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실록<2부>, 초현실 비상계엄 (32)] 시민들의 저항 K-민주주의, 그 첫 번째 이야기 12월 3일 밤

민병두 입력 : 2025.03.31 10:45 ㅣ 수정 : 2025.04.0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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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를 실록으로 엮어본다. 윤석열은 언제부터 쿠데타를 계획했을까? 윤석열은 무슨 일을 계기로 확신범이 되었을까? 12월3일은 우리나라가 처한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고권력자 1인의 독단으로 나라가 형편없이 흔들렸는가 하면 국회와 시민들의 용기있는 대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위대한 서사시였다. 12월3일을 전후해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역사적 순간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초현실적 계엄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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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 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경찰이 통제해 국회 안으로 진입하지는 못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국민 여러분은 스스로 역사의 빛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과 전세계는 5·18의 주먹밥이 12·3의 선결제로 이어지고, 2016년 촛불혁명이 2024년 빛의 혁명으로 승화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려 들고나온 내게 가장 소중한 빛'은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는 빛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빛이었습니다. 평화와 사랑과 연대의 빛, 민주주의를 지키는 빛이었습니다. K-팝의 합창과 함께 어우러져 세대와 성별과 계층을 뛰어넘어 국민 모두가 튼튼하게 연대한 이 빛의 물결을 대한민국과 세계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1919년 3·1독립운동,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2016년 촛불혁명의 역사가 2024년 12월 내란에서 대한민국을 구했습니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역사를 구원했고, 과거의 죽음이 현재의 삶을 지속시킨 새 역사를 국민 스스로 써 내려갔습니다.(중략)

 

대한민국 국회는 내란의 주모자들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었지만, 임무를 회피하거나 소극적으로 임했던 계엄군 병사들과 총칼로 무장했으면서도 끝내 국민을 해치지 않으려 했던 계엄군 병사들을 기억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돌아섰던 계엄군 병사의 안타까운 눈빛에서 이들 역시 대한민국의 선량한 국민임을 깨닫습니다.

 

헌정질서가 위태로울 때마다 떨쳐 일어나 국헌을 바로 세우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우리 국민의 위대함과 슬기로움에 대한민국 국회는 깊이 감사하며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표합니다. 대한민국 국민과 이 시대를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국회가 12·3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계엄군에 항거하며 민주주의를 지켜낸 국민에게 보내는 감사문을 채택했다. 국회가 대국민 감사문을 채택한 것은 1960년 4·19혁명 이후 64년 만이다. 국회는 1960년 4월 27일에도 4·19혁명을 기리며 '전국 학도에게 보내는 감사문'을 의결했다.

 

운영위는 2024년 12월 31일  '12·3 윤석열 비상계엄을 해제한 대한민국 국민께 드리는 감사문'을 의결했다. 진성준 민주당 의원 등 169명이 참여했다. 제32화에서는 12월 3일 그날 밤, 맨 처음 달려간 시민들을 다룬다. 시민들의 서사는 선결제와 응원봉, 남태령과 키세스 등으로 몇 편에 걸쳐 시간 순에 따라 다룬다.

 

2024년 12월 3일 밤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택시를 집어 타고 여의도로 달렸다. 민주당에서는 전 당원 비상소집 문자를 날렸다. 민주노총 등도 바쁘게 움직였다. 시민 4000여명이 국회로 들어가려는 국회의원들을 돕고, 계엄군을 끌어내리고, 군용차를 막아세웠다. 이렇게 빨리 계엄군 저지에 나선 시민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어떤 역사에도 없다. 이날 밤 세계는 윤석열의 계엄에 놀라고, 시민들의 반응에 더 놀랬다.

 

시사주간지 〈시사IN〉은 헌정질서가 무너질 뻔한 절체절명의 순간, 민주주의를 지킨 거리의 시민들을 ‘2024년 올해의 인물’로 뽑았다. 그 수많은 시민들의 ‘찰나’가 모여 역사를 만들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시민들이 보여준 K-민주주의에 대한 헌정이다.

 

“국회는 기민했고, 시민은 용감했다. 명령을 수행하는 군인들마저 ‘슬며시’ 주저했다. ‘상식적인 세상’에 근거한 찰나의 행동들이 모이고 모여 이성 잃은 권력자의 돌발 행동을 통제했다. 역사는 ‘만약’이 없다지만, 만약이라는 샛길로 빠질 뻔한 대한민국 역사를 바로잡은 것은 12월 3일 당일, 그리고 이후 국회 앞에 모인 시민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쿠데타를 막았다.”

 

12월 3일 그날 밤 계엄을 막는 역사의 현장에 가장 먼저 있었던 이들은 장애인이었다. 유엔이 정한 장애인의 날을 맞아 전국에서 모인 약 1500여명의 활동가들은 국회에 모여 1박 2일의 장애인권리 쟁취 투쟁을 시작했다. 그날 낮에 그들이 힘겹게 오르던 국회의사당 계단을 그날 밤에 계엄군이 오르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을 하지 못했다. 전국결의대회는 문화제를 끝으로 1일차 투쟁을 마무리했다. 지하철 국회의사당 역에서 잠자리에 들려다가 계엄 선포를 듣고 국회를 지키기 위해 뛰쳐나온 시민들과 꼬박 밤을 세웠다. 몸이 불편해 경찰과 대치한 맨 앞에 서지는 못했지만, ‘계엄 철폐’를 외치는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 컸다.

 

“저희 장인어른께서는 ‘장수는 싸움터에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는 말처럼 끝까지 싸우다 돌아가셨습니다. 몇 개월 전부터 감기가 떨어지지 않으셨고, 조금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을 퇴진시키고,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며 쉬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12월 3일. 계엄이 터진 날 밤. 장인어른은 장모님께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집을 나서시면서 저와, 여러 동지들과 함께 밤을 지새셨습니다.”

 

평생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했던 조성우 선생(1950-2025)도 짐을 싸고 전쟁터로 향했다. 그는 이번 싸움은 길 것 같다고 예언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위 황순석은 장인의 마지막 출정 장면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그날 총알보다 빨리, 계엄군보다 먼저 국회로 달려간 사람이 어디 ‘허당 조성우’ 뿐이랴. 이름 모를 시민들이 국회로 향했다.

 

재단법인 ‘진실의 힘’의 12.3내란 기록팀은 자료 수집에 나섰다. “그날의 마음 /생각은 물론이고 나아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요’라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저희는 이번 내란 사태 때 거리에 나선 시민들의 말과 행동을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하는 염원으로 보았습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그날의 기록이 모아지고 있다. 기억을 제공한 시민들의 이야기를 한겨레신문이 재구성했다. (“살 만큼 살았잖아” 세 자매는 달렸다...내란 막은 시민들의 그날 밤. 2025년 3월 1일)

 

-서울 삼양동 이준형(56)

 

소리 죽여 옷을 챙겼다. 아직 뉴스를 보지 못한 아내는 딸과 방에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제일 두꺼운 옷을 챙기고 등산 양말과 장갑을 챙겼”다.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금융 거래에 필요한 오티피(OTP·일회용 비밀번호) 생성기도 주머니에 넣었다. 정보기술(IT) 회사 대표인 그는 사태 전개에 따라 거리에서 회사 일을 보거나 전화로 업무 지시를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신분증을 챙겼다. 그는 1980년대 말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며 5·18의 참상을 알게 됐다. 당시 신분 파악이 안 돼 가족 품에 돌아가지 못한 희생자들이 많았다. 그는 혹시 잘못되더라도 내가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 있길 바랐다.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문을 닫는데 ‘삐리릭’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아내와 딸이 막으려고 뛰어나올 것 같아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밖으로 달렸다. 서울 강북구 삼양동에서 여의도로 급히 차를 몰았다.

 

-경기도 고양시 유현주(66)

 

딸에게 가로막혔다. 현관문을 막고 선 딸이 완력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딸은 완강했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 오늘은 절대 안 된다며 막무가내로 제지했다. 신발을 신으려는 엄마를 막고 비켜주지 않았다. 유현주는 딸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언니가 나오지 않자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막내 동생이 올라왔다. 상황을 파악한 동생이 언니는 집에 있으라고 했다. 걱정하는 딸을 위해서라도 ‘그럴까’ 고민했지만 유현주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나이 먹은 내가 가야 한다”며 뜻을 꺾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딸이 20여분 만에 힘을 풀었다. 

 

“이룰 만큼 이뤘고 애들도 다 결혼했어요. 지난 인생 후회 없고 미련도 없어요. 죽기 전에 후회를 덜 남기고 싶었어요. 가면 위험할 수 있잖아요. 위험할수록 내가 그 앞에 있어야지 젊은 애들 앞세우면 안 되잖아요. 현장에 가고 싶었어요. 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일단 그 현장에 있고 싶었어요.”

 

막내 유현미는...언니들과 만나기로 하고 집을 나서기 전 그는 친구들에게 전화했다. “‘세 자매 장렬히 산화하다, 그렇게 기억해줘.” 농담 삼아 한 말이었지만 그는 스멀스멀 무서워졌다. 두려움을 이긴 것은 “모욕감”이었다. “계엄이 성공한다고 생각하니까 못 살 것 같았어요. 도무지 ‘이후’를 상상할 수 없는 거예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이 들었어요. 막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간 건 아니에요. 뭐라도 해야 하니 일단 가자 싶었어요.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국회 앞에 쪽수 하나라도 늘리자, 그거라도 해보자 하는 마음. 돌이켜 보면 제가 살기 위해서 나간 거였어요.”

 

Human Rights Watch는 1979년에 계엄 선포를 경험했다는 전직 교사 이현규(63)씨를 인터뷰했다. “군이 발포를 시작하면 노인들이 앞으로 나가 젊은 세대를 지켜주자”는 70대 여성의 제안에 다른 시민들이 “그럽시다, 그럽시다”라고 동의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국회에서 밤을 샌 강선경(29)씨는 “아침에 출근해야 하지만, 혹시 모를 군병력과 장갑차를 막기 위해 일단 자리를 지키려 한다”며 “내가 없으면 민주주의가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임했다”고 밝혔다.

 

정민철 민주당 성북을 대학생위원장은 계엄령이 선포되자마자 택시비 4만원을 내고 국회 앞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그는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4일 0시부터 4시까지 국회 앞을 지켰다며 “대학생 친구들과 ‘우리는 잡혀가도 싸운다'며 함께 모였는데, 집에서 자다가 혹은 동네 산책하듯이 온 시민들도 굉장히 많았다”고 말했다.(‘20대 기자가 처음 겪은 계엄 국회 6시간’-김연진 주간조선 기가)

 

황인경씨는 곧바로 집을 출발해 국회 앞으로 달려갔다. 가는 중에 X(옛 트위터)에 자신의 심정도 올리고, 현장 속보도 전했다. 

 

“5·18 때 엄마 다니던 회사 직원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총에 맞아 죽었고, 외삼촌은 그냥 구경하다가 두드려 맞아 허리 장애로 5·18 유공자가 되었다. 시위대가, 시민이, 가족이 변변한 이유 없이 폭도가 되고 개머리판에 맞고 강간당하고 죽임당할 수 있는 게 바로 비상계엄이다. 저는 국회에 왔습니다. 가능한 분들은 함께해주세요. 버스에서 군인들이 내리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막아서고 있어요. 계엄령 무효 되었나요. 다행입니다. 경찰들도 무슨 고생인가 싶네요.”

 

친구들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도망치라’고 연신 카톡을 보냈다. 그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무섭거나 고민되지 않았는지를 묻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거리도 멀지 않고 차도 있고, 안 나갈 이유가 없었다. 가서 별다른 역할은 못해도 ‘그날 국회 앞에 많은 인파가 모였다’라고 했을 때 그중 한 명이라도 더 보탬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시사IN>은 설동찬 보좌관(안태준 민주당 의원실)을 인터뷰했다.

 

”평범한 날이었다. 12월 3일 밤 10시 30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840호에 홀로 남아 야근을 하고 있던 설동찬 보좌관은 뉴스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있었다. ‘이게 진짜야?’라는 의문보다 ‘국회를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먼저 스쳤다. 밖을 내다보니 이미 경찰차가 움직이면서 방호벽을 쌓고 있었다. 의원들이 국회 안으로 들어오려면 출입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의원회관에서 가장 가까운 정문으로 뛰어갔다. 급한 마음에 미처 슬리퍼를 갈아 신지도 못했다.

 

정문은 이미 닫힌 뒤였다. 설 보좌관은 “누구 지시로 출입문을 막느냐”라고 항의하며 “직원들과 당원들은 들어올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위에서 내려온 지시대로 할 뿐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뒤를 이어 달려온 보좌진들과 담을 타고 넘어온 보좌진들이 힘을 모아 경비대와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문이 조금 열렸지만 경비대 무전으로는 계속 ‘문을 닫으라’는 지시가 내려오고 있었다. 문을 닫으려는 경비대와 문을 열려는 보좌진들의 몸싸움이 계속됐다.“

 

민주노총은 긴급공지를 날렸다. 윤석열이 “스스로 권력의 종말을 선언했다”며 “이제 윤석열은  끝이다." 라고 선언했다. “비상계엄을 무력화 할 수 있는 우선적 방법은 국회에서 취소하는 것입니다. 일단 야당 국회의원들이 국회로 모이고 있으나, 국회 진입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직은 경찰병력이 입구를 막고 있는 정도라서 긴급하게 집결하여 돌파하고자 합니다. 가능한 모든 동지들은 국회 정문으로 모일 수 있도록 전파 바랍니다. 신속히 움직여야합니다.”

 

금융노조는 24일 새벽 0시 <반민주적 비상계엄, 국민들과 함께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을 통해 “10만 금융노동자들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시민의 기본권과 자유권,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국민과 함께 끝까지 저항할 것”이라고 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밤 11시경에 국회로 향하면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다. “국회로 와주십시오.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국민들이 이 자리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민주당도 밤 11시 55분 전 당원에게 문자 공지를 보내서 모이라고 호소했다. 

 

혹은 자발적으로 혹은 호소에 응해서 역사의 부름에 응답한 시민들의 기록도 있다.

 

“독재자는 언제나 국가폭력을 사용해 세상을 어지럽혀 왔고, 우리 시민은 언제나 민주주의 정신으로 저항해 거칠어진 세상을 사람이 살만한 나라로 만들어 왔습니다. 돈을 가진 사람은 돈으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용기로, 완력이 큰 사람은 힘으로, 기술이 좋은 사람은 기술로, 지식이 높은 사람은 지식으로 불온한 압제에 저항해 온 역사입니다. 기록학을 공부하는 우리는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한 달 후 한국외국어대 정보기록학과 대학원생들과 이 대학 출신 기록할 연구자 30여명이 ‘12.3 아카이브’(https://1203archive.oopy.io)를 열었다.

 

김어진숙은 “이재명 대표 라이브와 민주당의 문자...사실 이 메시지는 제 몸을 그냥 국회로 바로 가게 해 준 힘이었다”고 했다. @luckyy8591은 “남편이 여의도 가야한다는 말에 죽을 수도, 감옥에 갈 수도 있겠다 싶어 한편으론 집에서 상황을 지켜봐야지 하다가 도저히 안될 듯 해서 아주 작은 힘이라도 보탤까 싶어 남편 아들 나 12시 넘어 차를 몰고 국회 근처 세우고 윤석열 퇴진 외치다가...”

 

@acupmoxa는 서울에 있는 아들이 국회로 가야겠다고 해서 만감이 교차했다. 계엄군이 체포하려하면 가급적 도망치고, 잡히면 저항은 하지말고 순순히 체포되라고 하고 전화를 끊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why_not_x는 부인 모르게 작은 방의 책상에 통장 비밀번호와 국회 다녀오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청주에서 서울로 향했다. @라미F는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계엄 이후 연락이 안되면 잡혀갔을 수도 있다”고 하고 국회의사당 후문에 당도했다. 광주에서처럼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강원도 횡성에서 요양을 하다가 올라 온 사람의 사연, 필리핀 친구와 채팅을 하다가 계엄 소식을 듣고 국회로 차를 몰면서 내가 죽을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슬프면서 만감이 교차했다는 기록들이 올라와 있다.

 

그렇게 내가 죽을 곳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국회로 모여든 사람들 덕분에 의사당 안에서는 계엄 해제 요구안을 의결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한결같은 증언은 5.18 광주였다. 계엄군과 첫 번째 전선에서 맞선다는 것은 가족과 생이별이며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은 그 전선으로 향했다. 그들은 첫 번째 햇불이 되었다. 햇불은 응원봉을 든 빛의 혁명으로 진화했다.

 

이렇게 각계 각층의 조직과 개인이 움직였다, 그들이 역사를 만들었다. 조 에스더는 “12월 3일 국회 앞 달려간 시민분들께 감사합니다”(오마이뉴스. 2024년 12월 11일)는 글에서 감사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날, 따뜻한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가는 귀가 길에서 또는 친구들과의 반가운 식사 자리에서, 모처럼 일찍 잠들려고 몸을 눕혔던 침대에서 '계엄선포'라는 이야기를 듣고 국회로 달려온 분들 덕분이다.

 

국회로 내달리면서, 또 헬기와 군인들을 봤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칠 만도 한데. 그 생각이 머리 속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들은 국회 문 앞에 매달렸다.

 

당시 현장 영상을 보니, 계엄군에게 "너 어디서 왔어? 왜 그래?" 라고 소리 지르며 화난 아빠처럼 말한 이들도 있고, 계엄군을 너무 밀어붙이지 말라고 말리면서 이러지 말라고 타이르는 엄마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옷을 잡아당기며 앳된 목소리로 "이러면 안 되잖아요." 라고 울부짖는 남동생 같은 목소리도 있었다.(중략)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우리의 삶은, 위대한 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축적해내고 고통이 몸에 새겨져서 고통을 껴안고 사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 <피프티 피플>에서 가습기 피해 유가족이 이런 말을 한다.

 

"너 그거 알아?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들은 유가족들이 만든거야."

 

'살아있는 모든 것은 무언가의 죽음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이 글을 써내려가는 아주 평범한 오늘은, 지난 12월 3일 저녁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계산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간 사람들, 그들의 죽음을 각오한 내달림 덕분에 있다. 계엄 선포 뒤 이어진 일상을 복기해보니 정말 그렇다.”

 

국회에 그들이 당도했을 때에는 이미 경찰이 외벽을 차단하고 있었다. 시민들의 격렬한 항의와 국회의원들의 질타에 부딪히면서 잠깐 봉쇄를 풀기도 했으나 경비는 견고했다. 이날 현장을 본 임철휘 뉴시스 기자는 서울의 사건·사고를 기록하는 일을 하면서 집회 참가자들을 은근히 내려 깔보는 경찰의 '세모눈'을 숱하게 봤으나, 그날 난 경찰 눈에서 적의라고 할 것들을 쉽게 찾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누가 들어갈 수 있는지" 묻는 말에 "출입증을 가진 국회 직원들은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할 땐 자신들도 납득된다는 듯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났고, 자정을 20여분 앞둔 시간부터 "아무도 못 들어간다"고 말해야 할 때는 목소리와 함께 어깨도 움츠러들었다. 굳게 닫힌 국회 정문 오른편에 쳐진 천막 사이, 경찰이 배치되지 않은 곳으로 적잖은 시민들이 월담하고 있었으나 못 본 척 '흐린 눈'하는 경찰을 몇몇 보았다.“

 

이날 계엄군과 세 차례 전투가 있었다. 본청 후문, 그리고 정문, 소화기로 계엄군에 맞선 본청 2층 복도. 의사당 본청 후문에서는 계엄군이 청테이프로 문을 봉쇄하고 퇴각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본청 정문 앞에서의 전투가 가장 길었다. 

 

국회 보좌진들을 중심으로, 국회의사당 2층 출입구를 막기 위해 스크럼을 짜기 시작했다. 수백명의 남녀 보좌진들이 계엄군과 밀고 밀렸다. 이곳 저곳에서 서로 엉키는 긴장된 상황이었다. 계엄군도 무리한 도발을 하지 않았지만, 보좌진과 시민들도 자제했다. 우발적으로 유혈 사태가 날 수 있는 순간과 찰나가 있었지만 어느 정도 수위에서 대치가 이어졌다.

 

본청 2층의 자동 회전문 안에서는 책상과 집기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2층과 3층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보좌진들과 국회 사무처 직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계엄군 수는 계속 늘어났다. 국회를 사수하려는 사람들은 더 이상 입장이 어려웠다. 대열이 밀리면서 저항도 강해졌다.

 

특전사 707 특수임무단 출신 배우 이관훈이 국회에서 계엄군을 직접 설득했다. 유튜브 채널 '황기자TV'가 공개한 영상에서 이관훈은 국회에 진입한 계엄군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자신을 707 선배라고 소개한 이관훈은 "명령 받아서 온 거 아는데 진정하라"며 "너희도 다 판단할 거라고 믿는다"라고 당부했다. 이관훈은 2004년 707 특수임무단 중사로 전역 현재 연기자로 활동하며 드라마 '대조영', '환상연가' 등에 출연했다.

 

 “절대 폭력 행사하지 마라. 구실을 주면 안 된다”라며 격분한 이들을 말라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여성은 “너희들이 겨누는 총에 너희 어머니가 쓰러질 수도 있다”고 했다. Z세대 군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비상식량은 배낭에 챙겨왔지만 수통에 물을 담그는 대신에 생수를 들고 왔다. 우왕좌왕했다. 윤석열이 그동안 군과 자주 접촉하면서 정신무장을 강조했는데 이들은 체질적으로 다른 세대였다.

 

김대경 보좌관(민병덕 민주당 의원실)도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군인들이 자신이 맡은 임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혼란스러움 반, 명령은 따라야 한다는 생각 반인 것 같아서 군인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당신들이 이럴 이유가 없다’ ‘내란에 동조하려는 거냐, 분명히 나중에 문제가 될 거다’ ‘명령해서 온 건 알겠지만 적당히 해야 한다, 힘쓰면 안 된다’고.” 군인들은 가슴팍에 단 권총집에 손을 얹고 있었다. 김 보좌관은 세 번이나 ‘권총에서 손을 떼달라’고 말했다. 결국 군인들은 자세를 풀었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한 군인이 실제로 총을 뽑아들기도 했다. “진짜 총이었는지 테이저 건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총에 노란색, 빨간색 무언가가 붙어 있더라. 가슴팍에서 총을 꺼내니까 내 얼굴에 겨눠졌다.” 총구를 마주한 설동찬 보좌관도 고함을 질렀다. “여기가 어디라고 총을 들이대! 쏠 수 있으면 쏴봐!” 분위기가 격앙되자 군인의 상관이 총기를 집어넣도록 했다.“ (‘계엄이 내려진 밤, 국회를 지킨 사람들’ 시사IN. 2024년 12월 6일)

 

현장에 있었단 안귀령(35. 민주당 대변인)씨는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공포감이 엄습했다. 본회의장이 있는 본청에 도착했더니 이미 계엄군이 와 있었다. 당직자들은 계엄군이 국회 본청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안귀령도 계엄군이 그 사이를 파고들어오자 순간적으로 몸을 던져서 막았다. 군인들이 그의 팔을 잡고 막으니까 그도 군인을 뿌리치는 과정에서 총구를 잡고 밀쳐냈다. 그 장면이 포착되었다. 영국 국영방송 BBC가 2024년 인상적인 12장면에 그 사진을 포함시켰다. 

 

본청에서의 전투를 반관 반민(주로 보좌진, 국회 사무처 직원, 국회 출입증을 가진 민주당 당직자)이 주도했다면 의사당 외곽의 전투는 민병대가 담당했다. 순수 민간인이었다. 검찰은 “국회 주변에 모인 시민들과 국회 직원들로 인해 체포조가 국회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계엄 해제요구안이 가결되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공소장에서 밝혔다.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계엄군의 국회 경내 진입 시도는 시민들의 저항으로 번번히 실패했다. 시민들을 피해 경찰의 도움을 받아 경내로 진입하는가 하면, 시민들이그들이 타고 있던 중형버스 앞을 가로막거나 중형버스 밑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대기하다가 돌아갔다.

 

“국회 앞에 3일 오후 11시 50분께 도착한 ‘대한민국 육군’이라는 문구가 적힌 버스가 도착하자 시민들은 군대의 국회 진입만은 막으려는 듯 버스 주변을 에워싸고, 일부 시민은 버스 앞에 주저 앉았다. 한 시민은 버스 출입구를 막으며 “국회 안으로 군대가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며 외치기도 했다. 버스 옆에 있던 다른 차량 내부에는 철모와 탄약 상자가 발견되기도 했다. 육군 버스는 시민들의 저항에 국회로 진입하지 못하고 후진도 하지 못한 채 도로 중앙에 정체 돼 있었다. 마스크를 착용한 운전석의 군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르포] 계엄 선포에 국회 지키러 나온 시민들… "철폐하라" 함성. 서울경제 2024년 12월 4일)

 

차량 내부에 탄약 상자가 목격되었다는 진술은 공소장에 나온 무기 목록에서도 확인된다. 또  ‘국회의사당 진입을 막고 있는 시민들을 제압할 목적으로 공포탄, 테이저건을 사용하고자 박안수 계엄사령관에게 사용 승인을 건의하였으나 박 사령관이 이를 거부하였다’ 같은 대목에서도 무기를 사용하려 했던 정황을 볼 수 있다. 

 

자정이 넘어가자 시민들이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 국회 앞 도로에 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오후 12시 40분 이후에는 정문이 완전히 봉쇄되면서 기자들의 출입도 막혔다. 시민들은 ‘계엄을 철폐하라’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시민들은 “나라가 망해간다”, “이 시대에 계엄이 웬말이냐”, “믿을 수가 없다”, “계엄을 철회할 때까지 국회 앞을 지키겠다”고 외쳤다.

 

버스에서 내리는 군인들을 향해 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있을지도 모르는 부모님과 가족을 생각하라’고 소리쳤다. “군인들도 특별한 명령을 받지는 않았는지 힘으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중간에 대열이 잘렸다. 대오에서 떨어진 군인들이 다시 버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아예 전체 철수를 하더라. 위에서 바로바로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는지 군인들이 좀 당황한 것 같았다. 시민들이 군인을 버스 안에 거의 욱여넣다시피 했다.”(‘계엄이 내려진 밤, 국회를 지킨 사람들’ 시가IN)

 

임철휘 기자는 취재 수첩에서 군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다. 

 

“젊은 군인도 기억난다. 군 당국 마크가 그려진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는 군인 세 명이 앉아 있었는데, 특히 뒷좌석에 앉았던 한 군인이 뇌리에 박혀 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시민들과 눈 맞추던 앞 좌석의 두 명과 달리,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앞 좌석에 처박고 있었다. 왼편에 놓인 탄약캔에는 자물쇠 두 개가 이중으로 시건돼 있었다. 그는 수백명의 시민에 둘러싸여 차가 옴짝달싹 못 하게 됐을 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피로와 패배감, 자괴감을 느꼈을까.”

 

직장인 김동현(33)씨는 4일 새벽 0시 30분께 강서구 화곡동 집을 나섰다. 헬스장에서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뒤늦게 소식을 들었다. 고양이 두 마리가 1주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사료와 물을 준비해 뒀다. 가까운 친구 몇 명에게는 혹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고양이를 챙겨줄 수 있도록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누구든 도와주러 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날 밤 국회 앞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저는 먼저 나서기만 하면 되는 거였죠.”(군용차 막아선 김동현씨 인터뷰 “누구든 도와줄 거라 확신했어요” 한겨레신문 2024년 12월 30일)

 

그는 국회 인근을 지나던 군용차량을 홀로 막아섰다. 김씨가 차량의 앞부분을 짚고 운행을 저지하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곧바로 합세해 차량을 막아섰다.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이 장면을 포착해 영상을 올렸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X(옛 트위터)를 통해 그를 찾았다.

 

영상이 찍힌 시점은 4일 새벽 2시께. 김동현은 서강대교 남단 사거리에서 국회 뒷문 방향으로 가려는 군용차량을 발견했다.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됐지만 윤석열이 아직 계엄 해제를 선언하지 않았을 때였다. 김동현은 “시민들이 순순히 비켜줬을 때 정말로 (국회가) 안전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일단 차량을 향해서 뛰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차 안에 있던 군인이 비키라고 계속 손짓을 했다. 내가 처음 차량 앞에 서자 겁을 주려는 듯 슬쩍 앞으로 움직였다. ‘밀 테면 밀어봐라. 너희는 절대 국회 쪽으로 못 간다’는 느낌으로 버텼다. 합세한 시민들이 계속 막으니까 시동을 건 채 멈춰있던 차량은 결국 후진해서 서강대교 쪽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계엄해제 요구 의결이 가결되자, 국회 정문 앞에 집결한 시민 2000여명은 일제히 “대한민국 만세!”를 연호했다. 누군가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겼다는 소리들이 저절로 나왔다. “가결됐습니다. 철수하십시오”라며 철수를 유도했다. 계엄군이 우물쭈물대자 시민들과 국회 직원들이 소리쳤다. “계엄 해제됐어! 이제 너네 여기 들어오면 반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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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지난 해 12월 6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상박물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한강 작가는 6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롬 노벨상박물관에서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맨손으로 군인들을 제지하려고 하는 모습들도 보았고 총을 들고 다가오는 군인들 앞에서 버텨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았다. 그분들의 진심과 용기가 느껴졌던 순간이었다”고 그날의 감동을 전했다.

 

최정기 전남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2일 "5·18 정신을 상징하는 '민주·인권·평화'에 이제는 '정의'도 포함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계엄 선포 당시 국회를 지키고자 달려간 시민들과 소극적으로 임무 수행에 나선 계엄군·경찰의 모습에서 1980년 5월 광주정신이 굳건히 지키려 했던 '정의'를 엿볼 수 있었다"고 뉴시스 인터뷰에서 밝혔다.

 

“택시가 여의도로 들어섰을 때였다. 우측으로 지상보다 약간 높은 둔치길에서 국회의사당을 향해 뛰어가는 일군의 사람을 보았다. 대여섯 돼 보이는 남자들 사이에서 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열심히 뛰어가는 모습이 불빛을 받아 실루엣으로 보였다.

 

감동이었다. 저렇게 열심히 뛰어가는 아주머니가 있다니, 문득 울컥한 감정과 아울러 동학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내려 정문 쪽으로 발을 재촉했다. 벌써 사람들이 꽤 있었다. 수 백명은 됨직해 보였다. 하지만 경찰들은 완강히 저지하고 있었다...

 

‘계엄 철폐’ ‘헌법 수호, 국회 수호’ ‘민주주의 만세’ 등의 구호가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시간은 새벽 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국회 정문이 완전히 봉쇄되기 전에 들어갔던 시민과 국회의원 보좌진들이 계엄군과 몸싸움을 하면서 총구 앞에 막아서며 설득하고 때로는 간곡히 말리면서 같은 국민의 편에 설 것을 요구하자 이러한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계엄군들은 심적인 동요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듯싶다.

 

갑자기 시민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안’ 이 가결됐다고 카톡방을 통해 전달된 것이었다. 시민들의 구호는 즉각 바뀌었다. 시위 끝에 이러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니, 모든 사람들이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다. 옆에 사람에게 부탁하여 인증샷을 찍었다.... 

 

왜 시위 중인 시민들이 특히 젊고, 어린 세대들은 또 왜 그렇게 밝고 즐거운 기분일까? 단순히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을 하게 되어서 만은 아닐게다. 우리 모두는 자칫 침몰할 수도 있었던 나라를 구하고 있다는, 또 이 기세는 세상 어느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만이 희망이자 답인 것이다.”(‘12월 4일 새벽 국화 앞에서 갖게 된 확신’ 최병선 조선 자유언론 수호투쟁위원회. 민들레 기고문)

 

계엄이 실패로 끝나고 지휘관들은 발뺌을 했다.

 

"국무회의에 따라 발령된 계엄령이고, 계엄법에 따라 사령관이 발동한 포고령이었다."(조지호 경찰청장)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위기 상황에 군인들은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한다"(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 "뭘 어떻게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은 별로 없었고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박안수 전 계엄사령관)

 

하지만 그들의 명령에 따랐던 Z세대 군인들의 가슴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다. Z세대 군인들은 그날 일종의 태업을 했다. 소극적으로 계엄 임무에 종사했다. 시민을 다독이거나 일으켜 세워주는 군인도 있었다. 지휘관들은 저렇게 발뺌을 했지만 젊은 군인들은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날의 분위기를 조 에스더씨가 쓴 앞의 글에서 다시 엿볼 수 있다.

 

”무장한 계엄군은 시민 서넛이 달려들면 뒷걸음질을 쳤고 자기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두 손을 저으며 시민들을 뒤로 물리는 것 같았다. 마치 자기 몸에 시한폭탄이 있으니 근처에 있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눈발이 흩날리던 여의도 국회 문 앞,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부모이고 가족이었다. 단지 서로 입고 있는 옷이 다르고, 해야 할 일이 달랐을 뿐이다.

 

무장한 계엄군이지만 그들이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계엄군과 마주한 시민들, 얼굴과 몸은 일체 가렸지만 시민들을 보면서 집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떠올렸을 계엄군들.

 

어쩌면 그들이 서로 이리 밀고 저리 밀리면서 계엄의 그림자를 국회 밖으로, 대한민국 밖으로 밀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계엄 관련 게시물이 올라왔다. 한 커뮤니티에는 12월 4일 오후 4시까지 1만 5000여개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솔로나라뉴스에서는 ‘윤, 계엄 선포 사태에 대한 MZ 반응- 자유 만주주의 수호한다면서 온갖 자유 다 억압하네’라는 기사에서 온라인에 게시된 청년층의 당혹감을 전달했다.

 

V***re “한국 민주주의가 진짜 대단하긴 한듯, 경험치가 없었으면 얼레벌레 하다가 먹혔을거임”

리00“ 비상계엄 겪으신 아버지 어머니 세대들이 진짜 존경스럽네요 문득 드는 생각”

잼00  “5.18이 얼마나 끔찍했었을까 실감됨!!!! 어릴때 경상도 살아서 계엄있었는지도 몰랐는데 이번 계엄보면서 무장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총쏘고 진압하고 했던 것은 진짜 최악의 사건이며 전두환은 인간말종!!광주민주화운동하신 분들은 존중받아야합니다. 그리고 윤석열은 내란죄로 깜빵에서 썩어야됨!!"

7***78e “한국인들 오늘은 진짜 존경스럽습니다. 우리나라 시민들 진짜 멋집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릴순 없죠”

엄00  “김민석이 계염 타령할 때 드디어 운동권의 종말이 온다 생각했습니다. 정말 동떨어진 현실인식에 망상에 빠져 사는 아직도 80년대를 살아가는 민주당 586 운동권들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더 떠들어대라 그럴수록 운동권의 종말이 더 빨리온다 속으로 응원했는데 윤석열이 진짜 계엄을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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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2월 4일 서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내란죄 윤석열 퇴진! 시민촛불'에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용산 대통령실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슬로우뉴스의 이상헌 칼럼 ‘K-민주주의의 저력, 한국이 글로발 롤 모델이 된다’의 끝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제32화는 끝을 맺는다.

 

“외국 친구와 동료들에게서 쏟아지는 메일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어느 외국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탄핵 시위를 생중계하는 방송이 너무 좋더란다. 왜냐고 했더니, 자기가 아는 노래가 나와서 잠시 같이 따라 불렀다고. 그래서 한국 민주주의는 참 재미있다고 하더라.

 

이런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그날 밤 국회 앞, 사람들이 서둘러 나섰다. 일흔은 넘어보이는 여성이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내가 막겠다고 다들 뒤로 물러나라고 했다. 나는 살만큼 살았으니 젊은이들은 얼른 뒤로 가라고 나서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저 짧은 말 한 마디가 온전하게 아파서, 나는 어떤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말할 수 있다. 이 싸움에서 반드시 우리가 이길 거라고. 우리가 다시 마주한 이 ‘좁은 회랑’의 끝에 더욱 단단한 K-민주주의와 새로운 도약이 있을 거라고. 노래 부르면서 격려하면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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