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실록<2부>, 초현실 비상계엄 (31)] 우원식의 154분, 국민의 심장을 뛰게 한 의사봉 3타...12월 3일 그날의 영웅들, 보좌진과 국회 사무처 직원들

민병두 입력 : 2025.03.27 06:58 ㅣ 수정 : 2025.03.2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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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를 실록으로 엮어본다. 윤석열은 언제부터 쿠데타를 계획했을까? 윤석열은 무슨 일을 계기로 확신범이 되었을까? 12월3일은 우리나라가 처한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고권력자 1인의 독단으로 나라가 형편없이 흔들렸는가 하면 국회와 시민들의 용기있는 대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위대한 서사시였다. 12월3일을 전후해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역사적 순간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초현실적 계엄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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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3일 밤 긴급성명을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국회는 이날 본회의에서 여야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재석 190인, 찬성 190인으로 가결했다. [사진=연합뉴스]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우원식 국회의장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통상적이지 않은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대통령의 국회 경시의 정도가 지나쳤다. 여러가지 이상 징후가 축적되면서 막연하게나마 이상한 일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22대 국회의 임기가 시작되고 2024년 6월 5일 우원식 의원을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이미 3월부터 계엄을 모의하고 있었던 윤석열은 우원식 국회의장에게 축하 전화를 하지 않았다. 다음 날인 6일 현충일 기념식에서 윤석열은 우원식과 의례적인 악수만 하고 축하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처럼 건성으로 악수를 하고 지나갔다. 우원식은 굉장히 서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6월 10일 윤석열은 정진석 비서실장을  통해서 뒤늦게 축하난을 전달했다.

 

매 4년 마다 열리는 국회 개원식은 대통령과 대법원장 국무총리 헌법재판소장 그리고 국무위원 등이 참석한다. 그것이 전통이다. 헌법을 제정하고, 헌법에 근거하여 입법을 하고 행정부를 감시하는 국회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다. 개원식을 하려고 하는데 윤석열이 참석 의사를 피력하지 않아서 진행을 하지 못한 채 국회가 굴러가고 있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9월 2일 정기국회 개회를 겸해서 개원식을 했다. 윤석열은 이날도 불참했다.

 

그해 7월부터 국회의장 주관 회의에서 김민기 사무총장이 계엄령이 발동될 수 있다고 여러 번 얘기를 했다.  우원식은 처음에는 비현실적인 얘기로 생각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게 가능하냐고 했는데 김민기 총장이 몇 번이고 다시 반복을 했다. 김민석 민주당 의원이 계엄 가능성을 처음 공개적으로 제기할 때에도 믿기 힘들어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던 어느 날 우원식 의장의 군 출신 지인이 중요한 제보를 해왔다. 윤석열이 ‘안보 휴가’를 마치고 국방부 장관을 교체했다. 그 지인은 장관이 된 김용현이 쿠데타를 일으킬 사람이라며 대비를 해야 한다고 우원식에게 전했다.  김용현이 입에 계엄령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니 주의를 해야 한다며 조심하라고 조언했다.  우원식은 김민기의 ‘계엄 대비론’에 대해 논의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우원식 주재로 사무총장과 정무직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 헌법 국회법과 계엄법 해석 토론을 진행했다. 통상적인 위기 대응 매뉴얼에 따른 사무처 직원 비상소집 등도 점검했다. 대통령이 계엄령을 발동할 경우 국회가 해제를 요구할 권한이 있다는 것과 그 절차가 공유되었다. 또 해제 요구를 결의안 형식으로 채택할 때 국회 국방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의장이 곧바로 직권상정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국회법 해설 387쪽에는 위원회 회부의 예외 안건으로 총 14개가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 일곱 번째가 계엄해제요구 결의안이다. 이런 사전 준비가 없었으면 당일에 엄청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7월 3일 특수전사령부 1공수여단이 국회에 공문을 보내서 국회의사당 설계도면을 요구했다. 대테러 작전에 필요하다며 요청했지만 전례가 없던 일이다. 국회는 이를 거부했다. 이때부터 주요 간부들과 함께 대외비로 대비 훈련을 했다. 문건은 생성하지 않았다. 윤석열이 계엄 모의를 국회가 모르게 진행하고 있었지만, 국회도 윤석열 모르게 대비하고 있었다. 창과 방패가 상대방이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에 앞서 수도방위사령부는 4월 총선 직후 서울 19개 구청에 ‘서울시 국가중요시설 건물 내부 도면 협조 요청‘이란 공문을 보냈다. 영등포 구청은 국회와 KBS 도면을 보냈다. 10월 29일에는 이진우 수방사령관이 통합 방위 목적 등을 위한 시설 견학 명목으로 1 경비단장, 군사경찰단장과 함께 국회의사당에 전원을 공급하는 여의변전소(국회 소재지 여의도동)을 시찰했다. 명목은 국회 시설이 타격받았을 경우 주변 시설의 전력 공급을 살펴본다는 것이었지만 이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12월 3일  김민기는 윤석열의 계엄 선포 방송을 듣던 중 10시 28분에사무총장 비서실장을 통해 국회 사무처 전 직원에게 비상소집령을 전했다. 10시 29분 우원식과 통화했다. 우원식은 날이 밝기 전에 상황을 매듭짓자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김민기는 용인에 있는 집에서 총알같이 튀어나와 택시를 잡았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이어서 10시 28분 김영진 민주당 의원과 통화했다. 김영진 의원은 계엄 대비  회의를 수차례 함께 했기에 민주당 쪽 소통 채널로 생각하고 상황을 공유했다. 김영진 의원은 민주당 단체 대화방에 국회의장이 공관을 출발했다는 것을 알리고 국회로 모이자고 글을 올렸다.(30화 참조)

 

국회의장 공관은 대통령 공관과 인접해 있는 한남동 공관촌에 있었다. 우원식은 김민기의 전화를 받고 공관 밖에 군인들이 포위해 있을 터인테 어떻게 뚫고 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1980년 전두환 일당의 확대계엄을 경험한 세대라서, 비상계엄은 주요 인사의 연행 체포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날은 경비대장이 퇴근을 안하고 있었다. 원래는 당직 경찰 한 명만 근무했다. 경비대장에게 문 밖을 살펴보라고 했다. 어떻게 군인들을 피해 나갈 것인지 궁리를 했다. 경비대장이 정문 근처를 살펴보니 군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멀리 입구까지 갔더니 보이지 않았다.

 

우원식 의장 부인 신경혜 여사가 국회까지 차를 운전해서 나가려고 하는데 마침 직원 한 명이 남아있었다. 김민기의 전화를 받고 6,7분만에 직원이 모는 차로 경호대장과 함께 국회로 출발했다. 부인에게 조심하라는 인삿말을 남겼다. 그 세대는 기억과 체험으로 알지만 그날의 인사는 아주 오랜, 혹은 영원한 작별이 될 수도 있었다.

 

우원식은 차 안에서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국회를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 궁리를 하는 중에 한 기자가 전화를 해왔다. 국회가 봉쇄되어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국회의원이 모여있는 곳이 국회다”고 답을 했다. 이 시간에 민주당 단체 대화방에서는 국회로 가자고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과거에 국회에서는 날치기 사건이 많이 있어서 본회의는 반드시 본회의장에서 진행하고, 의장은 의장석에서 진행을 하도록 규정이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계엄에 대비한 여러 차례 회의에서 비상한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원식의 머리 속에서는 1차로 본회의장을 염두에 두고, 여의치 않을 경우  제3의 장소에서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서강대교를 건너서 국회를 한 바퀴 도는 윤중로로 진입했다. 기동대가 버스로 국회를 둘러치고 있었다. 반 바퀴를 돌아서 영등포쪽에 있는 의원회관 옆 3문 근처에 당도했다. 상대적으로 경비가 허술했다. 아직 이쪽으로는 경비대가 방어막을 치고 있지 않았다. 철로 된 담장이 높이는 1m밖에 안되지만 직각으로 되어 있어서 올라가기가 어려웠다. 

 

화원 근처 담장에는 문양 같은 것이 있어서 월담하기에 용이했다. 67세의 국회의장이 담을 넘는 그 순간을 경비대장이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고, 시민들은 이곳이 국회의장이 월담한 곳이라며 표식을 남겨두었다. 성지가 되었다. 10시 56분 담을 넘은 우원식은 의사당 1층을 통해서 10시 58분 의장실에 도착했다.  김민기가 11시 23분  국회로 들어왔다. 우원식은 주요 간부들과 대책 회의를 했다. 의장은 새벽이 오기 전에 계엄을 해제하자고 결의를 다졌다. 민주당 통로를 맡은 김영진이 민주당 의원들에게 이같은 분위기를 전했다. 모두가 본회의장으로 모여야 하고, 본회의장에서 잡힐 각오를 해야 계엄을 저지할 수 있다고 했다. 고지가 여기다하고 방향타를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국회 간부들과 사무처 직원들도 속속 국회로 향했다. 이날 국회를 지킨 사무처 직원은 500여명이다.  4일 0시 0분에 출입기록을 통해 확인한 숫자이다. 의사당 안으로 들어온 의원 보좌진도 500여명이었다. 국회의원들이 본회의장에서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킬 때까지 바리케이드를 쌓고, 완전무장한 군인들과 소화기를 뿌리며 맞섰다. 이들이야말로 12.3 전투의 숨은 영웅들이다. 이 시간에 국회의사당 밖에서는 시민들이 모여 계엄군과 맞섰다. 국회 경내로 진입하기 위해 담을 넘는 계엄군을 끌어내리고 군용차를 막아섰다. (32화에서 다룬다) 안과 밖에서 호응했다.

 

김민기는 국회에 도착하자 마자 여러 차례 '염두 훈련'을 한대로 진지전을 지휘했다. 염두 훈련은 머릿 속에서 상상을 하는 훈련 방식이다. 사무처 직원들은 준비한 매뉴얼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적 침투부대인 육군 201특공대 중위  출신의 김민기는 밀리터리 덕후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군사와 무기 체계에 정통했다. 특공여단 소대장 시절에 진압 작전 훈련을 받았다. 삽탄 착검 곤봉 방패 방석모 등 어떤 단계에서 어떤 수준의 무장을 하는지, 명찰과 부대 마크 등 침투에 따른 복장은 어떻게 하는지 등을 이미 20대 시절에 체득하고 있었다.

 

김민기는 국회의원 3선을 하면서 정보위만 6년 가까이 했다. 간사를 거쳐 정보위원장까지 역임을 했다. 21대 국회에서는 국회 국방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2017년에 조현천 기무사령관이 계엄 문건을 만든 것을 놓치지 않고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만약 문건에 적힌 대로 계엄이 진행이 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머리 속에서 수없이 그려보았다. 중고등학교 동창으로 20년간 정치를 함께 해온 김영진 의원과 늘 토론을 했다.

 

김민기는 국회를 봉쇄하고 있는 국회 경비대장에게 전화를 수차례 걸어 즉시 봉쇄를 풀라고 경고했다. 경찰은 10시 50분 의사당 외곽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김민기는 직원들을 시켜서 계엄군의 진입 상황 등을 체크하게 했다. 반란군 윤석열에게 김용현이 있었다면 시민군 우원식에게는 김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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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11시경 대통령 비상계엄으로 경찰이 통제 중인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이 담을 넘어 본청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국회의장실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우원식은 우선 대국민담화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시간에 국민들이 주목하는 것은 국회의 대응이고, 우원식 의장이 어디서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지 여부이다.  우선 우원식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 입장을 내놓기로 했다. 마침 국히방송도 도착했다. 이때가 11시 55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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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TV 캡처]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국회는 헌법적 절차에 따라 대응 조치하겠다. 모든 국회의원은 지금 즉시 국회 본회의장으로 모여달라. 국민 여러분께서는 국회를 믿고 차분하게 대응하기를 부탁드린다. 특별히 군경은 동요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줄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국회의장은 자리를 피했다. 방송을 통해서 의장의 위치가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5층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전문위원실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국회  4층 5층 6층 7층 전체에 불을 켰다. 의장이 진지로 자리잡은 곳만 불이 켜지면 계엄군이 이곳을 노릴 수 있었다. 모두가 침착하게 대응했다.

 

이 시각 국회의사당 뒤편에 707특임단을 태운 헬기 3대가 착륙했다. 11시 48분에 블랙호크 UH-60에서 내린 공수부대원은 대당 9명씩 모두 27명이었다. 이때부터 12월 4일 새벽 1시 15분까지 24차례 230명이 동원되었다. 해제안이 의결되고도 계속해서 10여분간 실어날랐다. 회항지시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11시 50분경 국회의사당 본청 후문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바리케이드를 쌓고 준비하고 있었던 국회 사무처 방호과 직원들과 민주당 보좌진들 간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민주당 보좌진 협의회(민보협)은 긴급 공지를 날렸다. 후문 방어를 위해 속히 이동해달라고 SOS를 쳤다. 의사당 본청안에 있는 민지홍씨 등 보좌진들이 젖먹던 힘까지 다해 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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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TV 캡처]

 

공수부대가 후퇴했다. 공수부대는 의사당 후문을 나가면서 청테이프로 출입을 통제했다. 진입을 하지 않고 밖에서 봉쇄를 했다. 이때만 해도 계엄군 사령탑은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빨리 국회에 들어오리라고는 예상을 하지 못하고 밖에서 차단하는 작전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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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TV 캡처]

 

공수부대는 후문에서 영등포쪽 회랑을 통해 본청 정문으로 향했다.  11시 55분 경 본청 정문에서 국회 사무처 직원 및 보좌진들과 계엄군의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김민기 사무총장이 허락없이는 본청 출입을 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국회사무처 직원들과 의원보좌진 수백명이 막아섰다. 국회 사무처 직원들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핑계 삼아서 소극적으로 처신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민주당 당직자들과 보좌진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계엄군과 몸싸움을 했다. 이 와중에 안귀령 대변인이 계엄군의 총을 뿌리치는 모습도 보였다. 해제안이 의결될 때까지 1시간여를 몸싸움을 했다. 계엄군도 시민군도 폭행을 하는 등 격렬하게 부딪히지는 않았다. 밀고 밀리는 수준이지만 긴장감은 팽배했다.

 

보좌진들은 회의용 탁자와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사실 바리케이드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밀고 들어오면 바로 뚫릴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기세였다. 계엄군에는 소명 의식이 없었다.  보좌진들이 계엄군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본청 정문의 자동문이 파손되었다. 보좌관과 국회 직원 26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영광의 상처였다. 나중에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는 월담 및 본청 저항 과정에서 다친 보좌진들의 이름을 기재했다. 강윤호 강태영 권영근 김가미 김대훈 김석태 김영표 김윤호 김재훈 김지훈 문서영 박규태 박기일 박준수 오가인 유현제 윤여길 이경은 이동기 이상엽 이승환 이시성 이주원 이주헌 이혜인 장대연이 그들이다. 국회 사무처 직원들도 47명 부상을 당했다.

 

계엄군은 후문의 경우와 달리 정문에서는 밖에 청테이프나 케이블 타이로 막을 방법이 없었다. 문의 구조가 전기로 움직이는 자동인데 그 마저도 파손되었다. 계엄군은 정문 대치 상황에서 처음에는 진입 여부에 대한 명확한 지시를 받지 못한 듯 했다. 후문처럼 청테이프로 봉쇄하지도 못하고 진입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수도방위사령부에서 온 병력은 국회 정문 출입을 시도하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다. 이 상황을 접수한 조성현 대령은 시민들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외곽으로 물러나 있거나 대기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제29화 참조) 본청 진입은 특전사에게 맡기고 후방 지원을 하라고 했다. 

 

상황이 급박했다. 새벽 0시 28분 우원식 국회의장이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에게 전화를 했다. 사안이 중대해서 모든 국회의원들에게 투표에 참여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부산 광주에서 오는 국회의원들을 고려하면 네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데 비상한 상황이니 한 시간 여유를  주겠다고 했다. 새벽 1시 30분에 본회의를 열자고 했다.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할 수 있지만 국회 본회를 소집하고 개의하는 것은 교섭단체 대표와 ’협의‘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미 이때는 민주당 의원들 만으로도 거의 의결정족수가 채워졌다.

 

새벽 0시 33분 정문에서 몸싸움을 하던 계엄군 707특임대원 16명이 의사당 2층 회랑을 북쪽으로 돌아 국민의힘 정책위의장 사무실 쪽 창문을 깨고 진입을 시작했다.  이동하는 길에 사진취재를 하던 뉴스토마토 기자를 묶으려고 하는 시도도 있었다. 이때쯤이면 방첩사 단체대화방에서도 정치인 14명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수정하여 우원식 이재명 한동훈 3명을 특정하여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윤석열은 도끼로 부수고서라도 들어가서 의원들을 끌어내라는 등의 지시를 마구 던지고 있을 때였다.

 

국회의장이 0시 35분 본회의장으로 입장했다. 이학영 국회 부의장은 먼저 입장해 있었다. 둘 중의 한 명은 의사를 진행해야 하기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순차적으로 입장을 했다. 우원식은 0시 38분 추경호에게 전화를 했다. 계엄군이 들어와서 상황이 긴박해졌으니 본회의 개의 시간을 30분 앞 당기겠다고 했다. 추경호는 의원들이 들어올 수 있게 국회차원의 조치를 취해달라며 시간을 더 달라고 했다. 우원식은 안된다, 비상한 상황이다고 답을 했다. 국회를  침탈하려고 들어오는데 국회 차원에서 계엄군에게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며,  여당이 의지를 갖고 스스로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새벽 1시 개의를 통보했다. 국회법상 협의 절차를 다시 밟은 것이다. 

 

우원식은  이런 절차를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나중에라도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처리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우원식은 담을 넘을 때도 고민했다고 한다. 국회의원의 출입을 막는 경찰을 보고 국회의장의 권위로 꾸짖으면서 철수를 요구하여 다른 의원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것을 잠깐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본인이 체포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월담을 했다.

 

0시 35분 의장석에 착석한 우원식은 개의 시간과 표결 시간을 고민했다. 정부에서 국회에 계엄안을 통보해야 하는데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언론을 통해서 공표가 되었지만 법적 절차는 절차대로 밟아야 했다.  정부가 국회에 통보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표결을 하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23일 밤 10시 28분 계엄을 선포하고 11시에 포고령이 공포되었다. 

 

우원식은 기다렸다. 명분을 축적해야 했다. 계엄령을 선포한지 두시간이 지났는데도 통보를 하지 않는 것은 고의로 표결을 지연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가 없었다. 김영진 등에 따르면 우원식은 윤석열의 방송을 국회 통보로 간주하는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우원식은 ’영원한 민주주의자‘ 고 김근태 의원이 물려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형님 도와주십시오." 0시 42분 전 국회의원들에게 새벽 1시 정각에 본회의가 개의된다는 문자를 발송했다.

 

계엄 해제 의결 요구안은 국회의원이 발의해야 한다. 박찬대 의원 등이 발의한 의안이 올라오는데 시간이 걸렸다. 원내 행정실에 맡긴 의원들의 나무도장을 찍어서 새벽 0시 45분쯤 의안을 국회 사무처에 접수했다. 170명 의원 명의로 발의했다. 당론 발의였다. 이것을 의원들의 단말기에 띄워야 한다. 안건이 단말기에 뜨고 전광판에 표결 결과가 나오게 하는 시스템이 새벽 1시쯤 가동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날은 시스템 관리를 하는 대신정보통신의 이광복 이사 등 직원들이 국회로 달려왔다. 시민들이 월담을 도와주었다. 비상통로로 목숨을 걸고 본회의장으로 도착했다.  사실 이들은 민간인 신분이기에 위험을 피해있어도 되었다. 이들은 진정한 시민이었고 영웅이었다.  종전에는 40분이 걸리는데 이날은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오류도 없었다. 300명 의원의 단말기에 동시에 의안을 띄우면 한 두 개 단말기에는 오류가 생기는데 완벽하게 진행됐다. 한 달 전에 큰 돈을 들여 오래된 시스템을 교체한 덕이다..

 

국민들이 화면을 통해 보는 국회전자투표시스템은 세계 최초로 2004년 우리나라 국회에서 도입되었다. 이날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으면 20여년 전에 했던 방식으로 의원들이 기립하여 의사를 표현하고, 의정과 직원들이 자신들이 맡은 줄을 따라서 의원들의 이름을 적고 숫자를 세야 한다. 우원식은 국민들에게 분명하게 보이는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야 부정이니 아니니 하는 뒷말을 차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계엄군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시간에도 전자투표시스템이 작동되기를 기다렸다. 일단 비상 상황을 대비해서 교섭단체 국민의힘 대표와 합의한 시간보다 10분 일찍 본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이 시각 2층에 있는 국민의힘 정책위의장 창문을 뚫고 들어온 16명의 계엄군을 보좌진과 국회 직원들이 소화기를 들고 맞섰다. 이들은 0시 45분쯤 국민의힘 정책위의장 사무실에서 예결위 회의장으로 가는 통로로 진입을 했다.  여기가 뚫리면 본회의장으로 가는 로텐더홀로 가게된다. 소총을 들고 위협을 한 계엄군도 있었다. 이날의 3차 전투는 치열했다. 보좌진들이 격렬하게 맞섰다. 상대는 대한민국 육군 최정예부대였다.

 

본회의장 안에서는 의원들의 긴박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의원들은 "당장 안건을 상정하라", "계엄군이 국회로 진입했다"며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했지만, 우원식은 "절차적 오류 없이 해야 한다. 아직 안건이 안 올라왔다"면서 자제를 요청했다. 그러면서 "밖의 상황을 잘 안다. 이런 사태엔 절차를 잘못하면 안 된다. 비상한 각오로 다 바쳐서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우원식도 초조했다. 그날의 화면을 보면 일어서서 분주하게 안과 밖의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다.

 

본회의장 로텐더홀에는  300여명 국회 직원과 보좌진들이 몸으로 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본회의장 밖의 상황은 사무처 직원의 실시간 보고를 받고 있는 김민기를 통해 우원식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됐다. 밖에서 계엄군과 대치하며 긴급하게 호소하는 소리들이 들려오는 듯 했다 .  다급하지만 시간 여유가 조금은 있어 보였다.

 

새벽 1시 우원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안을 상정했다. ’헌법 제 77조 제 5항, 계엄법 제11조에 따라 비상계엄의 해제를 요구한다.‘ 주문은 딱 한 줄이었다. 헌법 77조 5항은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이다.  제안이유는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요구한 행위는 명백한 위헌이므로 입법부인 국회가 이를 바로잡고자 비상계엄의 해제를 요구함‘이라고 하여 계엄의 위헌성을 강조했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단전을 하는 방법을 찾았다. 작전을 바꿨다. 전기를 끊으면 국회의 표결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배전판을 찾아서 지하 1층을 단전했을 때에는 이미 표결이 종료되었다.(제29화 참조) 김민기는 위기 대응 매뉴얼 회의에서 국회 발전시설에 대한 대책을 수립해 놓았다. 이들이 어떻게 발전시설을 지켰는지는 2, 3차 계엄에 대비하여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새벽 1시 1분경 표결 결과가 나왔다. 의장이 재석 190명에 190명 찬성으로 해제 요구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했다. 그가 의사봉을 3타하는 순간 전광판에는 찬성을 한 190명 의원의 이름이 녹색으로 표시되었다. 국회의원들은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국민이 안도했다.  본청 전문과 국에 밖에서 계엄군과 싸우고 있던 시민들은 "이겼다"고 소리쳤다. 우원식은 표결을 끝내고 마무리 발언을 했다,

 

”제가 오늘 의결하고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국회의 의결에 따라 대통령은 즉시 비상계엄을 해제해야 합니다. 이제 비상계엄은 무효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국회는 국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국회 경내로 들어와 있는 군경은 당장 국회 바깥으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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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TV 캡처]

 

이에따라 군인들은 철수를 했다. 어떤 군인은 시민들에게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나갔지만 어떤 군인은 이용당한 처지를 한탄하는 듯 주저 앉았다. 우원식은 국무회의에서 계엄이 해제되었다는 것을 한덕수 국무총리와 전화 통화를 통해 직접 확인하고 새벽 5시 34분에 정회를 선포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공관으로 가지 않고 국회에서 머물렀다. 그 당시 의장 공관에는 계엄군 13명이 4일 새벽 1시 42분 경부터 4시 45분까지 머물렀다. 만약 의장이 표결을 마친 후 곧바로 공관으로 퇴근을 했더라면 계엄군이 우원식을 체포했고 윤석열이 2차 계엄을 진행했을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우원식은 이날 보여준 안정감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제 9회 민주주의자 김근태상’을 수상했다. 선정위원회는 “계엄령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었다는 의사봉을 우원식 의장이 두드린 12월 4일 새벽 1시 1분은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희망과 안도, 그리고 다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는 강력한 깃발이 올라간 시간이었다, 민주주의를 지켜낸 그날의 대한민국국회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우원식은 현직 국회의장으로는 처음으로 26회 백봉신사상을 받았다. 그리고 방송기자연합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기자협회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한국영상기자협회 한국편집기자협회 한국PD연합회가 언론 자유를 지켜 준 것에 대한 감사패를 그에게 전달했다.

 

다음은 계엄해제 요구 결의안에 찬성한 190명 의원 명단

 


강경숙, 강득구, 강선우, 강준헌, 강훈식, 곽상언, 권향엽, 김교흥, 김기표, 김남근, 김남희, 김동아, 김병주, 김선민, 김성회, 김영배, 김영진, 김용만, 김우영, 김 훈, 김윤덕, 김제원, 김종민, 김주영, 김준형, 김현, 김현정, 남인순, 노종면, 맹성규, 문금주, 문정복, 문진석, 민병덕, 민형배, 민홍철, 박균택, 박민,규 박상혁, 박선원, 박성준, 박은정, 박정, 박정현, 박주민, 박지혜, 박찬대, 박홍근, 박흠배, 박희승, 백승아, 백혜련, 복기왕, 부승찬, 서미화, 서삼석, 서영교, 서영석, 서왕진, 소병훈, 손명수, 송기헌, 송재봉, 신장식, 신정훈, 안도걸, 안태준, 양부남, 어기구, 염태염, 오기형, 용혜인, 우원식, 위성곤, 윤건영, 윤호중, 윤후덕, 이건태, 이상식, 이성윤, 이소영, 이수진, 이언,주 이용선, 이용우, 이원택, 이제강, 이제관, 이재명, 이재정, 이학영, 이혜민, 임광현, 임미애, 임오경, 장철민, 전용기, 전종덕, 전진숙, 전현희, 정성호, 정을호, 정일영,  정준호, 정진욱, 정청래, 정춘생, 정태호, 정혜경, 조계원, 조 국, 조승래, 주철현, 진선미, 진성준, 차규근, 차지호, 채현,일 천준호, 천하람, 최기상, 한민수, 한병도, 한정애, 한준호, 한창민, 허성무, 허영, 허종식, 황명선, 황운하, 황희


 

22대 국회 유일한 시각장애인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표결에 참여하지 못한 참담한 심정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늘 배리어프리(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장벽을 시설 이용 장벽을 없애는 일)의 중요성을 외쳤던 제가 물리적 ‘배리어’를 느끼는 암담하고 절박한 순간이었다. 몸은 장벽으로 본회의장에 함께 할 수 없었지만 비상계엄 해제 결의에 대한 마음은 이미 찬성 버튼을 백만 번은 더 눌렀던 것 같다”

 

이날 비상계엄으로 민주주의 위기를 경험했던 수많은 국민들도 집에서 TV를 보면서 김예지 의원처럼 마음으로 찬성 버튼을 백만 번, 천만 번은 눌렀을 것이다. 12월 4일 윤석열이 국민의힘 의원총회장을 찾아와서 설명을 하겠다고 했다. 우원식은  그의 국회 출입을 불허했다. 내란 우두머리가 국회를 방문하는 상황을 수용하기가 힘들었다. 돌발상황도 우려했다. 김민기는 12월 4일 부터 비상계엄에 관여한 국방부 경찰청 국가정보원 직원들의 청사 출입을 제한했다. 그리고 해당기관장은 원칙적인 출입 절차를 거쳐야 국회를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박성재 법무부 장관, 조지호 경찰청장은 국회로 들아오면서 공항 검색대 통과할 때처럼 몸수색을 받아야 했다. 두팔을 들고 몸수색을 받는 법무부 장관의 모습은 국회가 계엄을 진압했다는 상징적인 사진 중의 하나로 회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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