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보연 기자 입력 : 2020.11.08 14:20 ㅣ 수정 : 2020.11.21 15:40
23세에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에서 소외돼/정의선의 포옹은 아픔 이겨낸 'K리그 레전드'에 대한 예우
[뉴스투데이=염보연 기자] “은퇴하는 날 우승컵까지 들어올리고, 생각했던 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돼 행복하다"
이동국(41)이 23년 프로 생활의 막을 내렸다. 지난 1일 이뤄진 그의 은퇴경기와 은퇴식은 8번의 K리그 우승을 함께한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과 팬들의 환호 속에서 이뤄졌다. 구단주인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이날 경기장에 직접 나와 이동국과 포옹했다. 젊은 시절 아픔을 이겨내고 불혹이 넘은 나이까지 그라운드를 누비며 숱한 기록을 세운 'K리그 레전드'에 대한 예우였다.
이동국[사진제공=연합뉴스]
이동국의 화려한 은퇴가 의미심장한 것은 젊은 시절 깊은 수렁에 빠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K리그 최고 수준의 공격수였지만 운이 좋지는 않았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월드컵이나 유럽 리그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모두의 축제였던 2002년 월드컵에는 홀로 쓰린 속을 달래야했다. 실패한 선수 취급을 받으며 자존심이 뭉개지기도 했다. 하지만 좌절하는 대신 아픔을 밑거름으로 삼아 끝없이 정진했고, '불굴의 커리어'를 이룩했다.
■ 프로 데뷔와 동시에 ‘최고 스타’ 됐지만…지나친 혹사로 무릎부상
이동국은 1979년생으로 경상북도 포항에서 태어났다. 초등학생 때 육상대회에 출전했다가 포항 스틸러스 유소년팀 이영환 감독의 눈에 띄었고, 팀의 후원을 받는 포항제철동초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1996년 MBC 전국고교축구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중‧고등학생 대회를 휩쓸며 ‘최고 유망주’로 관심을 모았다.
1998년 포항 스틸러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리그컵 대회에서 대활약을 하며 신인왕을 차지했다. 특히 1998 프랑스 월드컵 엔트리에 깜짝 포함되어 네덜란드전 후반에 교체출전했다. 국내 최연소 월드컵 출전 기록을 세웠고, 위협적인 중거리슛과 헤딩슛을 선보이면서 스타로 떠올랐다. 이때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사자 갈기와 닮아 ‘라이온 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높은 기대만큼 올림픽대표팀, 국가대표팀,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등 각종 대회가 열릴 때마다 이동국을 찾았다. 이것이 독이 됐다. 활약할수록 차출이 잦아졌고 결국 국가대표와 소속팀을 오가며 혹사에 시달리던 이동국은 20대가 되자마자 무릎 부상에 시달리게 됐다. 자연히 기량이 떨어졌고, 긴 슬럼프가 시작됐다.
[사진캡처=엠빅뉴스]
■ 2002년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던 국내 최고 공격수
2002년 한일월드컵은 대한민국에 잊을 수 없는 축제였다. 하지만 이동국에게는 가장 아픈 해였다. 우선, 월드컵 국가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동안 대회마다 국가대표로 나섰던 그가 정작 자국에서 열리는 첫 월드컵에 선택되지 못한 것은 충격이었다.
대한민국 대표팀이 4강 진출 신화를 쓰는 동안, 상심한 이동국은 술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고 월드컵 기간 내내 축구를 보지 않았다. 같은 해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도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면서 병역면제 특례도 받지 못했다.
광주 상무 불사조에서 뛰며 병역의무를 마친 뒤, 포항 스틸러스로 복귀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월드컵을 불과 두 달 앞두고 십자인대 부상을 당했다. 무릎 수술을 받게 됐고, 월드컵 출전은 또 좌절됐다.
십자인대 파열로 쓰러진 이동국[사진캡처=엠빅뉴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2년만에 월드컵 무대를 밟는데 성공했지만, 출전시간이 짧았던 데다가 16강 우루과이전에서 결정적인 동점골 기회를 날리면서 허무하게 끝났다.
이동국은 2017년 우즈베키스탄과의 러시아월드컵 최종예선을 마지막으로 월드컵과 아쉬운 인연을 마무리했다.
■ 독일 분데스리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뼈아픈 실패 / 무릎끓지 않고 'K리그의 전설'로 성장
무릎 부상 치료를 받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던 2000년, 이동국은 분데스리가의 몇몇 팀과 접촉했고, 그 중 베르더 브레멘에 6개월 단기 임대를 떠났다. 현지에서 ‘제2의 차범근’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받았지만,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병역문제와 월드컵 준비를 위해 포항 스틸러스로 복귀했다.
[사진캡처=엠빅뉴스]
독일 월드컵의 꿈을 무산시킨 부상에서 회복된 후, 2007년 미들즈브러에 입단하면서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 도전했다.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에 이은 역대 4번째 프리미어 리거가 됐지만, 29경기 출전 2골이라는 실망스런 기록을 남긴 채 1년 뒤 방출됐다. 영국 언론에서 최악의 외국인 선수 1위로 꼽히는 굴욕까지 당했다. 28살에 인생 최대의 치욕을 겪은 셈이다.
2008년 성남 일화 천마로 K리그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국내팬들조차 이동국을 ‘퇴물’이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팀에서 전력 외 판정까지 받으면서 밑바닥을 찍었다.
■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펼친 부활의 날갯짓…숱한 우승 기록 세워
이동국의 부활이 시작된 것은 2009년, 최강희 감독이 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북 현대 모터스로 데려오면서부터다.
최강희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 아래에서 팀 공격의 중심을 맡은 이동국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해 리그에서 20골을 터뜨리며 2009 K리그 득점왕과 MVP를 차지했으며, 전북 현대모터스는 K리그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동국이 뛰는 12년 동안 전북은 8번의 K리그 우승컵(2009, 2011, 2014, 2015, 2017, 2018, 2019, 2020)을 들었다. K리그 최다 우승 기록이다. 2016년에는 10년만에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이동국은 K리그 MVP를 4회(2009, 2011, 2014, 2015년)나 수상한 유일한 선수, K리그에서 신인상, MVP, 득점상, 도움상을 모두 차지한 유일한 선수, K리그 최다골 등 다양한 기록을 썼다.
서른 무렵 ‘퇴물’ 소리를 들었던 이동국은 마흔을 넘긴 나이에도 ‘펄펄’ 날았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연륜으로 팀의 정신적 지주로 지내다가 2020년 10월 26일 현역 은퇴 선언을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스스로 조급해지면서 정신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역시절을 회고하면서, 그는 최고의 순간으로 포항에서 프로 유니폼을 처음 받았을 때와 2009년 전북에서 첫 우승컵을 들었을 때를 꼽았다.
힘들었던 시간으로는 2002년과 2006년 월드컵을 뛰지 못했을 때를 언급하면서도, 그때의 아픈 심정이 오래도록 운동을 할 수 있던 보약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 경기에 우승컵을 들고 은퇴할 수 있다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축구 인생일 것”이라고 밝혔던 그는 2020년 11월 1일 치러진 홈 경기에서 정말로 전북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마지막 경기를 풀타임으로 소화하고, 팀에 K리그 최초 4연속 우승 기록을 남긴 채 아름다운 마무리를 했다. 이동국의 등번호 20번은 전북의 첫 영구결번이 됐다.
[사진제공=연합뉴스]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고 난 다음부터 그렇게 슬프지 않더라구요”
이동국은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고 지도자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거듭된 역경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현역의 끝을 맞이한 이동국이 지도자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동국이 남긴 기록, K리그 통산 득점 1위와 AFC의 3개 메이저대회 득점왕
이동국은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총 844경기를 뛰었다, 이는 대한축구협회가 집계한 한국 선수 역대 최다 출전 기록이다.
역대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FIFA와 AFC가 주관하는 모든 메이저 대회에 출전했다. 1998년 아시아 U-19청소년 선수권을 시작으로, 이듬해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그리고 아시안게임, 올림픽, 아시안컵, 월드컵에 출전했다. 소속 클럽팀의 일원으로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와 FIFA 클럽 월드컵에도 나갔다.
K리그에서는 547경기, 228골로 압도적 통산 득점 1위다. 전북에서 164골로 가장 많이 넣었고 포항서 47골을 넣었다. 또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넣은 37골도 아시아에서 1위 기록이다.
이동국은 1998년 처음 A매치에 데뷔한 이래 2017년 러시아 월드컵 최종 예선에 출전함으로써 횟수로 무려 20년 동안 대표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는 역대 최장 기간 대표팀 발탁 기록이다.
1998년 AFC U-19 선수권, 2000년 아시안컵, 그리고 2011년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다. AFC의 3개 메이저대회에서 모두 득점왕을 차지한 아시아 유일의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