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실록<2부>, 초현실 비상계엄 (37)] 두 번째 대첩-남태령, 세상 연대의 학교
민병두 입력 : 2025.04.09 09:43 ㅣ 수정 : 2025.04.09 09:43
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를 실록으로 엮어본다. 윤석열은 언제부터 쿠데타를 계획했을까? 윤석열은 무슨 일을 계기로 확신범이 되었을까? 12월3일은 우리나라가 처한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고권력자 1인의 독단으로 나라가 형편없이 흔들렸는가 하면 국회와 시민들의 용기있는 대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위대한 서사시였다. 12월3일을 전후해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역사적 순간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초현실적 계엄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지난해 12월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체포·구속 농민 행진 보장 촉구 시민대회'에서 트랙터들이 한남동 대통령 관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2024년 12월 3일 계엄군을 막고, 12월 14일 윤석열 탄핵안 가결을 이끈 여의도 대첩에 이어 12월 22일 남태령 대첩은 세상 소수자의 연대에 빛나는 승리였다. 2025년 한남진 키세스 대첩까지 3대 대첩이라고 불리운다. ‘빛의 혁명’ 시리즈 하나 하나가 세계 민주주의 운동사에 빛나는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3대 대첩은 시민들이 이룬 가장 위대한 승리로 기록될만하다.
2015년 11월 당시 쌀수입 중단 등을 요구하며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사망했다. 국가폭력에 분노한 농민들이 2016년 ‘전봉준 투쟁단’을 조직했다. 트랙터를 몰고 서울 입성을 시도했다. 양재 IC에서 경찰 저지를 뚫지 못해 하루 노숙을 했다. 인근 주민들이 핫팩, 음료수 등 투쟁물품을 가져다주었다. 함께 노숙한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끝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2024년 12월 16일 ‘전봉준 투쟁단’이 8년만에 서울로 향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이 동군‧서군으로 나눠 진주와 전남 무안에서 각각 트랙터를 끌고 윤석열이 있는 한남동을 향해 진군의 나팔을 울렸다. 전국농민회 정책위원장을 지낸 강광석 농민운동가는 그가 참여한 28시간의 남태령 대첩을 글로 남겼다. 그는 남태령 대첩을 심장이 박동하는대로 서술했다.
“21일, 수원의 아침은 몹시 추웠다. 전남 구례에서 올라온 트랙터 한 대는 눈길 가파른 경사로 발판을 내려오다 전복되었다.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출발 전에 ‘가자 서울로, 윤석열 체포하고 농민헌법 쟁취하자’고 앞에서 외쳤고 뒤에서는 ‘혹시 경찰이 막으면 남태령 일거야’ 누군가 말했다. 트랙터는 총 37대였다. 나는 앞 트랙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뒷 트랙터에 밀려가는 것 같았다. 중간에 대열은 잠깐 쉬면서 생밤 몇 개를 나누어 먹었다. 트랙터 속도는 느려졌고 드문드문 경찰이 보였다. 이제 막는구나 생각했다. 남태령이었다.”
원래 남태령은 여우와 산적이 들끓었던 고개였다. 관악산 능선에 자리한 해발 183m 고개다.
지금은 경기도와 서울을 잇는 왕복 8차로 외길이 되었다. 시속 약 20㎞로 엿새를 달려 서울을 코앞에 둔 투쟁단의 트랙터는 12월 21일 토요일 정오 남태령 고개에서 멈춰 서야 했다. 경찰버스가 이들의 행진을 막았다. 막대한 교통 혼잡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며 서울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남태령 양방향 도로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첩첩산중이며 고립무원이며 진퇴양난이며 속무수책이었기 때문에 남태령은 대열이 살거나 죽을 자리였다. 오후 해가 가파르게 졌다. 령은 양쪽 높은 봉우리 중간에 있었다. 령은 서울의 길목이며 산을 낀 수도방위사령부 철책은 삼엄했다. 그곳이 1980년에 노태우가 사단장이었다는 사실, 이번 쿠데타에서는 지하 벙커에 잡아온 정치인을 가두려고 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배는 계속 고팠다.
빵과 떡이 일부 돌았으나 그것도 바닥났다. 인근에 상점은 없었다. 령을 넘어가려는 바람의 숨소리는 거칠어서 사람들은 밖에 나오지 않고 트랙터에 안에서 시동을 켜놓고 시간을 보냈다. 내 트랙터는 히터가 나오지 않았다. ‘아 여기서도 춥고 배고픔에는 계급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강광석-‘28시간 남태령’)
2024 전봉준 투쟁단은 윤석열의 망상 계엄으로 관심을 끌고 있었다. 12월 12일, 엑스((X·옛 트위터)에 ‘향연’이 글을 올렸다. 국민의 짐이 된 “국민의힘 장례식에서 상여행렬을 보고 싶으십니까”라는 글을 올렸는데 호응이 좋았다. 전농이 그에게 ‘엑스 홍보대사’를 맡겼다. 트랙터 행진이 시작된 12월 16일부터 시시각각 글을 전달해 올렸는데 최고 조회수가 10만∼20만회는 기본이고 어떤 글은 400만회에 달했다.
“12월 21일 그의 엑스 계정도 바빠졌다. ”남태령까지 전방 4㎞’, ‘여러분, 농민 트랙터가 서울의 길목에서 막혔다’(낮 1시) 남태령에서 경찰에 막혔을 때에는 트랙터 농민과 시민 합해서 200여명에 불과했다. 일부 시민들이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19시 쯤 경찰 10개 중대가 견인차, 지게차를 앞세우고 진압하러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들어내려고 하는 구나’ 경찰이 들어내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이대로 허무하게 끝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트랙터를 견인하려면 기아를 빼야 하는데 기아를 넣은 상태에서 열쇠를 빼면 그들은 바퀴가 구르지 않는 트랙터를 사지를 묶어 끌고 가야한다. 그러면 클러치박스와 미션이 다 아작난다고 누가 말했다. 일부는 그렇게라도 버티면서 진을 사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각자가 트랙터에서 시동을 끄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회의가 열렸다. 현재상황은 진(進)의 길은 없고 퇴(退)의 길은 열려있다고 했다. 척화파와 주화파가 논쟁을 하듯 간부들은 명분과 현실 앞에서 흔들렸다. 오히려 간부가 아닌 사람들이, 평소에 조용한 사람들이, 간만에 참석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냈다. ‘아따 눈들이 많은디 여기서 우리가 빠지면 쓰겄는가, 쪽팔리게’ 그것은 명분도 실리도 아닌 체면과 양심이었다. 죽되든 밥되든 버틴다고 결정했다.
따뜻한 떡볶이가 왔다. 시민이 보내준 것이라고 했는데 두 그릇을 먹었다. 조금 있으니 김밥이 왔다. 있을 때 먹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먹었다. 핫 팩이 왔다. 핫 팩에는 군인이 근무를 서는 사진이 있었다. 여기가 그들이 지키는 고지와 같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저녁이 되어서 시민들이 모두 자리를 뜨면 들어내려고 하는구나, 언론이 없을 때 들어내려고 하는구나 생각했다.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강광석-‘28시간 남태령’)
전봉준 투쟁단의 긴급 호소문이 발표됐다. “시민 여러분! 2024년 오늘, 바로 여기 남태령이 우금치입니다. 갑오년 동학농민군이 끝내 넘지 못한 그 우금치가 바로 여기 남태령입니다. 이번에는 기필코 넘고 싶습니다. 농민들과 함께 해주십시오. 오늘의 우금치 남태령으로 달려와주십시오.” 향연도 글을 계속해서 올렸다. “여러분, 여기 지금 농민 분들이 다쳤어요. 도와주세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2시간 만에 수천 명 젊은이들이 남태령 고개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여덟시가 지나자 광화문에 있는 시민들이 여기로 올 수도 있다는 말이 돌았다. 늦은 시간에 누가 온다는 것은 우리를 구하는 일인데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아홉시가 되자 트랙터 옆에 삼삼오오 사람이 보이더니 점점 사람이 많아져서 앞 사람은 앉으라더니 더 큰 앰프를 행사장에 가져온다고 말하더니 노래가 나오고 사람들이 미치고 노래는 더 커지고 저녁 10시가 되자 대열은 눈덩이처럼 커졌다.”(강광석 - ‘28시간 남태령)
윤석열 대통령 구속 등을 촉구하며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과 시민들이 지난 해 12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경찰과 대치 중인 모습. [사진='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제공]
1년 중에 겨울이 가장 길다는 동지. 일기 예보는 다음날 새벽에 영하 10℃가 될 것이라고 했다. 남태령 고개의 칼바람으로 체감온도는 영하 20℃였다. 전농TV 등를 통해 남태령 상황은 실시간 알려졌다. 1950-1960년대 이농을 하여 도시로 왔을 농민의 손녀가 주축인 20대가 남태령을 향했다.
사실 이들은 평소 농민 이슈에 대해서 잘 몰랐다. 민주당이 통과시킨 양곡법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를 거부한 내용을 상세하게 파악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냥 사회적 약자인 농민이 자기 목소리를 낼려고 한다는 것에 연대하고 싶었다. 이를 공권력이 막아섰고, 그 과정에서 농민이 다쳤다는 것에 분노했다. 지나온 시절 자신들이 사회적 약자, 소수자로 겪은 서러움이 떠올랐고. 그들이 내민 손을 잡아주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여지없이 응원봉이었다. 여의도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흔들던 그 응원봉을, 광화문에서 ‘윤석열 파면’을 소리치며 흔들던 그 응원봉이 관악산 하늘을 수놓았다. 농민들이 가장 소중한 트랙터를 몰고 왔듯이, 그들은 최애품인 응원봉을 들고 나왔다. 남태령역에 내리자마자 집회현장이 어딘지 따로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지하도를 걸어 올라 밤하늘을 보는 순간, 빛이 보였다. 수없이 많은 별이 보였다.
퀵배달 오토바이들이 지나가면서 피자, 핫도그 등을 배달했다. 핫팩을 실어날랐다. 시민들이 난방버스를 보내주었다. 이름 모를 시민들이 어디선가 결제했다. 성경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다. 진리의 가르침에 굶주려했던 군중 수천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녔다. 군중은 굶주렸다. 그들이 가진 것은 다섯 개의 빵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다. 예수가 축복을 하여 군중들이 모두가 배 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김밥 한 줄을 받으면 절반만 먹고 절반은 뒷사람에게 보냈다. 집에서 데워온 보온병 물을 옆 사람과 나눴다. 집회 현장에서 책을 펴고 공부하다 저체온증으로 쓰러질 뻔한 신미영(24‧여성의당 경기지부 당원)은 발 핫팩을 나눠주던 노인, 직접 가져온 귤을 나누던 여성 등 집회에 있던 이들이 "모두 따뜻하고 다정하셨다"라고 말했다.”(‘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년 12월 27일.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이름 모를 누군가가 롱패딩을 벗어주시고 가심, 남태령 2번 출구 앞 후원물자 관리하던 분들과 통성명도 없이 묵묵히 일하다 청소 싹 끝내고 쿨하게 ‘그럼 언젠가 다시’라며 인사함, 음식과 물건이 물밀듯이 밀려오지만 뒷사람을 위해 딱 필요한 만큼만 챙기는 모습, 빨갛게 얼어붙은 작은 손들“(10인10색 ‘남태령 대첩’ 출전 동기 ‘우리가 서로에게 이렇게 따듯할 수가 있구나 계속 눈물이 났어요. 한겨레 21. 2024년 12월 29일 신다은 기자)
”이제 사람들은 한 5000 명, 아니 만 명, 숫자는 가늠 되지 않았다. 꾸역꾸역 느릿느릿 무장무장 밀물이 뭍을 압박하듯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곳 가까운 곳에 지하철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 열한시면 지하철이 끊긴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바람 차가운 령에서, 군인들도 서 있기 어려운 이 추운 고지에서 젊은 사람들이 버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10시가 넘자 사회자가 걱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곧 지하철이 끊기면 이곳은 올 수도 없고 나갈 수 없는 곳이 됩니다. 어찌합니까?’ 어떤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던 것 같다. ‘멀리서 오신 분들이 여기서 이 고생을 하는데 혼자 있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렇게 밤샘 농성은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이때부터 응원봉이 바다를 이루었다. 바다 빛은 서로 다르면서 하나였다. 네모, 동그라미, 세모였고 파란빛, 빨간빛, 노란빛이었다. 손잡이 길이도 짧은 것과 긴 것이 있었다. 물어보니 가격도 달랐다. 왜 그런 것 까지 물어보냐고 웃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나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통계를 확보하기 위해 부끄럼을 무릅쓰고 여기저기 물어보았다. 최저 가격이 3만원 이었고 최고 가격이 10만원 이었다. 그들 대게 젊거나 어린 여성들이었는데 모르는 노래가 없었고 지칠 줄 몰랐고 준비성도 좋아서 모자와 마스크, 목도리와 방한 숄더, 돗자리와 장갑, 작고 엷은 이불로 몸을 감쌌다.“(강광석 -’남태령 28시간‘ 다섯 번째 토막)
기술민주주의는 남태령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현장에 있는 400여명이 참여하는 대화방도 개설하여 실시간 정보를 교환했다. 밤새 사회를 본 권혁주 전농 사무총장은 “집에 돌아가시라는 말도, 이 자리를 계속 지켜달라는 말도 못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곧 막차(지하철)가 끊어집니다”라는 주최 측의 안내가 계속됐지만 사람들은 경찰을 향해 “차(경찰 버스) 빼라”고 외쳤다.
6070 농민이 ’농민가‘를 불렀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 형제 울부짖던 날 손가락 깨물며 맹세하면서 진리를 외치는 형제들 있다...춤추며 싸우는 형제들 있다. 춤추며 싸우는 형제들 있다” 진짜 춤추며 싸우는 자매들이 있었다. 2030 자매들은 '다시 만난 세계', '질풍노도' ’낭만 고양이‘로 화답했다. 이 모든 과정이 전농TV 등 유튜브로 생중계됐다. 새벽 5시 25분인데 라이브로 2만800명이 보고 있었다.
[사진=오마이뉴스TV 캡처]
“나는 그들의 음악을 유심히 들었는데 티어스와 밤이면 밤마다, 여행을 떠나요, 남행열차, 질풍노도, 다만세와 로제의 아파트와 윤수일의 아파트와 BTS 등을 불렀고 여기에 적지 못한 노래가 더 많다.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도 불렀는데 기가 막힌 것은 노래를 부르면서 구호를 외친다는 것이었다. 가사와 가사 사이, 시로 말하면 1연과 2연 사이에 불과 1, 2초 간격에 ‘탄핵 탄핵 윤석열 탄핵’과 ‘차빼라, 차빼라’를 떼창했는데 원래 그 노래에 그 가사가 생겨먹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집회 사회자라 하기는 어렵고 무슨 DJ라고 해야 할 주관자는 노래마다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 떼창을 유도했는데 실로 이것은 경이로운 사태였다. 그들은 밤새웠고 그것을 보는 농민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보고 싶어서 들어가지도 못했다. 이것은 한 개의 나락이 160개의 알곡이 되는 일보다 놀라웠다. 그들은 노래하며 춤추고 말하고 한숨 쉬고 야유하고 환호했다. 처단할 것을 결의하고 울지마라고 위로했다. (강광석 -‘남태령 28시간’ 여섯 번째 토막)
남태령 집회는 ‘다양한 정체성의 모임’이었다. 28시간의 위대한 교실이었다. 특이한 것은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용기있게 말하고 발언을 이어갔다는 점이다. 이민자 1세, 성적 소수자, 페미니스트, 여성 농민... 그런데 모두가 대한민국 국민이고 헌법을 수호한다는 동질감이 있었다. 그 전에는 이질감을 느꼈던 이들에게 동질감을 확인하는 기이한 체험이었다.
“노동·퀴어·장애·기후 등 여러 집회를 느슨하게 오가면서도 제 자신이 각기 다른 자아들로 찢어져 그저 부유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어서 신기했어요. 비관만 늘면서 사회 운동에 대한 기대를 접었던 차에 무언가 새로운 길을 위한 작은 새싹이 돋아난 것 같았고 그건 다 함께 해 주신 분들 덕분인 것 같습니다.”(10인10색. 한겨레21)
”그들은 순서대로 발언대에 올라 3분을 말했는데 그러기 위해 세 시간을 기다렸다.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강사, 초등학교 교사, 농업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광주에 사는 롯데 팬, 전라도 혐오 때문에 괴로운 대학생, 이번에 수능을 본 재수생, 자신이 농업지대에 산다는 학생, 부산에서 주말마다 올라온다는 24살 여성, 수방사에서 군인으로 근무한 아버지를 둔 직장인, 아들을 군대에 보낸 여성, 대학을 가기 위해 뒤늦게 수능준비를 한다는 30대 여성, 취직이 걱정인 4학년 여학생, 대학 총학생회 활동을 하는 성소수자 남성,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당한 친구를 둔 여성, 양평에서 아버지가 농사짓는다는 직장인을 따라온 양평에서 혼자 농사짓는 여성, 농민운동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연단에 선 고 신용범의 딸 신우리, 집회장의 천연기념물이 되었다는 20대 남성,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노조운동을 한다는 21살 여성 등이 말했다. 그들의 말잔치는 끝이 없었고 박수의 가열참은 겨울 공기를 뚫었다.”(강광석 - ‘남태령 28시간’ 일곱 번째 토막)
오마이뉴스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에서 조단원씨는 이 광경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개별 의제를 얘기하면 "숟가락 얹지 마라" 하는 비아냥이 날아들던 2016년 박근혜 탄핵 집회 때와는 다른 풍경이다."그런 게 중요하지가 않았던 거죠. 최소한 그 자리에서는 '우리가 다양한 삶의 양태들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투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여기 모였다'는 생각을 공유했던 거 같아요. 필요에 의한 공동 전선이 아니라 여기 있는 동지들이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 하는 식으로요."
새벽 3시 반, ‘불나비’의 가수 최도은씨가 도착했다. “밤새 여러분의 모습을 보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불나비’를 들고 왔습니다.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바로 이 왼편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 지하 벙커에 수천 명이 잡혀 들어갈 뻔했습니다.”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밤이면 밤마다 그리워...오늘의 이 고통, 이 괴로움, 한숨섞인 미소로 지워버리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그들은 응원봉을 든 불나비가 되었다.
“나는 22일 일요일 새벽 4시를 잊을 수 없다. 민중가수 최도은은 활화산이었고 불화살이었다. 최도은은 음악도 없이 불나비를 불렀는데 입때껏 그런 날 것 같은 포효를 본 적 없다. 맥막도 핏줄도 터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농민가’를 떼창했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몇 사람 깨워서 서울로 향했던 우리는 그들이 부르는 진리와 죽은 자가 갔던 길과 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산자의 길을 생각했다. 우금치에서 죽은 자의 몸 위에 포개진 산자의 몸과 80년 5월 27일 전남 도청의 동호의 마지막 밤을 생각하며 나는 울었다.”(강광석 - ‘남태령 28시간’)
12월 22일 한 누리꾼이 SNS에 올린 글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오늘 남태령에 가려고 신발을 고르다가 경찰들이 가로막는다는 말에 방수화를 신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문득 백남기 어르신이 별이 된 이후 전농의 투쟁으로 물대포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죽은 자는 산 자를 온 힘으로 돕는다. 그리고 산 자는 죽은 자를 온 몸으로 기억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소설가는 12월 8일 스웨덴 스톡홀롬 한림원에서 광주를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날 밤, 고 백남기 농민은 남태령에서 함께 했다. 천 개의 별이 된 세월호 아이들도 그날 남태령에서 빛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세월호 아이들을 보았다. 세월호 아이들이 그 자리에 왔다고 굳게 믿었다. 죽은 자가 산자의 길을 열었다고 믿었다. 하늘의 별이 된 그들의 영혼이, 배에 남긴 마지막 손톱자국이, 그들의 호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지상에 내려와 응원봉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을 달라야 한다는 다짐들이 저들의 가슴속에서 분노의 꽃을 피웠다고 생각했다. 찬 바다에서 죽은 사람도 있는데 이깟 겨울 하룻밤이 무슨 대수냐며, 그들은 인류의 역사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간과 아름답기 그지없는 인간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지난 해 12월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체포·구속 농민 행진 보장 촉구 시민대회'에서 트랙터 이동을 통제하던 경찰 버스가 철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나는 22일 일요일 새벽 4시 남태령에서 여명을 보았고 승리를 확신했고 세월호의 부활을 보았다. 그 후로부터는 경찰벽을 넘는 것도, 한강을 넘은 것도, 윤석열 자리의 턱밑까지 압박한 것도 이미 되어질 길이었다. ”(강광석-‘남태령 28시간’)
22일 오후 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이 나섰다. 김성회 임호선 이소영 채현일 문금주 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장 직무대행을 만나서 협상을 했다. 남태령 현장에는 김성우 김준혁 모경종 어기구 임미애 이재정 이언주 양문석 의원이 함께 하고 있었다. 경찰은 10대의 트랙터가 시내에 진입하는 것을 허용했다. 행진이 곧 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와 모두가 환호했다. 10여 대의 트랙터와 50여 대의 트럭들이 도로 옆에 일열로 서있었고, 농민들이 앞장섰다. 12월 22일 오후 4시 남태령역에서 사당역까지 시민들과 함께 행진이 시작됐다.
SNS에 글이 올라왔다. “전봉준이 130년 만에 드디어 서울로 입성한다”. 우금치 전투의 한을 푼 '남태령 대첩'이라는 말이 나왔다. 1894년 녹두장군 전봉준은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이 진주한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다가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조선 일본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그 해 12월 7일 일본군에게 인계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남태령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전봉준의 한을 조선 백성들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는 노랫말로 기억했다. 안도현 시인은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한남동에는 전봉준 투쟁단을 마중 나온 시민들로 가득차 있었다. 응원봉을 들고 노래를 부르면서 농민들의 트랙터가 용산으로 오기만을 기다렸다. 남태령에서 건너온 트랙터 10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세상이 떠나갈 듯 일제히 환호성이 울렸다. 트랙터를 몰고 온 농민들도 울고, 시민들도 함께 울고 웃었다. 눈물이 웃음이 되고, 웃음이 눈물이 되었다. 순간 헨댈의 개선행진곡 ‘보아라, 용사 돌아온다‘(See, The Conqu’ring Hero Comes)가 하늘에 울려퍼지는 듯 했다.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12월 8일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에서 집담회 자리를 마련했다. 남태령 대첩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참가자 70여명의 쪽지가 전시됐다. 부채감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12월 3일 그때 계엄군을 막으러 가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었다고 했다. 오마이뉴스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에 실린 내용을 재인용한다.
"계엄령이 선포되던 12월 3일, 저는 국회에 갈 수 있는 거리였는데도 가지 않았고, 새벽 내내 라이브를 보며 부끄러워했거든요." (여채현, 21, 대학생)
"(라이브 방송) 스트리밍을 틀어 놓고 잤다가 아침에 눈 뜨자마자 화면을 확인했어요. 화면 속에 계속 똑같은 사람이 더 빨개진 손으로 응원봉을 흔들고 계시더라고요. 그 순간에 진짜 마음이 너무 힘들어졌던 거 같아요." (이은비, 43, 킨츠기 공예가)
"친구가 거기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그래. 너한테 내가 핫팩 갖다주러 갈게' 하는 마음으로 갔거든요." (조단원, 32, 개발자)
"12월 3일 계엄 터졌을 때 국회에 못 간 게 마음에 걸려서, 빚졌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레즈비언 여성 요술봉, 40)
"'시민들이 오니까 경찰이 폭력적으로 굴지 못하는 것 같으니 남태령으로 와주세요' 라는 트윗을 보고 무작정 4호선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그냥 그분들 지켜야겠다는 마음밖에는 없었어요."(물결,21)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이 이번 트랙터 시위를 두고 “난동 세력에게는 몽둥이가 답”이라고 했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시위가 아니라 난동”이라고 공격했다. 민주당 주도로 통과된 양곡법은 남는 쌀을 정부가 매입하고, 양곡 가격이 평년 가격 미만으로 하락하면 정부가 차액을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정부가 12월 20일 거부권을 행사했다. 과도한 재정투입으로 스마트팜 전환 등을 막는다는 이유였다.
하원오 전봉준투쟁단 총대장·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2024년 12월 23일 성명을 발표했다.
“1894년 우금티, 한양으로 진격하던 갑오농민군이 패배했습니다. 꽃잎보다 붉은 피를 흘리며 수만 명의 농민군이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향한 그들의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형형색색의 응원봉이 내뿜는 밝은 빛이 어둠을 몰아냈습니다. 각종 음식과 방한용품은 물론이고 보조배터리, 담요와 위생용품, 심지어 밥차와 난방버스까지, 모아주신 따뜻한 마음이 추위를 몰아냈습니다. 남태령 고개를 가득 채웠던 ‘차 빼라!’ 구호가, 농민가요부터 트로트와 K팝까지 끊이지 않았던 음악과 몸짓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그 덕분에 트랙터는 공고해만 보였던 경찰의 봉쇄를 열어내고 모든 코스를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역사는 지난 이틀을 ‘남태령 대첩’으로 기록할 것입니다. 그저 이겼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혐오와 차별 속에 주류사회에서 배제되어온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노인, 도시빈민, 농민이 만든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성별도 세대도 지향도 직업도 다른 이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연대를 넘은 ‘대동의 남태령’을 열어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