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을 이긴 연예인 (13)] 41세에 도전장 낸 열정맨 각오빠, 시련 딛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해 노래

염보연 기자 입력 : 2020.12.13 05:28 ㅣ 수정 : 2020.12.13 20:07

아버지는 가정 돌보지 않는 기타리스트,어머니는 파출부/친구집 차고에서 살면서 아버지 미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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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성공한 연예인은 고수익을 올리는 권력계층으로 굳어졌다. 유명대학 총장보다 인기 연예인의 발언이 갖는 사회적 파장이 훨씬 크다. 서울대 조사에 따르면 한국 청소년들은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통적 인기직업보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등을 희망직업으로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화려한 연예계의 이면에는 대부분의 경우 깊은 아픔이 숨어있다. 역경을 딛고 성공가도를 달리거나, 좌절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려고 전력투구하는 연예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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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빠[사진캡쳐=MBC]

 

[뉴스투데이=염보연 기자] 각오빠(41)는 ‘트로트의 민족’이 배출한 최고의 캐릭터다. 불꽃 같은 열정, 끼, 쾌활함, 근육으로 쪼개진 몸매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허리를 뒤로 꺾은 채 복근으로 버티거나 스쿼트를 하면서도 노래를 부르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격렬한 동작에도 흔들리지 않고 시원하게 뽑혀 나오는 노랫 소리가 마치 수 년 차 경력의 프로 가수를 보는 듯 하지만, 놀랍게도 이번 ‘트로트의 민족’이 첫 가수 도전이다.

 

그에게 노래는 곧 아버지였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 탓에 오래도록 자신의 끼를 외면했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의 빈 자리를 차지한 것은 터질 듯한 후회였다. 이제는 미움 대신 그리움으로 하늘에 닿기를 소망하며 노래를 부른다.

 

■ 가난한 유년기, 무책임한 '기타리스트' 아버지 보고 노래에 등 돌려

 

각오빠(본명 김현우)는 1980년 11월 25일 서울 흑석동에서 태어났다. 6살 위의 누나 아래 남동생으로 태어난 그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부잣집 친구네 개인 차고를 개조한 집에서 4인 가족이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기타리스트로 예술가적 기질이 충만한 사람이었지만 가정에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파출부 일로 어렵게 벌어온 돈을 도박으로 탕진했다. 계속 빚이 쌓이고 집이 어려워지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는 것, 하라는 것은 모두 반대로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기를 원했지만, 음악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씨름을 하면서 운동을 배웠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군대를 다녀왔다. 23살에 전역하자마자 향한 곳은 친척 중에서 가장 생활력이 강하고 인품이 좋은 이모부가 계시던 전주였다. 

 

이모부의 옷가게에서 일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본받고자 노력했다. 매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한 시간 동안 산을 타고, 신문을 보며 아침식사를 하는 이모부의 생활습관을 똑같이 따라했다. 산에서 만나는 어르신에게 인사하는 습관도 몸에 익혔다. 

 

그러자 친해진 어르신들이 옷가게 손님으로 찾아오면서 장사가 잘 되고, 내성적인 성격도 바뀌어 밝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그가 속한 지점이 전국 매출 1위를 달성하면서 자신감도 생겼다.

 

전주에서 2년간 자신감을 쌓고, 서울로 올라왔다. 고졸 학력으로 일자리를 얻느라 고생했지만, 종로의 한 학원에서 영업일을 하면서 우수한 실적으로 인정받았다. 직장에서 만난 신입 직원과 사이에 아이가 생겨 결혼도 했다. 

 

26살에 딸이 태어나 아버지가 됐다. 새 인생을 꿈꾸며 회사를 그만두고 이벤트 술집을 차렸다. 가장으로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겠다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딸이 불과 2살 때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면서 물거품이 됐다. 

 

■ 딸 위해 주말도 없이 일해…부모님 도움 받으며 다시 느낀 가족의 소중함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자신이 부족해 딸에게서 엄마를 없애버린 것 같아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모두 딸을 위해 살자. 엄마가 없어도 딸이 하고 싶은 일은 다 해줄 수 있는 아빠가 되자’고 결심했다.

 

도무지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술집 운영을 할 수가 없어서 회사로 돌아갔지만,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1년 정도 애를 쓰다가 부모님과 살림을 합쳤다.

 

그렇게 아이가 딸린 성인이 되어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됐다. 어머니께 딸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고, 아버지와도 가까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마추어 공연을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주말에 노는 시간이 아까워서 궁리하던 차에 이벤트 술집을 하던 경력을 살려 비보이 하는 친구들과 결혼식 행사를 뛰기 시작했다.  얼굴에 각이 져서 붙은 별명 ‘각수’에서 딴 ‘각사마’를 활동명으로 쓰면서 ‘쌍쌍패밀리’ 팀으로 활동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끼 덕분이었는지, 점점 부르는 곳이 많아졌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전국구를 누비며 300여 번의 공연을 하면서도 ‘나는 가수가 아니다. 아마추어 공연가일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 다이어트 재능기부 통해 눈 뜬 도전의 삶…헬스트레이너‧보디빌딩‧모델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동안 자기관리를 잊었다. 30살에 재생불량성빈혈 판정을 받고 덜컥했다. 어느새 몸무게는 110kg까지 찐 상태였다. 재생불량성빈혈은 혈액세포의 생산이 감소하면서 그에 따른 질환이 나타나는 병인데, 치료가 힘들다. 앞으로 임산부보다 혈소판 수치가 낮은 상태로 평생 살아야한다는 말을 듣고 후회가 막심했다.

 

반드시 살을 빼야겠다고 결심하고 곧바로 다이어트를 도와주는 재능기부 프로젝트에 신청했다. 기숙사에 들어가 술담배를 끊고 운동과 식이조절을 배웠다. 노력한 덕분에 체중도 80kg까지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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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빠 다이어트 전후 사진[사진캡쳐=인스타그램]

 

몸이 건강해지자 마음도 건강해지고, 운동과 건강의 소중함을 느꼈다. 자신이 운동으로 얻은 건강의 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하고 싶어졌다. 이때부터 운동을 가르쳐주는 재능기부를 시작했다. 도움을 받은 단체에서 1년 4개월간 운동기부를 하고, 그밖에도 토요일마다 남산에 나와 운동을 하는 ‘남산각’ 프로그램을 따로 운영했다. 아파트 헬스장에서 헬스 트레이너 일도 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보디빌딩, 모델 등의 분야에도 도전했다. 일반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2년 동안 50번 넘게 보디빌딩 대회를 출전했고, ‘월드스포츠탑모델쇼’에서 퍼포먼스 부문 1등, 스포츠모델 부문 2등을 차지하면서 이영범 디자이너의 눈에 들며 모델 일에도 발을 들였다. 특히 앙드레김 옴므 패션쇼에서 런웨이를 누비는 경험은 새 분야를 개척한 자신감을 채워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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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웨이에 선 각오빠[사진캡쳐=인스타그램]

 

■ 아버지 세상 떠나자 미움 대신 후회만... “좀 더 많은 이야기 나눴다면”

 

각오빠에게 아버지는 사랑하지만 가슴 한 구석에 응어리가 남은 상대였다. 그런데 2019년,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당뇨합병증과 흡연으로 인한 폐암이 원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생 미움을 품고 살았는데, 막상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버리니 후회가 밀려왔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부자간에 진솔한 대화 한 번 나눈 적이 없던 것이 기억났고, 못해드린 것만 생각이 났다. 

 

그러다가 아들이 가수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소망이 떠올랐다. 아들이 조금이라도 원하던 일을 한다면 하늘에서 기뻐하지 않을까? 어느새 그는 컴퓨터를 켜고 MBC ‘트로트의 민족’에 지원하고 있었다. 

 

41살에 가수로서 내민 첫 도전장이었다. 딸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막상 오디션장에 들어가니 잘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긴장이 됐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각오빠의 상징처럼 된 ‘동네 오빠’였다.

 

■ “‘동네 오빠’ 너무 잘 어울린다고 다들 제 곡인 줄…아니예요”

 

‘동네 오빠’는 원래 가수 영기의 곡으로 별로 유명하지 않은 노래였다. 각오빠가 이 노래와 만날 수 있던 것은 아파트 헬스장에서 만나 친해진 트로트 가수 하동근 덕분이었다. 트로트의 민족 예심에 도전한다는 말을 듣고 “형한테 진짜 딱 어울리는 노래가 있다”면서 이 곡을 추천했다. 

 

노래를 들은 각오빠는 운명적인 끌림을 느꼈다. 너무 신나고 좋고. 자신이 잘 살릴 수 있는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사위원들의 귀도 다르지 않았다. 각오빠는 ‘동네 오빠’는 1차, 2차, 3차 오디션을 모두 뚫고 MBC 1라운드에서 이 곡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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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캡쳐=MBC]

 

열정이 넘치는 표정 연기, 강렬하게 쏘아지는 첫 소절, 상체 노출에 온 몸을 뒤로 젖히는 화려한 퍼포먼스까지 첫 무대부터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트로트의 민족에 출연하면서 다양한 무대를 많이 남겼지만 특히 인상 깊은 무대는 3라운드 1대1 생존배틀에서 부른 ‘테스형’이었다. 비록 패배했지만 오디션에 출전한 이유였던 아버지를 위해 부른 무대였기 때문이다.

 

“제가 처음 퍼포먼스부터 구성, 줄거리, 직접 꾸몄어요. 11년차 프로 가수 박혜진 씨와 대결한 무대기도 했구요. 제가 마지막에 소크라테스로 실제 변신까지 했는데, 그게 트로트의 민족 분당 최고 시청률 기록을 세웠죠. 사실 어떻게 불렀는지도 기억이 잘 안나요. 그냥 아버지에게 전하듯이 불렀거든요. ‘아빠가 아들이 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음악을 내가 지금 하고 있어, 아빠’라고 인터뷰했던 게 가장 인상 깊어요” 

 

■ 자신만의 ‘트로츠’ 장르로 건강과 희망 전하는 것이 꿈

 

각오빠의 ‘트로트의 민족’은 4일 방영된 패자부활전 무대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의 도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스포츠와 트로트를 합친 ‘트로츠’라는 장르를 개발하고 싶어요. 각오빠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노래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건강함을 같이 선물해줄 수 있는 퍼포먼스가 있잖아요. 노래에는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밝은 에너지를 전달하는 노래에 운동을 가미해서 해피바이러스를 전달하는 것이 최종목표예요. 국민들에게 건강과 희망을 전달해줄 수 있는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연예기획사와 계약하고 바쁜 일정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 것 같기 때문이다. 

 

꿈도 소중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역시 가족이다. 중학생 딸과 친해지기 위해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 온갖 SNS를 섭렵한 그는 그곳에 도전의 기록과 함께 가족들과 쌓은 소중한 추억들을 남기고 있다.

 

“인생에서 앞으로 가족들과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사실 남은 수명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수로서 아주 유명해지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예전처럼 계속 도전하면서 살고 싶어요. 도전을 즐기던 삶에 ‘가수’라는 포인트가 더 생겨서 행복하고, 항상 도전하고 웃으면서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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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빠와 딸[사진제공=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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