 슬픈 자화상 앞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공허한 구호를 외치며 분노의 정치를 펼치는 게 해법이 아니라는 얘기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1955년에 개봉한 미국영화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이 문득 떠오른다. 주인공 짐(제임스 딘)과 버즈(불량배)는 여주인공 주디(나탈리 우드) 마음을 사기 위해 치열한 구애를 펼친다. 딘과 버즈는 상대방 담력을 떠보기 위해 각자 차로 절벽을 향해 달리다 먼저 차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지는 게임을 하기로 한다. 먼저 뛰어내린 자는 ‘치킨’, 즉 겁쟁이가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자동차로 게임을 벌이다 버즈는 옷이 차 문에 걸려 뛰어내리지 못하고 절벽으로 추락해 죽는다. 한 명이 먼저 포기하면 치킨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지만 끝까지 가면 둘 다 사망하는 셈이다. 헝가리 물리학자 존 폰 노이만과 독일 경제학자 오스카르 모르겐슈타인이 1944년 발표한 논문 ‘게임이론과 경제 행동(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은 세월이 흘러도 인간의 내적 갈등을 잘 보여준다. 게임이론에서 파생된 치킨게임은 ‘해피엔딩’이 없다. ‘모 아니면 도’다. 양측이 ‘신뢰의 비대칭성’ 때문에 공생이 아닌 공멸이라는 역(逆)선택(adverse selection)의 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재계의 뜨거운 감자가 된 ‘영풍-고려아연 경영권 분쟁’도 치킨게임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영풍그룹이 자회사 고려아연 경영권을 거머쥐기 위해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이하 MBK)와 손잡고 고려아연 지분 공개매수에 나서고 있다. 이에 맞서 고려아연은 글로벌 사모펀드 베인캐피탈과 함께 고려아연 자사주 공개매수를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영풍과 고려아연의 치킨게임 탓에 주당 66만 원으로 시작한 고려아연 공개매수가는 89만원이 되면서 한 달 새 무려 34.8% 치솟았다. 양측의 장군멍군식 대응에 기업가치는 물론 주주가치도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지만 이들의 신경전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결국 두 업체 기 싸움은 내년 3월 고려아연 정기 주주총회에서 판가름이 날 전망이다. 고(故) 최기호·장병희 명예회장이 1949년 영풍그룹을 공동 창업한 후 지난 75년간 한솥밥을 먹어온 두 회사가 최 창업주 손자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과 장 명예회장 아들 장형진 고문 간 알력으로 동업자 정신이 한낱 휴지 조각이 된 점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 이 두 사람 모습을 그렇다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 피를 나눈 가족 간에도 경영권을 놓고 골육상쟁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 간 분쟁의 함정을 파고들어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이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기업의 동업 정신이 무너지면 경영권을 노리는 외부 세력은 더욱 힘을 얻는다. MBK와 베인캐피탈도 예외는 아니다. 영풍과 고려아연 가운데 누가 이기더라도 구원투수로 나선 이들 사모펀드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사모펀드가 국내기업 경영권 분쟁에 참여해 인수 기업을 키우기보다는 기업 자산을 팔아 이익을 취하는 ‘기업 사냥꾼’으로 전락한 것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특히 MBK에 새겨진 주홍 글씨는 깊고 뚜렷하다. MBK는 2013년 ING생명(현 신한라이프)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금융당국, ING생명 임직원에 회사를 약 10년 이상 보유하며 장기적으로 경영하겠다고 약속했지만 ING생명을 인수한 지 약 6개월 만에 대대적 인력 감축을 단행했다. 홈플러스도 마찬가지다. MBK는 2015년 유통업체 홈플러스를 약 7조원에 사들여 ‘인위적 인력 감축·구조조정’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홈플러스 경영권 인수 후 20개가 넘는 홈플러스 점포를 폐점하거나 매각 후 재임차해 자산을 처분하고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에 나섰다. MBK의 ‘약속 어기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치킨프랜차이즈 BHC를 인수한 MBK는 가맹점 계약 부당해지, 물품공급 중단 등 가맹사업법을 위반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3억5000만원과 시정명령 처분을 받기도 했다. ‘양치기 소년’이 된 MBK가 고려아연 인수를 추진하며 앞으로 10년을 바라보고 어떤 구조조정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공허하게 들린다. 베인캐피탈도 ‘먹튀’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베인캐피탈은 바이오업체 휴젤, 교육업체 에스티유니타스, 인천 청라국제업무단지 인수 등에 참여하면서 온갖 구설수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고려아연이 이들 사모펀드 품에 안기면 고려아연은 물론 국가 경제에도 치명적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비철금속 세계 1위 제련기업이며 반도체·2차전지 등 4차 산업혁명 핵심 자원을 공급하는 고려아연이 중국계 자본이 배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MBK 혹은 미국계 베인캐피탈에 좌지우지되고 첨단 기술력이 중국이나 미국에 넘어가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고려아연은 차세대 전기자동차 배터리 기술로 꼽히는 ‘전고체’ 제조 기술을 갖고 있어 전기차 배터리 기술 첨단화를 노리는 외국기업이 군침을 흘리기에 충분하다. 영풍-고려아연 간 갈등으로 두 기업 경쟁력이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 국가 첨단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간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된다. 영풍과 고려아연 신경전은 적대적 M&A(기업 인수합병) 풍속도도 바꿔놨다. 사모펀드는 그동안 경영이 부실한 기업을 대상으로 적대적 M&A를 추진했지만 이제 초우량 기업도 사모펀드의 ‘울프 팩(Wolf Pack) 전략’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다. 해외 주요국에 있는 차등의결권, 포이즌 필, 황금주 등이 국내에는 없어 기업이 경영권을 방어할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정부 당국이 기업 밸류업을 외치고 있지만 공허안 외침일 뿐이다. 공멸할 수 있는 두 기업 간 치킨게임은 이제 멈춰야 한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한 대화를 장형진 고문이 애써 외면할 상황이 아니다. 두 사람이 물러설 생각 없이 마주 달리는 신경전의 결말이 낭떠러지라면 이제 핸들을 돌려야 할 때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미국 반도체 업체 인텔의 최근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 두려운 마음마저 든다. 경영난을 겪고 있는 인텔이 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구조신호(SOS)를 보내는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56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며 한때 '반도체 제국'으로 불리던 인텔로서는 치욕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팻 겔싱어(Pat Gelsinger) 인텔 CEO(최고경영자)는 최근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을 만나 미국 기업이 과도하게 대만 TSMC에 의존하고 있다며 이를 해소할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했다. TSMC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로 엔비디아, 애플, AMD, 구글, 아마존 등 미국 대표 기업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자본주의 본고장 미국에서 특정 기업이 정부에 시장개입을 요청해 다른 기업 고객을 빼앗으려는 것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진풍경이다. 이와 함께 인텔은 적자를 기록하는 파운드리 사업부를 분사하기로 하는 등 군살 도려내기에 나섰다. 인텔의 이러한 행보는 생존을 위한 승부수로 풀이된다. 인텔은 잇따른 실적 부진으로 최근 주가가 연초 대비 60% 가까이 폭락해 한때 다우지수 퇴출설(說)이 나올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했던 인텔은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미국 정부도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인텔이 위기에 빠지면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하는 반도체 국산화 전략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텔이 거머쥔 처참한 성적표는 어떻게 보면 이미 오래전 예견됐던 일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라는 로고처럼 인텔은 한 때 글로벌 PC CPU(중앙처리장치) 시장에서 8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보유한 ‘넘사벽’ 이었다. 그러나 인공지능(AI)시대가 활짝 열리면서 인텔 핵심 영역인 CPU가 엔비디아와 AMD 등 미국 그래픽처리장치(GPU)업체에 밀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인텔이 새롭게 추진하는 파운드리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AI에 절대적인 GPU가 눈길을 끌면서 인텔 CPU는 이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인텔이 휘청거리는 신세가 된 것은 비단 AI 흐름뿐만이 아니다. 인텔은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 함정에 빠졌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기존 인기 제품에만 집착하는 상품 물신주의(Commodity Fetishism)는 기업을 몰락으로 이끄는 ‘치명적인 처방전’이다. 인텔은 기업이 한번 일정한 경로에 들어가면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로의존성의 대표적 희생양인 셈이다. GPU가 미래 추세라는 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인텔은 마치 ‘사골국물’을 우려내듯 CPU에만 의존했다. 이와 함께 반도체를 위탁받아 생산하는 파운드리가 반도체 업계 새로운 먹거리라는 점에 눈을 돌리지 않은 점도 꼽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인텔은 AI시대 흐름에 뒤로 밀려나는 CPU에만 주력했고 새로운 기술에 대처하지 못하는 우(愚)를 범한 것이다. 인텔의 반도체 왕국이라는 간판이 빛바래진 또 다른 이유는 '빈 카운터스(Bean Counters)'의 함정이다. 빈 카운터스는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챙기는 재무-회계 전문가를 꼽는다. 재무통(通)이 CEO(최고경영자) 등 기업을 운영하면 투자나 돈 쓰는 일에 주저하기 마련이다. 2013년 인텔 사령탑이 된 재무통 CEO 브라이언 크러재니치는 엔지니어에게 원가 절감과 단기 성과를 주문했다. 또한 PC 산업 성장이 주춤해진 2016년 인텔은 1만2000여명을 감원했다. 인텔에서 짐보따리를 싼 기술자들은 경쟁업체로 둥지를 옮기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처럼 첨단기술 개발보다는 '콩 숫자만을 세는' 사업 효율화만 강조하는 회사 분위기는 밥 스완 최고재무책임자(CFO) 출신 CEO 재임 기간인 2020년까지 이어졌다. 결국 인텔은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셈이다. 테크기업이 기술개발이 아닌 수익 중심 경영정책에 매몰되면 회사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치명적인 칵테일(lethal cocktail)'을 마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쟁업체가 첨단기술로 세계 무대에 앞다퉈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가운데 인텔은 경로의존성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기술혁신의 길을 가지 못했다. 몇 년 전 타계한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미국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저서 '혁신자의 딜레마( The Innovator’s Dilemma)'에서 세계적 우량기업이 시장지배력을 잃는 원인을 분석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글로벌 기업이 혁신자의 딜레마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달콤한 관성'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게임의 룰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일궈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초접촉사회를 맞아 시장과 고객 변화에 둔감하고 디지털 기술의 혁명적 변화를 외면하는 '나홀로 갈라파고스' 프레임에 함몰되면 AI와 로봇, 사물인터넷(IoT)으로 요약되는 제4차 산업혁명의 높은 파도에 휩쓸려 좌초할 수밖에 없다. 벼랑 끝에 몰린 회사 상황에 겔싱어 CEO는 회사 경쟁력을 되살리기 위해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 기업들도 인텔 사례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볼 처지가 아니다. 인텔 사례는 한때 시장을 지배하던 기업도 혁신을 게을리하고 시장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추락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과거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혁신과 변화를 추구해야 급변하는 기술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얘기다. 1등이라는 자리에 취하고 안주해 외부 도전에 둔감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졸면 죽는다'는 정보통신기술(ICT) 시장의 경구(驚句)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위기'를 강조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기술 초격차를 외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문득 그리워진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인류 과학사를 유심히 살펴보면 혜성처럼 나타나 한때 폭발적 인기를 누리지만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하게 사라지는 사례가 한두 개가 아니다. 세그웨이(Segway)가 대표적이다. 미국인 발명가 딘 카멘(Dean Kamen)이 2001년 개발한 1인용 스쿠터 세그웨이는 혁신적인 개인용 모빌리티(이동수단)로 등장한 후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그웨이는 오뚝이의 균형 메커니즘을 활용해 탑승자가 서서 타도 넘어지지 않도록 제작했다. 게다가 전기 충전 배터리로 움직이는 이 모빌리티는 최고 시속 19㎞로 24㎞까지 공해를 유발하지 않고 달렸다. 이 기술력에 당시 혁신 수용자는 환호했다. 물이 넘치는 욕조에서 불규칙한 물체 부피를 측정하는 방법을 발견한 후 유레카(Eureka:알아냈어)를 외친 고대 그리스 과학자 아르키메데스처럼 혁신 옹호자는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나. 세그웨이는 모빌리티 혁신의 상징으로 떠올랐지만 1대당 최대 1만달러(약 1330만원)이 넘어 ‘가성비’가 나쁜데다 전동 스쿠터와 전동 킥보드 등 대체재의 등장으로 시나브로 잊혀져 갔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컴팩트디스크(CD) 이후 선보인 레이저디스크는 뛰어난 화질을 자랑했지만 가격이 비싸고 사용하는 데 불편해 소비자들이 외면했다. 팜PDA(개인용정보기기)도 예외는 아니다. 팜PDA는 혁신적 개인정보 관리기기로 눈길을 끌었지만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장에서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세그웨이, 레이저디스크, 팜PDA는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의 대표적인 희생양이다. 미국 실리콘밸리 컨설턴트로 활동한 제프리 무어(Geoffrey A. Moore)가 처음 사용한 캐즘 이론은 혁신 기술이나 첨단제품이 피할 수 없는 혹독한 통과의례다. 제프리 무어에 따르면 혁신 제품은 등장 후 기술력이 검증되지 않아 처음에는 혁신성을 중시하는 얼리어답터(2.5%)가 초기 수요자 역할을 한다. 이후 혁신 제품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초기 수용자(13.5%)가 대부분인 주류시장으로 사업 영토를 넓힌다. 문제는 첨단기술이 이때 초기시장과 주류시장 사이에서 매출이 급감하거나 정체되는 캐즘을 겪는다. 제품이 보편화할 수 있는 최대 고비를 맞은 셈이다. 첨단기술이 캐즘의 높은 장벽을 뛰어넘는 데 성공하면 기술 혁신성이 검증돼 전기(前期) 다수 수용자(34%)와 후기 다수 수용자(34%)가 제품을 사는 소비 단계로 이어진다. 나머지 16%는 다른 이들의 소비성향을 살펴본 후 마지못해 제품을 구입하는 이른바 지각 수용자다. 이처럼 첨단 상품이 소비자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면 넓고 깊은 ‘캐즘의 강’을 건너야 한다. 문제는 캐즘을 이겨내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전기자동차도 캐즘이라는 질곡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전기차는 시장 도입 초기에 비싼 가격, 긴 충전시간, 짧은 주행거리, 충전소 부족이라는 ‘주홍글씨’가 늘 따라다녔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벤츠코리아, 테슬라 등 수입 완성차 업체의 잇따른 화재로 전기차 업계는 캐즘에 이어 화재 포비아(Phobia·공포증)로 이어져 소비자들이 외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제는 심리다. 공포를 지나치게 부추기는 ‘오버킬(Overkill:과잉 대응)’은 신기술 발전을 저해한다. 첨단기술이 소비자 품에 안기는 것을 차단해 산업의 숨통을 막기 때문이다. 지나친 불안 심리가 거인처럼 커지는 것을 막으려면 팩트를 체크하는 게 급선무다. 우선 전기차 화재율부터 짚고 넘어가자. 최근 전기차 화재가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차량 화재는 전기차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소방청에 따르면 2021∼2023년 내연기관차와 전기차 화재는 각각 1만933건, 139건으로 내연기관 차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특히 지난해만 해도 차량 1만 대당 화재 건수는 내연기관차가 1.9건, 전기차는 1.3건으로 내연기관차 화재 발생률이 전기차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 사례도 같은 추세다. 미국 교통안전위원회(NTSB)와 미국교통통계국(BTS)이 분석한 지난해 차종별 화재 발생률을 보면 하이브리드차가 1만대당 347.45대로 가장 높고 내연기관차가 1만대당 152.99대로 뒤를 이었다. 전기차는 1만대당 2.51대로 가장 낮았다. 이러한 팩트를 놓고 보면 전기차 화재 발생률이 가장 낮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최근 잇따른 화재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역부족이지만 명백한 사실을 손으로 가릴 수는 없다. 전기차가 화석연료 기반인 내연기관차를 대체하는 친환경 미래형 차량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미국 석유기업 엑손모빌을 비롯해 쉘, BP 등 이른바 ‘석유 공룡’들이 친환경 차량의 엄청난 잠재력에 매료돼 전기차 충전 인프라 확충에 나서는 모습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100여 년간 내연기관차의 '덕'을 톡톡히 누린 석유 공룡들의 ‘배반‘은 전기차 생태계가 미래 모빌리티 주인공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은 아득해 보이지만 전기차가 캐즘이라는 관문을 지나 티핑포인트(Tipping point: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변곡점)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를 위해 정부와 기업이 수레의 두 바퀴처럼 같이 협력해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정부는 전기차 산업을 적극 육성하기 위해 보조금 지급과 충전소 확충 등 인프라 지원책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에 대해 자동차 업계는 일반 내연기관차에 비해 비싼 전기차 가격을 내리고 차량 화재 위험이 거의 없는 전고체 배터리 등 첨단제품을 서둘러 사용하는 기술혁신을 이뤄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손잡고 나가면 전기차 업계는 티핑포인트에 이어 S-커브(성장률 상승곡선)를 그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라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벤츠자동차와 테슬라가 쏘아올린 ‘전기차 포비아’는 이제 ‘숨고르기’에 들어가야 한다. 차세대 기술이 일반인에게 인정받고 자리를 잡으려면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이다.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Supply creates its own demand)고 설파한 프랑스 고전주의 경제학자 장 바티스트 세(Jean-Baptiste Say)의 주장처럼 정부와 기업 노력에 따라 전기차 대중화가 얼마든지 앞당겨질 수 있다. 친환경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화두로 등장한 현실에서 이를 꽃피울 전기차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판결이 난 지 2주가 지났지만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항소심 판결을 받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얘기다. 항소심은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재산분할로 1조3808억원, 위자료로 2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는 그동안 국내 이혼 소송에서 나왔던 재산분할과 비교하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두 사람 이혼이 최 회장 불륜과 이에 따른 노 관장의 정신적 고통을 법원이 고려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법은 '정의'를 추구하고 그 시대 사회나 국가 이념에 부합하는 '합목적성'이 있어야 하며 사회 여러 사람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법적 안정성'을 갖춰야 한다는 기본 취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산분할 내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 없지 않다. 2심 법원이 판결한 재산분할액 1조3808억원이 1심에 비해 너무 많이 늘어났다. 1심에서 판결한 재산분할액 665억원과 비교하면 무려 21배나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놀라운 판결은 1심 법원 판단을 송두리째 무시한 결정이 아닌가 싶다. 이번 재산분할액은 인구 약 40만 명인 세종특별자치시의 올 한 해 예산(1조5202억원)에 버금가는 엄청난 돈이다. 그러다보니 노 관장에 대한 보상금으로 지나치게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물론 그동안 노 관장의 노고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199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게리 베커(Gary Becker) 고(故)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경제학 분야에서 이른바 '가정생산(home production)' 개념을 도입한 인물이다. 이는 가계 부문이 비(非)시장 부문에서 생산활동에 일익을 담당한다는 얘기다. 기존 경제학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가사노동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베커는 가정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한 셈이다. 노 관장이 그동안 묵묵히 가정생산의 핵심 역할을 했지만 그렇다고 노 관장에 대한 보상이 세종시 한 해 예산과 비슷하다는 판결은 이해하기 어렵다. 2심 판결에서 불거진 노소영 관장 부친 故 노태우 전(前) 대통령의 300억원 비자금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이 과연 정당한 방법으로 마련한 것인 지에 대해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비자금이 당시 기업들로부터 받은 뇌물의 결과물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점도 이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러한 지적이 사실이라면 기업으로부터 받은 부정한 돈을 노 관장이 고스란히 물려받는 게 과연 정의로운 결정인 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비자금을 지금이라도 각 기업에 돌려주는 게 합리적인 수순이 아닐까 싶다. 이와 함께 비자금이 SK그룹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는 주장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SK그룹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최 회장이 고도의 전문적 판단과 경영활동을 펼쳤고 이를 토대로 임직원이 국내는 물론 국제무대에서 피땀 흘린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SK그룹 계열사가 성장할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본 주주들의 기여도 간과해선 안된다. 이밖에 2심 판결은 최태원 회장 일가 기여분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최 회장 형제 등 직계 가족이 그동안 기업 경영에 직접 참여하고 일부는 상속 지분을 포기해 SK가 지금의 대기업으로 우뚝섰다. 그러나 2심 판결은 노 관장에 대한 보상에 무게 중심을 두고 최 회장 직계 가족의 헌신과 노력은 등한시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 회장 측이 항소심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상고해 이제 공은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대법원 판결은 국내 재계 순위 2위 기업 SK그룹의 명운을 가르는 중대 국면이 될 것이다. 만약 대법원이 항소심과 엇비슷한 결론을 내린다면 최 회장 지배력이 크게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의 그룹 지배력이 타격을 입으면 먹잇감을 찾는 헤지펀드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룹 경영권을 뒤흔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외국계 자산운용사 소버린이 2003년 SK 지분을 14.99% 확보한 뒤 최 회장 퇴진을 요구한 이른바 '소버린 사태'가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무늬만 그럴듯하게 자산운용사라고 하지만 소버린처럼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는 국내기업 경영권이 흔들릴 때 이를 표적 삼아 거액의 단기 차익을 챙기고 떠나기 십상이다. 대머리 독수리(벌처:vulture)처럼 기업 약점을 인정사정없이 파고들어 이익을 내는 벌처펀드의 교활함과 잔혹함에 SK가 또다시 희생양이 될 수는 없다. 노 관장이 남편에 대한 배신감이 크겠지만 그렇다고 한국경제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한 SK그룹 경영이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SK가 경영권 위기 없이 현재 논란을 딛고 세계 무대에서 다시 맹활약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 부부간 갈등이 치열한 글로벌 경제전쟁에서 한국경제 호(號)를 이끄는 대기업을 요동치게 하는 빌미가 되어서는 안된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추운 겨울 아침에 샤워실에서 더운물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찬물이 나온다. 조금만 기다리면 더운물이 나오는데 이를 참지 못해 더운물이 나오도록 수도꼭지를 끝까지 튼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무 뜨거운 물이 쏟아져 손등을 덴다. 이에 놀라 수도꼭지를 찬물 쪽으로 끝까지 돌리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뿜어져 나온다. 결국 샤워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거린다.' 이처럼 찬물과 더운물을 오가며 헤매는 상황을 경제학에서 '샤워실의 바보(Fool in the shower)'라고 부른다.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1968년 미국경제학회(the American Economic Association) 회장 취임 연설문에서 처음 사용한 샤워실의 바보는 '정부의 널뛰기 식 대응'을 힐난한다. 정부가 정책을 추진할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기다리며 미세조정을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즉흥적으로 조치해 이리저리 오가면 뜨거운 물에 데거나 아예 샤워하지 못하는 국면을 맞는다. 1976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프리드먼은 조금만 기다리면 '시장(market)'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알아서 더운물이 나오도록 해줄 텐데 정부가 개입해 정책을 자주 바꿔 오히려 경제를 망친다고 지적했다. 샤워실의 바보는 56년이 지난 지금 '메리 고 라운드(Merry-Go-Round:회전목마)'처럼 잊을만하면 등장한다. 최근 해외 직접구매(직구) 금지를 둘러싼 해프닝이 대표적인 예다. 정부는 국가통합인증마크(KC)가 없는 80개 품목의 해외직구를 금지하겠다고 발표한 지 사흘 만에 없던 일로 했다. 소비자들이 정부 정책에 거세게 반발한 데다 집권 여당까지 비판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위해성이 확인된 제품만 해외직구를 제한하겠다는 방침을 내놔 민심을 달래려 했지만 설익은 정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전자상거래 활성화로 소비 국경이 사라진 작금의 현실과 동떨어진 '21세기판 쇄국주의' 정책을 펼친다는 지적이 나와도 할 말이 없다. 현 정부의 샤워실의 바보는 이것만이 아니다. 'R&D(연구개발) 카르텔'을 거론하며 연구비를 줄이려다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래 먹거리를 발굴해야 할 과학계 연구 활동을 카르텔 공범으로 매도하면 과학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연구원 사기는 땅에 떨어진다. 또한 과학자들이 예산 압박에 못 이겨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장기·도전적 과제는 외면하고 단기성과에만 연연하는 결과를 낳는다. 카르텔 논란이 국내 과학 성장동력을 훼손하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愚)를 범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던 것도 이러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비난이 일자 정부가 내년 R&D 예산을 역대 최대로 늘리겠다고 밝힌 데 이어 예산에 재정을 투입하는 것이 적정한 지를 따지는 예비타당성조사까지 모두 없애겠다고 하니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취학연령을 만 5세로 앞당기려 하다가 학부모 반발에 흐지부지됐고 연장 근로시간 한도를 주 단위에서 월 단위로 변경하는 방안을 발표한 후 비판하는 목소리에 취소하는 등 정부 정책이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정부의 해외직구 조치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 등 이른바 'C커머스(중국 e커머스)'의 해외직구가 급증하면서 이에 따른 국민 건강과 안전을 우려하는 정부의 고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가 판매하는 장신구에서 최근 발암 유발 가능 물질인 중금속(납·카드뮴)이 국내 안전 기준치를 훨씬 뛰어넘은 수준으로 검출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1994~2011년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이들의 폐에서 섬유화 증세가 일어나 1700명이 사망하고 5900여 명이 피해당한 초유의 참사만 봐도 소비자에 위협을 주는 제품을 막기 위한 정부 조치는 마땅히 필요하다. 그렇다고 정부가 충분한 설명 없이 해외직구 금지라는 철퇴를 가하는 것은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하는 오버킬(Overkill:과잉 대응)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폭증하는 해외직구 상품에 소비자들이 독성·유해 물질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면 이에 따른 안전성 검증을 손 놓아서는 안 될 일이다. 안전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직구 상품 반입을 막는 검증 절차와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정부가 얼마 전 치러진 4·10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을 잡기 위한 고민을 내비치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 정부는 '정책 샤워실의 바보'에서 벗어나 탁상행정이 아닌 현장에 바탕을 둔 정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이것만이 정부 정책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소비자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해법이라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화불단행(禍不單行:불행은 잇따라 일어난다)'이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업황 부진이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의 끝을 향하고 있는데 노사 갈등이 불거졌다. 삼성전자 얘기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분기 영업이익이 2022년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95% 급감한 6400억원이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았다. 이러한 결과는 글로벌 반도체 수요 급감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지만 위안을 삼기에는 너무 엄혹했다. 그나마 삼성전자가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을 6조원대로 끌어올린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불황에서 벗어나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가운데 노사 분규의 암운이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이 삼성전자 창사 이래 처음으로 쟁위 행위에 나섰다. 평균 1억2000만원대 고액 연봉을 챙기는 전삼노가 임금이 적다며 얼마 전 1차 집회에 이어 오는 5월 24일 2차 집회도 추진할 예정이라니 걱정이 앞선다. GM과 모토로라가 문득 떠오른다. 2000년대 세계 자동차시장을 호령했던 미국 자동차의 대명사 GM은 2009년 6월 1일 파산보호 신청(일종의 법정관리)을 하는 초라한 신세가 됐다. GM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된 배경에는 차량 품질 저하도 있었지만 미국 내 최강성 ‘미국자동차노조(UAW)’의 횡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회사 경영 상태를 무시한 강성 노조 UAW의 터무니 없는 복지 요구에 굴복한 GM은 추풍낙엽처럼 몰락의 길을 걸었다. 모토로라의 조락(凋落)도 삼성전자로서는 곱씹어야 하는 대목이다. 한때 ‘세계 휴대전화 명가(名家)’였던 모토로라는 레이저폰으로 세계를 향해 용트림하며 힘차게 포효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모토로라는 그 이후 변변한 후속작이 없어 이제는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을 잃은 지 오래다. 노키아도 예외는 아니다. 노키아는 1998년 세계 휴대전화 시장점유율에서 처음으로 1위에 오른 후 2010년까지 10여 년간 선두 자리를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은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의 왕(王)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노키아는 그 이후 스마트폰 시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피닉스(불사조)가 아닌 한 마리의 새로 추락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기존 인기 제품에만 집착하는 상품 물신주의(Commodity Fetishism)는 기업을 몰락으로 이끄는 ‘치명적인 처방전’이다. GM, 모토로라, 노키아는 기업이 한번 일정한 경로에 들어가면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의 대표적인 희생양이다. 글로벌 기업이 첨단기술로 세계 무대에 앞다퉈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가운데 이들 3개 업체는 극심한 노사 분규와 기술 혁신 부진에도 경로의존성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세계 시장에서 밀려났다. 기술 기업이 세계를 매료시킬 기술력 없이 글로벌 경연장에 등장하는 것은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겁 없이 맞서는 '당랑거철(螳螂拒轍)'이나 다름없다. 그 결과는 처절한 죽음뿐이다. 세계 1위라는 ‘승자의 오만’에 흠뻑 빠진 GM, 모토로라, 노키아에 기술혁신은 그저 빛바랜 휴지 조각이었다. 삼성전자 노사는 GM, 모토로라, 노키아 등의 실패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몇 년 전 타계한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미국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저서 ‘혁신자의 딜레마( The Innovator’s Dilemma)‘에서 세계적 우량기업이 시장지배력을 잃는 원인을 분석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글로벌 기업이 혁신자의 딜레마 희생이 되지 않으려면 ‘달콤한 관성’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게임의 룰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일궈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초접촉사회를 맞아 시장과 고객 변화에 둔감하고 디지털 기술의 혁명적 변화를 외면하는 ‘나홀로 갈라파고스’ 프레임에 함몰되면 인공지능(AI)과 로봇, 사물인터넷(IoT)으로 요약되는 제4차산업혁명의 높은 파도에 휩쓸려 좌초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영국의 전설적 록밴드 비틀즈의 노래 ‘The long and winding road’처럼 삼성전자 앞에 놓인 길은 멀고 험하기만 하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미국 애플은 물론 중국 샤오미, 오포 등과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아야 한다. 반도체 시장도 안심할 수 없다. 대만 TSMC가 ‘삼성전자 타도’를 외치며 세계 무대에서 광폭 행보를 이어가는 가운데 미국과 일본도 반도체 최강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야심 찬 사업 청사진을 내놓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 아닌가. 이처럼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전장(戰場)에서 삼성전자가 기술혁신에 주춤하거나 노사 분규에 휩싸이면 회사 경쟁력은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노사분규가 금기시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조금 얘기가 다르다.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수출의 25%, 임직원 250만 명을 거느린 초일류기업이라는 표면적인 이유가 아니다. 이재용 회장에 대한 사법 리스크가 아직 남아 있는 가운데 파업이 일어나면 생산 차질과 이로 인한 글로벌 경쟁력 약화라는 부메랑을 맞기 때문이다. 갈수록 치열해진 세계 무대에서 오너 리스크와 노조 파업이 섞이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칵테일이다. 1등이라는 자리에 취하고 안주해 외부 도전에 둔감하고 파업 등 내부 갈등마저 빚어진다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졸면 죽는다’는 정보통신기술(ICT) 시장의 경구(驚句)처럼 글로벌 경쟁에서 한순간 방심하면 끝장이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지난달 19일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촉발된 '의정(醫政) 갈등'이 한 달 넘도록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부는 대학별 의대 정원을 발표하며 '2000명 증원'에 쐐기를 박고 의대 교수들은 이에 반발해 집단사직과 근무 축소에 돌입하기로 했다. 양측이 협상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면 둘 다 "잃을 것이 없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1955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 ‘이유 없는 반항’ (Rebel Without A Cause)이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이 영화에 등장한 주인공 짐과 버즈는 누가 더 담력이 큰지를 겨루기 위해 각자의 차를 타고 절벽을 향해 돌진한 후 먼저 핸들을 꺾는 쪽이 지는 경기를 펼친다. 이른바 '치킨 게임(Chicken game)'이다. 치킨 게임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 아니다. ‘모 아니면 도’다. 양측이 ‘신뢰의 비대칭성’ 때문에 공생이 아닌 공멸이라는 역(逆)선택(adverse selection)의 길로 갈 수도 있다. 의대생 정원 문제를 놓고 의사들이 병원을 떠나 거리에서 시위하는 국가는 아마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가 조롱할 만한 해외토픽감이 아니고 무엇인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최우선 하겠다’는 고결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이들에게 한낱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의료계의 이러한 이기적인 행태에 정부가 1998년 이후 26년 만에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기로 확정한 것은 박수를 칠만 한 일이다. 정부 결정에 의사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넌 것처럼 윽박지르고 있지만 이들의 행태는 당분간 질타의 대상이 될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면 우리나라 의료계 집단 사직처럼 환자 목숨보다 자신의 이익을 더 챙기려는 의료계 행태가 눈에 띈다. 미국의사협회(AMA)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공공 보건의료 향상과 의학 발전'이라는 고상한 목표를 세운 AMA는 의료 면허 발급을 제한해 의료시장에 진입하려는 경쟁자를 막는 행태를 보여 비난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1930년대 초반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뒤 독일 국적 유대계 의사들이 대거 미국으로 탈출하자 AMA는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의대만 졸업하면 다른 조건 없이 의사 면허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AMA는 갑자기 '미국 시민권'을 필수 조건으로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난민 자격으로 입국한 유대계 독일인 의사의 미국 진료 활동을 막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독일 의학이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 의사들은 환자 보호가 아닌 자신 이익 수호에 나선 셈이다. AMA는 1929년 시작된 세계 대공황 시절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밥그릇 챙기기에 나섰다. 당시 미국 정부가 의사 숫자를 늘리려 하자 AMA는 "의사 정원이 늘어 의사 소득이 떨어지면 비윤리적인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라며 제동을 걸었다. 이는 의료시장 제한을 통해 경쟁자를 막겠다는 생각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죽했으면 시카고학파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 당시 상황을 지켜보며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에서 AMA를 ‘미국에서 가장 철통같은 노조(the strongest trade union in the United States)’라고 지목했을까. 프리드먼은 까다로운 면허 규정, 신규 의사 수 제한 등 미국 의료업계 카르텔이 의료 비용을 올리고 의료의 질을 떨어뜨릴 것(cartel that would raise health care costs and diminish quality)이라고 경고했다. 프리드먼이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자리에서 "의사 수 증가와 비윤리적 의료행위 증가의 상관관계를 입증할 과학적 증거가 있다면 보여달라"고 말한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현실로 되돌아오니 AMA 악령이 한국 의료 현장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데자뷔(dejavu·기시감)를 떨칠 수 없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경구(警句)가 자못 뼈저리게 다가온다. 의료계 사직 사태는 여러 관점에서 국민적 동의를 얻는 데 실패했다. 우선 의대생 2000명이 증원돼도 수련의 과정 등을 거쳐 의사가 되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일이다. 이번에 증원된 인력이 지역 의사로 양성되는 효과가 10년 후에 나타나는데 의료계가 증원 숫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의사 숫자 증가에 따른 이익 침해를 거부하려는 행태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의료계는 의사 숫자가 늘어나면 의료의 질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제학의 수요와 공급 원리 관점에서 보면 다른 얘기다. 의사가 늘어나면 의료 경쟁도 함께 늘어 의료의 질은 더 향상되기 마련이다. TV 등 방송이나 신문, 인터넷에서 보도되는 각종 의료사고도 줄어들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의사 정원 확대로 의대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의대 교육 환경이 열악해지는 것은 정부 등 교육부 당국과 대학이 협의해 해결하면 된다. 이쯤에서 모두가 솔직해지자. 의사들은 이른바 ‘라이선싱 경제학’의 최대 수혜자였다. 이들은 의사라는 정부 면허제도에 힘입어 지난 26년간 의사 숫자를 늘리지 않고 그들만의 리그를 즐기지 않았는가.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의료계는 ‘규제의 포획이론(Capture Theory)’의 혜택도 마음껏 누렸다. 의료라는 전문성을 무기로 정부에 그럴듯한 논리와 주장을 펼쳤고 의사 전문성을 따라가지 못한 정부 관리들은 의료계 요구에 맞는 규제를 지금껏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이는 의료계 현안을 해결한다는 표면적인 측면이 있지만 의사들의 카르텔을 넘을 수 없는 철옹성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결국 의료계의 최근 파행은 자신 이익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지대((地代)추구(Rent-Seeking)’ 행태나 다름없다. 자신 이익을 지키기 위해 비생산적인 활동을 펼치는 지대추구행위는 자원배분을 왜곡해 경제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이에 따른 시장왜곡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대추구이론을 내놓은 미국 경제학자 고든 털록(Gordon Tullock)이 의사처럼 배타적 면허증을 가진 이들이 각종 규제를 통해 지대를 더 많이 챙기고 이해관계가 조금이라도 침해되는 것을 막으려 사직하는 한국 모습을 지켜봤다면 자신 이론이 맞았다며 무릎을 탁 쳤을지도 모른다. 1998년을 마지막으로 26년간 의대 증원·신설이 없었지만 그사이 인구 고령화에 따른 의료 수요는 급증하는 추세다. 이에 따라 그동안 한 번도 의대 정원을 늘리지 못해 의사만의 카르텔을 만든 현실이 이제는 혁파되어야 한다. 사람 목숨이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돈이 안된다며 위급 환자를 외면하는 ‘앰뷸런스 뺑뻉이’라는 한심한 작태가 이제는 사라질 때가 됐다. 일부 의사들의 이번 행태는 결국 ‘강소 전문병원’ 시대를 서둘러 앞당겨야 한다는 숙제를 남겼다. 또한 이른바 '빅5'로 불리는 서울 시내 상급종합병원 5곳(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이 전체 의사 인력의 34∼46%를 전공의로 채우는 과도한 의존도를 낮추고 중증 환자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는 명제를 떠안았다. 이를 통해 상급종합병원을 중증·응급환자 중심으로 개편하는 등 국내 의료체계 '정상화'가 서둘러 마련되어야 한다. '정부는 의사를 이기지 못한다'는 오만방자한 발언을 한 의사가 등장한 게 오늘날 우리 의료계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러나 의료계는 국민과 국가를 이기지 못한다. 국민 90% 이상이 현재 의사 집단행동을 맹비난하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들만의 오류와 착각으로 구성된 확증편향에서 벗어나 이제 다시 병원으로, 수술대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들이 속한 곳은 거리 시위 행렬이 아닌 병원이라는 점도 이제 깨닫기를 바란다.
[뉴스투데이=김민구 부국장]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이 쏘아 올린 ‘인구감소 해법’이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그 여운은 가시지 않고 있다. 이중근 회장은 2021년 이후 출산한 직원 자녀 1명당 현금 1억 원을 주고 셋째부터 영구임대주택을 제공하는 등 파격적인 종업원 복지 프로그램을 지난 2월 5일 내놔 눈길을 끌었다. 경기침체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기업이 늘고 있는 가운데 이 회장의 결심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기에 충분하다. 이 회장의 경영 철학은 ‘기업인은 이기적’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대기업 총수가 수익 극대화라는 이기심만 추구하지 않고 사원 복리후생에 앞장서는 이타심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게 아니고 무엇인가. 인간은 모두 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이기심은 나쁘고 이타심은 좋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의 한 구절을 읽으면 생각이 달라진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다(It is not from the benevolence of the butcher, the brewer, or the baker, that we expect our dinner, but from their regard to their own interest).” 스미스는 이기심이 개인 이익은 물론 사회 전체 이익을 촉진하는 영양제라고 설파했다. 그는 또 경제 주체가 각각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제활동을 하면 자신은 물론 남과 사회 전체를 잘 살게 해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기업인의 이기심을 극악한 행태라고 폄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각설하고 이 회장이 보여준 이타심은 대기업에 대한 편견을 깨는 돌을 던졌다. 그렇다고 이 회장의 이번 결정에 박수만 치고 있을 수는 없다. 기업가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도 돋보이지만 국내 인구감소 추세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 인구감소에 대한 우려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국내 지난해 4분기 합계출산율은 0.65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찍었다. 합계출산율은 한 여자가 가임기간(15~49세)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다. 이는 국내 가임여성이 평생 낳을 신생아가 평균 한 명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합계출산율이 1.00명에 못 미치는 국가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 하니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다 보니 한국의 인구감소는 이제 세계의 걱정거리로 전락했다. 오죽했으면 조앤 윌리엄스 미국 캘리포니아 법과대학 명예교수가 얼마 전 한국 출산율 현황에 ‘한국 완전히 망했네요(Korea is so screwed)’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을까. 이뿐만이 아니다. 현재 심각한 저출산 현상이 이어지면 한국은 오는 2750년 국가가 사라질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한 세계적인 인구학자 데이비드 콜먼 영국 옥스퍼드대 명예교수의 지적도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미국 경제학자 해리 덴트(Harry S. Dent)는 ‘인구 절벽(The Demographic Cliff)’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인구와 나라의 흥망성쇠와의 상관관계를 설명했다. 인구절벽은 인구통계 그래프에서 마치 절벽처럼 급락하는 구간을 비유한 말이다. 인구가 감소하면 돈을 쓸 인구도, 일하는 인구도, 돈을 투자하는 인구도 없어 경제가 휘청이게 된다는 얘기다. 이는 현재 한국경제가 직면한 상황을 꼬집은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령사회가 돼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면 잠재성장률이 떨어져 세입이 줄고 복지지출 수요는 늘어나 재정건전성이 악화한다. 이웃 나라 일본도 인구감소 추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은 2010년을 기점으로 인구 하락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이 감소세를 방치하면 1억2000만명에 달하는 인구수가 2100년에는 5000만명 이하로 반 토막 날 것이라는 아찔한 관측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일본 경제가 1990년대 부동산 거품 붕괴로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데 이어 ‘잃어버린 40년’으로 향할 수도 있다는 경고음이 울리는 것도 고령화와 인구감소에 따른 경제활동인구 급감이라는 점을 지적한 셈이다. 이에 따라 고(故)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前) 일본 총리가 일본 인구를 오는 2050년까지 1억 명 수준으로 유지해 일본 경제 엔진이 멈추지 않도록 ‘인구 1억명 관리상’이라는 장관직을 신설했던 점은 박수 칠 만한 일이다. 범국가적 차원에서 인구감소를 막기 위한 총력전을 펼치는 일본 모습을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 정부 대책은 한가한 모습이다. 일본이 ‘인구 장관’직까지 신설해 인구감소에 대응하고 있지만 우리는 고작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마련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세계 꼴찌인 우리나라 출산율을 높이려면 ‘인구부(部)’ 혹은 ‘인구청(廳)’이 서둘러 신설돼야 한다. 제대로된 컨트롤 타워가 없으면 인구문제는 시한폭탄이 돼 우리에게 시계 초침처럼 째깍째깍 다가온다. 인구감소가 한국경제를 뒤흔드는 게임체인저로 등장한 가운데 이 회장과 같은 ‘출산 전도사’가 등장한 것은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 회장에 이어 출산을 적극 장려하는 제2, 제3의 혁신 기업가가 나올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권도 팔을 걷어붙여 적극 나서야 한다. 기업이 거액의 출산장려금을 지급하고 사내 탁아소를 의무화하는 등 ‘통 큰’ 조치를 계속 내놓을 수 있도록 정부와 여야가 규제 철폐와 법인세 인하 등 세제 지원이라는 파격적인 당근책을 내놔야 한다는 얘기다. 저출산은 국가적 위기이다. 출산율 제고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지만 대책안을 서둘러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 존망의 문제가 된 저출산을 놓고 정부와 여야가 한가롭게 정치적인 주판알을 튕길 때가 아니다. 방심하면 아찔한 천 길 ‘인구 낭떠러지’가 발아래 펼쳐지는 것은 한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