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를 실록으로 엮어본다. 윤석열은 언제부터 쿠데타를 계획했을까? 윤석열은 무슨 일을 계기로 확신범이 되었을까? 12월3일은 우리나라가 처한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고권력자 1인의 독단으로 나라가 형편없이 흔들렸는가 하면 국회와 시민들의 용기있는 대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위대한 서사시였다. 12월3일을 전후해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역사적 순간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초현실적 계엄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헌법재판소가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을 선고했다. 윤 대통령을 파면했다. 사진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앉은 정계선, 문형배, 정형식, 김복형, 조한창, 정정미 헌법재판관, 윤 대통령, 이미선, 김형두 헌법재판관. [사진=연합뉴스]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헌법재판관들은 쉬지 않고 111일을 달렸다. 2월 25일 최종변론을 듣고 4월 4일 판결을 했다. 그동안 많은 억측이 있었다. 8명중에 3명의 재판관이 기각 또는 각하의 의견을 갖고 있어서 판결이 오래 걸린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많이 돌았다. 윤석열도 기각을 확신했다고 한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윤석열은 탄핵이 인용될 줄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며 그래서 판결을 보고 마치 둔기로 얻어맞은 느낌이었고 한다.
반면 4월 4일을 기일로 확정하자 대부분은 인용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다수의 재판관들이 기각으로 결론나는 판결에 동의했을리 없기 때문이다.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4월 18일 문형배 헌법재판소장과 이미선 재판관의 임기가 끝나고 후임은 임명을 못하게 된다. 헌법재판소는 180일 이내에 종국결정의 선고를 해야 한다. 그렇게 못하고 180일이 지나면 윤석열은 돌아온다. 그런데 재판관의 궐위로 7명의 출석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그 궐위된 기간은 심판기간에 산입하지 아니한다.(헌법재판소법 38조) 따라서 윤석열은 돌아오지 못한다.
한덕수 권한대행이 국회 추천 몫 마은혁을 임명하지 않으면 6인체제로 윤석열이 직무가 정지된 채 임기를 마치게 된다. (한덕수는 후에 임의로 대통령 몫 2명을 임명하는 불법 쿠데타를 자행했다가 실패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당시로서는) 한덕수가 2027년 5월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직무가 중지된 윤석열도 임기를 채우게 된다. 일종의 데드락이다. 진보쪽 재판관들이 이런 선택을 하면 했지, 기각 판결을 해서 계엄령 면허를 발급받은 윤석열의 복귀를 만들어 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기일이 잡혔다는 통보는 인용으로 합의가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4월 4일 역사적 판결문을 만든 헌법재판관 8인의 면면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른 출신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합의에 이르렀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이력의 조합이다. 추천한 대통령과 대법원장, 그리고 정당이 달라도 그들은 최종의 합의, 하나의 결론을 위해 노력했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과 이미선 재판관이 18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퇴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①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문형배 권한대행(1965년. 경남 하동)은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친척들로부터 낡은 교복과 교과서를 물려받으면서 겨우 중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다. 빈농의 집안에서 고등학교 진학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교 4학년 때까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했다. 한 사람이 내민 손이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김장하 선생(81)은 어려운 환경에서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18세에 한약업사 자격증을 취득해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했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해 얻은 수익으로 1983년 진주에 명신고등학교를 세워 1991년 경상남도에 기증했다. 1000명 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경남 진주 일대에서 60년 넘는 선행을 쌓았다. MBC 경남이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라는 평가와 존경을 받았다.
2019년 4월 문형배는 인사청문회에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독지가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교 4학년 때까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선생은 '자신에게 고마워 할 필요 없고 갚으려거든 사회에 갚으라'고 말했다"고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훗날 그는 사회에 갚았고, 사회는 그에게 고마워했다.
그는 대표적인 지방 법관이었다. 1992년 부산지법 판사로 임관한 이후 27년간 부산 경남 지역에서만 근무했다. 창원지법 부장판사, 진주지원장, 부산고법 부장판사, 부산가정법원장 등 지역에서 오래 근무한 향판이다. 향판들 중에서는 대충 대충 재판을 한다거나 지방 토호들과 어울리는 등 문제가 되는 이들이 간혹 있는데 문형배는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문형배의 판결중에 미담이 되어 언론에 회자된 사건이 있다. 2007년 2월 7일 창원지법 315호 법정에서 열린 형사3부 재판에서 문형배가 피고인에게 주문을 했다. 3000만원 카드 빚 때문에 자살하려고 여관방을 방화한 혐의로 구속된 30대에게 “‘자살’이라는 단어를 10번 반복해 보라고 했다. 자살자살자살자살... 문형배가 입을 열었다.
”피고인이 외친 ‘자살’이 우리에겐 '살자'로 들린다. 죽어야 할 이유를 살아야 할 이유로 새롭게 고쳐 생각해보라”고 말하며 집행유예형을 선고했다. 문형배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죽으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살’이 ‘살자’가 되는 것처럼, 때로는 죽으려고 하는 이유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라는 제목의 책을 선물하겠습니다. 책을 읽어 보고 난 뒤에나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 (‘살자 판사’ 문형배, 강하게 尹 탄핵 의견낼 것. 이런 장담 왜,중앙일보)
독서를 즐기는 문형배는 피고인에게 맞춤형 책을 선물했다. 공무집행방해로 기소된 20대 청년에게 류시화 시인의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을, 환각물질 흡입으로 재판을 받는 20대 청년에게는 ‘마시멜로 이야기’를 선사했다. 문형배의 블로그, ‘착한사람들을 위한 법 이야기’는 누적 방문객수 200만명을 넘어섰다. 법률가는 대중과 함께해야 한다는 취지로 소통하고 있다.
“법관들이 언제부터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재판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1970년대나 80년대에는 검사가 건네주는 쪽지를 보고 독재정권 입맛에 맞게 그대로 판결하는 법원이었습니다. 고작해야 1990년대에 민주주의를 위하여 자기 한 몸 바쳐온 수없이 많은 사람들 덕분에 이렇게 달라졌습니다.”(문형배)
“요즘 진보 성향 판사들이 뭔가 있는 척하며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민중가요를 목청껏 부르는데 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법관들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한 일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법관들은 동료와 선후배들이 학교와 거리와 일터에서 민주화운동을 할 때 골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습니다. 판사들은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문형배)
경남도민일보 김훤주 기자의 ‘문형배론’에 나오는 얘기다. 문형배는 강연에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부채의식을 말하곤 했다. "법관들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한 일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법관들은 동료와 선후배들이 학교와 거리와 일터에서 민주화운동을 할 때 골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습니다. 판사들은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진보적 법관으로 분류된다. 법원 내 대표적 진보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강금실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윤석열과 부딪혔던 이용구 법무부 차관과 한동수 대검 감찰부장도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다.
“그는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색깔론에 시달리기도 했다. 최근에도 그렇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에 판사의 좌경화, 편향 판결 운운하면서 다양한 공격을 받아왔다. 2010년 참다못한 그는 "사법의 정치화를 경계해야 하지만, 정치의 사법화도 경계해야 한다"면서 당시 여당과 보수 언론의 우리법연구회 해체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했다. (김용국.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자신의 이념적 성향이 진보로 분류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다음은 인사청문회에서 한 발언이다.
“저는 스스로 나태와 독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부산판례연구회나 우리법연구회 등 학술단체에 가입한 적이 있을 뿐 결코 정치적 이념을 추구하기 위해 단체에 가입한 적은 없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법관으로 재직하는 기간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였다’ 그렇게 감히 자부합니다. 오로지 증거에 의해서 사실을 인정하고 헌법과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법리를 도출한 다음 당해 사건에 적용하였을 뿐 그 외의 것은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임명권자를 포함한 사회의 모든 세력으로부터 독립된 상태에서 공정한 재판을 하는 데 저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점은 이 자리를 빌려 명확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문형배는 2024년 10월 권한대행을 맡았고, 이번 윤석열 탄핵 재판을 이끌었다. 이강윤 시사평론가는 “문형배 소장권한대행은 헌재의 권위와 논리 전개의 정연함을 확실하게 보여줬음. 재판관으로서는 당연한 덕목이지만서도, 중립적 진행과 증인에 대한 배려도 돋보였음. 증인에 대한 일부 변호인의 중언부언 질문을 제한하며 흐름을 잡아나가 논점 일탈을 막음.”이라고 평가했다.
문형배는 4월 18일 6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하루 전날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률가의 길: 혼, 창, 통’이라는 과목의 수업에 초청받아 특강을 진행했다. ‘혼’은 ‘왜 나는 법률가가 되려 했나’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창’은 독창적이고 적절한 것인가를 고심하는 것, ‘통’은 막힌 것을 뚫고 물처럼 흐르게 하는 소통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혼 창 통을 갖춘 법률가가 되기 위해서는 경청의 자세와 자기 뜻을 밝히는 의사 표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문형배는 질의응답에서 탄핵심판에 대해 “만장일치를 이루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은 성문법만 아니라 불문율에 힘입은 바도 크다”며 “그 불문율이 관용과 자제”라고 했다. 그는 “탄핵소추가 야당의 권한이다. 문제없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비상계엄은 대통령의 권한 아니냐고 하는데, 그렇게는 답을 찾을 수 없다. 관용과 자제를 뛰어넘었느냐 아니냐, 현재까지 탄핵소추는 그걸 넘지 않았고 비상계엄은 그걸 넘었다는 게 헌법재판소의 판단”이라고 답했다..
그는 탄핵심판을 내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도 밝혔다. “야당에 적용되는 권리가 여당에도 적용돼야 하고, 여당에 인정되는 절제가 야당에도 인정돼야 그것이 통합이다. 나에게 적용되는 원칙과 너에게 적용되는 원칙이 다르면 어떻게 통합이 되겠는가. 그 통합을 우리가 좀 고수해 보자. 그게 탄핵선고문의 제목이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형배는 “헌재 결정에 대한 학술적 비판은 당연히 허용돼야겠지만 대인논증(對人論證) 같은 비난은 지양돼야 한다”고 밝혔다. 탄핵심판 과정에서 여야 모두가 제기한 재판관 성향 등에 대한 비난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퇴임식에서 문형배는 권한대행은 내내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문형배는 퇴임사에서 8명의 동료 재판관과 헌법재판소 파워테니스 동호회, 뚜동회(걷기 동호회), 부인, 형님, 동생, 교장선생님 등 고마운 사람들을 한 명씩 언급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고마운 사람 중에는 김용국 오마이뉴스 기자도 있었다.
"<생활법률상식사전>, 10만 부가 팔렸습니다. 그 책의 저자인 김용국 선생 … 감사드립니다,"
김용국 시민기자는 오마이뉴스에 그와의 인연을 기사로 썼다. 20년 전, 어려운 법과 판결을 일반 시민들이 좀 더 쉽고 만만하게 대하게 하고(법의 대중화), 법원이 좀 더 사랑받도록 바뀌기(사법개혁)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양한 분야의 판사 인터뷰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문형배는 창원지법 부장판사였다. 그는 소장파 판사로, 사법부 개혁과 신뢰 회복에 관심이 있었고, 시민의 권리를 중시하는 주목 받는 판결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 역시 "법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소신을 밝혀왔다(지금도 남아있는 그의 블로그 이름은 '착한 사람을 위한 법 이야기'이다). 나는 그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내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내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거절 사유를 요약하면 이렇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제기한 의제(법원의 개혁 등)가 중요한데 내가 언론에 노출되면 의제가 묻히는 경향이 있다."
이미선 헌법재판관이 18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퇴임사를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② 이미선 재판관 – 윤석열 탄핵사건 수명 재판관
이미선 재판관(1970. 강원도 화천)은 이발사의 딸로 태어났다. 1983년 화천여중 시절,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와 진로상담을 했다. 담임은 공부를 잘해서 1등을 놓치지 않는 이미선의 장래를 위해 대처로 나갈 것을 조언했다. 유학을 보낼 정도로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다. 외가가 있는 부산으로 가서 대학교까지 마치고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97년 서울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한 이미선 재판관은 서울지법 북부지원, 청주지법, 수원지법, 대전고법을 거쳐,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해 역대 최연소 헌법재판관으로 부임했다. 여성으로서는 다섯 번째 헌법재판관이다,
2010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낸 이미선은 통상임금 사건 등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노동사건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이미선 재판관은 노동법 전문가로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데 힘썼다. 탄핵 사건에서는 정형식 주심 재판관과 함께 사건의 쟁점 등을 정리하는 수명재판관을 맡았다. 그래서인지 날카로운 질문이 많았다.
이미선 재판관은 퇴임을 하면서 “헌법재판관으로 근무하면서 마음속에 무거운 저울이 하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매 사건마다 저울의 균형추를 제대로 맞추고 있는지 고민했고, 때로는 그 저울이 놓인 곳이 기울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근심하기도 했다. 그 저울의 무게로 마음이 짓눌려 힘든 날도 있었지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헌법재판의 기능이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자부했다. 이번 탄핵심판과 관련 “주권자인 국민의 명령이고 자유민주국가가 존립하기 위한 전제”라며 “국가기관은 헌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기관이 헌법을 준수하지 않고 무시할 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헌법의 규범력이 훼손되지 않도록 우리 헌법재판소가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국민의 기본권 보호와 헌법질서의 수호·유지에 전력을 다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문형배와 이미선은 임기 동안 기본권의 보장을 강화했다. 백남기 농민을 사망에 이르게 했던 경찰의 직사 살수가 국민의 생명권과 집회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재판관 8대 1 의견으로 ‘위헌’ 결정(2020년 4월)을 내렸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살게 한 판결이다.(37화 남태령 대첩 참조)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대해서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2020년 10월)을 했다.
대통령 관저 인근의 모든 집회를 전면 금지하는 것은 집회의 자유를 침해해 위헌이라고 판단(2022년 12월)했다. 노동쟁의에서 손해배상 면책범위 확대 및 손해배상액을 제한하는 노란봉투법 입법 절차에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결정(2023년 10월)을 내렸다.
헌법재판소는 21일 재판관 회의를 열어 김형두 재판관을 소장 권한대행으로 선출했다고 밝혔다. 김 대행은 임명 일자 기준으로 현직 재판관 중 가장 선임자다. [사진=연합뉴스]
③ 김형두 재판관
김형두 재판관(1965. 전북 정읍)은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친 전형적인 엘리트 법관이다. 판사 시절 해외연수 대상으로 두 번이나 선발되어 도쿄대학과 컬럼비아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연구를 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요직인 영장전담판사, 형사합의부 부장판사를 거쳐, 서울동부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일했다. 특허법원과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거쳐 2015년 사법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을 맡았다. 2021년 법원장급인 법원행정처 차장에 임명되었다. 2023년 김명수 대법원장의 지명으로 헌법재판관이 되었다
2009년,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재직 시절,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있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을 맡았다. 1심 부장판사로서 집중적인 심리를 통해 3개월 반만에 재판을 매듭지었다. 온화한 성격에 공판 중심주의자로 거의 매일 검찰과 변호인의 대립 상황을 중재하며 밤 늦게 퇴근했다.
집중심리의 결과 한명숙 전 총리가 무죄선고를 받아 지방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 이 재판을 계기로 해서 규정에는 있지만 실무에서는 구현하기 어렵다는 집중심리주의, 공판중심주의가 확립되었다. 윤석열 탄핵 사건의 주심을 맡은 정형식 재판관은 항소심에서 한명숙 전 총리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둘은 윤석열 탄핵에 대해 같은 결론을 냈다.
2023년 3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가정사를 공개했다. 그는 둘째 아들이 자폐성 장애 1급 진단을 받은 자폐아라고 밝혔다.
"유난히도 잘 생기고 순한 아이였던 둘째가 자폐 진단을 받고 나서 우리 가족의 생활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저희 부부는 자고 싶을 때 마음대로 잘 수 없고, 쉬고 싶을 때 편히 쉴 수가 없으며, 둘째랑 같이 외출을 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시선을 받아야 하는 고단한 처지가 됐다. 제 처는 천직으로 생각하던 교사직을 포기하고 둘째 뒷바라지에 전념해야 했고, 첫째는 둘째와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자폐아의 형이라는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지금도 제 처와 저의 몸에는 둘째로부터 꼬집히거나 물려서 생긴 상처, 그리고 흉터가 남아있다. 우리 둘째는 가족들에게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둘째를 돌봐야 하는 힘겹고 고단한 생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이러한 힘겨운 삶의 경험들은 저에게 세상에는 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고, 주변에 우리 가족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내 처지가 좀 어렵더라도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세상을 좀 더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됐고, 법관으로서의 자세나 시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얻었다고 했다. 양길승 녹색병원 이사장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장애인과 함께 살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아마도 김형두 재판관은 장애인과 살아보면서 포용적인 철학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형두는 청문회에서 각오도 밝혔다.
"헌법재판소는 헌법 가치를 수호하고 진정한 사회 통합을 이뤄내기 위한 중추적 역할을 요청받고 있다.만약 제게 헌법재판관으로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헌법의 이념이 어떠한 형태로 구체화되어야 하는지를 항상 고민하겠다. 이를 통해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자,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실질적 평등의 원칙을 실현하는 한편 헌법 질서가 존중되는 사회를 이뤄나가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
이강윤 시사평론가는 김형두 재판관이 '단연 시선강탈자이자 헌법재판서 재판정의 스타'였다고 평가했다.
”김형두 재판관의 정중하고 겸손한 태도, 조곤조곤 그러나 의표를 찌르는 신문은 권위와 팩트의 중요함을 동시에 각인시킴. 재판관 중 증인 신문 횟수가 11회로 가장 많았음. 심리때마다 서류 뭉치를 잔뜩 들고나와 색깔 별 포스트잇으로 체크해놓은 부분을 들추며 의표를 찌르는 질문을 해 증인들과 윤석열측 대리인단을 쩔쩔매게 하곤 했음.“
4월 4일 문형배는 주문을 읽고 헌법재판소 법정을 나가며 김형두의 등을 토탁거렸다. 김형두는 문형배가 퇴임한 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맡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지명한 정형식(63·사법연수원 17기) 헌법재판관이 탄핵 심판을 심리할 주심으로 지정됐다. [사진=연합뉴스]
④ 정형식 재판관-윤석열 탄핵 사건 주심
정형식 재판관(1961. 강원도 양구군)은 탄핵 심판의 주심을 맡았다. 주심은 안건과 쟁점을 정리해 재판관 회의에 제시하는 업무를 맡는다. 심판 결론을 내기 위한 평의에 제출할 결정문 초안을 작성하는 역할도 한다. 이번에 헌법 교과서 같다는 평가를 받는 결정문 초안을 작성했다.
보수 성향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지명했다. 대통령실은 ”지녀야 할 자질과 덕목, 법조계의 신망을 두루 갖추고 있어 헌법재판소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재판관으로서 더 없는 적임자“라고 지명 이유를 밝혔다. 2023년 그가 헌법재판관이 되면서 헌법재판소의 구성이 4년 8개월만에 보수 우위로 재편되었다. 중도 보수 5명과 진보 4명이 된 것으로 법조계는 분석했다.
인사청문회에서 정형식은 ”대통령의 잘못된 결단에 대해서도 헌법의 원칙과 법률에 근거해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청문보고서는 ”소신있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최근의 탄핵소추 사건들에 대해서도 입법부 권한을 존중하는 등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민주당은 부적격 의견을 냈다. 그는 취임을 하면서 ”사안을 판단함에 있어 우리 시대가 추구해야 할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과의 괴리감 없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 균형점을 찾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 대전고법원장, 서울회생법원장을 지냈고 법리에 해박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소속 변호사들을 상대로 한 ‘2015년 법관 평가’에서 우수법관으로 선정되었다.
2018년 박근혜 국정 농단 사건 2심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재벌에 너그러운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 한명숙 전 총리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은 1심 무죄를 뒤집고 2년 실형을 선고했다.
이강윤 시사평론가는 ”흰눈썹. 역시 일부 변호인들의 증인에 대한 압박성 질문을 제어하며 칼같이 진행한 것은 백미(白眉)였음. 카랑카랑 말투에는 집요함과 권위주의적인 면모가 배있어서 보기에 불편한 분들도 있었을 것임. 상대나 법정을 자신의 스타일대로 지배하려는 타잎같음. 재판에서 재판관의 권능이나 역할 상 이해 안가는 건 아닌데, 김형두 재판관과 대비됐음. 호오나 선악으로 구분할 일은 아니라고 봄... 법관은 판결로 말하니 곧 알게될 터. 홍장원메모의 단어 선택('검거'냐 '검거 지원'이냐)을 두고 보인 집요함은 엄정함일 수도, 그의 성향에 따른 시비성 추궁일 수도.“라고 평가했다.
정계선 헌법재판관이 1월 2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⑤ 정계선 재판관
정계선 재판관(1969. 충북 충주)은 서울대 의대를 다니다가 영화 한 편을 보고 인생을 바꿨다. 1987년 서울대 후생관에서‘용감한 변호사’(...And Justice for All)가 상영되었다. 정계선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꽂혔다. 의사는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1988년 서울대 법대에 재입학해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읽고 조 변호사를 롤모델로 삼아 뒤늦게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1995년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했다. 직전에 아버지는 뇌출혈로 사망해서 딸이 법복을 입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한복점을 하고 있었다. 대학 4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동생 학비를 지원했다.
정계선은 사시 수석 합격자 인터뷰(경향 신문)에서 "법조계가 너무 정치 편향적이다. 검찰의 5.18 관련자 불기소와 미지근한 6공 비자금 문제 처리 등에서 볼 수 있듯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법대로라면 전직 대통령의 불법 행위도 당연히 사법처리해야 한다"라고 소신을 밝혔다.
서울행정법원,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등에서 일했고, 옥스퍼드 대학교에 연수를 다녀왔다. 헌법재판소에서 2년간 헌법연구관을 지냈고, 법원으로 돌아와 서울고등법원에서 형사사건을 다뤘다. 울산지법의 첫 여성 형사합의부장을 맡아 2013년 울산 계모 살인 사건에서 의붓딸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계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2018년 법원행정처 출신 남성 엘리트 판사가 독점해오던 형사합의27부 재판장이 되었다. 중앙지방법원 형사27부는 공직비리, 뇌물 등 부패사건을 전담하는 재판부인데 여성 최초로 부장판사를 맡게 되었다.
정계선 판사는 소신이 강하다는 평을 받는다. 정계선은 2018년 뇌물 혐의로 기소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15년에 벌금 130억 원을 선고하고 82억7000여만 원을 추징했다. 그는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인 이명박 대통령의 행위는 직무 공정성과 청렴성 훼손에 그치지 않고 공직사회 전체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라며 "죄질이 좋지 않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재판 과정에서 이명박의 불출석을 놓고도 강하게 질타했다. 재판 출석은 피고인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피고인이 자신의 재판에 출석하여 정당한 방어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형사소송법은 법원이 피고인을 소환할 수 있으며(68조), 출석 동행명령을 할 수 있고(79조), 피고인의 재정의무를 정하고 있다(281조 1항). 우리 형사소송법의 해석상 피고인의 재판 출석은 권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의무라고 보아야 한다. 피고인이 자기 마음대로 출석 여부를 결정한다면 재판이 뭐가 되나?‘
헌법재판관 8인 중 유일하게 한덕수 권한대행 총리직 탄핵 ‘파면‘ 의견을 냈다. 한덕수가 국회 추천 몫 헌법재판관 후보 3인 임명을 보류한 것이 탄핵사유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국무총리로서 불필요한 논란을 최소화하고 국가적 혼란을 신속하게 수습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같은 헌법 및 법률 위반 행위로 인해 논란을 증폭시키고 혼란을 가중시켰다...헌법재판소가 담당하는 정상적인 역할과 기능마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만드는 헌법적 위기상황을 초래하는 등 그 위반의 정도가 파면을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하다. 재판관 선출 관련 여야 합의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고, 후보자들이 국회 의결을 통과했음에도 권한대행이 추가적인 ‘여야 합의’를 요구한 것은 임명 의무를 방기해 헌법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여야 합의를 계속해서 요구하는 것이 결국은 소수여당인 국민의힘에 따라다는 것이라고 보았다.
“소수여당의 의도나 계획에 부합하는 일방적인 국정 운영이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소수여당은 실질적 민주주의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의 소수자라고 할 수 없다. 소수여당의 뜻에 따라 국회 의결을 좌우하고자 하면 대통령을 견제하는 국회의 책무를 다할 수 없게 되고, 국민의 총의가 반영된 국회의 구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김복형 헌법재판관이 지난 해 12월 3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로 출근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⑥ 김복형 재판관
김복형 재판관(1968년. 경남 거제)은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명했고 중도 성향으로 분류된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수원고법 부장판사·춘천지법 수석부장판사 등을 역임했다. 여성 법관 최초로 대법관실 소속 전속 연구관으로 일한 이력이 있다.
1995년 서울지방법원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한 뒤 2002년 프랑스 파리2대학으로 2년간 연수를 다녀왔다. 서울 근무가 가장 많았지만, 울산 수원 대구 춘천 등 전국 각지 법원에서 민사 형사 행정 가사 등 다양한 재판을 두루 다뤘다. 그를 지명한 조희대 대법원장은 “30년 가까이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재판 업무를 떠나지 않아 재판 실무 경험이 풍부하다”고 평가했다.
2024년 9월 10일 인사청문회에서 본인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아 논란이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시기가 언제냐는 질문에 17초의 침묵 끝에 답을 해서 질책을 받았다. 정치적 성향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서면 답변에서 민주당이 추진하는 검사 탄핵, 대통령의 재의 요구권(거부권) 행사에 대한 견해를 두고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개인적 견해를 말씀드리는 건 적절하지 않다”며 구체적 답변을 피했다.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두고는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진보와 보수 중 어디에 가까운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 도입에 대해선 “국민적 합의를 통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답했다.
김복형은 정치와 사법의 관계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신을 분명히 밝혔다. ‘정치적 압박에 따른 사법부 독립 훼손 우려’를 묻는 질의에 “사회 여러 세력으로부터 재판의 독립,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확고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사법의 정치화’와 관련해서도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위협하고 결국 국민의 사법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사법부와 구성원들이 정치화됐다는 의혹이 제기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복형은 판사 좌표 찍기, 신상 털기 등에 대해 “합리적 비판이 아닌 법관 개인에 대한 부당한 정치적 비판에 대해 엄정 대응함으로써 법관이 소신을 가지고 양심에 따라 재판에 임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밝혔다.
김복형은 취임식에서 "어떤 길이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기본권 등을 보장하고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와 법치주의 등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최선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겠다. 세대·지역·성별·이념 등을 둘러싸고 급변하는 사회현상을 주시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목소리에도 충분히 귀를 기울이겠다. 최근에는 탄핵 심판, 권한쟁의심판 등 사건이 증가하면서 정치적 갈등 해결기관의 역할도 많이 요구되는 상황이라며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한덕수 탄핵 사건에 대해서는 완전 기각 의견을 냈다. 한덕수가 국회 추천 몫 헌법재판관의 임명을 보류한 것에 대해서 문형배 이미선 김형두 정정미는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으며 일부 위반이 있더라도 파면을 정당화할 정도로 중대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김복형은 한발 더 나아가 “헌법재판관 임명 부작위가 헌법과 법률을 위반이 아니다”며 탄핵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정계선과 대척점에 섰다. 정형식 조한창은 권한대행의 탄핵 의결 정족수가 대통령과 같은 3분의 1라며 각하 의견을 냈다.
정정미 헌법재판관이 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에 입장해 있다. [사진=연합뉴스]
⑦ 정정미 재판관
정정미 재판관(1969. 부산)은 꽃가게 노점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명했으며, 역대 여섯 번째 여성 헌법재판관이다. 인천 서울 전주에서 판사를 한 뒤 2004년부터는 대전에서만 근무한 향판이다.
정정미는 인사청문회에서 자신의 인생사에 대해 "부산 남포동 골목에서 노점상으로 꽃장사를 시작하신 부모님은 가난했지만, 성실하고 정직하며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분들이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어머니는 '만인을 구하는 부처님이 되어라'고 하시며 항상 사람을 구하는 마음을 품고 살라고 가르치셨고, 이런 부모님의 마음은 법관 생활을 하는 데에 지표가 됐다"고 소개했다.
2023년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는 2016년 박근혜 탄핵심판을 앞두고 조현천 기무사령관이 작성한 비상계엄 계획이 논란이 되었다. 조현천이 해외 도피를 마치고 전날 귀국한 것이 질문이 계기가 되었다. 김의겸 인사청문위원은 계엄문건에 대한 태도를 물었다. 정정미는 김의겸의 질문에 간단하게 “예”라고 대답했다.
충청 지역 판사일 때 특히 사회적 논란이 되는 사건을 많이 맡아 주목을 받았다. 20살 남자가 19살 여자와 혼인 신고를 하고 일본 오사카에서 니코틴 주사로 살해한 사건(대전지방법원 2018고합149)의 1심 재판장을 맡아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생후 20개월 영아를 고문, 성폭행, 살해한 대전 20개월 영아 강간 살해 사건(대전고등법원 2022노6)의 항소심 재판장을 맡아 원심(징역 30년)을 파기하고 무기징역을 선고 했다.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사건에 대해서는 단호한 판결을 내렸다.
엄정한 양형을 통해 사회정의의 실현과 헌법적 가치의 수호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청문회에서 "재판을 하면서 제 판단이 맞는지, 혹시 공부가 부족해서 잘못된 것이 없는지, 기록을 꼼꼼하게 보지 않아서 놓친 것은 없는지 늘 걱정했다. 결론적으로 유죄라고 판단한 때엔 피고인이 저지른 잘못과 그 결과의 중대성에 상응하는 엄정한 양형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막상 판결을 선고하고 나서도 밤에 그 사건이 거듭 떠올라 혹시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닌지 하는 번민과 마음의 괴로움을 겪었다"고 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 의지가 강하다. 국민권익위원회 비상임위원을 폭넓은 시각으로 권리구제가 필요한 사건들을 적극 발굴해 관계기관들의 협력과 제도개선을 이끌어냈다. 그는 취임사에서도 “절차적, 실질적 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이 보호되는 사회, 우리사회 구성원 모두가 서로 배려하며 살아가는 사회, 젊은이들이 미래를 꿈꾸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에 힘을 보태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조한창 신임 헌법재판관이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⑧ 조한창 재판관
조한창 재판관(1965. 경기 수원)은 국민의힘 추천으로 탄핵 정국에서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해 상고심 보조 경험이 있고, 사법연수원 교수로도 활동했다. 평택지원장 서울고법부장판사 부산고법부장판사 등을 지냈다. 여러 차례 대법관 후보로도 거명되었다.
2024년 12월 24일 인사청문회에서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황당한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추천을 받았는데 이날 청문회에 국민의힘 의원들을 불참했다. 청문회를 사보타지해서 헌법재판소의 탄핵사건 심리를 불능화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조한창은 계엄 선포 당시의 상황과 윤석열의 담화 내용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윤석열의 부정선거 의혹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혔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중립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두차례의 사법 농단 사건에 연루되어 논란의 중심에 선 바 있다. 인사청문회에서 이에대해 수차례 사과했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당시 신영철 서울 중앙지방법원장으로부터 관련 재판들을 배당받아 연달아 유죄판결을 내렸다. 신영철의 재판 개입에 동조한 것이다.
2015년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 시절, 통합진보당 의원직 상실 무효 행정소송에 대해 담당 부장판사에게 각하를 검토해보라고 해 또 한번 재판개입 논란이 일었다. 이 사건은 양승태 대법원장 사법농단 의혹 사건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었다. 의원직 상실 사건을 두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간에 관할 주도권 다툼이 있었다. 양승태는 법원의 위상 강화를 노리고 이 사건을 헌법재판소보다 앞서서 다루기로 했다. 조한창은 재판 가이드라인을 법원행정처로부터 전달받고, 이를 전달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성명을 내어 “헌법질서 수호가 긴요한 시점에서 재판개입 등에 협력한 반헌법적 이력이 있는 그가 헌법재판관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인사청문회에서 민병덕 민주당 의원도 문제를 제기했다. “국민의힘 추천 사유를 보면 ‘법 원칙을 준수하고 기본에 충실한 재판을 법원 내 전파했다'는 건데 사법농단 사건을 보면 추천 사유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진다. 깔끔하게 사과할 건 사과해야 한다” 고 주문했다. 조한창은 “사법부 독립이나 사법 신뢰에 누를 끼친 사실이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중히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고 답을 했다.
이렇게 고향도 다르고, 살아온 역정도 다르고, 생각이 다른 8명의 재판관들이 모여 하나의 합의를 만들어냈다. 헌법을 지키겠다는 공통 분모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인내와 관용을 갖고 만들어낸 결과물로 보인다.
헌법재판소 결정문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다. 마디 마디, 조목 조목 짚었다. 헌재 재판관들의 노고에 경의 표한다”고 썼다. 한인섭 교수는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안개와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추면서 겨울에서 봄으로 순간 이동을 한 것 같았다. 온 천지에 봄의 꽃들이 한꺼번에 터진 듯 환희가 느껴졌다. 윤석열의 계엄 사태가 '겨울 공화국'이었다면, 헌재의 파면 선고는 봄의 도래를 알리는 팡파르였다.”라고 말했다.
대한법학교수회도 성명을 통해 “선택과 집중이 명확하게 표명됐다. 장기간의 평의와 숙고를 통해 그 결정문을 국민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쉽고 유연한 논리로 무리함 없이 작성함으로써 모든 권력의 원천이 되는 주권자 국민을 존중한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정성호 민주당 의원이 보수 성향으로 분류돼 비난을 받았던 헌법재판관들에게 사과했다. 그가 직접 헌법재판관들을 지목해 비판을 한 적은 없얶다. 당내 강경파가 원색적인 비판을 통해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했었는데 그들을 대신하여 통크게 사과했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정형식, 조한창, 김복형 재판관의 용기와 결단에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과 함께 죄송하다는 말씀도 전한다. 111일 동안 상상할 수 없는 압박과 근거 없는 비난 속에서도 법률가로서의 양심을 굽히지 않고 헌법수호자로서의 소명을 다해주셨다.오늘 대한민국 헌법과 민주주의의 승리는 그분들의 신념과 결단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